트로이
'''Τροία / Troy'''
'''𒌷𒃾𒇻𒊭 / Wil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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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로이 전쟁의 무대로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해 있었다. 일리온 혹은 일리오스(Ίλιον, Illium)이라고도 불린다.[1]
고대 그리스어 및 현대 그리스어 표기로는 트로이아(Τροία). 그러나 트로이가 있던 이오니아(아나톨리아 반도 서부 해안)의 당시 그리스어 이오니아 방언으로는 트로이에(Τρωίη)라고 했다. 라틴어로는 고대 그리스어 표기를 그대로 전사해 트로이아(Troia/Troja)라고 했으며 이 지역을 오늘날 지배하는 터키는 그리스어 혹은 라틴어 이름을 딴 트로야(Troya)를 쓴다. 대부분의 서양 언어에서는 이 도시를 '트로이아'라고 하며, 현대 한국어에서 쓰이는 '트로이'는 영어 표기 Troy를 들여온 것이다.
2. 국가 상세
2.1. 그리스 신화에서
2.1.1. 트로이 왕가
2.1.1.1. 라오메돈 치하
2.1.1.2. 프리아모스 치하
2.1.2. 트로이 전쟁
라오메돈이 아폴로와 포세이돈의 힘을 빌어 트로이를 세웠지만 두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아 재앙을 받았다. 이를 헤라클레스에게 도움받아 극복했으나 또 보상을 주지 않자, 헤라클레스가 분노하여 병사를 조금 데리고 와 트로이를 박살내 버렸다.[2] 이 때문에 이후 트로이까지 쳐들어간 아킬레우스 외 다른 영웅들은 바보가 되어 버렸다.[3] 이때 유일하게 헤라클레스에게 보상을 주자고 주장한 프리아모스를 제외한 왕자 모두가 죽어 버렸고[4] , 프리아모스는 겨우 겨우 트로이를 재건했지만...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가 헬레네를 데려온 탓에 트로이는 또 다시 멸망하고 만다.
여담으로 팔라스라는 트리톤의 딸이 있는데, 아테나의 실수로 팔라스가 죽자 팔라디움이라는 수호상을 트로이에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수호상이 있음에도 두 번이나 털렸는데, 얄궂게도 그 멸망을 이끈 두 인물, 헤라클레스와 오디세우스는 아테나가 아끼던 영웅이었다.
2.2. 고고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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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트로이의 발견 과정에 대해서 “일리아스는 신화적인 서사시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근세에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남자가 이 책을 읽고는 이것의 실존성을 밝히기 위해서 평생을 걸고 증명에 도전한 결과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트로이 유적에서 대전쟁의 흔적이 발견되어 일리아스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서술된 작품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거짓이다.
실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게 된 과정을 보면, 고고학자 캘버트가 이미 터키의 히사를륵 언덕(Hisarlık Tepesi)[8] 을 답사한 후 학술 저널에 그곳이 트로이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고 후원자를 찾고 있었으며, 이때 슐리만이 캘버트를 후원하겠다고 나서서 함께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게 된 것이었다. 슐리만도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하고 트로이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슐리만이 주목한 곳은 그때까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알려진 부나르바시 지역이었으며[9] 슐리만이 히사를륵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캘버트의 말을 들은 후였다. 널리 알려진, 슐리만이 여러 지역을 답사한 끝에 히사를륵 지역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점찍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슐리만 본인이 퍼뜨린 것이다.
