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대공습

 


東京大空襲 / Bombing of Toky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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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를 폭격하고 있는 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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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히 많은 소이탄이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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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을 맞은 도쿄의 야경[2]
1. 개요
2. 상세
3. 다른 나라
4. 초창기 (1944년 6월 ~ 1945년 2월)
5. 작전 내용
5.1. 네이팜탄(소이탄)이 사용된 이유
6. 시작과 경과
7. 결과
8. 평가
8.1. 대공습의 원인
8.2. 인종주의라는 주장의 반론
8.3. 6.25 전쟁의 초토화 폭격과 상관관계
9. 전략적 성과와 의미
10. 조선에 끼친 영향
11. 각국의 반응
11.1. 일본
11.2. 미국
12. 대중매체에서의 묘사
13. 말말말
14. 관련 문서
15. 참고 자료


1. 개요



'''도쿄 대공습'''은 미국태평양 전쟁일본 본토 공습의 일환으로 1945년 3월 9일~10일 일본 제국의 수도인 도쿄 일대에 대량의 네이팜탄을 투하한 전략 폭격 작전을 말한다.

2. 상세


'''[다큐] 도쿄 대공습 - 미공군 간부가 말하는 "진상"(2017)'''[3]
1960년대에 녹음되어서 단한번도 재생된적 없던 미공군 간부 246명의 육성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구성한 다큐멘터리. 일본에 대한 공중폭격을 계획·실행 했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등의 간부들의 귀중한 증언이 담겨 있다.
공습 직전 당시에 도쿄 인구는 600만 명이었는데, 공습 이후에는 피난민과 사상자 등으로 인구가 약 200만 명까지 급감했다. 폭격이 유발한 직접적인 피해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보다 더 많았다.
미군은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민간인 거주지에도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기 때문에 반전평화주의자들은 드레스덴 폭격과 함께 2차대전 중 일어난 최악의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비판한다.[4]
도쿄 대공습은 현대까지 일본에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으로 알려져있다. 한국인들에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적 전차, 새까맣게 몰려든 피난민 행렬, 피비린내 나는 고지쟁탈전 등을 전쟁에 대한 이미지로 각인시킨 사건이 6.25 전쟁이라면, 일본인들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비가 대도시를 불태우고 박살내는 모습을 전쟁의 이미지로 각인시킨 사건이 도쿄 대공습이다.

3. 다른 나라


영국도 같은 섬나라라서 본토에서 직접적인 전투는 없었지만, 전쟁 초기부터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까지 자국 상공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고 여러차례 폭격을 당했다. V1, V2와 같은 무기가 유명하지만, 본토 항공전 이후에도 독일은 여전히 폭격으로 영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대전 말에도 보복을 위해서 영국에 공습을 시도했다. 심지어 항복하기 직전까지도 제트 폭격기인 Ar 234를 영국 상공에 날려보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독일은 2차대전 참전국 중 가장 심한 폭격을 당했으며, 드레스덴 폭격과 같은 무시무시한 폭격을 당한 끝에 전국토가 잿더미가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최초로 대규모 폭격을 당한 나라는 폴란드 제2공화국이다. 그 중에서 수도 바르샤바가 가장 큰 참화를 가장 오랫동안 입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고 9월 28일 바르샤바 전투폴란드군항복으로 끝날 때까지 바르샤바는 매일 폭격을 당했다. 특히 9월 25일에는 독일 지상군의 대규모의 포격과 함께 1,200여 대에 이르는 항공기가 출격하여 바르샤바를 때려부쉈다. 전쟁 전의 바르샤바의 인구는 135만여 명이었는데,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항복할 때까지 폴란드군 6천여 명과 시민 2만 5천여 명이 사망했다. 당시의 폭격으로 도시의 12%가 폐허가 되고 50% 이상의 건물이 손상을 입었다. 바르샤바뿐만 아니라 프람폴(Frampol), 비엘룬(Wielun) 등 다른 폴란드 도시들도 독일 공군의 극심한 폭격에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프람폴은 폭격 직후 멀쩡히 남은 것이 도로 2개밖에 없을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0월 6일, 본토의 마지막 폴란드군이 항복하면서 폴란드 침공이 종료될 때까지 폴란드 민간인 10만여 명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여기서 끝났어도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지만 6년 후 바르샤바는 항공폭격뿐 아니라 600 mm, 800 mm 포탄까지 왕창 맞는 대참사를 다시 한번 겪었다.

4. 초창기 (1944년 6월 ~ 1945년 2월)


작전반경의 한계 탓에, 미국의 일본에 대한 폭격은 처음에는 미미한 것이었다. 첫 폭격은 둘리틀 특공대가 있었지만, 이는 일본인 전체에게 충격을 줬다기보단 대본영에 충격을 주었을 뿐이다. 애초에 이들이 몰고갔던 건 중(中)형 폭격기라 피해를 크게 줄 수도 없었다. 둘리틀 특공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둘리틀 특공대는 애초에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키면 어떨까?" 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항공모함에서 날아갈 수 있으면서 일본에 그나마 제대로 된 폭격을 때릴 수 있는 폭격기로 중(中)형 폭격기인 B-25가 결정되었고, 그나마도 착함[5]은 불가능해서 기체를 1회용으로 써야 했다. B-25보다 항속거리가 길면서 폭장량도 많은 폭격기[6]도 있었으나 덩치 및 활주거리 문제 때문에 항모에서는 이함[7]은 커녕 탑재조차 불가능했다.[8] 이러한 중형 폭격기 몇 대의 공격에 대해 당시 일본인들 반응은 '어떻게 미국이 천황폐하가 계신 곳에 폭격을 가한단 말인가?' 하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카더라.
1944년 6월 사이판 전투를 통해 비로소 B-29의 작전반경 안에 일본 본토 전역이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공습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그 전부터, 그리고 다른 곳에서부터 일본 공습은 이미 시작되었다.
처음의 일본 폭격 근거지는 중국이었다. 미국장제스중국 국민당과 동맹국이었기에 중국 내륙의 비행장들을 활용할 수 있었고, B-29쿤밍충칭에서 발진하면 큐슈 등 일본 본토 서부지역을 작전반경 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1944년 초반부터 열심히 발진했지만 한계는 명백했다. 일본군의 점령지를 너무 많이 지나야 하는 탓에 가능한 한 고고도를 오래 비행해야 했고, B-29가 지닌 폭장량(약 9톤)의 반의 반도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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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B-29 '''한 대의 최대폭장량.[9]''' 폭탄의 크기와 양으로 보아 가벼운 소이탄으로 보인다.[10]
따라서 사이판 전투의 전략적 의의는 매우 큰 것이었다. 사이판은 일본 본토를 목표로 하는 안정적인 폭격기지로서, 중국 내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기에 B-29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사이판과 괌에서 도쿄까지는 약 2,500km 정도로, 당시에 왕복 5,000km 비행이 가능한 폭격기는 사실상 B-29가 유일했다.
때문에 미군은 보병들이 일본군을 사이판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투닥거리는 와중에 부랴부랴 대규모 활주로와 기지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군 공병대는 무시무시한 건설능력을 발휘해서, 불과 1~2개월 만에 사실상 임야나 다름없던 중부 사이판 평원에다가 B-29를 위한 활주로 5~6개 이상과 관제탑, 유류고, 정비창, 막사 등 주요 기반시설을 완비한 초대형 비행장을 뚝딱 건설해내었다. 이것도 모자라 미군은 폭격기 항로상의 비상활주로 겸 호위전투기(P-51)의 기지로서 딱 중간에 위치한 이오지마를 손에 넣고자 했고, 이는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의 전략적 배경이 된다.
그러나 애써 확보한 전략기지 사이판·괌에서 출격한 B-29 폭격대의 초반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일본군은 빈약한 공군력과 기술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방공전을 전개했고 J2M 라이덴, Ki-45 토류 등으로 꾸준히 반격에 나서 1~3%의 소규모 손실이나마 꾸준히 입히고 있었다. 물론 Bf109, Fw190 등에 비하면 항속력도 화력도 방어력도 눈물겹게 빈약한 비행기를 몰고, 죽을 힘을 써 가며 B-29의 비행고도까지 올라갔다가,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11정+20 mm 기관포 1정으로 무장한 B-29의 밀집대형에 뛰어들며 갈려나간 일본군 전투기와 조종사는 훨씬 더 많았지만. 때문에 일본군은 B-29에 대한 자살충돌공격까지 감수했다.[11]
때문에 중국에서 발진할 때도 사이판에서 발진한 초기 폭격에도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은 그 규모에 매우 소극적인 편이었다. 일본군 방공전투기가 도달하기도 힘들고, 도달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7,000 ~ 9,000m 이상의 고고도는 B-29에게 매우 안전한 공역(空域)이었고, '매우매우 귀한' B-29의 손실을 우려한 폭격대장은 그냥 이 고도에서 폭탄을 때려부어버린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폭격대장은 무차별 융단폭격을 상정하긴 했으나 '''민간인의 피해까지 고려했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류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럽 상공에서는 이렇게 폭격해도 효과를 봤지만, 문제는 일본 상공에서는 제트기류에 의해 폭탄의 명중률이 최악이 돼버렸다는 것이다.[12] 고고도에서 투하되는 폭탄들은 시속 수십~수백 km의 바람(기류)를 만나며 마치 '''건물 옥상에 올라가 종잇조각을 마구 뿌리는 것'''마냥 사방천지로 흩어져 낙하 탄도가 엉망이 되었다. 게다가 이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서 운항하기 위해서는 폭탄 또한 폭장량의 절반 이하 밖에 실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이루어진 폭격의 성과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무사시노에 위치한 군수 공장을 폭격할 때는 B-29 약 100여 대가 출격하여 1,000 파운드 폭탄 수천 발을 때려부었는데, '''명중률은 2%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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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방공화기로 배치된 일본군의 3년식 기관총. 다만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이, 1945년 당시 도쿄에는 이미 780기에 달하는 대공포들이 배치된 상태였다. 이 중에는 75mm 고사포나 심지어 120mm 같은 것들도 배치된 상태였다. 아무리 항공기나 대공포가 부족/빈약해도 구 일본군은 자국의 수도 및 주요 도시에 방공망을 깔아놓을 정도의 여력은 되었다. 모스크바, 평양, 냉전시기의 바르샤바의 방공망을 생각하면 쉽다.
마찬가지로 도쿄에도 공습이 가해졌으나 대다수의 도쿄 시민들은 이 폭격을 한낱 유희거리로 여겼다. 시가지가 아닌, 시 외곽의 군수시설을 대상으로 하는 명중률이 형편없는 폭격이었는데다가 도쿄 시민들은 대본영에서 내보내는 엉터리 조작, 선동 방송[13]이나 들으며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전쟁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 시민들은 근방 뒷산이나 건물 옥상에 올라가 폭격을 구경하거나, 심지어 폭격기가 오는 날짜(보통 3일 간격)까지 헤아려 가며 애타게 기다릴 정도였다. 다른 지방에서는 어디가 공습당했다고 해도 자기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무심한 투로 ''''또 폭격인가...''''라고 관망하는 듯 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을 정도. 맨발의 겐 같은 작품을 보면 나온다.
미군으로서는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여가며 세계에서도 손꼽는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폭격기 B-29를 수백 대라는 최대 규모로 생산하고,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일본 본토를 폭격할 최적의 비행기지도 확보하고서 폭격을 가했는데 성과가 미미하니, "도대체 우리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거지?"라는 회의가 들기에는 충분했다. 로리스 노스태드(Lauris Norstad) 중장은 이를 보다 못해 전략폭격대장(제21폭격기 사령부 사령관)을 헤이우드 핸셀(Haywood S. Hansell) 소장에서 '''조금(?) 더 과격한 인사로 교체했다.'''
'''그리고 도쿄 시민들은 폭격이 더 이상 놀이나 구경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깨달았다.'''

