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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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헨리 3세
(Henry III)
'''출생'''
1207년 10월 1일
잉글랜드 왕국 햄프셔 윈체스터 성
'''사망'''
1272년 11월 16일 (만 65세)
런던 웨스트민스터
'''재위'''
1216년 10월 28일 ~ 1272년 11월 16일
'''대관식'''
1216년 10월 28일 (글로스터)
1220년 5월 17일 (웨스트민스터 사원)
'''배우자'''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자녀'''
에드워드 1세, 마거릿, 베아트리스, 에드먼드, 캐서린
'''아버지'''
존 왕
'''어머니'''
앙굴렘 백작 이자벨
1. 개요
2. 생애
2.1. 즉위
2.2. 치세
2.2.1. 독일 간섭
2.2.3. 복위와 죽음
3. 평가
4.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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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이자 존 왕의 아들이다. 가스코뉴 지방을 회복했지만 마그나카르타의 연장인 옥스퍼드 조례를 지키지 않아 시몽 드 몽포르를 위로 한 귀족들에게 폐위되었다. 이후 아들인 에드워드의 활약으로 복위하였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에드워드 1세가 하였다.

2. 생애



2.1. 즉위


아버지인 존 왕이 무능한 정치로 내외의 악평만 쌓은 채 급서하자 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초창기 프랑스 왕태자 루이 8세가 왕위를 노린 침공을 감행하기도 하였으나[1] 잘 물리치고 섭정인 펨브룩 백작 윌리엄 마샬 등 정신(廷臣)의 보좌를 받다가 20세에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좀 더 부연하자면 존 왕이 억지로 서명한 마그나 카르타에 대해 불만을 품고 후에 추인을 거부하자 귀족들이 아예 존 왕을 폐위시키고자 프랑스 왕태자 루이 8세를 초빙해 잉글랜드의 왕위에 앉히려 하였다. 당시 플랜태저넷 왕조는 프랑스와 매우 가까웠고 이리저리 혈연으로 프랑스 왕실과 얽혀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
루이 8세는 옳다구나 침공을 감행, 런던을 점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존 왕은 도주했으나 상당수의 제후들이 루이를 지지하여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려는 찰나에 존 왕이 급서하고 어린 헨리 3세가 즉위하자 귀족들은 새로운 왕 헨리 3세와 싸울 명분도 없었고 강대한 프랑스의 루이가 왕위에 오르기보다는 어린 헨리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더 낫다고 느꼈다.
이후 링컨 전투에서 윌리엄 마샬이 반란 제후들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샌드위치 해전에서도 헨리의 해군이 승리하자 반란파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결국 헨리 3세와 섭정 윌리엄 마샬이 약간 수정된 마그나 카르타를 추인하자 제후들은 다시 태도를 바꿔 루이 8세에게 철군을 요구했으며 도중에 붕떠버린 루이는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하고 약간의 대가를 받은 뒤 프랑스로 철군하였다.

2.2. 치세


그는 프로방스 백작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하고 처가 쪽 사람들을 중용하여 잉글랜드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거기에 아버지 때 잃은 영토를 회복하려고 다량의 증세를 감행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시도하였다가 별다른 이득도 얻지 못하고 위신만 깎고 말았다. 다만 이때 회복한 아키텐 서남부, 즉 보르도 일대 해안은 가스코뉴라고 불리며 백년전쟁 시기까지 잉글랜드가 지배한다
한편으로 차남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삼게 하려는 공작도 감행하였으나 역시 실패했다.[2]

2.2.1. 독일 간섭


더해서 동생 콘월 공[3] 리처드를 대공위시대의 혼란 속에 빠져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에도 올리려 했으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의 대립을 이기지 못하고 독일왕으로만 머물렀다. 나중에 시몽 드 몽포르와 싸우다가 동생과 함께 포로로 잡히면서 리처드는 자동으로 독일왕 자리에서 폐위되고 만다.

2.2.2. vs 시몽 드 몽포르


한편 헨리 3세는 귀족들의 마그나 카르타의 강요와 섭정기간 동안 강해진 귀족들의 권세를 꺾으려고 로마 교황에게 신종하고 교회를 이용해 귀족들을 견제하여 아버지 때 잃은 절대권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내부의 불만이 커지는 건 막지 못했다.
결국 헨리 3세의 매제였던 시몽 드 몽포르가 앞장서서 귀족들의 요구서인 옥스포드 조례를 왕에게 전달하였으나 왕은 지킨다고 말만 할 뿐 실제론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1264년 시몽 드 몽포르를 지도자로 결집한 귀족들의 대대적인 반란이 터졌다.[4]
왕은 동생 콘월 공, 장남 에드워드 1세와 함께 몽포르의 군대에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루이스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셋 다 포로로 잡히고 최초의 의회를 여는 데 동의하였으며 이로써 잉글랜드 왕가는 의회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2.2.3. 복위와 죽음


그러나 이듬해 맏아들 에드워드가 극적으로 탈출, 왕을 따르는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시몽 드 몽포르를 이브샴 전투에서 패사시킴으로써 권력을 회복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고령인 데다가 위신이 많이 깎여 장남인 태자 에드워드 1세에 국사를 맡겼다.
그 후 1272년 11월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혔다.

3. 평가


인품은 뛰어나고 교양과 신심이 깊어 개인적으로는 모자람이 없다는 평을 받았으나 독선적이고 무능한 대내외 정책으로 인하여 귀족들의 반란을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아들 에드워드 1세가 워낙에 뛰어난 명군으로 평가받아 실정을 상쇄했다.

4. 그 외


  • 시몽 드 몽포르가 왕을 포로로 잡고 귀족들의 의회를 최초로 연 것을 영국 민주주의사의 중요한 발전으로 보기도 한다.
  • 징기스칸 4의 시나리오 2, 3에서 국왕으로 등장. 능력치는 기대하지 말고 아들인 에드워드 1세와 부하인 롱스워드를 기대하자.

[1] 1차 바론 전쟁이라고 불린다.[2] 시칠리아 섭정 만프레디가 왕위를 찬탈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헨리 3세와 프랑스왕 루이 9세에 접근해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했는데 헨리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와 루이 9세의 동생 앙주-프로방스 백작 샤를이 경쟁하여 최종적으로 샤를이 시칠리아 왕위를 가질 명분을 받게 되었다.[3] 당시 잉글랜드에는 Duke라는 작위가 없었고 대신 그 역할을 현재의 백작을 지칭하는 Earl이 수행했다.[4] 2차 바론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