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정
許萬正
1897년(고종 34) ~ 1952년
[clearfix]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LG그룹의 공동창업주이며, GS그룹의 뿌리이다. 본관은 김해(金海)[1] , 자는 태범(泰範), 호는 효주(曉州)이다.
허만정은 1897년 경상남도 진주군 하봉면 승산리(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2] 에서 만석꾼인 아버지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 1844-1932)과 어머니 함안 조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3] 그는 무과 급제 후 평안도병마절도사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연당(蓮堂) 허동립(許東岦)의 11대손이며, 아버지 허준은 송시열의 후손인 송병선과 의병장 최익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공감감역을 지낸 뒤 1891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1902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거쳐 1904년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지냈다.# 1920년에는 700마지기의 논밭을 지수면내 빈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경상남도의 이름난 만석꾼 양반이었으며, 지역사회 구휼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1914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비밀자금 조달기관이었던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후원금을 지원했다. 1920년 4월 주식회사 주일상회(主一商會)가 설립되자 취체역에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주식회사 협성상회가 설립되자 감사에 취임하였고# 1923년까지는 협성상회주식회사 감사에 취임하기도 했다.@ 1922년 대한청년단원 황임성(黃壬性)에게 30원을 빌려주기도 했다. 1923년 백정들의 해방 운동인 진주 형평운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구인회, 이병철, 허정구, 조홍제 등이 졸업한 지수공립보통학교 부지 제공에 힘썼으며 1925년 진주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으며,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주식을 사들여 대주주로 있기도 했다.# 1927년 8월 5일 동아일보사 진주지국 승산분국이 설치되자 고문에 임명되었다.# 1928년에는 중외일보사 부사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1947년 같은 마을 출신 구인회와 함께 LG그룹의 전신인 락희화학공업을 창업하였다. 또 장남인 허정구에게는 이병철과 함께 삼성물산 경영에 참여시켜 삼성그룹의 공동창업주가 되게 하였고, 삼남인 허준구는 구인회에게 보내 LG그룹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52년 한국전쟁 중 별세했다.
LG그룹에서 허씨 일가들이 분리함에 따라 GS그룹의 뿌리로 받들어진다.
첫째 부인은 초계 정씨로 참봉(參奉) 정연기(鄭演祈)의 딸로 슬하에 허정구·허학구·허준구·허신구·허완구 등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후 초계 정씨가 1938년 별세한 뒤 둘째 부인 진주 하씨를 맞아들였고 그 슬하에 허승효·허승표·허승조 등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1897년(고종 34) ~ 1952년
[clearfix]
1. 개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LG그룹의 공동창업주이며, GS그룹의 뿌리이다. 본관은 김해(金海)[1] , 자는 태범(泰範), 호는 효주(曉州)이다.
2. 가계
허만정은 1897년 경상남도 진주군 하봉면 승산리(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2] 에서 만석꾼인 아버지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 1844-1932)과 어머니 함안 조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3] 그는 무과 급제 후 평안도병마절도사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연당(蓮堂) 허동립(許東岦)의 11대손이며, 아버지 허준은 송시열의 후손인 송병선과 의병장 최익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공감감역을 지낸 뒤 1891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1902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거쳐 1904년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지냈다.# 1920년에는 700마지기의 논밭을 지수면내 빈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3. 생애
3.1. 지역사회 구휼과 독립운동
경상남도의 이름난 만석꾼 양반이었으며, 지역사회 구휼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1914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비밀자금 조달기관이었던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후원금을 지원했다. 1920년 4월 주식회사 주일상회(主一商會)가 설립되자 취체역에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주식회사 협성상회가 설립되자 감사에 취임하였고# 1923년까지는 협성상회주식회사 감사에 취임하기도 했다.@ 1922년 대한청년단원 황임성(黃壬性)에게 30원을 빌려주기도 했다. 1923년 백정들의 해방 운동인 진주 형평운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구인회, 이병철, 허정구, 조홍제 등이 졸업한 지수공립보통학교 부지 제공에 힘썼으며 1925년 진주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으며,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주식을 사들여 대주주로 있기도 했다.# 1927년 8월 5일 동아일보사 진주지국 승산분국이 설치되자 고문에 임명되었다.# 1928년에는 중외일보사 부사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3.2. LG그룹 공동창업과 경영활동
1947년 같은 마을 출신 구인회와 함께 LG그룹의 전신인 락희화학공업을 창업하였다. 또 장남인 허정구에게는 이병철과 함께 삼성물산 경영에 참여시켜 삼성그룹의 공동창업주가 되게 하였고, 삼남인 허준구는 구인회에게 보내 LG그룹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52년 한국전쟁 중 별세했다.
LG그룹에서 허씨 일가들이 분리함에 따라 GS그룹의 뿌리로 받들어진다.
4. 가족
첫째 부인은 초계 정씨로 참봉(參奉) 정연기(鄭演祈)의 딸로 슬하에 허정구·허학구·허준구·허신구·허완구 등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후 초계 정씨가 1938년 별세한 뒤 둘째 부인 진주 하씨를 맞아들였고 그 슬하에 허승효·허승표·허승조 등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