5. 작전 내용


그냥 전쟁광인 성격이었으면 역사에 남지 않았거나 악명만이 남았겠지만, 르메이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값비싼 B-29, B-29에 탑승하는 승무원, 그리고 명령을 내리고 지휘하는 '''자신의 목숨마저도 희생할 각오가 된''' 인물이었다. 르메이는 지휘관이면서도 사기진작을 위해 몇 차례나 선두 기체에 직접 탑승하여 폭격기 대열을 진두지휘한 전력이 있다. 그 때 그의 부관은 후방 기체를 맡았는데, 폭격기 대열에서 가장 먼저 전투기에게 공격받는 대상이 선두와 후방기체임을 생각하면 가히 솔선수범이라 할 만하다.[14]
그런 그에게 떨어진 작전 명령은 일본의 산업역량을 완전히 무력화하라는 것이었다. 일단 전임자인 헤이우드 핸셀 소장이 그랬던 것처럼 민간인 거주지역을 피해 산업지대에 다시 한번 고고도 폭격을 시험해봤지만 결과는 역시 형편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안전하지만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주간 고고도 폭격은 집어치우고, '''대공방어가 취약해지는 야간에 B-29를 대량으로 투입해 1,500 ~ 3,000m의 저고도에서 한꺼번에 폭탄을 들이붓는 것'''이었다.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르메이는 주간 고고도 폭격 전술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도, 전임 지휘관인 핸셀 본인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았다. 핸셀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전술 자체에 결함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
겉보기에 자살 돌격처럼 보이는 이 명령에는 몇 가지 계산이 숨어 있었다.
  • 우선, 고도 2,000m는 기관포와 같은 소구경 대공화기가 제대로 닿지 않으면서도 대구경 대공포는 시한신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높이였다.[15] 영국 공군의 야간폭격에 대해 대전 초부터 충분한 경험을 쌓아온 독일의 방공망이라면 대공포를 낮게 조준해서 다가오는 폭격기 대열에 멀리서부터 포격을 가했을 수도 있겠지만, 야간 방공 능력이 없는 일본[16]은 저공으로 날아드는 폭격기를 제대로 타격할 수단이 없었다.
  • 기습을 포착하고 대응할 수단이 없었으므로 전투기가 제대로 방공임무를 수행할 리도 만무했다. 저고도 비행하는 폭격기를 줄줄이 떨어뜨릴 만한 훌륭한 조종사들은 이미 다 죽거나 자기들이 죽여버린 뒤였다. 르메이는 이런 기습을 통해 아군의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 그리고 비교적 안전한 야간폭격으로 폭격기의 빠른 이탈을 막아 연료소모를 최소화하여, 결과적으로 폭격기 설계 시에 상정한 대로 폭장량을 최대로 채워넣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폭탄 과적을 목적으로 외부 탑재 파일런을 장착하는 현장개수가 시행됐음을 고려하면, 당시 폭장량을 초과한 상태로 작전에 나선 폭격기들도 많을 것이다.
그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당시 대부분의 일본 가옥은 '''목조건축으로 지어졌다'''는 이유를 들어 기존에 사용하던 고폭탄은 집어치우고 B-29에 '''소이탄을 한가득 꽉꽉 채워 보내기'''로 하였다. 고폭탄 60%에 소이탄 40%였던 기존의 폭장 비율을 '''소이탄 100%'''로 변경하고 폭격 소티 수를 대폭 늘려서, 일반적인 작전이라면 2달 동안 쓸 수 있는 소이탄 물량을 '''5일 안에''' 퍼붓기로 한 것이었다.
드레스덴 폭격의 결과를 제21폭격기사령부 전체와 르메이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민간인 피해가 크게 발생할 것임은 자명했고 이를 지적하는 부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르메이의 관점에서 이들은 단순한 민간인이 아니라 일본의 공장 노동자, 즉 일본의 군수 산업 역량 그 자체였으므로, 이 산업 역량을 무력화시키려면 결국 공장 노동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르메이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부하들한테 "사실 저 밑의 스즈키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가내수공업이라 하지."라고 설명하고는 민간인 피해에 대한 지적을 상큼하게 무시했다. 전후에도 이에 대해서는 '전쟁에서는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비행기 한 대에 부품 약 3천 개가 필요하다. 그 부품 중에는 '''가정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약 절반이다. 이처럼 가정에서 만들 수 있는 부품 제작까지 공장에만 맡겨도 좋은 걸까? (중략) 이미 이런 결의에 불타올라 '''가정에서 또는 도나리구미[17]

공장, 자치회 공장 등에서 묵묵히 항공기 부품을 만드는 주부들이 적지 않다.'''

- 주부지우[18]

1944년 10월호 중[19]

그리고 일본은 '''진짜 가내수공업으로 항공기 부품을 만들고 있었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주부들의 잉여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간단히 할 수 있는 조립작업이나 부품 제작을 부업의 형식으로 가정들에 맡겨버리고 이의 생산을 독려한 것이다. 다른 국가들에서도 여성 노동력을 동원하긴 했지만 이들은 정식 노동자로서 공장에 출근했고, 민간 가정의 여성들과 군수공장의 노동자들은 서로 분리된 상태로 관리되었다. 따라서 르메이의 스즈키네 운운 이야기는 일본의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본 것이다.

5.1. 네이팜탄(소이탄)이 사용된 이유


르메이는 중국-버마-인도 전선에 가 있었을 때인 1944년 12월에 일본군 제6방면군 사령부가 있던 한커우(漢口)[20]에 대규모 소이탄 공습을 가하고 위력을 확인하였으며, 일본에서도 효과가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1945년 2월 4일에는 고베를 공습하였고 2월 25일에는 도쿄에 소이탄 공습을 가해 260헥타르 면적을 파괴하면서 소이탄의 위력을 다시 확인하였다.
소이탄을 쓰기로 한 원인 중 하나는, 육군 항공대에서는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쓰는 동안 해군 항공대에서는 소이탄만으로 폭격해서 성과를 내는 것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르메이가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쓰던 기존의 방법을 집어치우고 소이탄 100%를 쓴 저고도 폭격으로 폭격 방침을 바꾼 결정적인 배경은 여기를 참고하자.
당시 일본의 가옥은 90% 이상이 목재로 지은 목조건축이었다. 이는 누군가 작정하고 방화하면 쉽게 초토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1] 일본의 건축물 재료가 주로 목재라는 것은 빌리 미첼(Billy Mitchell) 준장이 1924년에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평가하면서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강조되었던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드레스덴 폭격의 결과를 통해 소이탄의 위력을 폭격기 승무원을 비롯한 육군 항공대 전체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시점이기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나, 이런 사실을 무릅쓰고 소이탄을 투입한 이유는 3가지였다.
  • 첫 번째는 몰락 작전 실행이 1년 이내로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전략 폭격으로도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지 못하면 결국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 본토를 직접 침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정도나 인명손실을 입을지 모르는 몰락 작전을 수행할 필요가 없도록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찍 끝내야 일본 민간인도 덜 죽고 미군 장병들도 무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2번째로, 당시 미군 폭격기가 수행하던 고고도 폭격으로는 폭격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당시의 최첨단 정밀 폭격용 조준기인 노든 폭격조준기조차 원형 공산 오차(圓形公算誤差)가 20~370 m로 고도에 따라 조준 성능이 크게 벌어졌던 탓에 특정 건물을 정확하게 노려서 폭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도 기류가 비교적 안정적인 서유럽에서도 명중률이 이랬는데 일본 상공에서 불어대는 제트기류로 인해 아무리 정밀 조준해서 폭격을 한다 해도 폭탄들이 제트기류에 휘말려서 폭탄의 탄도부터 엉망이 되며 폭격 정확도는 개판이 된다. 즉 특정 건물을 노려서 폭격한다 해도 떨어지는 폭탄들이 바람에 휘말리면서 탄착지점이 투하시 겨냥한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는 것이다. 일례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서도 투하 예정지에서 벗어나서 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22] 애초에 커티스 르메이의 전임자이며, 정밀폭격론자였던 헤이우드 셰퍼드 핸셀이 제 21 폭격기 사령부에서 전출된 원인도 이것이다. 그래서 르메이는 제트기류를 피해 저공으로 폭격을 가하고, 이왕 저공으로 폭격을 가할 것 같으면 좀 더 광범위한 범위에 피해를 입힐 목적으로 네이팜탄을 선택한 것이다.
  • 마지막으로, 소이탄의 파괴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당장 유럽전선에서 석조 건축물 위주였던 드레스덴에 가해진 드레스덴 폭격에서도 발군의 파괴력을 보여준 게 소이탄이었다. 대량의 소이탄 앞에서는 건물이 목조냐 석조냐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석조 건축물 위주인 드레스덴도 이렇게 박살 났으니 목조 건축물 위주의 도쿄는 과연? 심지어 드레스덴 폭격 때는 고폭탄과 소이탄 비율이 4:6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무사시노의 항공기 공장을 폭격할 때 르메이와 핸셀은 무려 15번이나 고고도에서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쓴 정밀 폭격을 했는데 해군에서 급강하 폭격기를 동원한 저고도 소이탄 폭격을 딱 한 번 했는데 르메이와 핸셀이 15번 정밀 폭격을 한 것과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는 것도 르메이의 폭격방침이 바뀌는데 근거가 됐다.
또한 중일전쟁 중 일본군의 충칭 대공습을 비롯한 중국 도시 폭격 방법에서도 영감을 얻은 것이다.[23] 간단히 말하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에다가 쓴 방식에 똑같이 당했다는 말'''이다. 도쿄 대공습 전에 커티스 르메이에게 영감을 준 2가지 공습 사건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위에서 언급된 드레스덴 폭격이고 2번째가 다름 아닌 이 충칭 대공습이다. 그뿐 아니라 커티스 르메이의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라는 말이 충칭 대공습 당시 소이탄을 전쟁 자체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민간인 거주지역에 투하해댄 일본군을 보고 한 말이라는 설도 있다.[24] 이 사실로 인해 도쿄 대공습으로 일본이 피해자 행세와 망언을 하면 가장 먼저 중국이 비웃는다.
일본의 건축물은 목조가 대부분이라는 조건에서 비롯되는 약점은 일본도 인식은 하고 있었다. 워낙 목조 건축물이 많으니 메이레키 대화재 등 역사적인 대화재도 여러 번 겪었고, 화재에 예민해진 덕분에 수백 년 전부터 민간 의용 소방대가 치밀하게 조직될 정도로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해 왔다. 이런 약점에 처해 있던 차에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대본영은, 시내에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서는 화재가 빠르게 확산됨을 막을 수 없을 테니, 시내를 일정 구역으로 나누고 사이사이에 화재 확산을 막고자 방화대(防火帶)[25]라는 빈 공간을 만들었다. 물론 그 방화대 안에 있던 가옥은 전체주의 국가답게 그냥 헐어버렸다.[26] 또한 시내 곳곳에 방화수조, 물을 채운 구덩이 등을 마련했는데, 이 탓에 모기 떼가 창궐[27]하며 이미 반 년이 넘는 소방훈련에 지친 도쿄 시민들을 더 힘겹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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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힘겨운 때가 정말 행복했던 시간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이 나름대로 세운 대책도 '''미군의 실제 폭격 앞에선 애들 장난이었다.'''

