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공주

 



'''조선 선조의 왕녀
정명공주 | 貞明公主
'''
'''출생'''
1603년(선조 36년) 5월 19일
조선 한성부 정릉동 행궁
'''사망'''
1685년(숙종 11년) 8월 10일
(향년 83세)
조선 한성부 북부 안국방 안동별궁
'''부왕'''
선조
'''모후'''
인목왕후 김씨
'''부군'''
영안위 홍주원[1]
'''자녀'''
7남 1녀
(장남) 홍태망
(차남) 홍만용
(3남) 홍만형
(4남) 홍태량
(5남) 홍태육
(6남) 홍만희
(7남) 홍만회
(장녀) 홍태임
[image]
정명공주가 직접 쓴 글씨 '화정(華政)'
1. 개요
2. 인생
2.1. 고귀하지만 축복받지 못한 출생
2.2. 서궁 유폐 시절
2.2.1. 천연두를 앓다
2.2.2. 공주에서 폐서인이 되다
2.2.3. 혼기를 놓치다
2.2.4. 서예로 승화된 유폐 생활
2.3. 인조 반정 이후
2.3.1. 뒤늦게 혼인을 하다
2.3.2. 어머니의 죽음과 위기 일발
2.3.4. 인조의 견제
2.4. 안정적인 삶의 말년
2.5. 죽음
3. 평가
4. 후손
5. 여담
6. 창작물에서


1. 개요


조선공주로, 선조인목왕후 김씨의 딸. 영창대군의 동복 누나이며 광해군의 이복 여동생. 선조의 딸 11명 중에서 10번째 딸이자 유일한 적녀(嫡女)이다.
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 6대 조선 국왕과 시대를 함께 하며 83세까지 장수했지만, 오랫동안 그녀의 삶은 비운의 왕녀로 유명한 선조인 경혜공주나 후손인 덕혜옹주 못지 않게 기구하고 불운했다.

2. 인생



2.1. 고귀하지만 축복받지 못한 출생


선조는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에게서 자녀를 보지 못하였으나, 후궁 9명에게서 13남 10녀를 두었다.[2] 선조는 가장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의 차남이자 선조 자신의 4남인 신성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했기에[3], 약 20년 가까이 선조는 왕세자 책봉을 미루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둘러 후궁 공빈 김씨의 차남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서장자였던 임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개망나니(…)로 유명했고, 유력한 왕세자 후보였던 신성군임진왜란 때 병으로 일찍 죽었다. 거기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민심을 얻는 데 성공했기에 광해군의 세자 지위가 안정되는 듯했으나, 왜인지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이 서장자가 아닌 차남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4] 그 핑계로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사실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민심을 얻는 광해군과 반비례되는 선조 자신의 추락한 왕권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다.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열등감이 커갈수록 미움이 커졌고, 광해군 측 사람들의 불안도 점점 커졌다.
그런 상황에서 선조가 인목왕후 김씨와 재혼하자, 광해군 측 사람들은 혹시라도 인목왕후 김씨가 아들을 출산할까 두려워했다. 선조가 광해군을 왕세자 자리에서 쫓아내고 새로 태어난 아들을 세자로 삼을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1602년, 선조는 51살 때 19살의 인목왕후를 계비로 택했고, 약 1년 후인 1603년 6월 29일에 정비 소생의 첫 아이 정명공주가 태어났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새어머니 인목왕후임신하고 있었을 당시 유산시키기 위해 도깨비 소동이나 기왓장을 던저 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광해군 측에서는 얼마나 불안에 떨었는지 쉽게 짐작이 된다.[5]
비록 선조는 아들을 기대했으나, 정명공주는 늦둥이로 태어난 정비 소생의 첫아이이자 유일한 적녀여서 아버지 선조의 귀여움을 받았으며, 나이 차로는 아버지 뻘[6]인 이복오빠 광해군도 경쟁자가 될 수 없는 이기 때문인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을 귀여워하였다고 한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이 어렸을 때, 광해군인목왕후를 문안하며 공주는 가까이 해 쓰다듬어 주는 등 칭찬해 주었지만 같이 그 자리에 있던 대군은 본 체도 하지 않아, 영창대군이 "나도 누님처럼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다."라며 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7] 실제로 영창대군이 태어나지 않았거나, 태어났어도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났다면 정명공주의 삶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2.2. 서궁 유폐 시절


정명공주가 6살, 영창대군이 3살 때 아버지 선조가 승하하자 소성대비(=인목왕후)[8]와 광해군은 점점 소원해졌다. 광해군 5년 외조부 김제남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 하여 벌어진 계축옥사 후, 5년 뒤 급기야 어머니 소성대비가 대비에서 서궁으로 강등당하고 덕수궁에 유폐되면서 정명공주 역시 함께 유폐되었다. "공주를 서인으로 궁에 두지 말고 사가로 내보내자." 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자, 소성대비는 정명공주까지 빼앗길까 두려워 "정명공주는 이미 죽었다." 하고 거짓말까지 하였다고 한다.
계축옥사 당시에 정명공주는 11살, 영창대군이 죽었을 때는 12살이었다.

