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192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image]
1925
1926
1927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도스[1]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아리스티드 브리앙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리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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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Gustav Stresemann'''
'''출신 정당'''
독일인민당
'''생몰년'''
1878년 3월 10일 ~ 1929년 10월 3일 (만 51세 7개월)
'''재임기간'''
1923년 8월 13일 ~ 1923년 11월 23일 (103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정계 입문
2.4. 바이마르 공화국 태동기 (1920년~1923년)
2.5. 짧았던 총리 기간 (1923년)
2.6. 외무장관 (1923년~1929년)
2.7. 죽음
3. 평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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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이자 외무장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특성상 총리로는 단명했지만,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외무장관으로 활약하면서 1차 세계대전 후 국제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였던 독일의 지위를 크게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인물. 그 공로로 1926년 프랑스의 외무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베를린의 맥주 양조와 숙박업을 겸하는 가문의 7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베를린 대학교로 진학한 그는 독일 문학에서 특히나 뛰어난 재능을 보이면서 교사가 될 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려를 했지만, 정작 그가 교원 자격증을 얻은 분야는 크게 관심이 없던 외국어와 자연 과학 분야였다. 결국 그는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국제 정치학을 자신의 전공으로 삼았으며 나중에는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학적을 옮겨 박사학위을 수여받는다.[2]

2.2. 정계 입문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뒤, 슈트레제만은 베를린 출신의 부유한 유대계 실업가의 딸인 케이트 클레펠트와 결혼한다.[3]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게 된 슈트레제만은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디딘다. 중도보수 정당인 국민자유당에 입당하고 1906년 드레스덴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것에 이어서 1907년에는 제국의회 의원에도 당선된다. 하지만 이후 슈트레제만은 사회복지 정책의 확장 문제를 둘러싸고 당 내 우파계열과 갈등을 빚으며 1912년 의원직을 모두 상실하고 만다.

2.3. 제1차 세계 대전


선거에서 낙선한 슈트레제만은 경제계에서 활동을 재개하였고, 독일-미국 경제 협회와 같은 조직을 창설하고 이끌었다. 그리고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징병검사에서 병역 의무를 면제 받은 슈트레제만은 같은 해 12월 제국의회 의원으로 다시 선출된다. 1차 대전 시기에 슈트레제만이 보여준 정치적인 변화는 꽤나 극적이었다. 슈트레제만은 열렬한 민족주의자이자 범게르만주의자, 그리고 왕당파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슈트레제만에게 이 전쟁은 방어전이었으며, 독일 민족의 안위를 위한 생활권(Lebensraum)을 벨기에, 폴란드 전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리히 루덴도르프와 같은 군부 인사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해서도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모순적으로 사회복지제도의 확충과 같은 좌파적인 스탠스도 동시에 보여준다.

2.4. 바이마르 공화국 태동기 (1920년~1923년)


전쟁은 독일의 패배와 빌헬름 2세의 퇴위로 끝났다. 여전히 심정적으로는 왕당파였던 슈트레제만이었지만, 어쨌든 모든 것이 뒤바뀐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환경에 적응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저명한 사회학자였던 막스 베버가 창설을 주도한 중도 좌파계열 독일민주당에 입당하지만, 우파와의 관계로 인해 금방 축출되고 만다. 그러자 슈트레제만은 개신교 신자와 중-상류층의 지지를 배경으로 하는 독일 인민당[4]을 설립하고 스스로 당수에 오른다. 그렇지만 심정적 왕당파를 숨길 수 없었는지, 극우 왕당 세력의 카프 반란이 일어나자 마치 이 반란을 옹호하는 것과 같은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독일 사회민주당-독일 민주당-가톨릭 중앙당이 연정을 이룬 바이마르 정권에게 반 공화주의자로 찍히고 만다. 그러나 정치적 암살, 반란, 폭동 등이 연이어 일어나며 혼란이 가중되자 마침내 바이마르 공화국을 주도하던 중도좌파 계열과도 타협하는 모습을 보인다.[5]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헌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슈트레제만은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 기간 뿐만 아니라 죽는 날까지 베르사유 조약의 개정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5. 짧았던 총리 기간 (1923년)


1923년 8월, 독일 내부에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외부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보상금 지불 이행을 요구하며 프랑스벨기에 군대가 독일 최대의 산업 지역 루르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슈트레제만은 사회민주당·중앙당·독일민주당·독일인민당으로 구성된 대연정의 수반인 총리가 되었다. 연합군의 루르 지역 점령에 대해 전임자였던 쿠노 내각은 루르 지역 독일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는 소극적 저항을 시도했지만, 연합군이 자국의 노동자들을 이 지역으로 데려오는 방법으로 대응하면서 이러한 소극적 저항은 오히려 독일 내부의 인플레이션과 정부의 재정 위기만을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외무장관 겸 총리직을 겸하고 있던 슈트레제만의 방침을 요약하자면, '''베르사유 조약을 성실히 이행하면서 연합국의 신뢰를 얻고,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독일에게 유리하게 개정하자.'''였다.
한편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으로 휴지조각이 된 기존의 라이히스 마르크를 폐기하고 대신 렌텐마르크를 발행하는 통화 개혁을 단행하였고, 이것이 성과를 거두어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마침내 잦아들었다. 이는 슈트레제만 내각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 쾰른 시장이었던 아데나워라인란트 지역의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라인란트가 독일에서 분리되어 완충지역으로 독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정국을 뒤흔들었고[6], 작센튀링겐의 공산당을 탄압하면서도 같은 시기 나치가 일으킨 맥주홀 폭동에 대해서는 동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분노한 사민당 장관들이 내각에서 탈퇴하면서 그대로 대연정은 붕괴하고 불신임 안이 가결되면서 슈트레제만은 100일하고도 3일이라는 짧은 총리직 임기를 마친다.