6. 시작과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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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죽음의 천사같은 모습으로 도쿄 밤하늘에 떨어지는 네이팜탄. 네이팜의 불길 확산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신관 설정을 저렇게 한 것이다.

커티스 르메이는 소이탄 폭격작전을 예배당 작전(Operation Meetinghouse)이라 이름 붙이고 폭격기를 준비하고, 1945년 3월 9일 밤 ~ 10일 새벽에 걸쳐, 사이판과 티니안 섬에서 344기[28]B-29 슈퍼 포트리스 폭격기가 출격했다. 이들은 기존의 고고도 폭격 대신 5천 피트(약 1.5 km)의 저공에서 폭격기 1대당 7톤씩, 소이탄(네이팜탄) 총 2400여 톤을 도쿄에 떨어뜨리기로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비행기 무게를 줄여 비행속도를 높이고 폭탄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폭격기 후방 기총을 제외한 모든 방어기총과 탄약을 제거한 후, 로버트 K. 모건 소령[29]의 지휘하에 폭격에 나섰다.
도쿄시각으로 3월 9일 밤 10시 30분, NHK 라디오 방송이 B-29 편대의 도쿄 접근을 알렸다. 적기에 관한 정보는 도쿄 (灣)으로부터 남쪽으로 오가사와라 제도까지 이어진 일련의 섬에 배치된 감시원들에 의해 잇따라 중계되어 들어왔고, 얼마 후 첫번째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몇시 간 뒤인 밤 12시 직전, 제 1번기가 동쪽으로부터 저공으로 급히 접근하여 30kg짜리[30] 네이팜탄 뭉치를 풀어놓았다. 그것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지상에서는 화염이 선을 그리며 분출하여 밤하늘을 밝혔다. 제 2번기는 스미다 강(隅田川) 상공에서 제 1번기의 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소이탄을 투하하였다. 제 1번기와 제 2번기가 교차하며 던진 소이탄으로, 도쿄의 공장, 상점, 소주택이 몰려있는 도쿄의 동북지역에 거대한 불의 X자가 조용히 그려졌다. 그리고 곧 이어 불의 X자를 표지 삼아, 폭격기 280여 대가 폭음을 울리며 3000 m의 고도로 진입해왔다. 책상에 올려놓은 찻잔 속의 녹차가 밖으로 튈 정도로, 도쿄 시민들은 그렇게 낮은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B-29의 엔진 폭음과 진동이 울려퍼지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B-29 놀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이란 것을 다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6시간 동안 300여 대가 넘는 B-29들은 도쿄 상공에 E-46 확산탄 8500발과 M-69 소이탄 자탄 50만 개, 네이팜 소이탄 총 1700톤을 투하했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린 네이팜탄과 기름뭉치들은 '''도쿄 시내 8500여 곳'''에 떨어졌고, 순식간에 불꽃이 밤하늘 30 m 높이까지 치솟으며 치명적인 화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여기에 애초부터 불어 오던 시속 27 ~ 45 km 지상풍이 만나자 화염은 순식간에 옆으로 위로 사방 팔방으로 기세좋게 뻗어나갔다.
처음 15분 동안에 목조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구역이 소이탄으로 거대한 불구덩이로 변했고, 화재로 가열된 공기는 팽창하며 위로 치솟았다. 그리고 다시 주변의 공기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여 풍속은 점점 강해졌다. 이 격렬한 대류 현상은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는 불기둥을 만들었으며 시속 65 km가 넘는 강풍은 불붙은 연소물들의 잔해를 빨아올렸다가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리고 이렇게 퍼져나간 불티들은 다시 잔불을 일으키며 화재를 확산시키고 작은 화재들이 다시 합쳐져 더욱 더 화재를 키우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불의 쓰나미는 골목길과 애써 만들어놓은 방화대 따위는 있지도 않은 것처럼 '''수십~수백 m를 우습게 뛰어넘어서, 경로상에 위치한 목재든 인체든 가리지 않고 모든 유기물을 닥치는 대로 삼켜나가기''' 시작했다.[31] 이쯤 되면 불이 모든 것을 태우고 스스로 꺼지거나 큰 비가 내리는 것 외에 인력으로는 소화가 불가능하다. 화재 예상 진로상의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방화대를 구축하는 정도가 한계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소방훈련 때 배운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소이탄에 물이나 젖은 걸레를 퍼붓기도 하고, 양동이 릴레이를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일본제국 경찰, 경찰 소방대와 의용소방대, 훈련받은 민간요원들이 지시하는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당시의 행동지침을 다룬 군가겸 가요도 존재했다.가사 정부 당국은 각 동네의 시민들이 자기 할 일을 완수하면 그 동네들은 무사할 것이고 결국 도시 전체가 무사할 것이라고 말해왔지만, 적기가 네이팜탄뿐 아니라 '''기름이 가득찬 2.5톤짜리 폭탄을 2.6 ㎢당 1개 꼴로 투하'''하고, 그로 인한 '''화재 그 자체가 폭풍처럼 회오리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국 화재 진압을 시도하던 사람들도 모조리 화재에 잡아먹혀 버렸다. 경찰은 사람들을 방화대, 공터, 혹은 이미 모든 게 다 타버린 장소로 이동시키려고 노력했고, 소방대원들은 살아남은 몇개의 소화전을 통해 화염에 휩싸인 거리를 뛰어다니는 사람들 몸에 물을 뿌려줬지만 화재선풍이 시속 100 km 가까운 속도로 사방팔방에서 덮쳐오는 상황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타죽지 않은 사람들은 불이 산소를 모두 태워버린 탓에 뜨거운 연기 속에서 질식해서 죽었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긴 증언에 따르면 화재현장의 끔찍한 열기로 인해 '''가까이만 가도 화상을 입거나, 옷이 갑자기 화르륵 타오를 정도'''였다고 한다.
도쿄 동북쪽에는 피난민들이 간논사라는 에 몰려들었다. 그 절은 오랜 세월, 도쿄의 숱한 화재들 속에서도 한 번도 불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절이 관세음보살의 가호를 입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내의 정원에 불이 옮겨붙자, 절의 목조 건물과 수많은 수목들은 거대한 화장(火葬)용 장작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에도시대부터 내려오는 공창가인 요시와라(吉原)가 있었고, 여기는 접대부들의 탈주를 막고 외부에서의 화재를 막기 위해 큰 철문들이 닫히게 되어 있었는데, 수많은 접대부와 손님들이 그 철문 안에서 불타 죽었다.
도쿄 남쪽의 니혼바시 근처에서 경찰들은 피난민들을 유명한 극장인 메이지좌(明治座)[32]로 피난토록 했다. 그러나 이미 도쿄를 가득 메운 불에 극장안의 산소도 부족해져갔고 마침내 무대의 막에 불이 옮겨붙자, 극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장로(火葬爐)로 돌변했고 극장 안으로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그냥 산채로 화마(火魔)의 먹잇감이 되어버렸다.
동북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스미다 강은 화염 폭풍으로부터 안전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양쪽 기슭에서 사람들 수만 명이 강의 얕은 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네이팜은 강물 위에서도 꺼지지 않고 잘만 타올랐으며, 화재 선풍의 열기로 인해 '''강물도 끓어올랐다.''' 문자 그대로 사람들은 물 속에서 '''삶아져 죽었다.''' 강변에, 다리 위에 있던 사람들도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끓는 물에 뛰어들어 죽어갔다. 강에서 빠져나온 사람들도 불에 타 죽거나 증기에 질식사하곤 했고 겨우 살아남았어도 심각한 화상은 피할 수 없었다. 네이팜탄의 불길 확산을 위해 같이 투하된 2.5톤 규모의 기름 폭탄이 이 강렬한 불길을 지속시켰다. 드레스덴에서 소이탄에 희생된 사람들 상당수도 이런 죽음을 맞았다. 이건 뭐 도저히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불길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화염 때문에 폭격을 하던 폭격기 동체가 달궈져서 작전 수행이 어려워졌을 정도였고, 조종석에서 사람의 시체 타는 냄새가 진동하여 승무원이 구역질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미군의 본격적인 폭격으로 도쿄는 '''밤에는 시뻘겋게, 낮에는 새카맣게''' 타올랐으며, 3월 9일 밤 12시에 시작된 공습은 3월 10일 새벽 5시 공습 해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끝났다.

7.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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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팜 불길에 직접 쏘여 죽은 시신, 혐오 주의.[34][35]
도처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 스미다 강을 따라 걸어간 한 군의관은 강 기슭에 쌓인 시체들을 보았다.