2.2.1. 천연두를 앓다


정명공주는 11살 때 천연두를 앓았다.
당시의 의학상 천연두에는 외출 금지는 물론, 고기ㆍ과일ㆍ계란 등 금지된 음식이 많았는데,[9] 계축일기에 따르면 김개시에게 포섭된 대비전 궁녀가 몰래 고기와 술을 먹였다고 한다.
참고로 계축일기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닌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만약 이 일화가 사실이라 가정하더라도 음모자들이 실제로 노린 (아마 천연두에 옮기라고 저주하는 등) 대상은 어차피 광해군의 왕위 경쟁자가 될 수 없는 정명공주가 아니라 인목왕후라고 추정된다.

2.2.2. 공주에서 폐서인이 되다


계축옥사 당시 정명공주는 신분이 옹주로 낮춰졌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살짝 애매한 게 조정 논의에서 "그래도 선왕의 딸이니 옹주로 낮추자." 하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이첨이 "죄인인 영창대군의 친누나이니 폐서인으로 대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광해군옹주로 낮추자는 주장에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실상은 폐서인되었지만 선조의 딸이니 혼인과 늠료에서만 옹주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대우였을 뿐, 소성대비가 공식적인 후궁이 아닌 역적의 대우로 서궁이라는 이름을 받았듯이[10] 정명공주 역시 폐서인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소성대비는 정명공주마저 광해군이 빼앗아갈까 전전긍긍했다. 소성대비는 혹시라도 광해군이 정명공주의 소식을 알고자 하면 "이미 죽었다." 하고 둘러대곤 했다. 서궁 유폐 시절, 정명공주는 공식적으로는 죽은 사람이었다.

2.2.3. 혼기를 놓치다


또한 유폐되었던 1618년에, 정명공주는 이미 16세였다. 조선 시대의 왕녀들이 보통 10세 전후에 부마감을 간택했음을 생각하면, 공주가 그때까지 혼인을 하지 않았음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정명공주의 부마 간택이 미뤄지던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혼담이 오고 갈 나이인 11살 때 역모 사건이 일어나고, 12살 때 영창대군이 죽고 정명공주는 천연두에 걸렸으니 아마 자연스럽게 혼담 이야기가 없어졌을 것이다.
아들을 빼앗기고 친정이 몰살당한 인목왕후가 딸마저 곁을 떠나는 것을 염려하여 혼인을 미루었든지, 인목왕후의 사위이자 영창대군의 자형이라는 지지 세력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광해군이 일부러 공주를 혼인시키지 않았다든지 하는 해석이 있다. 아무튼 정명공주는 유폐된 이후에도 혼인하지 못하고 계속 서궁에 갇혀 지내게 된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선왕의 적녀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가난하게 생활했다고 한다. 까마귀가 물어다 준 박씨를 먹고 살았다거나, 추운 겨울에 우연히 들어온 면화 씨로 옷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생필품에 생활비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채,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는 약 5년 동안 서궁에서 죽은 듯이 갇혀 지냈다.

2.2.4. 서예로 승화된 유폐 생활


유폐되어 생활하는 동안 정명공주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옆에서 크고 작은 글씨를 썼다고 한다. 남겨진 서예 작품은 '화정(華政)' 두 글자 등이 전해지는데, 남구만은 이 작품의 발문을 쓰면서 "선조의 글씨를 본떠 규합의 기상이 전혀 없다."[11]라고 평가하였다.
화정은 글자 하나의 사방이 각각 73 cm나 되는 대작이다. 연약한 여성의 체력으로 이런 글씨를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듯 힘과 기세가 펄펄 느껴지는 글자를 여성인 정명공주가, 그것도 서궁 유폐 시절에 썼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서궁 유폐 시절 소성대비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 영창대군계축옥사가 일어난 해인 광해군 5년(1613)에 죽었으며, 그 해에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고, 친정은 멸문되다시피 했다. 서궁에 유폐된 후 희망은 더욱 멀어졌다. 절망과 원한에 사무친 소성대비에게, 마지막 남은 위안은 하나뿐인 딸 정명공주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죽은 듯 살아 있는 정명공주는 어머니의 절망과 원한을 풀어주려 애썼는데, 그 방법으로 아버지 선조의 어필을 본떠 크고 작은 글씨를 썼던 것이다.
10대를 서궁에 갇혀 보내야만 했던 정명공주는,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고 꿋꿋이 버텨낸것이다.

