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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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전쟁.
신들과 영웅들이 개입한, 도시국가 트로이와 그리스를 주축으로 한 아카이아 연합군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다.
2. 전쟁의 발단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묘사된 바로는 전쟁의 발단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려간 것에 그리스인들이 분노해서 벌어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그리스 측 기록과 페르시아 측 기록이 조금 다르다.
2.1. 호메로스의 기록
헬라스인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트로이 전쟁의 배경을 신화를 통해 기록했다.
모든 것은 올림포스의 세 여신인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누가 황금사과를 가질 것인가로 다툰 것에서 시작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테티스와 펠레우스의[1]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에리스는 불화와 다툼을 관장하는 신이기 때문에 결혼식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입장을 거절당했고, 격분한 에리스는 황금사과를 선물로 보낸다. 불화의 신이 만든 작품답게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서로 황금사과를 가지려고 다투게 된다. 치열한 접전끝에, 셋은 승부를 내려고 인간 중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인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을 부탁한다. 파리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헤라는 최고의 부와 권력을, 아테나는 위대한 지혜와 모든 경쟁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줄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트로이가 망조가 들었는지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조건을 받아들여 승자로 선언한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파리스에게 주지만, 그게 하필이면 유부녀인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 헬레네이었다. 아내를 뺏겨 격분한 메넬라오스 왕은 자기 형인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함께 수많은 영웅들,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트로이로 쳐들어가게 된다.
2.2. 페르시아의 기록
트로이 전쟁 후 트로이 지역을 다스리던 페르시아의 기록은 헬레네가 온 과정이 조금 다르다.
헤로도토스가 인용한 페르시아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 서아시아 페르시아인들과 남유럽 그리스인들 사이에는 잦은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고 기록한다. 이오가 처음 이집트로 납치된 후, 메데이아가 그리스인들에게 반대로 납치되었고, 이에 트로이의 왕자 알렉산드로스(파리스의 본명)가 보복 목적으로 그리스인 헬레네를 납치했다는 주장이다. 트로이가 헬레네 반환 요청을 무시한 이유도 이전 납치 사건에서 사과나 배상이 없었고 여성 납치 문제가 국제 문제로 대두되는 일이 없었기에 무시했다는 주장이다.[출처2-1-1]
3. 경과
이에 따라 올림포스의 신들은 저마다 둘 중 한 진영을 선택하는데, 다음과 같다.
- 그리스 진영
- 헤라: 파리스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아서 돌아섰다. 가정윤리의 수호신으로서, 파리스가 전처 오이노네를 이별도 없이 방치했고, 이미 자식까지 있는 유부녀를 빼앗는 불륜행위 자체가 헤라의 분노를 더 샀다.
- 아테나: 헤라와 같은 이유로 파리스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 또한 아테나가 가장 아끼고 편애하던 인간인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아카이아(그리스) 편이다.
- 포세이돈: 트로이아의 선대왕 라오메돈에게 원한이 있었다.[2]
- 테티스: 그리스의 장수 아킬레우스가 테티스의 아들이다.
- 일부 전승에 따르면 에로스도 그리스 편이었다고 한다. 실제 그리스 편에 치우친 일을 많이 했다.[3]
- 트로이 진영
- 아프로디테: 황금 사과를 자신에게 줘서 파리스와 헬레네를 이어준 장본인이기도 하고 트로이아의 장수 아이네이아스가 아프로디테의 아들이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아프로디테는 트로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적이 많았고, 다치기도 했다.[4]
-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트로이아 진영에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을 그리스에서 강제로 참전시켰다가 죽게 했다. 그리고 아레스의 도시들은 대부분 트로이아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영지 문제도 있었다.
- 포보스&데이모스: 아버지랑 어머니를 따라 트로이아를 지지했다.
- 아폴론: 헥토르를 아끼는 데다 아가멤논이 자신의 사제를 모욕한 일로 트로이아의 편을 들었다. 결별하기는 했지만 옛 애인이었던 카산드라가 트로이아의 공주인 것도 있었다. 사실 포세이돈과 마찬가지로 선왕 라오메돈에게 원한이 있어서 한 번 트로이아에 전염병을 퍼뜨려 박살낸 적이 있는데도 트로이아 편을 든 것을 보면 헥토르와 카산드라의 이유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 아르테미스: 쌍둥이 남매인 아폴론이 트로이 편인 것 + 그리스 군이 출정 전에 아르테미스에게 바친 사슴을 죽인 것[5] 때문에 트로이아 편을 들었다.
- 레토: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어머니로서 트로이아 편에 선다.