사실 슐리만은 유적 발굴과정에서도 '트로이 함락의 극적인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유물이 발견된 위치를 조작하려다가 캘버트가 발굴 노트에 발견위치를 기록했기 때문에 실패한 일도 있고, 트로이 발굴 후에도 다른 사람에게서 유물을 사들인 후 자기가 발굴했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다 들통난 일이 있었다.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해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은 대단한 일이고, 트로이 발굴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도 분명한 사실이긴 하나 그 이면에는 이러한 사기행위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흔히 알려진 이야기에서 트로이 유적에서 대전쟁의 흔적을 발견했다면서 일리아스가 실제 역사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10년 동안이나 싸운 대전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무언가 충돌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 정도의 전쟁 흔적은 다른 유적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수준이며, 이 트로이 유적에서도 '''여러 층에서''' 발견된다. 덕분에 학자들은 어느 층의 전쟁이 '일리아스'의 모델인지를 놓고 지금까지 논쟁을 벌이고 있다.[10]
그중에서 슐리만이 점찍은 ‘대전쟁의 흔적’은 트로이 전쟁의 후보일 수 없다는 것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연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슐리만이 발굴한 것은 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500년경)의 유적으로, 오늘날의 학자들은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는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200~1100년경)의 도시로 본다. 즉 슐리만이 트로이가 있었던 곳을 발굴한 것은 사실이지만 슐리만이 발견한 것은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아닌 그 천몇백 년 전의 유적이었던 것이다. 전기 청동기 시대나 후기 청동기 시대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기 청동기 시대에는 아직 도시국가들이 전쟁을 벌일 만한 사회구조에 도달하지 못했다. 더구나 연대상으로도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와 슐리만이 발굴한 트로이는 대략 선덕여왕 드라마가 방영된 21세기와 진짜 선덕여왕의 시대 정도의 차이가 난다.
또한 고고학에서 발굴을 할 때 가장 윗층(현대에서 가장 가까운 층)을 1번층이라고 명명하고 아래층들은 2번 3번 등으로 숫자를 매기는데, 이런 원칙을 모른 슐리만은 자신이 트로이라고 생각한 층을 1번층으로 지정했다. 이 때문에 가장 근대에 있는 층이 8번층이 되어버리고, 슐리만이 찾았던 트로이가 1번이었으나, 1번층 아래에 또 다른 유적이 발견되면서 슐리만의 트로이는 2번층으로, 최상위층이 9번층이 되는 문제가 생겨나서 여러 고고학자들이 빡쳤다.
더욱 난감한 점은, 슐리만은 '트로이' 발굴을 위해서 그 위층에 있는 유적들을 파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고대 그리스 고전시대의 성벽이라고 생각하고 파괴한 것이 바로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의 성벽이었고, 그나마 그 아래층의 유적과 겹치는 곳 일부만 부수었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물론 슐리만과 캘버트가 해당 유적을 호메로스의 트로이라고 단정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트로이 유적에는 고대의 4개 시대의 유적이 중첩되어 있다. 가장 위층은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며, 그 아래층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건설된 도시이고, 그 아래의 유적층이 바로 후기 청동기 시대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이며, 가장 아래층이 전기 청동기 시대의, 슐리만이 발굴한 트로이이다. 물론 각각의 시대 역시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사이사이에는 전쟁이나 해일 등으로 인한 여러 파괴의 흔적이 있다. 이들 여러 파괴의 흔적들 가운데 후기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것 중 하나가 트로이 전쟁의 흔적일 것으로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11] 그런데 슐리만은 이 중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도시 아래쪽에 있는 도시를 포함한 층, 즉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를 포함한 층을 시대 순서로 미루어 고대 그리스 고전시대의 유적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래층이 일리아스의 트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슐리만이 미케네를 발굴하기 시작한 것도 그리스 역사학자들이 미케네의 사자문을 발견해서 복원한 지 30년 이상 지난 후의 일이었다. 미케네 발굴에 많은 공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다. 트로이와 달리 미케네는 그 위치가 잊힌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 누가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굴한 뒤 후속 연구에 따르면 몇 차례 파괴되어 몇 번이고 다시 재건되었다고 한다. 지진에 부서지고, 전쟁에 부서지고 말도 아니게 고생을 한 도시.
슐리만이 발굴했을 때는 크기가 너무 작았다. 혹자는 초등학교 교정 쯤 되는 크기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을 정도. 하지만 연구가 더 진행된 결과 슐리만이 발견한 유적은 그가 원하던 호메로스의 트로이보다 옛 유적이었고, 호메로스의 트로이는 슐리만이 찾아낸 것의 크기의 17배쯤 된다. 호메로스의 트로이는 약 20만 제곱미터[12] 로, 직사각형이라 치면 400×500미터쯤 크기다.[13]
다만, 슐리만이 이 유적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 지역은 갈리폴리 전투의 주전장이 되었을 것이고 [14] 발굴이고 나발이고 그때 다 박살나 버렸을 것인데, 이 발굴로 이쪽을 피하여 전투를 하게 되었으니 그의 공을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다.
