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슈타인 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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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SV 홀슈타인 킬은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도시인 킬의 축구 클럽이다.
킬은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로 인구 약 23만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곳이다. 그러나 독일 해군의 군항으로 잘 알려져있으며 이미 2차대전때부터 U보트의 본거지로 명성을 떨친 나름 유명한 곳이다. 관련기사
메인 스폰서는 이탈리아의 슈퍼마켓 체인 Famila.
2. 역사
홀슈타인 킬은 전신팀이었던 '킬 푸스발페어아인 폰 1900(Kieler Fußball-Verein von 1900)'과 '킬 푸스발클럽 홀슈타인(Kieler Fußball-Club Holstein)'이 합병된 팀이다. 먼저 '킬 푸스발페어아인(1. KFV)'은 1900년 10월 7일에 1844년에 창단된 체조 클럽이었던 '킬 매너투른페어아인(Kieler Männerturnvereins)'의 멤버들이 창단했다. 1.KFV는 그렇게 잘나가진 않았다. '킬 푸스발클럽 홀슈타인'은 1902년 5월 4일에 창단했으며 1908년에는 '킬 푸스발페어아인 홀슈타인(FK 홀슈타인 킬)'으로 개칭했다. FK 홀슈타인 킬은 빠르게 전력을 갖추어 1910년에는 북부 독일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각 지역의 챔피언들이 모이는 챔피언십 결승에 올라갔지만 카를스루에 FK에 0-1로 지며 준우승했다. 하지만 1911년, 1912년에도 연달아 북부 독일의 챔피언이 된 킬은 1912년 독일 챔피언십 준결승에서 디펜딩챔피언 빅토리아 89 베를린을 2-1으로 꺾은 뒤 결승에서 전전년 자신들에게 패배를 안긴 카를스루에를 1-0으로 복수하고 첫 독일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1914년에는 아이스하키와 육상이 들어서며 '슈포르트페어아인 홀슈타인 폰 1902 (Sportverein Holstein von 1902)'로 다시 명칭을 바꾸었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력이 약화되자 1917년에는 '1. KFV'와 'SV 홀슈타인 폰 1902'가 합병하며 지금의 홀슈타인 킬이 만들어졌다. 새로 합병된 클럽은 창단일을 더 오래된 클럽의 창단일로 정했다.
함부르크 SV의 등장으로 독일 북부의 콩라인 끝에 14년 만에 북부 챔피언이 된 1926년에는 독일 챔피언십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SpVgg 그로이터 퓌르트에 1:3으로 패배했고, 1927년에도 북부 챔피언으로 독일 챔피언십에 참가하지만 8강에서 헤르타 베를린에게 2:4로 패하며 떨어졌다. 3년 만에 북부 챔피언이 된 1930년에는 독일 챔피언십 결승에 진출하지만 헤르타 베를린에게 5:4로 지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듬해에는 북부 준우승팀 자격으로 독일 챔피언십 준결승에 오르지만 이번에는 1860 뮌헨에게 2:0으로 패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1933년 16개의 디비전으로 나뉘었는데 홀슈타인 킬은 가우리가 노르트마르크(Gauliga Nordmark)로 배정되었고 꾸준히 5위 안에 들었지만 함부르크 SV와 아임스뷔텔러 TV의 존재로 인해 챔피언에 오르는 데엔 실패했다. 1942년에는 가울리가 노르트마르크는 가울리가 함부르크와 가울리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2개의 리그로 분리되었는데 경쟁자인 함부르크가 사라지자 홀슈타인 킬은 2년 동안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리그를 독주하며 우승을 차지, 독일 챔피언십에 출전했고 1943년에는 독일 챔피언십 준결승에서 드레스덴 SC에 3:1로 졌지만 3.4위전에서 피르스트 비엔나 FC를 꺾고 3위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2년 동안 리그가 열리지 않다가 1947년 가울리가는 폐지되고 5개의 오베르리가로 재편되는데 홀슈타인 킬은 오베르리가 노르트에 편입되었고 1952/53 시즌과 1956/57 시즌에는 준우승을 기록하며 독일 챔피언십에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우승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줄곧 지역리그에 머물렀으며 3, 4부가 주 활동무대였다. 1963년에 분데스리가가 출범하는 가운데 분데스리가 참가팀을 결정한 1962/63 시즌에는 오베르리가 노르트에서 5위[3] 에 머무르며 2부리그인 북부 레기오날리가에서 1963/64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1964/65 시즌 북부 레기오날리가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승격 도전에 나섰지만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SSV 로이틀링겐 05, 보르마티아 보름스와의 4개조에서 3위에 그쳐 승격에 실패했다.[4]
그 후 1974년 2. 분데스리가의 창설로 5개 리그의 2부리그를 2개 리그로 줄이는 리그 구조조정에서 3부리그인 오베르리가 노르트로 강등되었다. 1977/78 시즌 2. 분데스리가로 승격했지만 3년만 머물고 1980/81 시즌 다시 오베르리가 노르트로 강등되었다. 1994/95 시즌에는 리그 구조조정으로 3부리그인 레기오날리가 노르트로 편성되었다. 1995/96 시즌에는 레기오날리가 노르트에서 18위 꼴찌로 처음으로 4부리그인 오베르리가 함부르크/슐레스비히 홀슈타인으로 떨어졌다. 4부리그에서의 2번째 시즌인 1997/98 시즌에 함부르크/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에서 우승하며 1998/99 시즌 2년 만에 레기오날리가 노르트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3부리그인 레기오날리가를 4개 리그에서 2개 리그로 줄이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결국 2년 만에 2000/01 시즌 다시 4부리그인 오베르리가로 밀려나게 된다. 1년 만에 3부리그 레기오날리가로 승격했고, 2005/06 시즌 4위로 2위까지 주어지는 2. 분데스리가 승격을 아깝게 놓쳤지만 2006/07 시즌 6년 만에 4부리그 오베르리가로 강등당했다. 2007/08 시즌 오베르리가 노르트에서 우승하며 레기오날리가 노르트로 돌아갔지만 2개의 3부리그를 1개로 만드는 3. 리가 창설로 인해 2008/09 시즌에는 3부리그가 아닌 4부리그 레기오날리가 노르트였다. 그리고 2008/09 시즌에도 레기오날리가 노르트에서 우승하며 3부리그인 3. 리가로 승격했다.