2.3. 인조 반정 이후


존호가 복원된 소성대비는 공주로 복권된 정명공주와 약 5년 동안의 서궁 유폐 생활을 끝내고 창덕궁에 들어왔다.
인조는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으므로 소성대비와 나이 어린 고모 정명공주[12]를 깍듯이 대우했다.

2.3.1. 뒤늦게 혼인을 하다


정명공주는 당시 21살이었는데, 현대에는 이른 나이여도 그 당시엔 정궁 소생의 왕녀라도 21살이면 그냥 그 사실만으로 거의 혼삿길이 막히는 수준의 결격 사유이자 노처녀였다.[13][14] 가뜩이나 늦은 혼사를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던 만큼 인조반정 사흘 만에[15] 부마 간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국에서 겨우 9명이 부마 간택에 단자를 냈는데, 전부 다 정명공주보다 연하였다. 공주가 당시 기준으로는 혼기를 지나도 한참 지난 노처녀였다보니, 비슷한 나이의 사대부 청년들은 죄다 이미 결혼을 했거나 최소한 약혼은 한 상태에서 집안 사정상 혼례만 치르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약혼조차 못한 사대부집 남자라면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것이 아닌 이상 정말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미 결혼한 남자에게 그 결혼을 무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주를 하자 있는 남자에게 시집보낼 수도 없으니, 남은 선택지는 약혼은 했지만 어떤 사정으로 아직 결혼까지는 못 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약혼은 했으나 조모의 3년상을 치르느라 혼인을 미루고 있던 홍주원이 부마로 뽑혀, 강제로 파혼을 시키고 부마로 삼았다.
소성대비는 뒤늦게 얻은 사위를 예뻐했던 모양으로, 사위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까지 내려 비판받기도 하였다. 인조는 자기 즉위의 대의명분인 소성대비를 우대하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명공주의 혼례를 매우 호화롭게 치러주었으며, 그 뒤에도 홍주원의 품계를 높여주거나 정명공주에게 상당한 땅과 재산을 하사하였다. 일제강점기까지 소작 분쟁이 이어진 암태도도 정명공주가 받은 땅이다.
이게 현대로 치자면 강남 호화 아파트와 명품 살림을 공짜로 준 셈인데, 당연히 많은 논쟁과 논란이 있었다. 인조는 재위 초기 발생한 이괄의 난 때 나름대로 챙겨주던 흥안군이 냅다 이괄에게 달려가 합류한 이후 왕실의 방패가 되어야 할 종친들의 추가적인 이반을 막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는데 정명공주 우대도 그중 하나였다.

2.3.2. 어머니의 죽음과 위기 일발


그러한 비판에도 인조는 계속 정명공주를 우대했지만, 정명공주가 30살 되던 해인 인조 10년(1632년) 6월, 소성대비는 49세의 나이로 인경궁에서 한 맺힌 삶을 끝냈다.[16] 인조는 초상을 치르는 데 열중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졌다.
그런데 인목왕후가 사망하고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인조 10년 10월, 회은군 이덕인의 역모 고변이 정국을 흔들어 놓았다.