- 스카만드로스: 강의 신. 아킬레우스의 무쌍으로 강둑이 시체로 막혀버리자 열 받아서 참전. 아킬레우스를 거의 죽일 뻔하다가 이를 막으려는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강물을 통째로 말려버리는 바람에 항복하고 중립이 되었다.
- 에오스: 새벽의 여신으로서, 그 아들인 멤논이 에티오피아 왕으로서 트로이아 편이었다.
- 중립
- 데메테르: 12주신이지만 전쟁과는 상관없는 여신이라 나설 일이 없다. 이는 헤스티아도 마찬가지. 두 여신은 일종의 평화를 상징하다 보니 전쟁이 배경이 되는 일리아스에 등장시키지 않은 것일 수 있다.
- 디오니소스: 일리아스가 쓰여질 당시에는 12주신이 아니어서 언급조차 한 번도 되지 않았다.[6] 애초에 전쟁에 관여할 일 자체가 거의 없기는 하다만.
- 헤르메스: 계속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제우스가 전쟁에서의 신들끼리의 싸움을 허용한 이후로는 그리스 편에 선다.
- 에리스: 황금사과를 던져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만악의 근원.
- 하데스: 사람이 죽어나가면 죽어나갈수록 이득을 보는 하데스만은 유일하게 중립을 지켰다. 애초에 황천의 신이라 지상에 간섭을 하기는 어려우니, 그냥 가만히 앉아 떡이나 보는 게 낫다.
- 제우스: 트로이의 장수 사르페돈이 제우스의 아들이나 제우스가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신들의 우두머리인 데다 제우스를 뺀 다른 신들을 다 합친 것보다 제우스가 강하기 때문에[7] , 제우스는 중립을 지켜야 했다. 실제로 사르페돈이 죽게 되자 구해주려고 했지만 헤라가 네 입장상 안 된다고 설득해서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의 기도로 테티스가 부탁을 하자 잠깐 그리스 세력을 약화시켰지만 아킬레우스가 전쟁에 다시 참가한 뒤로 다시 중립에 섰다. 하지만 트로이아를 제일 존중하고 사랑한다고 한 점을 보아 사적으로는 트로이아로 마음이 기운 것으로 보인다. 트로이아의 명맥을 로마로 잇게 한다는 점도 그렇다.
- 헤파이스토스: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드는 것 말고는 한 게 없다. 그리스 편이라지만 사실상 중립. 다만, 아킬레우스를 죽이려는 스키만드로스를 헤라의 명령을 받고 막은 적은 있다.
- 이리스: 헤르메스처럼 신들의 전령으로 발빠르게 돌아다닌다.
- 그 외 기타 등등
다른 설에는 트로이 부근에 쳐들어가긴 했지만 곧바로 트로이로 쳐들어가진 않고 주변의 국가들부터 약탈하고 박살내고나니 9년째였더라 하는 말도 있다. 펠로폰네소스를 저술한 투퀴디데스도 이 설을 지지한다. 바다를 건너가 전쟁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트로이 전쟁은 그 당시 있었던 어떤 전쟁보다 대규모이기는 했다. 그러나 병참 문제 때문에 대군을 보내지 못했고 바다를 건너가서 약탈을 하든가 농사를 하든가 하면서 시간을 끌었을 것이며, 그렇기에 투퀴디데스 당대의 전쟁보다는 규모가 확연히 적었을 것이라고 한다.
여하간 10년이 넘게 결판이 나지 않자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의 제안으로 거대한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성 앞에 남겨두고 군대를 물렸다. 트로이인들은 거대한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면 트로이가 완벽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믿고 성 안으로 들였다. 라오콘이 목마를 성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8] 결국 묵살당했고 카산드라 또한 목마를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아폴론이 내린 저주 때문에 카산드라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트로이인들이 승리의 잔치를 벌여 취해있던 사이, 목마 안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오디세우스와 병사들은 트로이인들이 방심한 틈에 목마에서 나와 트로이를 함락시키고 헬레네를 구해냈다.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그리스 작가들의 영원한 원천이 되었는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가장 대표적인 트로이 전쟁을 다룬 서사시다. 의외로 이 외에 트로이 전쟁에 관한 작품은 많지 않은 편이다. 되려 그 전후의 사건이 메인이 되는 일이 잦다. 스케일이 지나치게 큰 것이 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고대 이후 중세에는 트로이 전쟁사를 다룬 책도 여러 권 나왔다. 물론 거의 역사서 가깝게 지어졌지만. 또 중세에는 아킬레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영웅에 대한 이야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도 특징.