표류하는 수많은 시체를 봤다. 옷을 걸친 시체도 벌거숭이 시체도 모두 목탄처럼 검게 타 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시체인 것은 틀림없는데 남녀를 분간할 수조차 없고 그 곁을 떠내려가는 물체가 팔인지 다리인지 아니면 불탄 나무조각인지도 식별할 수 없었다.

반상회 조직은 살아남아서 식량조달과 임시거처 마련을 위해 힘썼다. 일본군이 파견되어서 시체들을 수습했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체는 100구씩 모아서 커다란 공동무덤에 매장하였다. 3월 10일 아침부터 수십만 명 규모의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철도는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이들을 실어날랐다. 폭격 '''단 한 차례'''로 대략 가옥 25만 동이 파괴되었고 180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도심 약 40 ㎢가 잿더미로 변했다.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하게 집계하지 못했다. 정부는 12만 명이 사망했다는 신문보도도 발표하지 못하게 막았는데, 프랑스인 기자 로베르 기얭(Robert Guillain)은 사망자로 간주되는 피해자 수가 19만 7천 명이라고 보고된 문서를 접했다고 한다.
일본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 8만 3793명, 중상자 4만 918명, 이재민 100만 명 이상이 발생했다. 조선인은 약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치면, 피해자가 약 20만 명에 달하여 피해가 원폭 이상이다. 공습 피해 및 소개[36]로 인하여, 종전 직후 도쿄 인구수는 진주만 공습이 발발하기 직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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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대밭이 되어버린 도쿄 시가지. 수도로서 도쿄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관동 대지진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계획도시로 복구한 일본 제국의 수도 도쿄는 이 작전으로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도쿄에서 과거 에도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사이타마현카와고에시는 옛 에도 분위기의 길거리가 보존된 것으로 유명한데, 원조 에도인 도쿄에는 전쟁 이후 폐허 위에 현대식 건물들이 세워지고 버블 시대에는 거의 무계획적으로 확장되었으며, 현재는 반쯤 미래화된 탓에 이런 곳이 거의 남지 않았다.
소소한(?) 피해로, 당시 김정희의 자료들이 이 폭격으로 대거 소실되었다. 당시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란 인물은 완당(김정희의 아호)에 관심이 매우 깊어서 그의 글과 그림 등의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서예가인 손재형은 후지츠카 치카시를 찾아가서 세한도를 돌려달라고 간청했고, 오랫동안 설득한 끝에 세한도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후 이 폭격으로 치카시의 서재도 불타서 김정희의 자료들이 대거 소실된 것. 손재형의 설득이 아니었다면 세한도도 이 때 소실될 뻔했다.

8. 평가


도쿄 대공습은 일본의 수도를 불타는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공습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 제국 치하에서 35년간 지독한 세월을 보내던 중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씻어지기 어려운 반일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만족시켜준 덕분인지 한동안 한국 네티즌들에게 옹호를 받았고[37] 일본 제국 풍자와 일본 극우를 조롱하는 가치가 있었으나 실제 전술적, 전략적으로 불가피했는지는 따로 확인해볼 문제다. 이 공습으로 하루 만에 10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조선인 희생자가 10% 정도로 알려져 있다.
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사무국장을 지낸 고(故) 이일만 씨는 여러 자료를 근거로 당시 조선인 희생자를 약 1만 명으로 추산한 바 있다.
예로 르메이는 중간에 일본의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을 예측한 미 해군 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요청으로 3월 중순부터 일본군 비행장 폭격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르메이 장군은 이럴 시간에 차라리 공장이 숨어 있는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드는게 더 효과적이라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물론 육군과 해군의 협의에 따라 니미츠 제독에게 르메이의 항공대 병력을 동원할 권한이 있었으므로 별 수 없이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르메이는 틈만 나면 이 임무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전후 연구에 따르면 미 육군 폭격기가 허구헌날 비행장을 두드려대는 바람에 일본 육해군이 확보했던 항공기에 비해 실제 출격한 항공기의 수가 급감하여 카미카제 작전의 효율까지 덩달아 떨어트린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됐다.
비행장을 폭격하는 와중인 4월에는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의 일환으로 폭격기의 일부를 떼서 항만지역에 기뢰를 살포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그 결과 한달간 기뢰가 1만 2천여 개가 살포되었는데, 약 배수량 100만 톤에 달하는 일본 수송선단을 격침시키고 본토로 들어가는 원자재 수송량을 80%나 잘라버릴 수 있었다. 또한 현대까지도 연안 해운에 대한 의존이 큰 일본의 국내 교통망도 동시에 마비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폭격기로 불바다로 만들어버린 도쿄 대공습의 화려함에 비하면 수수한 작전이라 가려지긴 했지만 전후 분석 보고서는 이 기뢰 살포가 일본 본토 공격 도중 가장 가성비가 뛰어난 작전이었다고 적고 있다.[38] 이 작전으로 일본 전역에서 민간인 30만여 명이 아사했다고 추정하는데, (민간인을 직접 죽인 것까지 포함해도) 민간인을 죽게 한 숫자로는 가장 높은 것이다.
전후 분석 결과로는 해상수송을 차단한 작전도 매우 효율적이었을 것이라는 평가[39]가 군 내부에서 나왔다.
Warren Kozak,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에서는 일본 전역의 공업기반을 쑥 재배지로 만들어버린 덕분에 몰락 작전을 굳이 벌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제의 공업 생산량이 급락해서, 원자폭탄과 함께 수십만 명을 죽였지만 결국 수백만 명의 목숨을 살린 비정하지만 현실주의적인 결정이었다는 평가가 있는데 이분은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임을 감안하자. # 위의 군사보고서 같은 전문가는 아니다. 오히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닌데 일본군에게 치명적 피해를 주며, 일본 내부에서 굶어죽는 일본인들이 대량으로 나와 미군들이 민간인들을 죽이지 않고도 (일본군이 항복하지 않아) 일본인들이 알아서 내부에서 대량으로 자멸해준 게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정도다.
민간인 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꼭 불가피했다고도 볼 수 없으며 이런 방식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지역 폭격으로 발전해서 민간인들이 떼로 학살되는 상황까지 발전했다. 특히 문제는 정작 북진할 때는 무차별 폭격이 없었는데, 북진을 하지 않을 때 발생했다는 것.[40]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어록이 그간 반일 감정 덕분에 옹호받기는 했지만 사실 그 자체로는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르메이는 6.25 당시에도 저런 관점으로 한반도에서도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차라리 중일전쟁진주만 공습에 대한 복수란 관점에서 옹호하는 게 낫다. 그러나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과 비교하기엔 미군에게 너무 과하다. 중일전쟁기 일본군은 난징대학살 등에서 민간인을 대놓고 학살했을 뿐 아니라, 민간인과 포로를 상대로 100인 참수 경쟁 경쟁까지 벌였던 미치광이들이었다는 점에서...
민간인 희생이 있었지만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 내서 희생자가 줄어들었다는 평가는 도쿄대공습이 아니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다.[41] [42]
그런데 사실 도쿄대공습 덕분에 오히려 일본은 진짜 지옥을 피하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공습 때문에 일본인들은 진정한 전쟁의 공포를 모르고 넘어갔고, 그것이 전후 일본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폭격이 너무나 강렬하고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본토상륙을 급하게 추진하지 않고 철저하게 준비를 하며 기다렸고, 그 사이에 원폭과 소련참전으로 인해 본토에서의 지상전은 해보지도 못하고 일본이 항복을 해버렸기 때문. 그래서 일본인들은 전쟁이 가져오는 오만가지 공포와 비극 중에 단 하나에 불과한 '폭격' 말고는 전쟁의 쓴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심지어 폭격 가치가 없어 미군이 폭격하지 않은 지방 소도시나 시골사람들은 대도시가 어떻게 구워졌는지도 모른 채 '아니 이렇게 대일본제국이 멀쩡한데 왜 항복함?'이라는 소리를 했을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 인구의 60% 이상이 농민이었고 이촌향도 현상도 일어나기 전이라 결국 전쟁의 공포를 제대로 체험해본 일본인은 생각보다 적었다.
일본은 국토를 짓밟는 기갑부대도,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의 포병도, 수십만 단위의 적군도 아무것도 경험해보지 않았다.[43][44] 한국의 6.25 전쟁 미디어물이나 사진전을 보면 고지 하나를 두고 벌이는 일진일퇴의 공방전, 아군의 어떤 무기로도 파괴하기 어려운 기갑부대의 공포, 적군이 근처까지 추격해왔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하는 피난민, 인민군 치하에서 학살과 인민재판을 당하는 시민들, 포로수용소 생활 등등 아픈 기억이 매우 다채롭게(?) 나타나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 미디어 등에 등장하는 전쟁의 이미지는 끽해야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 '불타는 도시' 이렇게 매우 단편적이고 천편일률적이다.[45]

8.1. 대공습의 원인


일단 현재까진 학설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건 인종주의다.
  • John W. Dower, War Without Mercy: Race and Power in the Pacific War
  • Craig M. Cameron, American Samurai: Myth and Imagination in the Conduct of Battle in the First Marine Division 1941-1951
태평양전쟁기 미국과 일본은 서로 인종차별적인 선전으로 비하하며 서로 증오심을 키운 것을 근거로 제시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게 독일지역 폭격과 북한지역 폭격인데 독일지역에 대한 민간인 폭격은 미국 내에서도 여론이 비판적이었으나 일본과 북한에 대한 폭격은 독일같은 비판적인 여론이 없었다.

