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원

 

1. 개요
2. 인생
2.1. 부마가 되다
2.2. 혜택
2.3. 말년
3. 사극에서


1. 개요


영안위 홍주원(永安尉 洪柱元, 1606년 ~ 1672년)
조선 선조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의 남편이다. 정명공주는 광해군에 의해 인목왕후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다시 공주로 복귀되었다. 한편 혜경궁 홍씨의 5대조이기도 하다.

2. 인생



2.1. 부마가 되다


당시 정명공주는 오랜 유폐 생활로 혼기를 놓친 21세의 노처녀라서, 비슷한 또래의 남편감을 찾을 수 없어 연하를 구했다고 한다.[1]
그것도 이미 홍주원에게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강제로 파혼시키고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2] 사실 그 시대는 신분이 높으면 혼인 연령이 빨랐기 때문에 공주와 비슷한 나이의 양반 집안 남자들은 거의 유부남이었다. 아직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본인에게 혼인하기 어려운 하자가 있다든지, 아니면 홍주원처럼 약혼은 했는데 어떤 사정으로 혼인을 미루고 있는 경우밖에 없었다. 공주를 하자있는 남자와 혼인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미 혼담이 정해진 남자들이라도 전부 부마 단자를 내게 해서 부마를 구한 것이라 한다.[3]
홍주원과 정명공주 사이에서는 7남 1녀가 태어났다.

2.2. 혜택


홍주원으로서는 멀쩡한 혼처를 물리고 하게 된 어거지 결혼이었으나, 그 덕분에 그 자신은 물론 홍씨 가문도 많은 혜택을 받았다.
소성대비는 귀한 딸을 드디어 시집보내게 된 것이 너무 기뻐서 어린 사위를 무척 예뻐했던 모양으로, 사위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까지 내려 비판받기도 하였다. 인조는 자신의 즉위의 대의 명분인 소성대비를 우대하여 정명공주의 혼례를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우 호화롭게 치러주었으며, 그 뒤에도 상당한 땅과 재산을 하사하였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우의정 신흠(申欽), 서평부원군 한준겸(韓浚謙) 등과 함께 소성대비와 인열왕후를 호종하였고, 그 공로로 품계가 승진하였다.
이후 소성대비가 병을 앓게 되자 인조는 홍주원의 부친 홍영을 예조 참판에 제수하였고, 소성대비의 건강에 차도가 없자 홍주원의 품계까지 높이면서 소성대비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일제강점기까지 소작 분쟁이 이어진 암태도도 정명공주가 받은 땅이다.
그러나 소성대비 사후 정명공주의 처소에서 흉측한 백서가 발견되었고, 이에 연루된 정명공주궁녀들이 줄줄이 체포되어 수차례의 형문은 물론이고 압슬, 낙형까지 당하다 죽기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홍주원으로서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2.3. 말년


67세까지 당시로서는 천수를 누리다가[4] 현종 14년인 1672년에 사망했다.

3. 사극에서



[1] 물론 요즘 기준으로 따지자면 21세에 결혼한 건 오히려 조혼이지만, 이 때에는 왕실 자녀들이 10대 초반에 결혼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혼기를 놓쳐버려 19세에 결혼한 정명공주의 어머니 인목왕후만 해도 당시 기준으로는 노처녀였다.[2] 당시 홍주원은 조모의 3년상을 치르느라 결혼을 미루고 있었다.[3] 홍주원의 부친 홍영이 간택에 대해 집안의 뜻을 굽히지 않자 귀양까지 가는 등, 잡음이 생기기도 하였다.[4] 부인 정명공주 역시 83세까지 살면서 조선의 왕녀들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