2.6. 외무장관 (1923년~1929년)


비록 그의 내각은 무너졌지만 여전히 중도 우익의 대표세력이었던 슈트레제만은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 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총리 항목에서도 써놓았지만, 슈트레제만의 외교방침은 '''베르사유 조약을 현실적인 한계 안에서는 가능한 성실히 따르면서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점진적으로 개정해나가자'''는 것이었다.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적어도 서방측과 슈트레제만의 협상은 성공적이어서 독일의 배상금 액수 삭감을 허용하는 도스 안이 통과됐고, 독일-프랑스간의 국경을 인정한 로카르노 조약은 그에게 노벨평화상까지도 안겨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1926년에는 루르 지방에서 연합군이 철수하는 한 편, 전범국이라는 이유로 가입이 거부됐던 국제연맹에도 가입하게 된다.

2.7. 죽음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한 채로 답보 상태에 놓였고, 그가 속한 독일인민당은 당시 부상하고 있던 나치에게 지지자들을 빼앗기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속에서 좌절한 슈트레제만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고, 그는 새로운 중도우파 정당을 창설하기 위해 고심하던 와중에 뇌졸중으로 1929년 세상을 떠난다.

3. 평가


7년에 걸쳐 외무장관 직을 역임하면서 슈트레제만은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이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안정적으로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유럽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그의 모습은 그의 후임자들과는 대비되면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그를 유럽 연합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영국-프랑스-소련 사이의 다툼을 이용한 기회주의적인 처사, 서방에게 유화적이었던 태도와는 정반대로 1차 대전 패전으로 인해 폴란드에게 양도한 폴란드 회랑을 되찾으려는 시도 등으로 인해 비판받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음은 R. Morsey의 슈트레제만에 대한 평가이다.

슈트레제만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아 통합 유럽의 기수로 인식되었던 1945년 이후에는 영웅 대접을 받았으나 1950년대에는 점차 비판받게 되었다. 특히 이 비판작업은 슈트레제만의 방대한 문필 작품이 발견되고 주로 미국의 역사가들이 이를 임의대로 분석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에 따라 슈트레제만은 자신의 야망과 시대적 요구를 교활하게 일치시킨 민족주의 열정을 품은 변덕스럽고 기회주의적인 정치가로 묘사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고 오히려 원칙적인 수준에서 '술책'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 획일성과 전통에 대한 감상적인 집착도 강조되었다.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독점자본주의의 대변자이자 히틀러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최근의 한 전기작가는 슈트레제만을 독일의 부(富)와 권력 회복, 독일의 전통적인 사회·경제 질서 유지라는 국가적 목표를 추구하는 한편 그 정치적 수단을 선택하는 데는 융통성을 보여준 '실용주의적 보수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다. 또다른 사람들은 유럽인의 시각에서 그가 독일의 '애국자'였음을 강조했으며 독일의 역사가들도 한때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결론적으로 슈트레제만은 다양한 정치적 변신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진짜 정치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여담


  •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히 나치는 이것을 가지고도 슈트레제만을 깠다.
  • 예복을 평소에도 입는 독특한 패션 감각으로 당대에 유명했다고 한다. 이 패션 자체가 슈트레제만 본인과 동일시되어서 슈트르제만 스타일이라고 불렸다고... 이 덕에 필기구 회사 펠리칸의 슈트레제만 시리즈의 유래가 된다.
  • 부인이었던 케이트 클레펠트는 당대의 미인으로 유명했다고. 10~20년대 베를린 사교계를 휘어잡으며 슈트레제만의 정계에서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둘 사이에는 아들이 둘 있었고 클레펠트는 1939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슈트레제만 사후 한참 뒤인 1970년까지도 생존했다. 큰아들 볼프강 슈트레제만은 지휘자 겸 작곡가로, 종전 후 베를린 필의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1] 도스안을 주장한 바로 그 도스이다.[2] 그의 박사논문은 대기업들의 카르텔로 인하여 몰락하고 있는 소규모 양조업자들을 주제로 삼고 있었는데, 이 박사논문은 추후 그의 정적들이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3] 그리고 당연히(...) 나중에 외무장관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이 점으로 인해 나치한테 씹힌다.[4] 자유주의 우파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관세 인하, 세속 교육, 기독교적 가족관 진흥을 목표로 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에 단호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5] 다만 죽을때까지 왕정주의를 포기하지는 않았다고...[6] 아닌게 아니라 이 시기 아데나워는 정말로 프랑스 사령관과 라인란트 자치에 관해서 논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