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사회당
1. 개요
헝가리의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 약칭은 MSzP이며, 흔히 "사회당"으로 불린다.[1] 당대표는 토트 베르털런이며, 현재 녹색당 계열의 헝가리를 위한 대화(이하 대화당)와 연대 중.
2. 역사
동유럽의 사민당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 당도 공산당의 후신이다.[2]
1980년대 후반 헝가리는 사회노동당(MSzMP)의 장기 공산독재에 대한 여론의 반발에 부딪혔고, 이에 사회노동당의 대표이자 헝가리의 지도자였던 카다르 야노시가 사임하기에 이르른다. 공산주의의 붕괴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당의 향후 노선을 두고 내분이 발생하는데, 당권을 잡은 녜르시 레죄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재창당할 것을 선언했다. 이렇게 하여 1989년 10월 7일 지금의 사회당이 창당되었다.
물론 공산주의를 철저하게 표방하던 강경파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으며, 결국 12월 17일 노동당으로 살림을 따로 꾸리기에 이르른다. 이렇게 사회노동당은 "사회당"과 "노동당"으로 정확하게(...) 갈리는데, 쉽게 비유하자면 민주정의당이 민주당과 정의당으로 갈라졌다는 얘기(...).[3]
여하튼 헝가리는 자본주의로 전환되었고, 1990년 민주화 이후 첫 총선에 도전하지만 그간의 분노한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386석 중 겨우 '''33석'''만 가져가는 대참패를 당한다.[4][5] 민주포럼, 독립소농당, 기독교민주인민당 등 우파가 초압승한 상황에서 당연히 연정에도 들어가지 못한 건 덤. 그러나 우파 연정이 예상과는 달리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으며, 이 때 사회노동당의 후신인 사회당은 구 공산당 시절의 향수 속에서 부활하기에 이른다. 이후 1994년 총선에서 비록 33%라는 저조한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과반(209/386)을 차지하며 대승을 거두었고, 따라서 단독으로도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공산주의 색채를 희석시키기 위해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과 연정을 구성했다.
비록 1998년 잠시 정권을 내주기도 했지만,[6] 새로 집권한 오르반 정권이 각종 논란에 휘말렸고,[7] 이 틈을 타 사회당은 2002년 자민련과의 연정으로 재집권에 성공한다. 이 때 양측간의 조율을 위해 무소속인 메드제시 페테르를 총리로 선출했지만, 2004년 당대표인 주르차니 페렌츠로 교체되면서 호른 줄러 이후 두 번째로 당이 총리를 직접 선출하게 되었다.
당시 주르차니는 나이 43세로 '''유럽의 대표적인 젊은 지도자'''로 손꼽혔으며, 이러한 카리스마에 힘업어 2006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단독 과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한다.[8] 하지만 경기 침체로 지지율이 하락하던 와중에 일명 "가을 연설"이라고 불리는 스캔들이 터져 지지율이 급락하였고,[9] 결국 연정 파트너인 자민련이 연정을 탈퇴하기에 이른다. 이후 제1야당인 청년민주동맹이 무려 60~70% 대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밀리다가 200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대참패(4/22)를 당하기에 이르고, 2010년 총선에서 386석 중 단 '''59석'''만을 건져 그야말로 망했어요 신세를 맞이하기에 이르른다.
이렇게 총선에서 제대로 응징을 당하고 가히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그래도 제1야당의 위치에 있었으며, 초기 약 3년 간은 지지율이 20~30%를 찍으면서 일단 가망은 있었다. 하지만 총선 패배 직후부터 당이 내분에 빠졌고, 이 와중에서 그래도 당의 굳건한 기반이나 다름 없었던 주르차니 전 총리가 아예 '''탈당'''하고 민주연합을 창당하는 등,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2013년에 들어서는 지지율 20%대가 붕괴된 여론조사까지 나오자, 이를 만회하게 위해 연합이라는 야권연대를 결성했다. 초기 지지율이 30%를 넘나들면서 희망이 보이는 듯 싶었으나, 결과는 아시발꿈 그 자체였고, 의석 점유율이 20%도 되지 못하는 대참사가 발생한다. 이후에는 지지율이 더 추락해 급기야는 극우 정당인 요빅에게도 밀리는 형국이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총선 참패 직후 사임한 메슈테르하지 어틸러를 대신해 토비아시 요제프를 신임 대표로 선출했고, 이 컨벤션 효과가 먹혔는지 국회의원 및 시장(셜고터랸) 보궐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걸로 지지율이 오르는 일은 없었으며, 어쩌다를 제외하면 요빅에게도 지지율 2위를 내주면서 질질 끌려다녔다. 비록 청년민주동맹과 오르반이 숱한 비난을 받기도 했고, 지지율이 추락하는 일도 있었지만, 이에 반등을 얻는 것은 요빅이었지, 사회당이 아니었다. 하지만 2018년 초 오르반에게 악재가 터졌고, 시장 보궐선거에서도 다시 승리를 거두면서 여세를 다시 굳히는 듯 싶었다.
그리고 이 여파 속에서 대화당과 연대를 구성하고, 대화당의 남성 대표이자 '''43세'''의 커라초니 게르게이를 총리 후보로 옹립하면서 인기몰이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총선 결과 청년민주동맹-기독교민주인민당 연합은 의석을 그대로 유지한 반면, 사회당-대화당 연합은 의석이 더 감소해 요빅에게 제1야당의 자리를 내주기에 이르렀다. 득표율도 겨우 11.9%.