그러나 2009/10 시즌 3. 리가에서의 첫 시즌에선 19위에 그치며 1년 만에 4부리그로 돌아갔다. 레기오날리가 노르트에서 2010/11 시즌 6위, 2011/12 시즌 2위에 머물렀다. 2011/12시즌에는 DFB 포칼에 출전하여 코트부스와 뒤스부르크, 마인츠를 꺾는 자이언트 킬링 이후 8강까지 올라갔지만 분데스리가 챔피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만나 0:4로 패해 탈락했다. 2012/13 시즌 우승을 차지하며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렀고 KSV 헤센 카셀을 꺾고 3년 만에 3. 리가에 복귀했다.
2016/17 시즌 마르쿠스 안팡을 선임한 후 3. 리가 2위를 기록, 36년 만에 2. 분데스리가로 승격했다. 2017/18 시즌, 36년 만의 2. 분데스리가에서 3위를 차지하며 VfL 볼프스부르크와 격돌하였으나 홈어웨이 끝에 1:4로 지며 창단 첫 분데스리가를 밟는데는 아쉽게 실패하였다.
3. 최근 시즌
3.1. 2018-19시즌
9라운드가 지난 현재 3승 3무 3패로 리그 11위를 기록중이다.
11월 9일 13R SC 파더보른 07과의 경기에서 3대 1으로 지고있던걸 야니 세라, 알렉산더 뮐링, 킹슬리 쉰들러가 골을 넣으며 4대3으로 역전했으나 경기 종료 직전인 90분에 파더보른의 벤 촐린스키가 골을 넣으며 4대4 동점으로 끝났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바이에른 뮌헨 유망주 프랑크 에비나를 임대했다 임대기간은 2020년 6월까지이다.#
시즌 종료 이후, MSV 뒤스부르크의 레프트백 서영재를 영입하였다.
3.2. 2019-20시즌
VfB 슈투트가르트로 떠난 팀 발터 감독을 대신하여 안드레 슈베르트 감독을 영입했다.
개막 후 홈에서 잔트하우젠에 1-1 무승부, 다름슈타트 원정 2-0 패배로 부진하다가 3라운드 이재성의 동점골과 역전골로 카를스루에를 2:1로 꺾고 첫 승리를 올렸다. 그러나 장크트 파울리 원정 2:1 패배, 아우에와의 홈경기 1:1 무승부, 하이덴하임 원정 0-3 패배로 개막 6경기에서 1승(2무3패), 16위에 그치자 슈베르트 감독은 9월 15일자로 전격 경질되고 2군 감독이었던 올레 베르너가 감독 대행이 되었다.
슈베르트 경질 이후 이재성의 득점에도 하노버에 홈에서 1:2로 졌지만 8라운드 퓌르트 원정에서 3:0 대승으로 4경기 무승을 끊어내는데 성공했다. 무승 탈출도 잠시 10월 6일 레겐스부르크에 안방에서 1:2로 져 16위로 내려왔다.
그러다가 A매치 브레이크 이후 10월 20일 2부리그 선두 슈투트가르트 원정에서 이재성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며 14위로 뛰어올랐다. 이 경기 승리로 베르너 임시감독은 정식 감독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10월 25일 보훔과의 홈경기에서도 이재성의 득점으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17라운드까지 승점 22점을 쌓아 10위에 자리잡았다. 3위 슈투트가르트와 승점 8점차. 점수만 봤을 때는 크게 차이가 안나는 것 같지만 1, 2, 3위를 차지하고 있는 빌레펠트, 함부르크, 슈투트가르트에 비해서 치고나갈 동력이 부족해 보인다. 특히 수비 불안으로 날려 먹은 승점이 상당한지라 이번 시즌 승격도 상당히 험난해보인다.