2.2.1. 윌루사와 트로이
관련 학자들은 고대 히타이트의 기록에 등장하는 '윌루시야(Wilusija)' 혹은 '윌루사(Wiluša)'가 바로 트로이라고 비정한다. 트로이가 있던 지역을 부르던 이름 일리오스(Ilios)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이나 히타이트의 기록에 나타나는 윌루사의 위치가 실제로 트로이가 발굴된 지역과 일치한다고 판단한 점 등 때문이다. 일리오스라는 이름이 생소하겠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 제목부터가 '트로이아스'가 아닌 '일리아스'이듯 상당히 자주 사용된 이름이었다. 게다가 윌루사와 히타이트의 조약에서 나타나는 윌루사의 신은 '''아팔리우나'''로 아폴론과 매우 유사하고, 윌루사 왕의 이름은 '''알락산두'''로, 알렉산드로스[15] 와 거의 똑같다. 히타이트와 맺은 조약에서 윌루사의 또 다른 신으로 '땅 속을 흐르는 수로의 신'을 언급했는데, 이 수로 역시 트로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도 윌루사가 곧 트로이라는 주장의 중요한 근거이다.
피야마라두라는 왕도 있었는데 프리아모스와 유사하다. 다만 알락산두보다 오히려 후대 인물로 추정된다. 참고로 윌루사의 신 아팔리우나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아폴론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 편을 들었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빌려 입고 나온 파트로클로스의 눈을 멀게 해서 죽게 한 자도 아폴론이고, 아폴론이 직접 아킬레우스를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16] 트로이의 성벽을 쌓아올린 신도 바로 아폴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폴론이 트로이의 수호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17][18]
몇몇 히타이트 학자들은 트로이에서 사용한 언어는 히타이트에서도 꽤 자주 사용된 언어인 루위어라고 주장해 왔다. 히타이트에서 많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종족과 맺은 조약문은 당시의 외교 표준어 노릇을 한 아카드어로 작성했는데, 히타이트와 윌루사 간 조약문들은 아카드어가 아닌 루위어로 작성했으므로 윌루사에서는 루위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트로이는 그리스가 아닌 히타이트를 중심으로 한 아나톨리아 문화권에 속했을 터이다. 문제는 트로이 유적 자체에서는 문자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문서 보관소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곳에 후대 그리스인들이 신전을 세워 유적을 완전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트로이에서 사용한 언어에 대해서는 막연한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에서 문자 몇 개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지만, 발견된 숫자가 너무 적어서 발견된 것이 정말로 문자가 맞는지부터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트로이 유적에서 마침내 문자가 새겨진 인장이 발굴되어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비록 인장 하나에 불과하지만 트로이에서 발견된 유일한 문자기록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인장에 새겨진 것이 히타이트에서도 널리 쓰였던 루위어 특유의 상형문자였다. 이 때문에 트로이에서 사용된 언어가 루위어라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히타이트의 외교조약들을 보면 윌루사, 즉 트로이가 소아시아 서쪽 해안의 중심국가였던 것 같다. 그 지역의 원래의 중심국가는 아수와[19] 였으나, 히타이트의 왕인 투드할리야가 정벌한 이후 윌루사로 대체된 것 같다. 그런데 히타이트 외교문서에서 윌루사의 이름은 미케네가 멸망한 이후까지 계속 등장하므로 그리스 전승과는 달리 트로이가 미케네와 벌인 전쟁으로 멸망하진 않은 듯하다. 이는 트로이의 고고학적 발굴결과로도 뒷받침된다.[20] 하지만 그리스의 침공 자체는 실제로 있었던 듯하다. 이 무렵 히타이트의 궁정문서들 중에서 아히야와[21] 의 왕이 소아시아 서쪽 해안은 자기들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내용이라든지, 아히야와 왕의 아우 아타리시야[22] 가 군사를 이끌고 소아시아 서쪽 해안을 노략질하고 돌아갔다던지, 윌루사의 왕이 도시를 버리고 피난을 갔다든지 하는 내용들이 발견된다. 특히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형제의 아버지 이름이 아트레우스라는 점이 이 문서와 일치하여 주목받는다.