특이한 건 단테의 신곡에서 트로이 측의 영웅들은 파리스만 빼고 다들 림보에 있는 데 비해(그래봐야 아이네이아스와 헥토르뿐), 그리스 측 영웅들은 죄다 지옥에 떨어졌다. 이건 단테가 이탈리아인이라 로마 쪽을 더 옹호한 것도 있다. 거기다가 헥토르는 중세에는 '최초의 기사'라는 호칭을 얻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롤랑의 검 듀란달이 헥토르의 검이 이어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니 당연하다.
근데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보면 상당히 막장인데...여기선 '''헬레네가 트로이에 없었다.''' 즉 이건 헤로도토스의 추측성인데, 헤로도토스의 말에 따르면, 차라리 헬레네가 이집트에 있었다는 얘기가 더 사리에 맞다는 것. 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해서 도망가다가 잠시 쉬려 이집트에 도달하자, 파리스에게 불만이 있던 하인들이 도망치고 그 근방의 군주에게 그 사실을 까발렸다. 파리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군주에게로 갔다가 헬레네와 보물들을 다 뺏기고 트로이로 쫓겨났는데... 메넬라오스는 이 사실을 몰라서 트로이로 가서 헬레네를 내놓으라고 했고, 파리스가 이집트에서 헬레네를 뺏겼다는 말을 안 믿어서 10년 걸려 트로이를 다 박살냈는데, 헬레네가 없어 결국 이집트로 가 헬레네를 되찾아갔다. 헤로도토스가 은근히 일리아스를 까는 점이 있어서 그런지 정말 막장스러운 이야기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헬레네에선 여기에 신화적인 설정을 추가해서 트로이로 간 건 헬레네의 환상이고 진짜 헬레네는 신들에 의해 이집트로 빼돌려져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왕이던 프로테우스는 헬레네를 보호해 주었는데, 그러는 동안 자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소식을 듣고 죄책감과 억울함에 괴로워하며, 급기야는 자신의 악명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까지 듣는다. 결국엔 난파돼서 거지꼴이 돼서 온 메넬라우스와 재회, 기지를 써서 자신과 강제로 결혼하려는 프로테우스의 아들[9] 에게서 도망친다.
참고로 그리스 영웅들이 10년간 전쟁을 치뤄서 함락한 트로이는 헤라클레스가 혼자서 단숨에 박살낸 전적이 있다. 이게 가능했던 게 헤라클레스가 영웅이었던 점도 있겠으나, 우연히 포세이돈과 트로이를 공격하는 시기가 겹쳤던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참고로 그리스 신화는 말고 로마 신화에 따르면 로마의 설립자들은 '''멸망한 트로이 성의 후예이다.''' 원래는 로물루스/레무스 신화가 로마 신화에서 로마의 시초였지만 로마가 그리스를 병합하고 그리스 신화를 받아들이고 나니 자기들의 건국 신화가 너무 초라해 보여서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신화를 끌어와서 땜빵한 것이라는 설과, 다른 설에 따르면 로물루스/레무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직계로 내려오는 후손인 줄 알았는데 그리스 신화를 받아들이고 나서 보니까 트로이 전쟁은 로물루스/레무스 시대에서 한참 오래전이라 이것과 로물루스/레무스 신화를 잇기 위해 장장 '''600년에 달하는''' 신화를 나중에 따로 끼워넣었다는 설이 있다. 이 신화의 맨 처음 조상이 바로 베누스의 아들 아이네아스. 원래 아이네아스는 일리아스에서 이미 트로이를 재건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기에 끼워넣기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다.
더불어 유럽의 다른 지방의 설화 중에는 조상을 트로이로 잡는 것도 있다. 스노리의 신 에다에선 아스가르드의 위치를 트로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으며 토르 또한 아스가르드의 12 왕국의 왕 중 한 명과 트로이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썰을 소개했다. 이쪽에선 아예 아사 신족의 이름이 아시아에서 나왔다고 얘기한다. 물론 현재의 정설은 아사(애시르)는 아수라와 같은 뜻을 가진, 인도유럽어족 고유어라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 이야기는 바이킹 시대는 나타나지 않고 아이슬란드가 기독교화된 이후에나 등장한 썰이다.
심지어 샤를마뉴 전설에서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 헥토르의 아들 아스티아낙스가 살아남아 그 후손이 샤를마뉴 왕조가 되었다는 설까지 나올 정도였고, 이 전설을 리메이크한 광란의 오를란도에서는 헥토르를 '인류 최초의 기사'라 부르며 찬양하고 그의 무구가 전설 장비 취급 받을 정도로 위상이 올라갔다.
4. 관련 인물
4.1. 트로이
- 프리아모스 - 트로이의 왕
- 헤카베 - 왕비
- 헥토르 - 왕세자 & 총사령관.
