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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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sh Corridor''' (영어)
'''Polnischer Korridor''' (독일어)
'''Korytarz polski''' (폴란드어)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독립한 폴란드에게 바다로의 길을 만들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발트해를 잇는 너비 32-112km의 기다란 땅이다.
1920년대 독일이 새로 만든 명칭으로 비스와(Wisła) 강 하류를 따라 뻗어있는 지역이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이 폴란드에게 넘긴 서프로이센과 포젠[1] 대부분으로 구성된다.
10세기 이후로 슬라브족들이 이곳에 이주해 와서 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폴란드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튜튼기사단과 폴란드 왕국 사이의 여러 차례 전쟁의 결과로 생긴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자치구역으로 15세기 이후 편입됐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연합국은 폴란드를 무려 123년 만에 부활시켰다. 문제는 무려 123년만에 새로 생긴 나라였던 만큼 영토가 분명히 규정되어있지 않았다는 점.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14개 조항 중 13번째 항목에서 이미 폴란드에게 바다로 가는 통로를 보장해 줄 것을 결의했다. 문제는 이제 어느 나라가 폴란드에게 바다로 가는 길을 내주기 위해 자국의 영토를 양보해야 하느냐라는 문제였다. 그리고 연합국이 지정한 곳이 바로 이 포즈난과 서프로이센 지역이었다.[2]
이 지역이 독일 영토의 연결 부분이고, 따라서 독일인들의 반발이 엄청날 것이 뻔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이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이 지역을 폴란드에게 넘긴 이유는 독일 영토를 합병함으로서 얻을 수 있은 발트해안이 폴란드인의 거주지역에서 가장 가까웠으며, 다른 독립국에게 영토할양을 요구하는 것보다 패전국 독일의 영토를 넘기는 것이 가장 반발이 적었기 때문이다. 또한, 패전국 독일이 복수를 다짐하고 다시 전쟁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프랑스 수뇌부는 동유럽에 여러 강력한 동맹들을 만들고 싶어 하였으며 서프로이센 합병으로 독일을 약화시키고 폴란드를 강화시키는건 프랑스 수뇌부의 바램과도 일치했다.
회랑을 할양한 결정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념에는 부분적으론 부합하는 결정이었다. 폴란드 회랑을 이루는 두 주 서프로이센과 포젠 중 포젠은 폴란드계가 대다수, 서프로이센은 독일계가 60%, 폴란드계가 28%였다. 독일계가 다수인 지역인 단치히를 폴란드에게 할양하지 않고 자유시로 둔 것도 이때문. 하지만 포젠 할양만으로는 폴란드에 해안선을 부여하지 않으니 당대에 민족자결주의에 부합하면서 폴란드에 해안선을 넘길 수 있는 땅은 없었고 폴란드 회랑의 할양이 부분적으로만 민족자결주의와 부합하는것도 이때문.
게다가 독일 당국이 적극적으로 독일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고 현지인들의 강제적 문화 접변과 동화정책을 실시하여 지역을 게르만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독일인이 40% 가까이 인구를 차지했다. 물론 중세시대 독일인의 동부 이주로 인해 폴란드 분할 전부터 독일계가 대다수인 지역도 있었다. 때문에 독일인이고 싶지 않은 이 지역의 폴란드인들은 당연히 폴란드로의 귀속을 원했다. 문제는 연합국이 독일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독일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일부 지역도 폴란드의 영토로 만들어버린 것.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회랑의 일부였던 서프로이센 지역. 이곳은 독일인이 60%를 차지하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 귀속되었으며, 그 일부였던 단치히시는 국제연맹이 관리하는 자유시로 설정되었다.[3] 베르사유 조약 주요내용 3번째 참조. 이런 상황에서 독립에 한껏 고무된 폴란드 신생 정부는 상(上) 실롱스크 지역에 거주하는 폴란드인의 봉기를 장려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1925년 국제연맹 하 주민투표로 상실롱스크 지역은 카트비체를 중심으로 한 폴란드령 실롱스크와 오펠른(현 오폴레)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일령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이런 논리대로라면 폴란드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빌뉴스와 그 이동지역, 리비우와 그 인근 지역은 모두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한다.[4] 거기에다가 위에서 주석으로 말한 상 실롱스크(독일어: Oberschlesien, 영어: Upper Silesia) 지역도 폴란드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하며,[5] 1차 대전 종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뜯어 갔다가 1938년에 폴란드가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다시 뜯어간 치에쉰(Cieszyn) 지역도 폴란드계가 절대 다수니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한다.[6] 그렇다고 폴란드에 넘겨주기엔 너무 독일인들이 많으니 자유시로 독립시킨 국제연맹의 결정은 당시로서는 꽤 합리적인 편이었다. 사족으로 2차 대전 이후 그단스크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은 모두 독일 본토로 강제이주되었으며, 현재는 폴란드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애초에 '''단일 민족국가'''로서의 폴란드는 2차 대전 이후에 탄생했다.
