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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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 IV'''
'''가문'''
벨프 가문
'''생몰년도'''
1175년 ~ 1218년
'''출생지'''
브라운슈바이크
'''사망지'''
하르츠부르크
재위
기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209년 ~ 1215년
'''독일 국왕'''
1198년 ~ 1209년
'''이탈리아 왕국 국왕'''
1208년 ~ 1212년
'''부르군트 왕국 국왕'''
1208년 ~ 1215년
1. 개요
2. 유년 시절
3. 즉위 이후
4. 여담


1. 개요


독일어: Otto IV. (오토 4세)
이탈리아어: Ottone IV (오토네 4세)
라틴어: Otto IV (오토 4세)
벨프 왕조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며, 독일왕, 부르고뉴 왕, 이탈리아 왕.
벨프 가문 출신의 유일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다. 가문의 라이벌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치열한 권력 다툼으로 대립왕으로 거쳐 정식으로 황제에 올랐으나 결국 역사상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그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으로 돌아선 후 퇴위했다.

2. 유년 시절


오토 4세는 바이에른작센공작하인리히 사자공잉글랜드의 마틸다 공작부인의 3남으로 태어났다.
오토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하인리히 사자공이 독일에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는 외갓집인 잉글랜드 궁정에 보내져 외할아버지인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보살핌 아래 잉글랜드에서 자랐다. 잉글랜드 궁정에서 자라면서 오토는 독일어프랑스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1]
오토가 5살 때인 1180년 아버지 하인리히 사자공이 바르바로사 황제와의 분쟁에서 패하여 법익(法益) 피탈자[2] 처벌을 받아 모든 작위를 박탈당하고 영지를 몰수당하게 되자, 오토를 무척 귀여워했던 외삼촌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오토를 자신의 양자로 삼고 모든 작위와 권리를 상실한 친부 사자공을 대신해 오토의 법적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다. 나중에 오토가 성인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놓고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치열하게 다툴 때, 외삼촌들인 리처드 1세존 왕이 오토를 크게 도와주게 된다. 사자공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을 제외한 모든 영지와 작위를 몰수당하면서 벨프 가문이 완전히 듣보잡 가문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졌지만, 오토를 중심으로 벨프 가문이 금방 다시 일어나 황제 선거에까지 출마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 내의 친 벨프 가 세력의 지원 뿐만 아니라 외갓집인 잉글랜드 왕실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1190년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잉글랜드를 떠나게 되었고, 리처드 1세는 오토를 요크 백작에 임명했다. 이어 1196년 리처드 1세는 오토에게 푸아투 백작 자리도 물려주었다. 오토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리처드 1세의 편을 들어 참전한다.

3. 즉위 이후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죽자 신성 로마 제국의 주요 제후들은 하인리히 6세의 형제인 슈바벤공작 필립을 1198년 다음 왕으로 선출했다. 이 제후들은 필립에게 돈을 받고 필립에게 지원을 하는 대신 이익을 받기로 약속을 받아낸 상태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른 제후들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반기를 들었고 리처드 1세의 주도로 대신 벨프 가문의 멤버를 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심했다. 오토의 형 하인리히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고 있어 오토에게 선택을 맡겼다. 한편 교황 인노첸시오 3세시칠리아신성 로마 제국이 한 사람의 군주 아래에서 통일되는 것을 차단하기로 결심했다.
오토 또한 인노첸시오 3세가 어떤 요구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제국의 혼란을 틈타서 인노첸시오 3세는 하인리히 6세가 임명한 안코나, 스폴레토, 페루자의 제국 영주들을 추방했다. 같은 때 인노첸시오 3세는 투스카니에 있는 도시들에게 "산 제네시오 리그에 참가하거나 이탈리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이익에 대항하는 투스카니 동맹에 참가하라"고 부추겼다. 결국 도시들은 스스로 인노첸시오 3세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교황의 총신은 곧 북서쪽과 하 라인 강 지역 북독일의 제후들이 1198년 6월 쾰른에서 왕을 선출하는 것을 인정했다.
오토 4세는 대관식이 열리는 장소인 아헨을 통제했고 1198년 7월 12일 쾰른 대주교 아돌프가 주는 왕관을 받았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상징이었다. 쾰른 대주교만이 로마왕의 왕관을 씌워주는 것이 상징이 된 것이다.
필립이 죽자 오토는 슈타우펜 왕조를 개선하고 필립의 딸 베아트리체와 약혼했다. 120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출될 때 그는 그의 어떤 자식들도 아버지를 대신하여 황제의 자리를 세습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 모든 선제후들의 지원을 얻었다.
1209년 이탈리아로 내려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화해하고 동년 10월 4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다시 대관식을 거행하지만, 바로 그 다음 해에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났다가 교황에게 파문당했다.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독일 국내의 제후들은 프리드리히 2세를 새로운 독일 왕으로 선출한다.
이렇게 제국 내부의 내전과 갈등이 이어지던 중, 1215년에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전쟁에서 잉글랜드의 존 왕 편을 들어 참가했지만 부뱅 전투에서 완전히 개발리는 대패의 치욕을 당한다. 자세한 사항은 필리프 2세 참조.
결국 오토 4세는 부뱅 전투의 패배로 인해 황제 자리에서 퇴위하고, 병으로 인해 3년 뒤인 1218년에 사망한다. 죽을 때까지 교황에게 파문을 철회해달라고 청원했다고...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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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
징기스칸 4 시나리오 1에서 신성 로마 제국 장수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정치 61, 전투 47, 지모 51.

[1] 당시 영국의 귀족층은 대부분 노르망디를 비롯한 프랑스계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외할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부터 프랑스의 대영주였다.[2] 법의 보호를 박탈당한 사람, outl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