- 파리스 - 제2왕자.
- 데이포보스 - 제3왕자.
- 헬레노스 - 제4왕자 & 대신관
- 카산드라
- 폴릭세네
- 라오콘
- 아이네이아스
- 이피게네이아
- 사르페돈 - 리키아의 왕.
- 펜테실레이아
- 멤논 - 에티오피아의 왕.
- 오이노네
- 가니메데
- 피라이크메스 - 파이오니아의 왕.
- 레수스 - 트라키아의 왕.
4.2. 아카이아 연합군
- 아가멤논 - 총사령관
- 메넬라오스
- 아킬레우스
- 파트로클로스
- 네오프톨레모스
- 오디세우스
- 네스토르
- 디오메데스
- 大 아이아스
- 프로테실라오스
- 小 아이아스
- 필로크테테스
- 이도메네우스
- 마카온[10]
- 칼카스
5. 현실 역사상의 트로이 전쟁
많은 이들이 트로이를 호메로스의 서사시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도시로 여겼지만 호메로스에 감명을 받고 트로이를 찾아내겠다고 결심한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트로이가 1870년에 유적이 발굴되었다.[11] 슐리만은 자신이 발굴한 제2층의 트로이를 트로이 전쟁 시대의 트로이로 생각했으며 이곳에서 발견한 황금유물들을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부르며 빼돌리기까지 했지만, 후대 고고학자들의 발굴 조사 결과 슐리만의 착각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신화로만 생각하던 트로이 전쟁을 역사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로서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처음에 생각했던 제2층이 트로이의 유물은 아니었으나 결국 그 장소에 트로이 전쟁이 있었던 것은 확인되었다.
트로이 전쟁이 과연 실제의 전쟁이었는지 역사학자들은 의구심을 품었지만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유적에서 발견된 대량의 외교문서를 통해서 트로이 전쟁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히타이트 제국의 외교문서에 의하면 윌루사에 미케네인들이 쳐들어 왔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는데 학자들 중에는 히타이트 제국의 세력권인 윌루사가 곧 일리오스=트로이로 비정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미케네인들이 쳐들어와 약탈하고 불태운 것이 트로이 전쟁의 실체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1250년 또는 기원전 1170년에 일어났던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목적으로 일어난 전쟁이라는 분석도 있다.[12] 트로이는 입지적으로 험난한 다르다넬스 해협을 피해 소아시아로 육로수송이 가능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런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아카이아인들이 쳐들어와 트로이를 정복한 것이 트로이 전쟁의 실체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이 외에 거의 인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분석도 있는데, 트로이는 히타이트 세력권에서 큰 도시이므로 철기를 일부 사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시 그리스 주변에서 철은 '''금과 맞먹는 값어치를 지닌 꿈의 물질이었기에''' 이를 약탈하기 위해 처음에는 히타이트를 치려고 했다가 국력으로는 게임이 영 안 될 것 같으니까[13] 꿩 대신 닭 격으로 트로이를 쳤다는 분석이다. 이 주장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제아무리 트로이가 히타이트 산하에서 큰 도시라 해도 히타이트가 철기를 '''내어줄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철기를 내어줬다는 건 현재 시각으로 보면 '''핵무기를 준 것'''과 다를 바 없다.[14] 물론 철기가 아니라 철광석을 내어주었으며 트로이에서는 이것을 제련할 줄 몰라 창고에 처박아뒀었고 그리스는 제련을 할 줄 알았기에 그걸 뺏으려고 쳐들어갔다 식으로 설명하면 그런대로 말은 되지만, '''그럼 왜 그리스는 그리스 국내의 철을 제련해 쓰지 않고 굳이 다른 나라에 쳐들어가 뺏어와야 했느냐'''는 문제점을 안게 된다.
그러나 몇몇 역사학자들은 트로이 전쟁의 실제 가능성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다. 물론 그에 해당되는 전쟁 자체는 역사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앞서의 주장들을 미뤄본다면 트로이 전쟁의 실체는 미케네인들의 약탈이나 소규모 정복전쟁이 호메로스에 의해서 극적인 드라마로 각색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한 설명일 듯하다. 미케네 인의 윌루사 침공은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그런 사건이 존재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이지만, 신화에 나오는 것 같은 규모는 절대 아니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청동기 시대 근동의 인구나 문명 기준, 그중에서도 비교적 약소 문명이었던 미케네 문명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전투로 기억되었을 수 있다. 결국 관건은 평범한 수준의 전쟁이 서사시 덕분에 큰 사건으로 기억된 것인지, 일리아스의 묘사만큼은 아니라도 실제로도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큰 전쟁이었는지 여부인 셈이다.