3. 트로이의 후예
유럽의 많은 건국 신화들은 트로이가 국가의 조상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상 제3의 로마의 대선배.
로마의 경우 아이네이스로 아예 로마가 트로이의 후예라고 주장했으며, 영국 또한 트로이의 생존자들이 세운 땅이라는 전설이 있고, 북유럽 신화 자료 중 하나인 신 에다에선 아스가르드의 위치를 트로이와 동일시하는 구절이 있으며 아스가르드의 12 왕국 중 한 곳의 왕이 프리아모스 왕의 딸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트로르, 즉 토르였다는 얘기도 나온다. 오스만 제국도 트로이의 후예를 자칭한 로마를 멸망시킬 때 자신이 트로이의 복수를 했다고 선언한다.
3.1. 아이네이아스 계열
3.1.1. 로마 문명
트로이의 왕족 아이네이아스가 로마 신화에 편입되어 고대 로마의 시조로 추앙받는다.
율리우스(Iulius) 가문은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의 별명인 이울루스(Iulus)가 자신들의 선조라는 주장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고, 카이사르의 외조카이자 양자인 아우구스투스도 아이네이아스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결국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는것은 당연하다 라는 논리를 성립시킨 것이다. 이를 홍보하기 위해, 베르길리우스는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집필했다. 참고로 카이사르는 자신의 고모인 가이우스 마리우스 아내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조상이 아이네이아스이니 결국 따지고 올라가면 아프로디테(베누스)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로마 왕국의 시조인 로물루스의 어머니인 레아 실비아 역시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라고 한다. 즉, 트로이의 후손인 것 뿐만이 아니라 부계쪽으로 군신 아레스(마르스)의, 모계쪽으로 아프로디테(베누스)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한 것.
3.1.2. 브리튼인
브리튼 섬의 이름을 트로이의 왕족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인 브루투스에게서 따왔고 이 브루투스가 브리튼의 첫 왕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실존 여부는 불명이지만, 브루투스의 브리튼 건국 설화는 근세까지 단순히 설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었다.
브리튼인의 역사라는 9세기 문헌에서는 브리튼의 이름을 딴 브루투스가 로마의 집정관이라는 것과 아이네이아스의 손자 또는 증손자로 나온다.
3.2. 아스티아낙스 계열
헥토르의 아들 아스티아낙스의 생존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전승은 사랑에 빠진 오를란도와 광란의 오를란도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아스티아낙스는 안드로마케가 다른 아기와 바꿔치기 해서 살아남았고, 장성한 아스티아낙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시칠리아섬 메시나에 정착하여 왕국을 세우고 거인 왕 아그라노르를 죽이고 시라쿠사의 여왕과 결혼했다.[23]
그리고 아스티아낙스의 아들 중 한 명인 폴리도로스[24] 는 그의 뒤를 이어 왕국을 잇는 대신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프랑크족의 족장 프랑키오의 사위가 되어 프랑쿠스로 개명하고, 폴리도로스의 후손은 메로빙거 및 카를 왕족이 되었다.[25]
다행히도 남은 아들이 가계를 이음에 따라 레기오 왕족이 되어 왕국을 이었고, 로마가 건국되자 스스로 병합되었음에도 귀족으로서 대우를 받으며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메시나 영지를 지켜왔으며, 레기오 왕족의 형제 중 동생이 독립하여 프랑크 왕국의 가신이 되었는데 그 가문이 클레르몽 가문이라는 것이다.