8.2. 인종주의라는 주장의 반론


단, 인종주의적 이유만으로 폭격했다는것에는 여러 반론들이 존재하는데, 일본의 경우 기계화가 덜된 노동집약의 시대에 머무르는 산업구조라 볼트와 너트같은 기본적인 부품조차도 각 집안에서 곰인형에 눈붙이듯 국가로부터 할당량을 채우게 강요받는 식의 전시산업이 이루어졌기에 민간지역과 산업지역을 구분하는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나, 상당한 수준의 산업적 분화와 기계화가 이루어진 독일의 경우 드레스덴의 군수공장들만 폭격했으면 됐지만, 기상악화상 영국군이 안개로 보이지 않아 큼지막한 건물들에는 죄다 폭격을 가했기에 민간인 피해가 증가한 경우이며, 최소한 전쟁 중반까지 영국과 독일 사이엔 '도심 민간지역 폭격만은 자제하자' 라는 불문율이 존재했던 발달된 서구권 국가간의 전쟁의 연장선으로 여겨졌기에, 오랫동안 유럽 인접국가 사이의 인지상정으로 여겨진 부분이 크다.
그리고 영국, 미국만 해도 굉장히 많은 독일계 국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단순히 인종주의적 차별이라기 보단, 같은 서구인으로서의 동질감의 발로라는 것이다. 반면 일본, 북한의 경우 서구인들의 생활공간과 지구 반대편 거리는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어떤 큰 피해가 발생한다 해도 서구인들의 삶의 질과는 아무 관련성이 없어, 소 닭보듯 여겼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현재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내전이 일어나 아프리카인들이 때죽음 당하고 있는데, 별 신경쓰지 않는건 그 내전이 한국경제에 어떤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고, 한국국민의 삶의 질에 악영향을 거의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인들이 인종차별주의자여서 신경 안쓰는건 아니다.
위의 단순 인종주의설에 반대하면 다양한 원인을 제시하는 학자에는 미국 일리노이대학 역사학과 교수 존 린이 있다. 존 린은 진주만 공습, 죽음을 불사하는 일본 군인들의 전투력, 미국인 포로학대, 집단자살 등 군사요소와 문화요소가 태평양지역 미군들에게 영향을 준 것도 복합적인 원인이라 지적한다.[46]
한국의 김태우 교수는 미국의 폭격전략과 함께 중일전쟁에서 벌인 일본군의 충칭 대공습 같은 무자비한 폭격이 도쿄 대공습의 원인 중 하나였다고 지적했다.[47]
현재 학계에서는 도쿄 대공습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처럼 전술 전략적으로 불가피한 행위로 평가받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뭐 애초에 너나할 것 없이 미쳐돌아가는 전쟁상황에서 꼭 불가피한 행위만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지만(...)

8.3. 6.25 전쟁의 초토화 폭격과 상관관계


도쿄 대공습의 경험은 6.25 전쟁 시기에 북한군과 중공군에 대한 폭격에서 재현되었다. 물론 이런 초토화 폭격은 무고한 민간인 피해로도 이어졌다. 정밀타격기술과 피아식별이 이때보다 더 진일보한 지금도 민간인 피해가 0%라고 하기 힘든데, 이때는 그런 기술도 없었다.

르메이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미래 전쟁 과정에서 전략항공력의 중요성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는 이 같은 확신 속에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신의 업무를 추진해 나갔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전략공군 비행사들의 훈련과정을 체계화했고, 극동지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전략공군의 중요성에 대한 홍보와 함께 조직의 체계화를 꾀했다. 르메이가 불러들인 인물 중에는 2차대전기 그의 휘하에서 일본폭격을 주도한 오도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도넬은 한국전쟁기 최초의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관으로서 북한지역 폭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08, 42-43

민간인 보호와 대량파괴라는 상반된 가치의 공존과 갈등은 한국전쟁에서도 단적으로 표출되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유엔군의 집행대리인인 미국은 북한지역 폭격 시 군사 산업 목표만을 선별적으로 '정밀폭격'해야 한다는 정책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워싱턴의 정 군 최고지도자들은 이 같은 정책의 엄격한 준수를 유엔군사령관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극동지역의 공군 사령관들과 조종사들은 워싱턴의 여러 제한조치들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과으로 부임한 오도넬은 맥아더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북한의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투하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도넬의 주장은 2차대전 후 전략폭격의 강화를 주도했던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위의 책, 43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는 소이탄 사용을 통해 북한 내 목표지역은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폭격기사령부는 소이탄 공습으로 주요 산업목표를 파괴함과 동시에 해당 지역을 완전히 전소시킬 수 있었다.''' 전략공군사령부는 자신의 계획을 보다 구체화했다. 전략공군은 폭격기사령부의 B-29기 2대가 1조의 편대를 이루어, 1대는 목표지역에 소이탄을 투하하고 다른 1대는 산업시설에 정밀공격을 가하기 위해 과열폭탄을 투하하도록 했다. 전략공군은 이 계획을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에게 송부하여 극동군 사령관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위의 책, 43~44)

중국공산군의 압록강 도하라는 새로운 전쟁국면에 직면하여,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기존에 없던 매우 공세적인 폭격정책을 하달했다. 맥아더는 미 공군의 주요 사량관들에게 북한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도시와 농촌지역 자체를 주요 군사적 목표물로 간주하라고 지시했다. 도시와 농촌에 대한 폭격의 목적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은신처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는 민간지역의 '사전파괴'였다. 맥아더와 미 극동공군 수뇌부는 추운 겨울 한반도 북부의 민가들은 모조리 불태워버림으로써 공산군의 휴식처와 보급기지를 사전에 파괴하고자 했다. 맥아더는 새로운 파괴작전의 성공을 위해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 본토 공격에서 활용되었던 소이탄 폭격을 지시했다.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폭격은 2차대전 시기 영국공군의 독일 도시폭격이나 미 공군의 일본 본토폭격에 비할 수 있는 사실상의 무차별폭격이었다. 맥아더는 새로운 민간인 거주지역 파괴작전을 '초토화정책'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맥아더의 북한지역 초토화작전 명령이 그를 향한 미 극동공군 장교들의 지속적인 건의에 의해 승인되었다는 점이다. 초토화 작전을 강력히 건의한 이들은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 폭격기사령관 오도넬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2차 대전 시기 미군의 극동지역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인물들'''로서, 전후 전략공군의 확충에 큰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전시민간인보호를 주장했던 미국 내 세력들이 폭격정책 수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전쟁이 위기에 처하자 항공력을 공세적으로 활용하길 원했던 미국 내 세력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초토화작전이 시작된 후 북한지역은 그 작전명처럼 완전히 폐허로 변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4일 B-29기 수십대의 소이탄 투하는 연일 지속되었다. 1950년 11월 폭격으로만 만포진의 95%, 회령과 남시의 90%, 초산의 85% 강계 희천 삭주의 75%등이 완전파괴되었다. 이 시기 북한지역 폭격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해당지역주민들의 진화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소이탄 투하 후 전폭기의 기총소사를 실시하거나 다양한 시간간격의 시한폭탄을 소이탄과 동시에 투하했다는 것이다. 극동공군은 표현 그대로 북한 도시와 농촌의 '초토화'를 기도했다.

위의 책,296-297

지상군의 후퇴에 따라 극동공군의 초토화작전의 범위도 자연스럽게 남한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학살 조사 사례 중에는 1951년 초 미공군의 소이탄 공격에 의한 대규모 집단희생 사례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주로 1951년 1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강원 · 경기 · 경북 · 충북 지역''' 폭격 피해 사례들은 사실상 1950년 11월 맥아더의 지시에 의한 초토화작전의 남한지역으로의 확대를 의미했다. 그중에서도 도진순에 의해 학계에 소개되어 진실화해위원회의 심도 깊은 현지조사가 실시된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 폭격에 대한 연구논문과 조사보고서, 경북 예천 · 충북 단양 · 경기 · 강원 지역 폭격사건 조사보고서 등은 초토화작전의 남한지역 확산과정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을 만하다.

김태우, 폭격, 2013, 326-327

남한지역 초토화작전의 진행과정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시술 중 하나는 이 시기 폭격기 조종사들이 남한 내 작전구역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적잖은 전폭기 임무보고서의 적정 항목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people in white)이 기록되어 있었고, 이 같은 지역에는 어김없이 대규모 네이팜탄 폭격이 진행되었다. 산성동 폭격의 정찰관 중 하나였던 조지 울프는 "많은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적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산성동 폭격에 관여한 또다른 정찰관 네빌은 "우리는 지상의 움직이는 모든 사람이나 물건은 아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51년 초, 미공군은 적 점령하의 남한지역 민간인들을 사실상 적 병력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같음, 329-330

뉴욕타임즈의 종군기자 배럿(G. Barrett)은 1951년 초 경기도 한양부근의 어느 농촌 마을을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했다.

중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기 3~4일 전에 마을에 대한 네이팜탄 공격이 진행되었다. 마을 어느 곳에서도 시체가 매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를 행할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1명의 늙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곳에 생존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4명의 시신으로 가득 찬 검게 그을린 마당 안에서 몇벌의 옷을 부여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전체와 들판에서 발견되고 사살되었다. 그들은 네이팜탄 공격을 당했을 때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성은 막 자전거를 타려는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는 고아원에서 뛰놀고 있었으며, 한 가정주부는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없었다.(...) 약 200구의 시체들이 그 작은 마을에 놓여 있었다.

