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군

 



'''전주 이씨 해안군파의 종주'''
해안군파 역사 시작

'''1대 해안군 이희'''

2대 서릉군 이섬
'''조선 중종의 왕자'''
'''해안군
海安君'''

'''군호'''
해안군(海安君)[1]
'''시호'''
정희(靖僖)
'''본관'''
전주(全州)
'''이름'''
희(㟓)[2]
''''''
불붕(不崩)
'''부왕'''
조선 중종
'''생모'''
숙의 홍씨(淑儀 洪氏)
'''부인'''
진주 류씨(晉州 柳氏)[3]
거창 신씨(居昌 慎氏)[4]
'''자녀'''
6남 5녀
'''묘소'''
경기도 양주군 신혈리[A]
'''생몰
기간
'''
'''음력'''
1511년 6월 15일 ~ 1573년 8월 4일
'''양력'''
1511년 7월 9일 ~ 1573년 8월 30일
1. 개요
2. 생애
3. 인품
4. 사망
5.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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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중종의 2남이자 숙의 홍씨의 장남으로, 전주 이씨 해안군파의 파시조이다. 인종명종의 이복형이다.

2. 생애


1518년(중종 12년) 12월 28일 해안군에 책봉되었다.
1540년(중종 34년)에는 종부시[5]의 제조를 지내다 명종 즉위 이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으며, 사옹원[6]과 문소전[7]의 도제조도 지냈다.

3. 인품


  • 용모는 감히 조선에서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단정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 독서를 즐겼으며 매사에 점잖아, 중종은 "나의 아들 중에 가장 침착하고 삼가 들떠 있지 아니함에 해안군 같은 아이가 없다"며 칭찬하였다. 해안군은 병으로 말을 하기 어렵게 되어도 차분하게 의관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에 명종이 친히 어의를 보내어 해안군의 병을 살피게 하였다.
  •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면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 성품이 검소하여, 그를 아꼈던 중종이 하사한 사저[8]의 앞을 지나다니는 자들도 그곳이 해안군의 집인지 몰랐다고 한다.

4. 사망


선조 즉위 후인 1573년(선조 6년) 8월 4일, 향년 63세로 사망했다. 해안군이 사망하자 대신들은 선조에게 관청의 업무를 멈추고 시장도 폐점하도록 하여 애도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1788년(정조 12년) 4월 6일 정조가 정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신혈리[A]에 마련되었다.

5. 가족과 후손


해안군은 슬하에 서릉군, 서흥군, 오천군, 오산군, 서천군, 오강군과 5녀를 두었다. 진주 류씨와 혼인했으나 류씨가 딸을 출산하다 1532년(중종 요절하여, 거창 신씨와 재혼했다. 거창 신씨는 6남 4녀를 출산하고 1567년(선조 즉위년)에 사망했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해안군파 파종회장으로 해안군파 14대손 이태두(李泰斗) 옹이 재임 중이다.
배우 이미도가 해안군의 18대손이다.#
[1] 군호는 황해도 장연군의 옛 지명인 해안(海安)에서 유래했다.[2] 산 곁돌 기(㟓) 자이지만,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독음을 희로 소개한다.[3] 영의정 류순정의 손녀이자 진산군 류홍의 딸[4] 우찬성 신홍유의 딸[A] A B 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5] 宗簿寺. 조선시대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관서.[6] 司饔院. 조선시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7] 文昭殿. 조선 태조의 비인 신의왕후 한씨를 모시던 사당이다.[8] 왕족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