폴란드 회랑의 탄생 배경에는 경제적 이유도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신생 폴란드의 탄생을 결코 반기지 않을 독일이 폴란드의 바다를 통한 경제교역을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그것. 1937년 무렵 폴란드 무역의 '''77.7%'''가 폴란드 회랑의 그단스크와 그디니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던 걸 보면 엄연히 현실적인 걱정이었던 셈.
1922년 바이마르 공화국은 동프로이센 해상교통부(Seedienst Ostpreußen)를 설치하고 수송선들을 운용하여 독일 본토와 단절된 동프로이센이 고립되지 않도록 했다.[7] 물론 폴란드 회랑의 철도를 통하여 이동하는 방식도 있었지만 폴란드 당국의 감시가 너무 가혹해서 독일 민간인들은 보통 쓰지 않았다. 단 철도를 이용할 때도 폴란드 비자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나 정부에서나 자신들의 영토가 강제로 분할되어 폴란드에게 넘어간 일은 독일인들의 자존심과 결합되어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고 독일은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서부 국경선은 인정했지만 폴란드와의 국경선을 승인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히틀러의 무모한 대외도발에 전쟁이 날까 식겁하던 독일 군부 내에서도 폴란드는 언젠가 한번쯤 손봐줘야 한다는 여론이 다수였을 정도였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폴란드에 대한 야욕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폴란드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독일은 폴란드를 상대로 국경선의 수정을 계속 요구하면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일으켰다. 1925년 1월 1일부로 베르사유 조약이 정한 독일과의 무역 특혜 기간이 만료되면서 폴란드는 새로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의 수정을 추구하던 독일이 폴란드의 석탄 수입을 금지하자 폴란드가 독일 제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면서 맞섰다.
독일의 무역전쟁으로 인해 폴란드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독일은 폴란드의 최대 무역상대국(수입 43%, 수출 35%)이어서 무역 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거기에다가 상(上) 실롱스크 지역의 중공업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석탄 수출이 급감하면서 전국적인 경기 침체와 함께 실업률이 증가했다. 이외에도 폴란드에 대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폴란드는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정치적 위기로 변화하여 1926년 5월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폴란드 정부를 상대로 5월 쿠데타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무역전쟁은 1934년까지 계속되었다.
폴란드가 건국 초 독일 영토 내 거주하는 폴란드인들을 사주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것에 대한 반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단스크의 독일인들은 태업과 파업을 일으키며 폴란드의 대외 무역을 방해했다. 나치 독일 시기 탈퇴하기 전까지 국제 연맹에 폴란드 내 독일계들이 폴란드가 소수 민족의 권리를 탄압한다고 신고한 민원들만 대략 1만건이라고 한다. 이러한 독일의 움직임에 폴란드 역시 강경해서, 어떠한 도전에도 단호히 전쟁으로 맞대응하겠다고 맞받아쳤고 그단스크가 난리가 나자 폴란드는 서북쪽 해안에 최신 설비를 갖춘 항구 도시 그디니아(Gdynia)를 건설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지역을 둘러싼 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원인이 되었다. 당시의 폴란드 제2공화국은 폴란드 침공으로 멸망했지만,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면서 새로 들어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Polish Corridor''' (영어)
'''Polnischer Korridor''' (독일어)
'''Korytarz polski''' (폴란드어)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독립한 폴란드에게 바다로의 길을 만들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발트해를 잇는 너비 32-112km의 기다란 땅이다.
2. 위치 및 구성
1920년대 독일이 새로 만든 명칭으로 비스와(Wisła) 강 하류를 따라 뻗어있는 지역이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이 폴란드에게 넘긴 서프로이센과 포젠[1] 대부분으로 구성된다.