한편, 2018년에는 파우사니아스가 언급했던 '트로이 전쟁의 생존자들[15] 이 만든 고대 도시 테네아'의 유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기사보기
5.1. 규모 추측하기
일리아스의 494행에서 759행까지 그리스 측의 전함과 병력을 설명하는데 언급되는 검은 배 즉 전함을 종합하면 1184척이다.
그리고 그리스군의 병력에 대해서는 일리아스에서는 그리스 함대중 보이티아에서 배마다 120명씩 타고 있는 함대가 15척이고 필록테테스가 지휘하는 배마다 50명씩 타고 있는 함대가 7척이 라고만 묘사할뿐 나머지 함대의 병력에 대한 묘사는 일절없다.(아마 120명은 배한척당 가장 많은 병력이 탄 숫자이고 50명은 배 한척당 탑승인원이 가장 적은 최소치일 것이다.)
일리아스에서는 정확히 그리스군의 병력이 얼마라고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군의 배가 대략 1200척이고 배 한척당 최소 50명 이상 승선했다고만 계산해도 무려 최소 6만 이상의 대군이 된다.
이 정도 수치면 카데시 전투당시 패권국가인 히타이트가 동원한 규모보다도 많기 때문에 당연히 고대의 과장법일 것이고 그럼 다른 방식으로의 계산을 해보아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직접적으로 탑승 인원을 명시해 둔 선박의 대표격은 다름 아닌 아르고 호이다.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가져오기 위해 제작한 이 선박은 언급에 따르면 그 어떤 배보다 크고 강했다. 그런데 이 선박의 탑승 인원은 50명이었다.
가장 큰 배의 탑승인원이 50명이니 이 50명은 말그대로 최대 탑승 가능한 인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트로이 전쟁당시 지휘관들이 탄 대장선의 크기는 그 정도 크기 였겠지만 다른 병사들이 타고 있는 배는 그 보다 작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선박의 수도 재계산할 필요가 있다. 1184척은 척 봐도 과장이다. [16]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을까? 안타깝지만 없다. 따라서 선박의 수는병력부터 계산한 다음 맞춰 보아야 한다.
일단 트로이 인구는 대략 5000~7500 명인 대략 6000명 정도의 도시국가였고, 그렇기 때문에 트로이 내에서 스스로 동원할수 있는 규모는 최대 600명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17] 그럼 미케네 측은 그것에 대략 한 10배 정도 되는 5000명 정도일것이고 트로이 측도 동맹군들의 군대까지 합치면 병력면에서 그리스측에게 그렇게 열세까지는 아니였을 것이다.
사실 옛날에는 실제 숫자에다가 대략 0하나 덧붙이는 뻥티기가 흔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리스측 배숫자도 대략 120척이였을 수도있다. 그럼 배 하나당 대략 40명 남짓 정도가 탔다고 계산하면 대략 5000에 얼추 들어맞는다. 이 정도면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싸운 청동기 시대 최대의 전투인 카데시 전투에서 히타이트와 이집트 측이 동원한 병력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미케네 문명자체가 영토부터 전성기 고대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영토보다 훨씬 작고 그 작은 영토마저도 그때당시 굉장히 부유한 아나톨리아 지역을 지배했던 히타이트와 아이귑토스 지역을 지배했던 이집트에 비하면 굉장히 척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히타이트와 이집트에 비해 국력이 훨씬 약했던 미케네 입장에서는 5000정도도 충분히 대군이였을 것이다.
(이집트가 지원해 주었을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일리아스에서 그 어디에도 이집트의 대규모 지원병에 대한 일절 언급은 없다.
호메로스가 그리스 연합군의 도시국가들과 트로이 동맹국들까 일일히 다 나열할 정도로 전쟁을 자세하게 묘사했는데 이집트가 나름 지원병을 보냈다면 그 규모도 적지 않았을 건데 그 부분에 대한 일절 언급이 없다는건 이집트가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트로이 전쟁당시 히타이트도 국가 말기 상태라서 트로이 측에 그렇게 대규모 지원을 해주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애초에 미케네도 트로이가 히타이트의 봉신국이라 히타이트의 눈치를 살피며 히타이트가 내전으로 국력이 약해져 정신없을때 트로이를 쳐들오지 않았겠는가.
5.2. 베일을 벗지 않은 부분들
고대 그리스인들마저도 여자 때문에 전쟁난 걸 못마땅해 했으며 투키디데스의 경우 경제활동 등으로 인해 전쟁이 벌어졌다는 설을 내세웠다. 거기다가 트로이가 함락된 원인도 그리스인들의 공격 때문에 성벽이 무너진 건지 지진이 일어난 건지도 불분명하다.