이후 베르탈란 토트를 신임 대표로 선출하며 재기를 모색하고 있지만, 현실은 시궁창 그 자체. 아예 지지율이 10%대가 붕괴되는 여론조사까지 나오면서 비례대표 당선자를 1명도 못 낼 수도 있는 상황이며,[10] 2019년에 들어서는 아예 분당 세력인 민주연합이 추격하면서 헝가리 좌파 진영의 주도권을 내주게 생겼다.
결국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단 '''6.6%'''라는 처참한 득표율을 기록해, 1990년 총선 이후 도로 '''4위'''를 찍으며 제대로 몰락한다. 민주연합이 16.1%를 득표해 깜짝 2위를 기록했고, 중도 성향의 원외 정당인 저울운동도 9.9%의 득표율로 깜짝 3위를 기록한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거리가 있자면 2014년 총선 이후부터 지지율 2위를 가져간 요빅을 누른 정도라지만, 그래봤지 '''0.3%''' 차이일 뿐이고(...), 명실공히 한때 집권 여당이었다는 정당이 원외 정당에게까지 뒤졌다는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참패가 맞다.
심지어 유럽의회 선거 직후 첫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6%로 '''5위'''를 기록하는 등[11]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다.
3. 정책·이념
사회당은 창당과 함께 과거의 공산주의·민족주의 강령을 폐기하고, 사회민주주의·친유럽 노선을 도입했다. 유럽 내에서는 유럽 사회당 및 사회민주진보동맹 소속이며,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및 진보동맹에 소속되어 있다.
그런데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라는 당의 이념은 사회 및 외교 정책에 국한된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 신자유주의를 표방한다. 즉 공산주의 세력의 후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구 사회노동당과는 아예 정반대의 성향을 갖게된 것. 오히려 청년민주동맹을 포함한 우익 진영이 경제적으로는 계획경제, 복지 확대를 표방하는 등, 경제적으로만 보자면 좌·우파가 아예 정반대인 것.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은 오히려 공산주의 시절의 향수가 강한 헝가리 국민들에게 별 호응이 없었으며, 결국 재기를 하지도 못 하게 된 것.[12] 최근들어 민주동맹에게도 뒤지기 시작한 이유는, 민주동맹이 경제적으로도 사민주의 색채를 분명하게 내세우면서 오르반에 반대하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더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는 폴란드의 민주좌파연합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인 우경화로 인한 반감에다가 스캔들까지 터지면서 군소 정당으로 몰락했다는 점 등... 폴란드 좌파가 2019년 총선거에서 나름 부활하고 그 후 지지율이 시민연합을 위협할 정도까지 부활한 것과 비교하면 헝가리 좌파의 몰락은 더욱 처절하다. 좌파정당들 지지율을 다 합쳐서 피데스 지지율의 1/3을 간신히 넘을 정도이다.
4. 같이보기
5. 각주
[1] 사민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있어서 간혹 "사회민주당"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있으나, 명백한 오역이다. 원외 군소정당이지만 헝가리사민당은 사회당과 별개로 명백히 따로 존재한다. [2] 공산화 이전 무려 1890년에 창당된 원조(?) 사민당(MSZDP)이 오늘날까지 존재하긴 하지만, 민주화 이후 노선이 겹치는 사회당에 밀려 인지도가 공기 수준이다. 2018년 총선에서는 아예 후보출마를 포기 해버렸다(...) [3] 참고로 일부에서 민주당과 정의당을 조롱하는 차원으로 "민주정의당"이라는 비칭을 쓰기도 한다.[4] 참고로 득표율은 10.9%였지만, 한국처럼 지역구+비례대표의 병립 형태라(물론 정확히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더 가깝지만) 실제 의석은 10%도 되지 못한 것. 더 처참한 사실은, 지역구 당선자는 겨우 1명이었다(...). 가히 안습 그 자체.[5] 당시 '''4위'''를 기록해 가히 떡실신했다(...). 참고로 5위가 오르반 빅토르의 청년민주동맹인데, 1994년까지만 해도 청년민주동맹은 군소 정당이었다.[6] 청년민주동맹이 승리하고 빅토르 오르반 대표가 총리에 취임했다.[7] 당시 사법부 장악 논란 등이 불거졌는데, 비록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이 때부터 독재자의 기질을 보였다고 봐도 무관하다.[8] 386석 중 190석을 가져갔는데, 과반에서 7석이 모자란 것. 따라서 자민련과의 연정은 지속되었다.[9] 녹취록 중 "정부는 국민을 위해 한 것도 없고 거짓말만 주구장창 늘어놓았다"는 얘기도 문제였지만, 문제는 총리라는 인간이 대놓고 '''육두문자'''를 사용한 게 결정타였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이 X발 어떤 XX가 이 X같은 나라를 개혁할 건데?", "내가 역사를 만들었지, 역사책을 쓴 게 아니라고. 뭐고 나발이고 다 X까라 그래" 등등...[10] 비례대표 봉쇄조항은 원칙적으로 5%지만, 2당 연합은 10%, 3당 이상 연합은 15%이다. 즉 양당 연합이 지역구 1,2명만 겨우 낼 수 있을 정도로 망했다는 얘기.[11] 더 웃긴 사실은, 장난 정당인 두 꼬리 강아지당을 겨우 1% 차이로 앞섰다는 점이다(...).[12] 어떤 의미에서는 베네수엘라의 인민의지당과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