인조실록 27권, 인조 10년 10월 16일 경진 2번째기사 1632년 숭정(崇禎) 5년

회은군 이덕인이 고변하여 국청이 열리다

‘동네에 임해군의 종 아내가 때로 출입하는데, 하루는 와서 말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다.」고 하기에, 내가 자세한 것을 묻자, 답하기를 「경창군이 우리 궁(宮)의 양자(養子)를 위하여 계해년 일(인조반정) 을 도모하려고 술사(術士)를 조치하여 거사(擧事) 시기를 선택하였는데, '''대비(인목왕후)께서도 이일을 알고 있다고 한다.''' 임해군의 부인이 항상 지극히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내 생전에 이 따위 일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다.’ 하였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에게 제거된 임해군을 복권시키는 조치가 따랐는데, 그에게 후사가 없어서 선조의 서9남, 인조의 이복동생 경창군 이주의 아들 양녕군(陽寧君)을 양자로 입적시켜 대를 잇도록 했다. 광해군 2년에 열린 경창군의 혼례를 정원군이 맡아 주관했고, 인조반정 후 이뤄진 소현세자(당시 원자)의 관례는 경창군이 주관했을 정도로 둘이 가까운 사이라 신경써준다고 한 조치였는데, 임해군이 선조의 맏아들이라서 졸지에 왕위 계승서열까지 높아지는 바람에 역모에 연루된 것 이었다.
이 사건의 심각한 점은 '''폐모살제라는 인조 즉위 명분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인조의 조카가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는데 만약 이 사건이 커져서 조카 양녕군이나 아우 경창군이 화를 입는다면, 인조는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과 다를 바 없어진다. 폐모살제에 찬동한 죄로 인조반정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공격받고 인조 6년 북인의 역모에 연루된 인성군을 어떻게든 살려주려 노력했다 실패한 인조에게, 스스로 이 사건을 키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2번째는 인목왕후가 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시실이었다.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즉위한 인조 정권에서 대비의 위치는 인조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캐스팅 보트였다. 만약 인목왕후가 인조를 제거하려는 모반 사건에 연루되었다면, 그것은 인조의 왕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된다. '''인목왕후의 사위, 그러니까 정명공주의 남편 홍주원의 삼촌''' 홍씨 집안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임해군과 홍씨 집안은 본래 옆집 이웃이었다.) 대비가 살아있어서 열심히 부인해줬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하필 또 죽고 나서 터지는 바람에 부정도 못하니 더 골치아팠다.
인조 입장에서 이 역모는 설사 사실이라도 사실이 아니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인목왕후가 자신의 왕위계승을 부정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인조는 고변 접수 1주일만에 사건을 사실무근으로 결론짓고 종결시켰다.
그러나 사건을 덮으려는 노력도 헛되이, 인경궁에서 백서삼폭(帛書三幅)이 발견되었다. 비단에는 “왕을 폐위하고 세우는 일과 같았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흉측한 백서가 나왔다고 하지만 인조가 곧 불에 태웠기에 자세한 사연은 아무도 몰랐고, "인조를 저주한게 아니라 유폐되어 있던 시기 광해군을 저주하며 쓴 글"이라는 풍문도 돌았으나[17] 어차피 죽은 마당이라 진위 여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인조는 국청을 설치하여 그 내용을 조사하도록 하였고, 땅에 묻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저주물을 찾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하필 또 '''이때 인조가 몸이 안 좋았다.''' 인조는 "그게 어떻게 저주 때문이겠냐"고 했지만 신하들의 강권도 있고, 저주 사건 자체의 파장이 크다보니 저주문이 발견된 경덕궁에 계속 있기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경덕궁에서 사건이 터졌는데 경덕궁에 왕이 계속 머무르면 입방아밖에 더 찍겠는가. 그래서 옮기긴 옮겨야 했는데 창경궁창덕궁은 없고, 별궁으로 눈을 돌리니 남별궁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목왕후의 혼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평소 좁다고 마뜩찮아 했던 이현궁으로 옮겨갔다.
인조가 이미지가 안 좋아서 일련의 과정의 인조의 자작극으로 몰아가는 의견도 있는데, 정명공주소성대비를 끌어들여 자신의 즉위 명분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옥사를 조작하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인조에게 소성대비는 아무리 싫어도 그런 역모에 끌어들여서는 절대 안 되는 사람이었고, 고변도 스스로 1주일만에 묻어버리려 했다.
소성대비는 죽기 2년 전부터 줄곧 병석에 누워 있었고, 역모를 꾸밀 정도로 주도면밀한 성품도 못되었기 때문에, 화살은 자연히 소성대비의 딸인 정명공주에게 돌아갔다. 그 여파로 소성대비와 정명공주를 모신 궁녀들이 줄줄이 체포되어 수차례의 형문은 물론이고 압슬, 낙형까지 당해 고문 치사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궁녀들이 끝내 입을 다물어 상전을 지켰기에 사건 자체는 흐지부지 되었지만, 인조가 살아있는 이상 언제든 다시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그 후 정명공주는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 위험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때부터 정명공주는 조보[18]를 받아 읽는 것을 그만 두었다. 자신이 정치에 아무런 관심도 없음을 보이려는 처신이었다.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뛰어난 실력이라고 평가받던 서예도 그만 두었다. 남들의 시선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2.3.3. 병자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35세였던 정명공주가 강화도 갑곶 나루로 건너가려 할 때, 이미 공주의 재화를 실은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피난 온 백성들이 몰려와 서로 배를 타려고 아우성이었다. 정명공주가 아랫 사람에게 “재화들을 다 내리고 백성들을 먼저 배에 태우라!”라고 명했다. 백성들은 앞다투어 배에 오르며 “과연 정명공주로다. 마음 씀씀이가 저러하니 후손들은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라고 저마다 한마디씩 말했다고 한다.