최종순위 11위로 시즌을 마쳤다.
3.3. 2020-21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 니클라스 하우프트만, 핀 바르텔스, 요주아 메스, 지몬 로렌츠 등을 데려오며 확실하게 보강했다.
3.3.1. '''리가'''
팀 에이스인 이재성의 캐리와 더불어 알렉산더 뮐링 등의 좋은 활약에 힘입어 22라운드 기준으로 12승 6무 4패로 승점 42점으로 4위를 기록 중이다. 다만 22라운드에서 승격 경쟁 중이던 그로이터 퓌르트에게 1-2로 역전패했는데, 비기기만 해도 단독 1위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거라 아쉬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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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의 패배로 홀슈타인 킬은 4위로 밀려났는데, 1위부터 4위까지 모두 승점 42점으로 동일한데다 골득실도 1위와 4위의 차이가 5점에 불과하여 승격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참고로 22라운드의 마지막 경기는 2월 22일에 열린 그로이터 퓌르트 vs 홀슈타인 킬 경기로, 2월 22일에 2부리가 22라운드 순위가 최종 확정되면서 1~4위 승점이 42점 동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3.3.2. '''DFB-포칼'''
DFB-포칼 32강에서 무려 '''FC 바이에른 뮌헨'''을 만난다. 한지 플리크 감독이 이재성, 핀 바르텔스, 야니 세라를 경계대상으로 꼽기도 하였다. # 그리고 그 바이에른 뮌헨을 승부차기에서 6:5로 이겼다! 합산스코어 8:7. 결과도 결과지만, 킬 선수들은 뮌헨 선수들 앞에서 겁을 먹지 않고 잘 수비해냈으며, 박수를 받을 만 하다.
16강 상대는 SV 다름슈타트 98. 다름슈타트의 주전 미드필더인 백승호와 이재성의 코리안 매치가 성사됐으며 1-1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5] 승부차기에서 7-6으로 승리하여 9시즌 만에 8강에 진출했다.
4. 이재성 영입
2018년 7월 25일자 기사로 전북 현대 모터스의 이재성과 이적 협상이 막판 조율 중이라고 알려졌다.
그리고 당일, '''이재성의 홀슈타인 킬 이적이 확정되었다.''' 이적료는 150만 유로(한화 약 20억). 풀럼 FC에서 온 오퍼가 워크퍼밋으로 불발된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주전 보장도 확실하게 되는 팀에서 시작하고 싶어서 이적했다고 한다.
3, 4부를 넘나들던 영세한 홀슈타인에게 150만 유로의 이적료는 사실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이적료를 주고 선수를 사온 경험이 거의 없어서 이전 클럽 레코드가 20만 유로에 불과했던 팀이 아시아 선수 한 명에게 주전 선수 2명 판 돈[6] 을 거의 올인하다시피한 것은 그만큼 2018-19 시즌을 1부 승격의 마지막 기회로 보고 승부를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오죽하면 기사 제목으로 '홀슈타인 킬, 이재성에 구단 운명 걸었다'라고 뜰 정도. #
더불어 이재성과 계약하면서 6개월 내에도 이적이 가능한 옵션과 바이아웃 조항을 넣고, 차후 이적에 전북에게도 20%의 이적료를 지급한다는 내용까지 넣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 홀슈타인에게 있어선 그만큼 이재성의 영입이 급했고 절실했으며 이재성 또한 유럽 무대에 적응하기 위한 첫 번째 교두보로서 가장 적극적이었고 주전이 보장되는 홀슈타인을 선택했다고 봐야할 듯하다.[7]
결론적으로 이 영입은 '''대성공'''. 첫시즌에서는 5골 8도움 두번째 시즌은 10골 8도움으로 에이스놀이를 하며 강등권이던 팀을 중위권으로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활약으로 셰필드 유나이티드, 크리스탈 팰리스, 샬케 04, 함부르크 SV 등 명문팀이 이재성을 주목하였다.
5. 선수 명단
6. 과거 소속선수
[1]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리그로 이 리그에서 우승한뒤 다른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팀과 붙는 방식이었다.[2]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리그로 이 리그에서 우승한뒤 다른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팀과 붙는 방식이었다.[3] 오베르리가 노르트 우승팀과 준우승팀이 분데스리가로 직행하고 3위 팀은 플레이오프를 치렀다.[4] 이때 승격한 두 팀은 1970년대의 거함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와 분데스리가 최강자 바이에른 뮌헨이었다.[5] 두 팀의 한국인인 백승호와 이재성은 모두 승부차기 5번 키커로 출전해서 킥을 성공했다.[6] 지난 시즌 주전이었던 도미니크 드렉슬러가 감독을 따라 쾰른으로 이적했다. 이 또한 구단 역사상 거의 처음 있는 유의미한 이적 수입이었다.[7] 이렇게 좋은 이적 조건이 나온 것은 이재성 본인의 유럽 무대 진출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홀슈타인으로 가면서 전북에서 받던 연봉이 반 토막나는 것을 감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