3. 역사
3.1. 배경
10세기 이후로 슬라브족들이 이곳에 이주해 와서 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폴란드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튜튼기사단과 폴란드 왕국 사이의 여러 차례 전쟁의 결과로 생긴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자치구역으로 15세기 이후 편입됐다.
3.2.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폴란드 귀속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연합국은 폴란드를 무려 123년 만에 부활시켰다. 문제는 무려 123년만에 새로 생긴 나라였던 만큼 영토가 분명히 규정되어있지 않았다는 점.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14개 조항 중 13번째 항목에서 이미 폴란드에게 바다로 가는 통로를 보장해 줄 것을 결의했다. 문제는 이제 어느 나라가 폴란드에게 바다로 가는 길을 내주기 위해 자국의 영토를 양보해야 하느냐라는 문제였다. 그리고 연합국이 지정한 곳이 바로 이 포즈난과 서프로이센 지역이었다.[2]
이 지역이 독일 영토의 연결 부분이고, 따라서 독일인들의 반발이 엄청날 것이 뻔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이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이 지역을 폴란드에게 넘긴 이유는 독일 영토를 합병함으로서 얻을 수 있은 발트해안이 폴란드인의 거주지역에서 가장 가까웠으며, 다른 독립국에게 영토할양을 요구하는 것보다 패전국 독일의 영토를 넘기는 것이 가장 반발이 적었기 때문이다. 또한, 패전국 독일이 복수를 다짐하고 다시 전쟁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프랑스 수뇌부는 동유럽에 여러 강력한 동맹들을 만들고 싶어 하였으며 서프로이센 합병으로 독일을 약화시키고 폴란드를 강화시키는건 프랑스 수뇌부의 바램과도 일치했다.
회랑을 할양한 결정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념에는 부분적으론 부합하는 결정이었다. 폴란드 회랑을 이루는 두 주 서프로이센과 포젠 중 포젠은 폴란드계가 대다수, 서프로이센은 독일계가 60%, 폴란드계가 28%였다. 독일계가 다수인 지역인 단치히를 폴란드에게 할양하지 않고 자유시로 둔 것도 이때문. 하지만 포젠 할양만으로는 폴란드에 해안선을 부여하지 않으니 당대에 민족자결주의에 부합하면서 폴란드에 해안선을 넘길 수 있는 땅은 없었고 폴란드 회랑의 할양이 부분적으로만 민족자결주의와 부합하는것도 이때문.
게다가 독일 당국이 적극적으로 독일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고 현지인들의 강제적 문화 접변과 동화정책을 실시하여 지역을 게르만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독일인이 40% 가까이 인구를 차지했다. 물론 중세시대 독일인의 동부 이주로 인해 폴란드 분할 전부터 독일계가 대다수인 지역도 있었다. 때문에 독일인이고 싶지 않은 이 지역의 폴란드인들은 당연히 폴란드로의 귀속을 원했다. 문제는 연합국이 독일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독일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일부 지역도 폴란드의 영토로 만들어버린 것.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회랑의 일부였던 서프로이센 지역. 이곳은 독일인이 60%를 차지하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 귀속되었으며, 그 일부였던 단치히시는 국제연맹이 관리하는 자유시로 설정되었다.[3] 베르사유 조약 주요내용 3번째 참조. 이런 상황에서 독립에 한껏 고무된 폴란드 신생 정부는 상(上) 실롱스크 지역에 거주하는 폴란드인의 봉기를 장려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1925년 국제연맹 하 주민투표로 상실롱스크 지역은 카트비체를 중심으로 한 폴란드령 실롱스크와 오펠른(현 오폴레)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일령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이런 논리대로라면 폴란드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빌뉴스와 그 이동지역, 리비우와 그 인근 지역은 모두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한다.[4] 거기에다가 위에서 주석으로 말한 상 실롱스크(독일어: Oberschlesien, 영어: Upper Silesia) 지역도 폴란드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하며,[5] 1차 대전 종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뜯어 갔다가 1938년에 폴란드가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다시 뜯어간 치에쉰(Cieszyn) 지역도 폴란드계가 절대 다수니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한다.[6] 그렇다고 폴란드에 넘겨주기엔 너무 독일인들이 많으니 자유시로 독립시킨 국제연맹의 결정은 당시로서는 꽤 합리적인 편이었다. 사족으로 2차 대전 이후 그단스크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은 모두 독일 본토로 강제이주되었으며, 현재는 폴란드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애초에 '''단일 민족국가'''로서의 폴란드는 2차 대전 이후에 탄생했다.