같음, 330


9. 전략적 성과와 의미


작전 시점에서 미군이 전선에서 우위를 차지하였고, 제공권을 획득한 상태에서 치밀한 준비 속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폭격의 성과는 매우 컸다. 미군이 이런 무차별 공습을 통해 의도한 바는 아래와 같다.
  • 일본 국민의 동요: 폭탄을 퍼부은 미국 측에선 죽창 운운하던 최후 항전 이야기 때문에 사실 이쪽으로 별 기대는 안했다고 하는데, 일본 쪽의 기록에 따르면 국민들이 대단히 동요한 모양이다. 일본 국민들에게는 진주만 공습, 난징 대학살, 이오지마 전투, 동남아에서의 일본 육군의 몰살 등등 이야기는 그냥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음.' 정도로 남 일처럼 취급되었고 이오지마 전투 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하는 국가 같지가 않았으나, 폭격 이후로 비로소 국민들은 '전쟁'을 실감하였다. 이 대공습은 핵 투하와 함께 대부분 일본 국민들이 기억하는 '일본이 했던 전쟁'의 이미지로 남았다.[48] 전쟁에 나간 아들이 덴노를 위해 싸우다 전사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회적 지위와 명망이 높으신 잘난 어르신들은 이후 미군이 일본 도시 전략폭격을 본격화하고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자 폭격을 피해 다 시골로 튀어버린다.
  • 규슈 상륙작전(올림픽 작전) 시행을 위한 준비: 규슈 상륙 전에 이와 같은 네이팜 폭격과 상륙지에 핵 투하가 예정되어 있었다. 미군이 투입될 상륙작전지에 핵을 사용하려 한 것은 그 당시 방사능의 위험을 맥아더 장군을 포함한 장성들과 과학자들이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 군 시설과 군수공장의 괴멸: 이미 도쿄는 관동 대지진으로 박살난 뒤 재건되었는데, 누가 재건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나 시가지 내에 민간인 거주지와 군사시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 있었다![49] 하지만 이런 무질서한 도시계획은 미약한 산업기반만으로 군국주의 국가로 진화한 일본에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형 공장을 세우고 이를 채울 최신 산업설비를 갖출 능력이 없이 수공업 따위에만 의지하니 주택가와 공장이 섞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50] 이러한 흔적은 서울에도 남아 있는데, 을지로 5가에 있는 주한미군 공병대가 일제시대 일본군 병영을 그대로 쓰고 있다. 다른 사례를 들자면 을지로 한복판의 공구상가나 소규모 영세공장들과 주택들이 마구 뒤섞인 독산동같은 곳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또한 현재와 비교해 보면, 대중교통을 비롯하여 노동자들이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직장과 주거 공간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할 필요성이 더더욱 컸음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특히 2차대전 이전의 일본 자동차공업은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고, 2차대전 중으로 가면 아예 연료부족으로 목탄버스가 일상적으로 운행되던 시절이기 때문에 직주근접[51]이 아니면 노동자의 통근을 보장하기가 힘들었다. 일본 쪽 기록에 따르면 그 이전까지의 고고도 폭격으로도 이미 꾸준히 피해를 입었지만, 미군 수뇌부에서는 일본의 전투기 등 병기 생산능력을 소멸할 것을 폭격작전 실무자들에게 요구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사실 저 밑의 스즈키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말한 바가 순전히 자기합리화에서 나온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덧붙이면 "옆집 스즈키네"라는 르메이의 발언은 폭격 당시 미군 장성들의 실제 관점과도 일치했다. 당시 일본 공업지대는 산업혁명 당시 영국처럼 거주지역과 구분되지 않았다. 특히 파괴 전까지 항공기 생산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일본의 항공기 생산 공장들은 미군 장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공식적으로 미국의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당시 국제법상으로도 위법은 아니다. 방어되고 있는 군수공장과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집을 박살내야 하는데, 원칙대로라면 군수공장만 노려야겠지만 그런 시설과 노동자 주거지를 민간인 주거지에 혼합해 자국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만들어 버린 일본 때문에 민간인 희생이 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은 민간인을 동원한 인간 방패 전술을 실제로 쓴 적이 있다. 일본군의 민간인을 동원한 인간방패 전술에 대해서는 사이판 전투#s-4 문서와 오키나와 전투#s-4 문서를 참고하자. 특히 사이판 전투.[52]
  • 또한 도쿄 대공습은 이전까지의 '미군이 평가하기에는' 별 효과가 없었던 (일본군의 관점에서는 "고고도 폭격기를 격추할 수 없어!"라며 좌절한 전투기 파일럿이 적지 않았다지만) 일반 폭탄을 이용한 고고도 수평 폭격 대신 미군의 공습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냈던 기념비적인(?) 사건이며, 르메이 등이 주장했지만 그 당시까지 지지부진하던 미 공군의 독립과 관련한 논의가 급진전되는 계기가 된다.

10. 조선에 끼친 영향


도쿄 대공습 같은 대규모 폭격시, 목조주택이 많은 일본 대도시 특성상 일부 지역의 폭격만으로도 화재가 도시 전체로 번지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폭격을 당해도 해당 지역만 화재가 일어나고 화재가 도시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 내부에 마치 도로처럼 줄 모양으로 특정 지역을 비워놓는 소개지역을 대규모로 만들었다. 이는 일본 열도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경성부(京城府) 중심가에도 이러한 지역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곳이 현재 종묘 앞에서 퇴계로까지 남북 구간과 광희동 사거리에서 4호선을 따라 서울역까지 동서 구간이다.
이 남북 구간은 해방 후 그냥 빈 땅으로 남았다가 월남자와 전쟁 피난민들이 움막을 치고 살거나 노점을 했으며, 사창가 '종삼'이 들어서기도 했다. 훗날 이 지역을 일제시대 당시 계획대로 화재가 번지지 않게 만든 방재구간으로서 빈 땅으로 둘 것인가, 건물을 세워 재개발할 것인가 의견이 맞서다가 결국 두 가지 다 하기로 결정하여 세운상가로 개발된다. 현재의 종로 세운상가에서부터 진양상가가 들어선 곳이다. 동서 구간은 해방 이후 도로포장을 하여 도로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퇴계로다. 일제강점기 당시 태평양전쟁 전의 경성부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퇴계로에 해당되는 도로는 없었다. 대신 오늘날 충무로라고 부르는 도로는 있었다. 왕복 6차로인 퇴계로 한 블럭 뒤에 있는 왕복 2차로짜리 도로이다. 이 구역들이 조성될 당시, 일본은 철거지역 건물주에게는 단 한푼 보상도 없이 정부시책이라고 그냥 내쫓았다고 한다. 뭐 당시 일본은 보상해줄 작자들이 절대 아니지만...
대공습 당시 조선인들은 이 처참한 소식을 듣고 "우리도 폭격을 당할지 모른다." 걱정하기도 했으나, 조금이라도 국제정세를 아는 사람들은 "미국은 절대로 조선을 폭격하지 않는다."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미 폭격 2년 전에 카이로 선언에서 루즈벨트 대통령과 연합국의 수장들이 "한국은 일본의 일부가 아니고, 종전 후 독립시킨다." 선언했기 때문에 한국에 대규모 폭격을 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한국에 대한 공습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함흥, 원산, 부산, 대구 등지에 소규모의 폭격이 있었다. 하지만 도쿄 대공습과 같은 민간인 주거시설과 산업 및 군사시설 가릴거 없이 무작위로 투하하는 초토화 공습 대신 산업 및 군사시설, 철도역 등에 대한 정밀폭격이 주를 이루어 민간인 피해는 매우 적었으며, 폭격 빈도나 규모도 일본 본토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11. 각국의 반응


첫 타자로 도쿄가 얻어맞은 탓에 가장 피해가 컸다. 때문에 그 수많은 폭격 중에서도 소이탄 폭격 얘기가 나오면 언제나 도쿄대공습이 같이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11.1. 일본


일본에겐 지금도 악몽 같은 날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십만 단위의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킨 대규모 공습으로, 특히 당시의 생존자는 '''그날''' 또는 '''그 3월의 어느 날'''이라고 부르며 몸서리칠 정도로 매우 끔찍한 사건으로 회상한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아베 신조가 소속된 일본회의 같은 일본 극우세력들은 일본 본토 공습이나 도쿄 대공습'''만'''을 기억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에게 일본 본토 공습을 당하기 전부터 중국에게 충칭 대공습 같은 무차별 전략 폭격을 가했다.[53] 오히려 미국이 일본이 중국에서 행한 소이탄 대공습에서 영감을 얻어서 일본 공습 때 똑같이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 결국 자업자득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익과 만나면 이상하게 변질되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일본의 피해자 행세#s-3.6.2의 구실로 주로 이용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일반인이야 그렇다쳐도 충칭 대공습 같은 중국에 대한 무차별 전략 폭격으로 반대로 중국에게 가해자 입장으로 대량폭격을 저지른 전범들을 참배하는 일본 우익들이 피해자 행세하는 건 그야말로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비슷하게 네오 나치들은 드레스덴 공습을 이용한다. 그런데도 2013년 5월에는 도쿄 대공습이 인도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에둘러서 미국의 '전쟁 범죄'로서 책임론을 제기하며 비난하기도 했다. 日 "美 도쿄대공습 인도주의 위배"…미국과도 역사인식 갈등빚나 日, "도쿄대공습 인도주의 어긋나" 각의…美직접 비난은 자제 그 외 피해자 행세 관련 유튜브 동영상. 이와 별개로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폭탄 투하로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은 도쿄대공습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의 상고를 기각했다고 한다. 일본대법원, 도쿄대공습 배상소송 기각

11.2. 미국


진주만 공습의 리벤지 매치격. 사실 미국에서도 민간인 폭격에 대해선 논란이 있었지만, 일본에는 민간인 거주지와 군수공장이 뒤섞여 있어서 그 당시의 기술로는 둘을 구분해서 공격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긴 했다.[54] 지금처럼 정찰 위성이나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엑스칼리버 포탄 같은 정밀 타격 무기[55]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걸 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둘을 구분해서 군수공장만 폭격하려고 계속 고고도 정밀 폭격을 주장했던 핸셀 소장(Haywood S. Hansell)은 결국 기술력의 한계에 부딪히고 시간만 보내다가 르메이에게 폭격단 사령관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차라리 이 정밀 폭격이 완벽 성공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르메이는 절대로 핸셀 소장에 대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느니 하는 험담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Kozak, 2009) 사실 핸셀이 강판된 이유는 단순히 정밀 폭격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작전 수행의 효율성이 미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르메이도 취임 초기에는 조직의 최적화를 단행하면서 폭격 소티 수를 2배로 늘렸지만, 그렇게 늘린 소티 수로 똑같은 정밀폭격을 시도했다.
민간인 피해를 염려해서 공격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미군을 죽일 무기들이 무더기로 생산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미군은 손놓고 봐 줄 수가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모든 참전국이 국가의 모든 역량을 전쟁에 결집하는 총력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고, 당대의 수많은 폭격 작전에 비추어볼 때 '군수공장이 포함된 도시 파괴'를 전제로 한 도쿄 대공습은 당시의 미군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측면이 있었다.
또한, 만약 핸셀 식의 정밀폭격을 계속하다가 너무 시간을 끌었을 경우, 미군은 '''몰락 작전'''을 발동해 일본 본토를 침공하여 어느 제독진주만 공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해군기지를 보고 했던 말 그대로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물론 몰락 작전이 실행되면 미군 역시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인 수만에서 수십만[56][57]의 장병을 희생해야 했으니, 반대로 커티스의 대규모 폭격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가 지지부진한 소모전에서 벌어졌을 대규모 희생을 최소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종전 후 르메이는 미국과 우방이 된 일본 항공자위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로 훈장[58]을 수여받게 된다.

11.3. 중화민국


중화민국/국민정부는 도쿄 대공습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적이 없는데, 중화민국 또한 일본으로부터 충칭 대공습을 포함한 무차별 전략 폭격을 당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59] 국민당 정부가 충칭시를 임시수도로 정하자 일본은 충칭을 집중 폭격했는데,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다는 명목으로 고의로 민간인 거주지역을 폭격했을 뿐만 아니라 소이탄도 사용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방공호를 찾아가다가 피격 혹은 질식해서 사망했으며, 방공호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1200명이 질식사한 끔찍한 공격에 대해 일본 정부는 뻔뻔하게 사과하지 않았다. 중화민국의 입장에서는 미군이 자신이 당한 것을 방법까지 똑같이 가해국의 수도에 되갚아준 상황이니, 쌍수를 들고 환영했으면 했지 불편해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충칭에 면한 쓰촨성 또한 여기저기에 일본군의 무차별 민간인 학살 폭격을 당한 기억이 강렬히 남아있는데다 일본 정부의 사과 한 마디조차 없어 반일 감정이 강한 상황이다.

