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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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허만정과 함께 LG그룹의 공동창업주이다.
2. 생애
구인회는 1907년 8월 27일 경상남도 함안군 하봉면 승산리(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서 아버지 구재서(具再書)[3] 와 어머니 진양 하씨 하정식(河廷植)의 딸[4] 하근(河近)[5]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인회의 집안은 본래 경기도 양주, 파주 등지에서 세거하는 문인 집안이었다. 12대조 구사민(具思閔)은 좌찬성을 지낸 인조의 외할아버지 구사맹의 동생으로, 종4품 군수를 지냈으며# 9대조 구음(具崟)도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이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다. 8대조 구문유(具文游)는 진사시에 급제한 후 고령현감을 지냈는데, 7대조 구반(具槃) 때부터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경상도 진주목으로 내려와 세거하게 되었으며, 구인회의 조부 구연호(具然鎬)가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대대로 벼슬에 진출하지 않았다.
구인회의 조부 구연호는 문과 급제 후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따라서 사업을 시작하는 데 강한 유교가풍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히려 강한 유교가풍 덕에 할아버지의 지지를 받고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6]
1920년 같은 마을 김해 허씨 허만식(許萬寔)의 딸[7] 허을수(許乙壽)[8] 와 결혼해 6남 4녀를 슬하에 두었다. 이후에 그가 사업을 시작할 때 허만식 일가가 동업하는 형식으로 허씨 집안이 LG의 창업 및 경영에 참여했다.[9]
1921년 지수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했고, 1924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3학년 재학 중이던 1926년 중퇴하고 귀향해 지수협동조합의 이사로 취임하였는데, 이것이 사업가로서의 첫 출발이었다.
1931년 진주에서 동생 구철회(具哲會)와 함께 구인회상점이라는 포목상을 했다. 1941년에는 구인상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독립운동가인 안희제에게 1만원[10] 을 건네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LG그룹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관련사료가 부족하며 한겨레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반대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사업자금 8천원을 대출받고, 일제가 조직한 진주상공회의소의 의원직을 역임함과,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신문광고에 후원기업으로 이름을 올리고, 전시에 조선의 물자통제를 담당했던 경남상공경제회의 진주지부원을 지낸등 친일행위에 대한 관련 근거는 충분하기에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보기엔 불분명하다.
1944년 트럭 30대로 운수업을 시작했다.
1945년 부산에서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이는 당시 미군정청에서 허가받은 무역업 1호업체이다. 그가 부산에서 사업활동을 하고 있을 때 장인 허만식의 친척[11] 허만정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 허준구[12] 를 대동하고 찾아왔다. 허만정은 구인회에게 "사돈의 역량을 익히 알고 찾아온 것이니 내 아들 준구를 밑에 두고 사람을 만들어 주소. 나도 사돈 사업에 출자 좀 할 생각이오."라고 부탁했다.
때마침 동생 구정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화장품 판매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판매대리만 하던 조선흥업사는 화장품 생산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생산을 시작하면서 당시 부산 서대신동에 있던 자택은 생산공장으로 바뀌었다. 첫 제품은 럭키크림이었다.[13]
화장품을 만들다가 플라스틱에 대한 이해만 높이면 칫솔, 빗 등의 일상 생활용품을 만들 수 있음을 깨닫고 좀 더 본격적인 제조업으로의 진출을 위해 1947년 1월 5일자로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였다. [14]
1952년 부산 범일동 공장에서 빗과 비누갑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빗만 쓰던 사람들은 합성수지 빗에 열광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합성수지 빗을 보고 한국에서 이런 제품이 나온 것에 감격했다고 한다.
1955년 럭키치약을 출시했다. 1956년에 창경원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장에서 럭키치약을 10만 개 무료증정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결국 출시 3년 만에 당시 시장을 석권한 미국제 콜게이트치약을 물리치고 국내시장을 석권했다.
해외원조에 의한 전후복구사업에 의해 50년대 후반에는 전기통신이 대부분 복구되었다. 이 시기에 구인회는 민간방송의 출현과 라디오에 관심을 두었다. 라디오의 수요는 늘어나고 있었지만 전부 외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59년 한국 최초의 전자공업회사인 금성사가 설립되었다. 그해 11월 국산 라디오 1호 A-501[15] 을 출시했다.
군사정부 출범 이후 군부는 기존 대기업들에게 비료, 정유, 제철, 화섬, 시멘트 등의 기간산업에 진출할 것을 명했다. 이에 구인회는 화섬공장을 짓겠다고 신청했다. 하지만 군부는 LG에게 전선공장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 이를 놓고 재계에서는 기업의 로비라는 억측이 무성했다.
