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학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허위의 아들이며, 독립유공자 허훈과 허겸의 조카이다. 독립유공자 허필은 허학의 종숙이며 동북항일연군 허형식은 허학의 6촌 동생이다.
2. 생애
허학은 1887년 경상도 선산도호부 하고면(현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허위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1907년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21세의 나이로 참가하였는데, 일제 기록에 의하면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칭하면서 경기도 지방에서 부하 2천명을 거느렸다고 한다.# 이후 그는 의병장들에 대한 연락과 무기 조달을 위해 각처로 잠복하여 활동하였다.
1913년 9월 임병찬·이인순(李寅淳)·전용규 등과 함께 독립의군부 사건의 주모자로 활동하다가 1914년 5월 동지 54명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독립의군부 사건에는 허위의 아들 허학을 비롯하여 사위 이기상(李起商)과 그 아우 이기영(李起永), 그리고 부하였던 정철하(鄭哲下) 등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후 출소한 그는 중부(仲父) 허겸을 따라 동지 박노창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강산 이도구에서 김동삼 등과 함께 동화학교(東華學校)를 설립하였다. 1917년에는 유하현 전수하자에서 이세기(李世基) 등과 함께 동흥학교(東興學校)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20년 일본군이 간도 참변을 자행하자, 허학을 비롯해 그의 종숙 허형(許蘅)과 허필(許苾) 등은 서간도를 떠나 일제의 탄압이 미치지 않고 동만주·남만주보다 남한 출신 동포들이 많은 북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허위의 유족인 허학과 허국 등은 주하현(珠河縣)[3] 으로 이주하였다.
허학은 1925년 김혁을 위원장으로 한 신민부(新民府)가 창립되자 원로들로 구성된 참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때 참의원장은 이범윤(李範允)이었고, 참의원으로는 허형을 비롯한 김규진(金奎鎭) 등이 있었다. 1934년 허학은 일제 관헌의 비밀문서인 『국외에 있어서의 용의조선인명부』에 '남만주군정서원(南滿洲軍政署員)으로서 부독판 여준(呂準)과 연결되어 있다'며 요시찰 대상에 올라 있었다. 아우 허영(許瑛)[4] 과 허준(許埈)[5] , 그리고 허국(許土+國)[6] 도 같은 혐의로 수배 대상이었다.
1940년 9월 28일, 허학은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허학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