12. 대중매체에서의 묘사


  • 서예의 전위적 대가로 유명한 이노우에 유이치가 이 사건을 작품으로 옮긴 바 있다. 실제로 이노우에는 당시 도쿄의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피난 중 졸업식을 위해 돌아왔던 6학년 학생들이 공습으로 모두 사망했고 그 와중 이노우에는 겨우 살아남았던 경험을 토대로 한다. 제목은 '아, 요코가와 국민학교'이다. 작품 사진
  • 드라마 《도쿄 대공습》: 제목 그대로 대공습을 다룬 호리키타 마키, 후지와라 타츠야 주역의 2008년 2부작 드라마. 위의 피해자 행세라며 올린 영상이 바로 그 드라마의 공습 부분만을 편집해 올린 것이다. 다만 해당 작품은 완전하게 피해자 행세를 하는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도쿄의 경찰서장인 남자 주인공인 오오바 히로토(후지와라 타츠야 분)의 아버지가 도쿄 시민들의 피난을 건의하나 이를 천황에 대한 불충이라며 거부하는 꽉 막힌 일본군의 병크가 그대로 그려지고 상이군인과 억지로 입대한 히로토 등을 전면에 내세우는 등 일본군이 결코 긍정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 간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군이었던 미군의 전투기 조종사를 치료하는 의사 이시카와(키시타니 고로 분), 몇 안 되는 생존자 소녀를 입양해 가는 부부가 한국인 부부라는 설정 등이 그 예이며, 무엇보다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도 그대로 그려졌다는 점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위한 작품이라기보다는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런 일이 있더라도 살아나가야 한다'라는 메세지를 더 강조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만화 《맛의 달인》: 쾌락정 블랙의 장인이 피해자다. 당시 묘사를 보면 엄청 충격적이었는 듯.
  • 만화 《미스터 초밥왕 전국대회편》: 카노 초밥 사장 카노 야헤이는 이 사건으로 가게가 전소돼 아들 쇼헤이를 잃었다. 50여년 뒤 세키구치 쇼타를 알아보기 전까지 뛰어난 후계자를 발굴하지 못했다.
  •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 작중 장소는 도쿄가 아니라 고베였지만, 도쿄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도시들도 이런 류의 폭격을 당했다. 일본을 피해자로 다루었다는 논란이 있었다.
  • 영화 《언브로큰》: 이쪽은 실화를 다루고 있다. 도쿄 대공습 당일 주인공과 포로들이 수용소 불끄기에 강제동원된다. 이때 '이거 우리가 왜 꺼야 하나? 타버리게 놔두자.'라는 말까지 나온다.
  • 애니메이션 《오소마츠 상》: 2기 18화 '이야미는 홀로 바람 속에'라는 에피소드에서 소녀의 부모가 전쟁 때 죽었다고 하며, 소녀는 그 때 눈을 잃었다고 나온다. 이야미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도쿄 대공습 당시의 불타는 도시를 떠올린다. 이 에피소드의 배경은 전쟁 직후인 40년대 후반으로 보인다.[60]
  • 드라마/만화/애니메이션 《유리 토끼》: 대공습 당시의 주인공과 가족의 생활에 대해 나온다.
  • 만화/애니메이션 《하나우쿄 메이드대》: 최종 보스인 하나우쿄 호쿠사이가 도쿄 대공습의 생존자들 중 하나이다.
  •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폭격 전 삐라를 날리는 것이나 공습을 받은 도시 묘사로 보나 도쿄 대공습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듯하다.
  • 영화 《못말리는 람보》: 일본 총리 부처가 참석한 파티장에서 벤슨 미국 대통령(로이드 브리지스)이 연설을 하는데, 연설문 첫 대사가 "일본에 폭탄을 쏟아부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일제 차가 속을 썩이는군요"(...) 이 말을 들은 일본 총리가 뭐 씹은 표정을 짓는 건 덤..
  • 만화/애니메이션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작중 등장인물인 시즈가 도쿄 대공습의 생존자인 것으로 나온다.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사망하기 직전 이세계로 건너왔다는 설정. 소설 연재분과 만화판에서도 짚고 넘어가는 설정이지만, 애니메이션 판에서는 이 설정이 한층 중요시되어 아예 애니메이션 1화부터 도쿄 대공습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정말 애니메이션 1화의 도입부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설정인가?"에 대해 한국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었으며, 해당 작품의 설정을 잘 모르는 시청자들도 '이세계 판타지물이라길래 봤더니 시작부터 웬 폭격 현장이 나오는 상황'에 대해 황당해하기도 했다. 이는 작품의 우익 논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13. 말말말


우린 매캐한 잔해 속에서 숯덩이로 발견된 일본인들을 위해 울지 않습니다.

ㅡ 헨리 '햅' 아놀드 장군의 편지[61]

에 대한 커티스 르메이의 답장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62]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

커티스 르메이

Killing Japanese didn’t bother me very much at the time…. I suppose if I had lost the war, I would have been tried as a war criminal….. every soldier thinks something of the moral aspects of what he is doing. But all war is immoral and if you let that bother you, you are not a good soldier.

(나는 그 당시에 일본인을 죽이는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중략) 만약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나는 전범으로서 기소되었을 것이다. (중략) 모든 군인은 도덕적인 측면을 고민한다. 하지만 모든 전쟁은 비도덕적이며, 만약 이로 인해 스스로 괴로워한다면, 당신은 훌륭한 군인이 아니다.)

커티스 르메이

일본의 도시란 이런 식이다. 공장이 있다. 그 옆에 민간인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집에서 조그만 부품들을 만든다. 그걸 일가친척 조립라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네는 64호나 65호, 63호 너트, 아니면 그 사이에 끼는 모든 개스킷을 만드는 식이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키타가와씨가 손수레를 끌고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적당한 순서로 부품들을 모아서 가는 거다.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

커티스 르메이, 폭격 직전에 민간인 대상 공습이란 상황에 죄책감을 느낀 부하들을 보고.

료 아저씨는 도요코 선을 타고 출발했다. 정답던 료 아저씨가 떠남과 동시에 B-29가 드디어 도쿄 하늘에 나타나 매일같이 폭탄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도모에 학원에 불이 났다. 밤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학교 바로 옆, 교장선생님 집에 있던 미요와 언니 미사, 그리고 사모님은 다행히도 구혼부츠 절의 연못 근처에 있는 도모에 농원으로 급히 피해 화를 면했다. 하지만 B-29는 계속해서 도모에 학원의 전철 교실로 폭탄을 떨구었다.

'''교장선생님의 평생 꿈이었던 학교는 지금 화염에 휩싸여 있다. 선생님이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며 노랫소리 대신, 학교는 지금 끔찍스런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다. 그 불길은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이 학교를 불태워버리고 있었다...'''

쿠로야나기 테츠코, <창가의 토토>에서


14. 관련 문서


  • 일본 본토 공습
  • 일본의 중국대륙 무차별 폭격
  • 충칭 대공습 - 위 문서의 한 갈래이면서 위 문서의 내용 중에서도 별도로 문서화되어 있는 가장 심한 전략폭격.[63]
  • 커티스 르메이
  • B-29
  • 융단폭격
  • 일본의 피해자 행세

15. 참고 자료


  • 타임라이프, <2차 세계대전 - B-29와 일본폭격>: 2차대전 밀덕후들에게 불후의 걸작으로 추앙받는 다큐멘터리 서적.
  •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 Warran Kozak (2009)