여기에는 고고학적인 이유도 있다. 트로이는 여러 차례 파괴되고 재건되었는데, 그 파괴의 흔적들 중 10년에 걸친 대전쟁에 의한 철저한 파괴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다.[18] 이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 여러 차례의 파괴들 중 어느 것이 트로이 전쟁의 흔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더구나 히타이트의 문서에는 윌루시아(히타이트인들이 트로이를 부르던 이름)에 대한 기록이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이후에까지 계속 나타나고 있다.[19] 때문에 만일 미케네인들이 윌루사를 일시적으로 함락하거나 약탈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이 지역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윌루사의 배후에 있는 강대한 히타이트 제국의 영향력을 몰아내는 것은 어려웠을 듯하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트로이 전쟁은 2차례 있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것은 2번째 트로이 전쟁이고, 헤라클레스가 트로이를 함락했다는 전설이 신화상으로는 그보다 한 세대 앞의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헤라클레스가 트로이를 공격해서 함락시켰을 때 트로이는 이미 포세이돈이 보낸 바다의 괴물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트로이 유적의 흔적 중에도 이러한 신화상의 설명과 잘 들어맞는 듯한 부분이 있는데, 해일로 도시가 파괴되고 약탈당했다가 복원되고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군사적으로 파괴된 (그리고 다시 복원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흔적이 바로 헤라클레스의 공격과 트로이 전쟁을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견해도 있다. 문제는 이 중 두 번째의 파괴의 흔적은 파괴의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첫 번째의, 해일로 인한 파괴보다 오히려 정도가 약했고, 파괴 이후에도 더 빨리 복원되었다는 점이다. 즉 이 주장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이 지나치게 작은 사건이 되어버린다. 이 때문에 정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참고로 이 전쟁은 기원전 1250년~기원전 117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
최근 학계의 견해는 기원전 1200~1150이라는 지극히 짧은 기간에 일어난 사건인 후기 청동기 문명 붕괴와 연관지어, 신화와 기록으로서의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술들이 후기 청동기 시대에 여러 번 진행되었던 공격과 몇 번의 점령, 최종적으로 트로이가 멸망하면서 그리스 암흑기가 찾아오게 된 후 팽배한 비극적 인식 등이 융합된 것일 것이라는 것이 많다. 위에도 언급되었듯 트로이는 여러 번 파괴되고 재건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복합적인 청동기 국제 시스템 전체의 붕괴인 청동기 문명 붕괴 사건 이후에 해당한다. 더군다나 이 시기 동시다발적으로 그리스 문명 역시 붕괴하여 수백년의 암흑기를 거쳤다.
6. 이야깃거리
6.1. 그리스-터키 관계의 시발점?
어디까지나 지역만 보고 말하는 거지, 터키의 조상인 튀르크(돌궐)족은 한참 후에야 지금의 터키 땅에 오므로 진지하게 '그리스 vs 터키'라 볼 수는 없다. 고대까지만 해도 아나톨리아 반도에 튀르크족 따윈 없었으며, 이들이 지금의 터키 지역 근처로 오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천 년'''쯤은 지나 셀주크 제국 때부터였다. 지금의 터키 땅을 튀르크인들이 가지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이후부터이다. 물론 단순히 DNA상으로만 보면 현대 터키인들은 백인인 아나톨리아 반도 원주민들과의 지속적인 혼혈로 인해 황인인 원시 튀르크인의 피가 거의 희석되었으며 그에 따라 현대 터키인들은 트로이인을 포함한 아나톨리아 반도 원주민들의 후손이므로 이런 관점에서는 그리스 vs 터키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혈통이 같다는 게 곧 민족이 같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으며 적어도 오스만 제국 이후의 아나톨리아 반도 원주민들은 언어, 문화적으로 튀르크족에 동화되었을 뿐더러, 터키 공화국이 들어서면서부터는 튀르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튀르크적 정체성이 완전히 자리잡은 상태다. 