4. 관련 문서
[1] 태양의 도시라는 뜻이다. 트로이인의 수호신은 아폴론이었으며, 그는 태양의 신이었다.[2] 이때 포세이돈도 합세했다고 한다.[3] 물론 포세이돈이 합세했다는 점과 이 시기의 트로이에는 대영웅 헥토르가 없었다는 큰 차이점이 있기는 하다. 게다가 둘을 비교하면 헤라클레스 때에는 포세이돈만 헤라클레스 쪽을 도왔고 트로이에 개입한 신들은 아예 없었지만, 트로이 전쟁은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아레스, 아폴론, 아르테미스 등 각자 여러 신들이 각자의 감정을 앞세워 그리스 측과 트로이 측으로 갈라지며 개입하는 바람에 인간들의 싸움을 넘어 신들의 파벌 싸움으로까지 번져버려 전쟁의 스케일이 다르기에 두 사례를 똑같이 비교하기는 힘들다.[4] 이윤기 작 뮈토스에 따르면 원래 헤라클라스에게 주기로 한 공주에게 왕자들 중 한 명만을 살려줄 테니 고르라고 하자 고른 왕자가 프리아모스라고 한다.[5]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6]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7]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8] 여담이지만, 이 지명은 터키어로 '성채를 세울 만한 언덕'이란 뜻이다. 유적지의 설명에 의하면 이미 발굴 전에도 이곳에 성이 있었다는 구전이 지역 사람들에게 있었다고 한다.[9] 즉 슐리만 혼자만이 어릴 때의 꿈을 간직하고 트로이를 찾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사실과 다르다. 캘버트와 슐리만 이외에도 트로이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여럿 있었다.[10] 이는 영화 《트로이》에서도 반영해서 영화의 무대가 되는 일리아스의 트로이가 있고, 해안이나 도시 주변에 훨씬 고대에 지어진 유적들이 다수 있다.[11] 도시 전체가 큰 화재에 휩쓸린 흔적이 있고, 도시 곳곳에서 '''그리스제''' 화살촉과 창날 등 무기가 흩어진 모습이 발견되는 등, 다른 파괴의 흔적과는 달리 전쟁에 의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12] 이것도 제곱킬로미터로 환산하면 0.2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하다. 20만 제곱미터는 6만 5백 평쯤 된다.[13] 덕성여자대학교보다 작은 면적으로 기숙사가 붙어있는 규모가 좀 큰 중고등학교만 한 면적다.[14] 실제 터키에서는 갈리폴리 전투를 차낙칼레 전투라고 부르는데 차낙칼레는 이 지역을 포함한다. 다만 갈리폴리 전투의 주 전장은 트로이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두고 맞은 편에 위치한 지역이었다.[15]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알렉산드로스 파리스. 파리스라는 이름이 훨씬 유명하다.[16] 유명한 '파리스의 독화살' 이야기와는 계통이 다른 이야기이다. 어차피 어느 쪽이건 일리아스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다.[17] 본래 아폴론은 유럽어계 태양신의 전형적 특징을 보이는 아나톨리아 출신 신으로 그리스 신화에선 테베와 델포이를 제외하면 잘 출연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트라키아나 라피테스 지역 등 헬렌네스의 중심지인 프티아 지역이나 다나오이의 중심지인 아르고스보다 좀 북쪽과 동쪽으로 치우친 지역에서 가장 자주 나타난다.[18] 하지만 신화상으로는 아테나 조각상이 트로이에 있는 한 트로이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으며, 트로이 목마의 목적도 아테나 조각상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또한 차나칼레의 트로이 유적에도 아테나 신전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아폴로 뿐만 아니라 아테나도 숭배했음을 생각해봐야할 것이다.[19] '아시아'라는 지명의 어원이 된 듯하다.[20] 일리아스에서도 트로이가 이번 전쟁에서는 멸망하지만 아이네이아스에의 손으로 다시 재건되리란 포세이돈의 예언이 나온다.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를 떠나 이탈리아로 간다는 이야기는 로마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믿고 있던 이야기인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때문에 정설처럼 오해받아 버렸다.[21] 그리스를 가리키는 아카이아의 히타이트식 표기[22] 그리스식 이름 아트레우스를 히타이트식으로 표기한 것[23] 마침 근처에 정착한 아이네이아스를 도와 우호적 관계를 맺었고, 안드로마케와도 재회했다는 전승도 있다.[24] 프리아모스의 막내아들인 폴리도로스와는 동명이인이다.[25] 이 부분은 아리오스토가 프랑크 왕국의 건국 전설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건국 전설에서 결혼하고 개명하는 것은 아스티아낙스이며 그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폴리도로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