폴란드 회랑의 탄생 배경에는 경제적 이유도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신생 폴란드의 탄생을 결코 반기지 않을 독일이 폴란드의 바다를 통한 경제교역을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그것. 1937년 무렵 폴란드 무역의 '''77.7%'''가 폴란드 회랑의 그단스크와 그디니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던 걸 보면 엄연히 현실적인 걱정이었던 셈.
3.3.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1922년 바이마르 공화국은 동프로이센 해상교통부(Seedienst Ostpreußen)를 설치하고 수송선들을 운용하여 독일 본토와 단절된 동프로이센이 고립되지 않도록 했다.[7] 물론 폴란드 회랑의 철도를 통하여 이동하는 방식도 있었지만 폴란드 당국의 감시가 너무 가혹해서 독일 민간인들은 보통 쓰지 않았다. 단 철도를 이용할 때도 폴란드 비자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나 정부에서나 자신들의 영토가 강제로 분할되어 폴란드에게 넘어간 일은 독일인들의 자존심과 결합되어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고 독일은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서부 국경선은 인정했지만 폴란드와의 국경선을 승인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히틀러의 무모한 대외도발에 전쟁이 날까 식겁하던 독일 군부 내에서도 폴란드는 언젠가 한번쯤 손봐줘야 한다는 여론이 다수였을 정도였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폴란드에 대한 야욕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폴란드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독일은 폴란드를 상대로 국경선의 수정을 계속 요구하면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일으켰다. 1925년 1월 1일부로 베르사유 조약이 정한 독일과의 무역 특혜 기간이 만료되면서 폴란드는 새로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의 수정을 추구하던 독일이 폴란드의 석탄 수입을 금지하자 폴란드가 독일 제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면서 맞섰다.
독일의 무역전쟁으로 인해 폴란드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독일은 폴란드의 최대 무역상대국(수입 43%, 수출 35%)이어서 무역 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거기에다가 상(上) 실롱스크 지역의 중공업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석탄 수출이 급감하면서 전국적인 경기 침체와 함께 실업률이 증가했다. 이외에도 폴란드에 대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폴란드는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정치적 위기로 변화하여 1926년 5월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폴란드 정부를 상대로 5월 쿠데타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무역전쟁은 1934년까지 계속되었다.
폴란드가 건국 초 독일 영토 내 거주하는 폴란드인들을 사주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것에 대한 반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단스크의 독일인들은 태업과 파업을 일으키며 폴란드의 대외 무역을 방해했다. 나치 독일 시기 탈퇴하기 전까지 국제 연맹에 폴란드 내 독일계들이 폴란드가 소수 민족의 권리를 탄압한다고 신고한 민원들만 대략 1만건이라고 한다. 이러한 독일의 움직임에 폴란드 역시 강경해서, 어떠한 도전에도 단호히 전쟁으로 맞대응하겠다고 맞받아쳤고 그단스크가 난리가 나자 폴란드는 서북쪽 해안에 최신 설비를 갖춘 항구 도시 그디니아(Gdynia)를 건설했다.
3.4. 제2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지역을 둘러싼 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원인이 되었다. 당시의 폴란드 제2공화국은 폴란드 침공으로 멸망했지만,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면서 새로 들어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1] 폴란드명 포즈난[2] 하지만 포즈난과 서프로이센 전역이 폴란드로 넘어간건 아니었다. 포젠과 서프로이센의 일부는 포젠-서프로이센 변경주로 바이마르 공화국에 귀속되었기 때문. 한편 이 지역을 넘겨받은 폴란드는 기존 포젠 주의 영역에 포즈난 주를, 서프로이센 주의 영역에는 포모르스키에 주를 설치했다.[3] 명목상으로는 국제연맹 자유시였지만 폴란드 정부가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사실상 폴란드령으로 간주된다.[4] 실제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빌뉴스 점령으로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5] 1925년 주민투표로 폴란드계가 다수였던 지역은 폴란드에 할양되었다.[6] 1938년 나치 독일과 헝가리 왕국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할 때 뜯어갔다.[7] 동프로이센과 본토를 오가는 페리의 운항을 담당하였지만,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까지 오가는 선편도 운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