따라서 트로이 전쟁을 그리스 vs 터키로 보는 건 그저 드립으로서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사실 트로이 전쟁은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 조사 등으로 그 실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신화상의 전쟁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했고, 트로이 전쟁 이후 바다 민족의 대규모 침략 등으로 지중해 구성원 자체가 갈려 버리는 등의 암흑기가 도래하여 사실상 고대 그리스든 트로이든 민족성이 희석되어 버렸으므로 현대의 그리스와 터키에 대입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 지역을 정복했던 지배층은 이 전쟁에 자신의 세력을 대입하여 정당성을 주장하곤 했다. 일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메흐메트 2세가 '''나는 트로이의 복수를 했다'''고 선언한 것. 그러나 이것도 알고 보면 참 어이없는 소리인데,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은 자신들을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겼고, 로마는 자신들을 트로이의 생존자인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라고 여겼다.[20]
그리고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후 "짐은 트로이의 복수를 했도다."라고 말했다는 일화의 출처는 코르푸섬의 베네치아 지방관 필리포 다 리미니(Filippo da Rimini)가 친구 프란체스코 바르바로(Francesco Barbaro)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 하나뿐인데, 함락 당시 리미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참사의 현장을 생생히 증언한 게 아닌 그저 세간에 떠도는 카더라 통신을 끄적인 것에 불과했다. 편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술탄이라는 사람이 하기아 소피아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마치 '한 마리의 포악한 짐승처럼(like a savage beast)' 도시의 처녀를 마구 강간하고는 "아테나 신전에서 강간당한 트로이 처녀의 복수다!"라고 말했다는 거. 실제 메흐메트 2세는 도시 약탈을 예정보다 빠르게 중지시킨 뒤 하기아 소피아를 신성한 공간으로 취급한 채 그곳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임명했다. 게다가 이 일화대로라면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를 그리스로 봤다는 얘기인데, 정작 그는 동로마를 로마 제국으로 인식한 채 그 정당한 후계자가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로마 황제'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화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럽으로 빠르게 퍼져 나간 건 이슬람 군주의 잔혹성을 선전하고 그리스 신화에 흠뻑 빠져들었던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을 과거 그리스가 저질렀던 '트로이의 함락'과 대비해서 본 탓도 있었다.[21]
7. 대중문화 속의 트로이 전쟁
-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10권~14권까지 다룬다.
- 불새(만화)/소녀 편
- 엠파이어 어스: 고대 그리스 캠페인에서 다룬다. 일리아스의 영웅들이 싹 다 등장하며, 이피게네이아 이야기나 목마를 사용한 전술도 등장한다.
-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 아틀란티스군이 그리스 편에 서서 트로이 전쟁에 참전할지 말지를 두고 논의하는 장면에서 게임이 시작되어, 시나리오의 초반부를 담당.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1편 그리스 네번째 시나리오로 등장하는데 청동기 시대로만 플레이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트로이의 유물을 뺏고 헥토르를 처치하는 것이 목표다.
- 연애전사 슈라반: 내용 자체는 별 상관없지만 모티브를 빌려왔다.
- 토탈 워 사가: 트로이: 2020년에 출시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 카산드라(웹툰)
- 트로이(영화)
- 트로이 무쌍
- 트로이: 왕국의 몰락
8. 관련 문서
[1] 이 부부는 나중에 아킬레우스를 낳는다.[출처2-1-1] 헤로도토스, 역사, 1권 1~4장[2] 라오메돈이 트로이아에 성을 세우려고 하는데, 마침 제우스에게 대들어서 인간의 종살이를 하라는 벌을 받게 된 아폴론과 포세이돈에게 성을 세워달라고 부탁한다. 트로이아의 성은 신이 만들어준 덕에 나중에 트로이 전쟁에서도 아카이아군은 성을 쉽게 함락하지 못한다. 하지만 신마저 속이는 사기꾼이었던 라오메돈은 막상 성이 완공되자 약속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고, 아폴론이 점잖게 따졌으나 라오메돈은 그 혀랑 팔 자르기 전에 나가라며 내쫓았다. 그래서 아폴론은 트로이아에 전염병을 퍼뜨렸고, 포세이돈은 바다괴물을 보내 나라를 막장으로 만들었다. 신탁에 따라 딸 헤시오네를 괴물에게 바쳤으나 헤라클레스가 괴물을 퇴치해주고 헤시오네를 살려준다. 물론 신조차 기만한 놈이 헤라클레스 같은 인간에게 보상을 줄 리가 없었다. 분노한 헤라클레스는 라오메돈과 그의 아들들을 죄다 죽여버렸다. 