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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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의 총리를 지낸 정치인. 또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독일 경제가 대혼란을 겪을 시기, 재무부 장관과 제국은행(Reichsbank) 요직을 지낸 경제인이기도 하다.
2. 생애
1879년 베를린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업을 마친 이후 정계로 진출해 1907년에는 막데부르크 시의회 의원이 된 데 이어서 1918년에는 에센의 시장으로 선출된다. 에센 지방 역시 공업의 중심지였던만큼 독일 11월 혁명의 여파가 들끓었지만 놀랍게도 루터는 이들 노동자들을 설득해서 치안을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20년대 초반까지 에센 시장 직을 유지하다가 1923년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의 식량부 장관으로 발탁된다.[1]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은 100여일만에 붕괴됐지만 슈트레제만 내각의 뒤를 이어 성립한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에서도 한스 루터는 재무부 장관으로 기용된다. 재무부 장관 시기 루터는 얄마르 샤흐트를 제국은행 총재로 임명시킨 이후, 화폐개혁을 단행해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한다.
2.1.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로서
1924년의 총선으로 중앙당이 이끄는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이 붕괴하자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루터에게 새로운 내각을 구성할 것을 제안했고, 루터는 바이에른 인민당, 중앙당, 독일인민당 등이 참가하는 중도보수 계열의 연정 정권을 설립한다. 한편 이듬해인 1925년 2월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사망하자 루터는 임시적으로 대통령직까지도 겸임하게 된다. 물론 루터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준수하는 정치인이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대법원장인 발터 지몬스에게 대통령 권한대행 자리를 넘겨주었다.[2]
비교적 짧은 1년 반 정도의 총리직을 지내면서 루터는 로카르노 조약[3] 에 서명했고, 소련과 외교관계를 맺기 위한 교섭을 진행하는 한편, 노동자 계층의 권익을 증진하기 위한 복지 정책을 수립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총리직 수명을 단축시킨 것은 바로 그의 업적 중 하나인 소련과의 교섭. 중도보수로 구성된 그의 연립정권 구성 정당들은 소련과의 교섭에 반발심을 표출하면서 연정을 탈퇴했고, 이어서 국기와 관련된 격렬한 논쟁[4] 이 그에게서 총리직을 앗아갔다.
1925년 1월 2일부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일으켰다. 폴란드 제2공화국한테서 단치히, 실레시아, 폴란드 회랑을 내놓으라며 베르사유 조약에 명기된 패전국의 독립국 무관세 수입 조항을 깬 것이다.
2.2. 여생
총리직 사임이후 얄마르 샤흐트의 뒤를 이어 제국은행 총재직을 지내면서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의 긴축재정 정책을 적극지지하기도 했던 루터는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나치당의 요구에 의해 미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된다. 이 시기가 한스 루터 본인한테는 최악의 흑역사인데 히틀러를 '평화의 사도'로 포장(...)하는 강의를 미국에서 하고 다녔던 것.[5] 이후 1942년 은퇴한 루터는 1962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한다.
[1] 이 시기 바이마르 공화국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전국이 휘청거리는 상황이었기때문에 식량부 장관은 상당한 요직이었다. 그만큼 루터의 능력이 독일 중앙정계에서 인정받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2] 루터는 지몬스가 계속 이 자리를 지켜주길 원해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권했지만 지몬스가 거부했고 그 자리는 탄넨베르크 전투의 영웅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차지하게 된다.[3] 로카르노 조약을 발판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4]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식 국기는 흑-적-황이었지만, 루터는 독일 제국 시기의 흑-백-적도 국기로 인정할 것을 주장했다.[5] 당연히 학생들이 이런 강의에 엄청나게 반발해서 일부대학교에서는 폐강을 만들려는 학생 사이의 집단행동도 있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