[1] 1945년 3월 9일 ~ 10일에 있었던 'Operation Meetinghouse'의 공습만이 아닌 도쿄를 대상으로 이뤄진 모든 공습을 일컫는 말이다. 예외적으로 둘리틀 특공대는 그 상징성 때문에 따로 Raid on Tokyo라고 따로 부르는 편이다.[2] 먼발치에서 도쿄를 바라본 풍경이 아니라 '''수천 미터 이상의 상공에서 도쿄를 찍은 사진이다. 한마디로 거의 도쿄 전역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이며, 사진에 보이는 조그만 불빛 하나하나가 주택 십수채를 불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하기 짝이 없는 불덩어리라는 것.'''[3] 일본 NHK BS1에서 2017년 8월 13일에 방송된 다큐멘터리 이다.[4] 이를 일본의 전쟁범죄를 용인해준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는 일본과 독일의 전쟁범죄나 연합군의 민간인 학살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는 논지에 더 가깝다.[5] 着艦: 비행기가 항공모함 갑판에 내려앉음.[6] 유럽 전선에서 커티스 르메이와 함께 한 B-17이 대표적이다.[7] 離艦: 비행기가 항공 모함 갑판에서 떠오름[8] 실제로 둘리틀 특공대B-25 폭격기들을 항공모함 CV-8 USS-호넷의 격납고가 아닌 비행갑판에 계류해서 이함하는 방법을 썼다.[9] 실제로 도쿄에 투하된 500파운드 확산 네이팜탄인 E-46 기준으로는 38발 정도 탑재된다고 한다. 출처: Bombing of Tokyo 영문위키.[10] 250파운드 폭탄이라도 저 정도 양이면 B-29에 다 실을 수 없다. 도쿄를 폭격하는 B-29들의 사진을 보면 애초에 고폭탄이 아니라 소이탄을 싣고 날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11] 이게 진천제공대다. 단 진천제공대가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결성된 건 아니다.[12]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상공의 대류권 상층은 편서풍이 부는 영역이다.[13] 이러한 대본영의 정보 조작은 결국 나중에 일본이 항복하고 나서 항복에 반대하는 반란이 터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궁성사건마츠에 소요 사건 참고.[14] 신기하게도 자신들을 호위하던 편대기들이 줄줄이 떨어져 나갈 때도 이 인간이 탑승한 선두기는 왠지 멀쩡했다. 심지어 '''대공포탄 직격'''을 당하고도 살아돌아온 적도 있다.[15] Air Raids on Tokyo, National Geograpghic[16] 이 당시 일본의 야간방공능력이 없는 원인은 없느니만 못한 레이더에 있다. 일본군/무기체계 문서 참고.[17] 도쿠가와 막부 시절 형성된 5-10가구 단위의 최소 행정조직으로 전후 GHQ가 없애버렸다.[18] 주부를 주 구독층으로 하는 여성 월간지. 1917년에 창간되었고, 전쟁 중에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전시 프로파간다 활동에 동원되었다. 전후 정상적인 주부 잡지로 돌아왔으며 2008년 휴간(사실상 폐간)했다.[19] 출처 : 하야카와 타다노리 저, 송태욱 역. <신국 일본의 어처구니없는 결전생활> (2019) 277p.[20] 지금의 코로나 창궐 도시의 그 한커우 맞다. 하지만 당시에는 독립된 도시였다.[21] 때문에 동서고금을 통틀어 방화범에 대한 처벌(사형)이 제일 가혹했던 곳이 에도 막부 시기의 일본이었다. 방화미수범에 대해서도 기본이 화형이었고, 거기에 몇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22] 히로시마는 맑아서 그나마 덜했는데 나가사키는 구름 틈새에 잠시 보여진 맑은 부분을 보고 떨어뜨린 것이기에 더했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원래 목표지는 원폭돔으로 알려진 시마 외과병원 건물이 아닌 T 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였다. 게다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경우는 원래 코쿠라에 떨어뜨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날 작전 직전부터 예비 펌프 고장으로 연료 일부를 못 쓰게 된데다가 사인이 안 맞아서 40분을 공중에서 허비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시간이 지나면 차차 맑아질거라던 기상보고와 다르게 코쿠라 상공의 구름과 연기가 걷히지 않아 투하하지 못했고, 돌아가다가 길목에 있던 나가사키에 떨구기로 하고 갔는데, 나가사키 역시 기상보고와는 다르게 시계가 가려진 건 마찬가지. 연료가 떨어져가자 폭탄을 버리고 도망치느냐 폭탄과 함께 추락(...)하느냐의 갈등을 하고 있을 때, 약 30초 정도 구름 틈으로 나가사키의 시가지가 보였고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23] 참고로 르메이가 중국 전선에 있던 시기가 이 때다.[24]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51~52쪽[25] 방화선(防火線)이라고도 한다. firebreak[26] 현재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세운상가도 일제가 이렇게 조성한 방화대 부지 위에 세워졌다. 해방 후 넓직한 공터에 무허가 판자촌이 난립했는데, 이를 정비하고 위에 주상복합 아파트를 세운 것.[27] 고인 물은 모기가 산란하기 최적의 장소이다.[28] 이 날의 작전 Operation Meetinghouse에 폭격기 총 339대가 참가했고 그 중 282대가 목표 지역 상공에 도달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고, 기록마다 조금씩 숫자가 차이가 난다. 영어 위키백과[29] 이 사람은 유명한 B-17기인 멤피스 벨의 파일럿이다. 멤피스 벨이 유럽 전선에서 물러난 후 소령으로 진급하여 B-29의 조종간을 잡은 것이다.[30] 애초에 확산탄이 아닌 자탄으로서의 소이탄은 고폭탄에 비해 무게가 가볍다. 도쿄에 쓰인 M-69 소이탄을 기준으로 6 파운드(2.7 kg) 정도.[31] 2019년 고성-속초 산불을 직접 지켜보거나, 뉴스 속보로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산불 발생 지역 쪽에서 영랑호를 두고 떨어져 있던 속초 시내까지도 불이 순식간에 미쳤다.[32] 1873년에 처음 지어진 극장으로, 이 때의 메이지좌는 1923년에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된 후 장소를 옮겨 콘크리트로 재건된 건물이었다. 도쿄 대공습으로 소실된 이후 2년만에 재건되었고, 그 뒤로도 화재 사고를 한 차례 겪은 뒤 1958년에 재건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극장이다. 이후로는 승승장구하여 1993년에는 극장을 갖춘 고층 빌딩으로 재건축하는 등 현재까지 잘 나가고 있는 극장이 되었다.[33] 타지 않고 남아 있는 건물들은, 불에 타지 않는 석조 건물들이다. 즉, 저 소수의 석조 건물들을 제외하고 '''모든 목조 건물이 타버려서 재가 되었다는 것이다.'''[34] 궁금하지만 보기는 무서운 사람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람 모양의 숯덩어리가 된 상태다. 대충 폼페이의 화산재에 묻힌 화석 같은 느낌. 물론 폼페이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화석과는 다른데, 폼페이 유적지의 그건 시체가 썩어 없어진 공간에 석고나 유리섬유를 부어서 본을 뜬 것이라서 진짜 화석이 아니다.[35] 네이팜의 파란 불꽃은 1,000도를 넘는 고온으로서 인체와 접촉할 경우 수분을 고속으로 증발시켜버리기 때문에 시체의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된다.[36] 疏開: 공습, 재난 등에 대비하여 주민, 시설물 등을 분산시키는 것[37] 통구이드립, 셰프 드립, 도쿄핫 드립 등등.[38]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1946, p. 73.[39]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1946, p.90~92[40]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참고[41] 존 키건 저, 류한수 옮김, 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07, 864-867쪽.[42] 다만 소련의 만주작전을 같이 언급하기에는 좀 그런것이,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의 민간인 피해는 거의 없었다.[43] 과거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원정도 태풍으로 저지되었고, 조선 세종 때 이종무의 정벌도 대마도만 한정되었다. 보통은 주로 내전으로 겪어왔다.[44] 이들이 접한 전쟁에 대한 소식은 남방군도, 중국 등지에서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온 생환병들의 이야기나 라디오 등에서 흘러나온 대본영의 통제된 정보가 고작이었다.[45] 태평양 해전은 대부분 해전이나 공중전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대부분이 육상전인 중일전쟁마저도 일본 본토에서 진행되지 않았다. 이때문에 일본 본토에서의 육상전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46] 존 린, <배틀 전쟁의 문화사>, 청어람미디어, 2006[47]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48]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더라도 외계인 침략자들은 일단 닥치고 도시를 때려부수는 것으로 시작한다.[49] 현대에도 일본 자위대 기지나 시설 등이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오이타 분둔지, 네리마 주둔지 등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이렇게 자위대 기지가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자위대 기지가 먼저 들어서고 그러고 난 뒤에야 그 주변에 민간 거주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기 때문. 이런 경우는 제네바 협약에 어긋나지 않아서 딱히 뭐라 못한다.[50] "...1944년 즈음에는 일본의 전쟁 경제에서 가내수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부품과 장비의 상당부분은 직원 250명 이하인 소규모 공장에 하청을 맡기는 식으로 조달하였다. 이런 소규모 공장은 도쿄에 밀집되어 도시 전체 공업 생산량의 50% 가량을 차지하였다." United States Stategic Bombing Survey, 1946, p. 87. 표준화와 대량 생산 분야에서 한참 앞서있던 미국 입장에서 250명 규모의 공장은 사실상 가내수공업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51] 職住近接 : 직장과 주거 공간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52] 사이판과 오키나와의 공통점은 인간방패를 쓴 일본군과 민간인들의 자살극이다. 그러나 민간인들의 자살 동기에 큰 차이가 있는데, 오키나와 전투의 경우 민간인들의 대규모 자살극 같은 건 있었으나 덴노의 직접 명령 같은 건 없었고 그전까지 귀축영미 운운하며 일본 군부가 행한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에 대해 민간인들에게 한 세뇌가 원인을 제공했다.(실제로 옥음방송을 듣고 자결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이판에서는 아예 히로히토 덴노가 섬에 거주하던 민간인에게 자살명령을 대놓고 내렸다. 그 도조 히데키조차 이 명령이 내려진 것을 알고 자살 명령장을 감추려고까지 했을 정도. 그런데다가 오키나와 전투의 경우 일본 정부가 역사왜곡을 시전한 바도 있다. 자기들이 류큐어 사용자나 미군의 삐라를 주운 주민들을 스파이로 규정해서 몰살시켜 놓고서.[53] 사실 규모 자체는 20여만이 죽은 도쿄 대공습보다 '''최대 2,300여만(...)명이 사망한''' 중국 무차별 폭격이 압도적이고, 죄질도 더 악랄하다.[54] 다만 맨발의 겐이란 만화를 보면, 당시 일제에 붙잡힌 미군 포로들이 지붕에 P라는 페인트칠을 했는데 그게 미군 포로 수용소란 뜻이라 미군 폭격기들이 공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당시 일본 민가에서도 지붕에 P라는 페인트칠을 하는 게 유행하기도 했다고.[55]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F-117의 레이저 유도 포탄 등 정밀 타격 무기는 핸셀 소장의 주장을 현대 기술로 구현한 것에 가깝다. 민간인 오폭의 정치적/외교적 악영향이 2차대전 때보다 엄청나게 커진 데 따른 운용 교리의 변화이다. 물론 그럼에도 100% 정밀 타격은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56] 단, 몰락 작전이 예상대로 시행되었다고 (대체 역사) 가정 시 미군의 예상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나오고 있다. 크게는 몇십만 명 적게는 몇만 명 혹은 그 이하로 잡는 추정치도 있다. 자세한 건 몰락 작전 문서에서 미군 피해 규모 예상 쪽을 참조하자.[57] 참고로 이러한 전략을 실제 취했던 것이 베트남 전쟁이었다. 문서 참조.[58] 욱일대수장.[59] 솔직히 말하면 충칭 대공습도 일본의 중국대륙 무차별 폭격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신멸작전이라고 중국인들에 대한 대량학살도 서슴지 않고 행했으니, 그 와중에 벌어진 100인 참수 경쟁은 덤.[60] 처음 오소마츠 군이 연재되던 62년도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육쌍둥이의 부모인 마츠조, 마츠요, 그리고 데카판다용(당시 설정으론 53세), 이야미(당시 설정으로는 마츠조 또래)는 태평양 전쟁을 겪은 세대이기도 하다.[61] "축하하네, 이번 일로 자네들이 무엇이든지 해낼 용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62] 커티스 르메이의 이 말은 근현대 전쟁에서 총력전의 개념을 단적으로 묘사한 말로 손꼽힌다. 쉽게 말하면, 이러한 총력전은 결국 국민방관협조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다만 이 말은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는 게, 당시 일본에도 후세 다쓰지 등 군국주의에 저항하다 치안유지법으로 끌려간 반전주의자들은 제법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들에겐 죄가 없다. 사실 정보가 제한되던 시절 일반인이 군부 정권에 저항할 수단이란 게 기껏 해봤자 불복종 정도인데 그것조차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한 게 현실이었으니... 르메이 이 양반은 6.25 당시 한반도 폭격도 주도한 바 있는데,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키면 당시 민간인 학살도 별 문제가 아닌 게 될 수 있다.[63] 당시 중국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떨어뜨리기 위해 민간인 거주지에 고의로 소이탄 폭격을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