1963년 사돈 이병철[16] 에게서 방송사업참여에 대한 제안을 받았다. 방송사업에 참여하면 자사의 TV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동양방송을 운영하던 중 경영에 대하여 삼성과 LG 간의 의견대립이 있어서 이병철과의 토론 끝에 방송사업에서 철수하기로 결정되었다.
1964년 국내 최초의 합성세제인 하이타이를 출시했다. 이는 세탁기의 보급과 함께 우리 의생활에 새로운 문화가 자리잡는 계기를 불렀다. 같은 해에는 국제신보까지 인수하였다.
1965년 정부에 정유사업으로 진출하고 싶다고 사업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정부는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1966년 정부가 제2 정유공장 사업희망자를 모집함에 따라 재계에는 이를 두고 경쟁이 일어났다. LG, 롯데, 한화 등 6개 기업이 신청서를 제출했다. 결국 기술력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LG가 낙점되었다.
1967년 주방용 액체세제와 두발용 샴푸를 출시했고, 1968년 회갑기념으로 연암문화재단을 세웠으나 70년대를 불과 하루 앞둔 1969년 12월 31일 밤 12시 15분,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뇌종양으로 세상을 등졌다.[17] 장례식은 그의 자택에서 간소히 치러져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하갈리 선영에 유해가 안장됐다.
3. 경영이념
- 인화단결, 개척정신, 연구개발
4. 가계도
5. 수상 경력
- 대통령 표창 (1970)
6. 여담
- 구인회(지수초 1기)가 수학한 지수초등학교는 이병철[18] , 허정구(GS, 지수초 4회 졸업), 조홍제(효성)가 다녔던 학교이다. 현재는 학생이 없어서 2009년에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와 통폐합해서 위치를 이전했다. 그 전까지 LG에서 금전적으로 지원을 했다고 한다.
- 조선 세종의 17대손으로, 세종의 8남 영응대군의 사위 구수영이 그의 직계 15대 선조이다.
7. 관련 문헌
- 총수의 결단: 구인회 일대기 - 한운사 저. 동광출판사. 1984.
- 실록기업소설 구인회: 럭키금성 창업비화 - 전범성 저. 서문당. 1984.
- 연암 구인회·상남 구자경 연구 - 이건희[19] 등 공저. 수서원. 2000.
-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 LG 창업회장 연암 구인회의 삶 - LG. 2000.
[1] 능성 구씨 집성촌이다.[2] 도원수파 26세 '''회(會)''' 선(善) 항렬.[3] 아내의 족보에는 이름의 한자가 具再瑞라고 써져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image][4] 출처: 《능성구씨족보》 구재서편.[5] 출처: 구재서 묘비.[6] GS 허씨 가문도 LG처럼 유교적 기풍이 대단하여 단적으로 삼성, 롯데의 경우에는 딸들이 경영일선에 나서서 진두지휘하지만 LG나 GS의 딸들은 경영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재벌가로 출가해서 전업주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유교적 가풍에 대해 덧붙이자면 손자 구본무의 경우, 장자 승계 전통의 경영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의 동생 구본능의 친자 구광모를 양자로 입적하였다.[7] 출처: 《능성구씨족보》 구인회편.[8] 출처: 구인회 묘비. 1905년 1월 18일에 태어나서 1986년 6월 13일에 죽었다. 구인회는 결혼한 후에 아명을 버리고 구인회라는 이름을 썼다.[9] 이후 2005년에 허씨 집안은 LG그룹에 갖고 있던 지분을 떼어내어 GS그룹으로 분가하였다.[10] 현재 가치로 약 1억원[11] 6촌 형제[12] 구인회의 조카사위. 구인회의 동생 구철회의 장녀 구위숙과 결혼[13] 70~80대 어르신들에게 속칭 '동동구리무'로 잘 알려진 크림로션이다.[14] 락희는 즐거운 락, 기쁠 희 한자에 영어로는 Lucky를 의미하며, 구정회의 아이디어로 상호로 채택했다.[15] 부품 국산화율 60%[16] 구인회의 3남(구자학 아워홈 대표)이 이병철의 2녀(이숙희 씨)와 결혼[17] 그리고 50년 뒤 장손인 구본무도 뇌종양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다.[18] 물론 삼성 이병철이다. 구인회가 1907년생, 이병철이 1910년생이라서 약간의 나이 차가 나지만 구인회와 한 교실에서 수학하여 동기로 졸업했다.[19] 이화여대 경영대학 명예교수로, 삼성 회장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