그러나 헤시오네가 울음을 터뜨리자 마음이 약해져 그녀의 베일 한 장만 받고 라오메돈의 막내아들, 즉 그녀의 남동생 프리아모스를 데려가게 해주었고, 프리아모스는 장성하여 트로이아를 재건한다.[3] 폴릭세네가 아킬레우스와 사랑에 빠진 것, 아킬레우스가 펜테실레이아에게 사랑에 빠진 것도 다 에로스의 소행이었다.[4] 물론 신이라서 다쳐도 시간이 지나자 치유된다.[5] 이 때문에 그리스 쪽에서는 아가멤논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바치는 것으로 무마하려 했고, 아르테미스는 이피게네이아를 살려주고 타우리스에 있는 본인 신전의 사제로 삼았다. 그러나 딸이 살아 있는지 알 리 없는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남편 아가멤논에게 평생 원한을 품었고, 남편이 전쟁 나간 동안 사촌동생 아이기스토스와 불륜을 저질렀으며 아이기스토스와 짜고 아가멤논을 죽였다. 아이기스토스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음을 눈치챈 오레스테스는 포키스의 왕 스트로피오스에게 시집간 고모 아낙시비아에게 도망쳐 몸을 숨겼고, 장성 후 아이기스토스와 어머니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존속살해의 죄를 씻고자 신탁을 받기를, 타우리스에 있는 아르테미스의 신전에 가서 아르테미스 신상을 가지고 와서 어떤 지역에 모시라는데, 그 타우리스 신전의 사제가 바로 이피게네이아였다. 타우리스에는 외국인을 잡아다가 제물로 바치는 악습이 있어서 오레스테스와 그의 사촌(아낙시비아의 아들) 필라데스는 제물이 될 위기에 처한다. 이때 "내 맏누나 이피게네이아도 내가 어렸을 때 아르테미스 여신의 제물이 되었다는데 나도 똑같이 되는구나." 라고 울부짖자 이피게네이아는 앞의 청년이 동생임을 알고 그들을 풀어주어 정체를 밝혔다. 세 사람은 신탁대로 신상을 챙겨 그 지역에 모셨고, 타우리스에서는 산 제물을 바치는 풍습이 사라졌다.[6] 굳이 따지자면 세멜레를 말하면서 디오니소스의 친어미라고 소개하는 정도.[7] 하데스나 포세이돈은 제외한 계산으로 올림포스에 사는 신들만 쳤을 때.[8] 결국 이걸로 포세이돈을 자극해 라오콘은 바다뱀에게 아들 둘과 함께 죽고 만다.[9] 아버지가 죽자마자 헬레네와 결혼하려 들었다.[10]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들. 신화 상 최초의 군의관이라고 한다. [11] 이는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트로이 항목 참조 [12] 투키디데스가 처음 제기했었다.[13] 당시 히타이트는 최강대국 이집트의 자리를 위협하던 대국이었다.[14] 현대에서야 철은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철보다 더 중요한 석유나 우라늄같은 자원이 있기에 이런 가치는 없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문명의 격을 가르는 오버테크놀로지나 다름 없는게 철기였다. 철이 어째서 그정도의 가치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면 청동기 시대의 주 무기가 석기였다는걸 생각해보자.[15] 아가멤논에게 포로로 잡힌 트로이의 시민들[16] 사실 카탈로그에 나오는 배들의 수는 척 봐도 작위적이라서 동양권에서 천자국을 만승지국 제후국을 천승지국이라 하듯이 예우 내지 전투력 측정기의 역할로 보인다. 호메로스 시대 이미 후기 청동기 그리스 문명은 철저히 파괴된 상태인데도 이 부분은 오히려 후대의 영향이나 시인 자신의 사견이 없는듯 현대에 발굴된 규모와 비슷하다. 뮈케나이, 아르고스, 퓔로스가 약 100여척, 나머지 군소 도시국가는 일관적으로 40척인 식이다. 예외로 전화로 파괴된 테바이가 보이오티아군을 다 합쳐도 50척에 머물고 케팔레니아, 쉬메, 살라미스처럼 작은 섬은 십여 척에 머문다.[17] 트로이 인구의 3할이 동원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청동기 시대보다 훨씬더 후대에도 전체 인구의 3할을 동원했는게 불가능 했는데 그 시대에 전체 인구의 3할은 너무 지나치게 많다. 상식적으로 인구의 3할이나 군대로 돌리면 노동력 부족으로 농사를 짓는것도 힘들 것이다.[18] 다만 이 부분은 10년 공성전이 아니라 9년 동안 여기저기 들렀다가 1년 동안 싸웠다고 본다면야...[19] 앞서 주장처럼 트로이가 지역 통상에 요긴한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트로이가 몇 번 파괴된 뒤에 버려지지 않고 연이어 재건되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20] 더 재미있는 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슐리만은 신성 로마 제국의 후신 나치 독일의 탄생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라는 사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소위 '게르만 민족주의' 열풍에 힘입어 스와스티카 무늬를 아리안 민족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이를 전파하였다.[21] Marios Philippides, 『The Siege and the Fall of Constantinople in 1453: Historiography, Topography, and Military Stud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