2.3.4. 인조의 견제


인조 17년, 나이 든 인조는 병에 걸렸다. 인조는 "내가 아픈 것은 저주 때문"이라며 저주물을 찾게 했다. 물론 저주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건 조선시대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인조 10년 백서삼폭이 발견되어 뒤숭숭할 때 마침 병에 걸리자 "어떻게 사기(邪氣)로 사람을 해치냐"며 부인했던 사람이 인조 본인이었다.
조선 왕실 역사를 보면, 저주란 건 정적제거, 특히 왕실 여성들을 엮어넣은 사건에 많이 쓰이던 명분이었다.[19] 지난날 대북소성대비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칠서의 옥을 꾸몄을 때 그러했고, 훗날 인조의 맏며느리 민회빈 강씨도 저주에 독살 혐의를 뒤집어 쓰고 제거되지 않았던가. 인조가 후기 정국을 자기 뜻대로 끌고가는 과정에서, 일단은 다른 사안들이 시급해서 묵혀 뒀던 견제를 다시 시작한 것이었다. 때마침 원손이 거주할 향교동 본궁에서 저주할 때 쓰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인조는 이번 사건의 배후로 또 다시 정명공주를 지목했다.
최명길과 장유[20]인조반정 공신들은 "반정의 명분을 위해서라도 정명공주를 처벌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인조는 소성대비가 살아있을 때와 달리 대놓고 정명공주를 핍박하며 몰아붙였다. 만약 반정공신들이 인조를 말리지 못했다면, 정명공주 자신은 물론 남편 홍주원과 자식들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정명공주는 유폐 시절 종종 글을 쓰곤 하였으나, 그때는 어차피 아무 힘도 없는 10대 소녀였고 방패막이 되어줄 어머니 소성대비도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물정 다 아는 30대의 성인이 된 데다가 명문 풍산 홍씨 가문으로 시집을 간 상태로 인조의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문장을 논하거나 양반들(즉, 관직에 있는 사람들)과 교류했다가는 의심을 받을 위험이 컸다. 그래서 글을 쓰지 않고, 여염집 여인들처럼 바느질에만 몰두하며 숙이고 지냈다.
그렇게 정명공주는 10대 시절 서궁에 갇혀 보낸 것도 모자라, 30대와 40대를 서궁 유폐 시절보다 더 불안한 세월로 보내야 했다.

2.4. 안정적인 삶의 말년


인조 사망 후 효종 역시 조 귀인의 저주 사건에 정명공주가 연루되었다고 몰아갔다. 아버지 인조와 마찬가지로 정통성 문제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뒤이어 즉위한 현종 역시 견제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정통성에서 누구도 비길 바 없었던 숙종은 정명공주를 종친의 큰 어른으로 대우했다. 참고로 숙종은 정명공주의 '''현손뻘'''이다.

2.5. 죽음


내가 원하건대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었을 때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입에 올리고 정치와 법령을 망령되이 시비하는 것을 나는 가장 싫어한다. 내 자손들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경박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이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정명공주가 80세가 되던 해에, 막내아들 홍만회에게 써 준 글이다.
정명공주는 계축옥사인조반정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예송논쟁 2번ㆍ경신대기근 등 역사의 굴곡을 직접 겪기도 하고 거쳐 가기도 했다. 서궁에서 죽은 듯이 유폐 생활을 했고, 인조를 저주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 권력의 비정함에서 침묵의 처세술을 배운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1685년에 향년 83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어린 나이에 비명횡사한 남동생과 달리, 그녀는 조선의 왕녀들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

3. 평가


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에 걸맞게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해 오복을 향유했다.

송시열

송시열의 묘지 글대로라면 정명공주에게 오복은 ‘존귀함ㆍ겸손ㆍ공손ㆍ어짊ㆍ후덕’이었다.
한편 정명공주의 서예가 세상에 알려진 때는 정명공주가 세상을 뜬 이후였다.
정명공주의 막내아들 홍만회는 혹시라도 자신이 물려받은 작품이 사라질까 두려워 모각(募刻)하고, 그것을 여러 벌 탁본으로 떠서 친인척들과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면서 남구만에게 발문(跋文)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남구만은 발문에서 "작품을 받들어 감상해보니 진실로 선조 대왕의 필법을 본받아 웅장하고 강건하며 혼후(渾厚)하여 규합의 기상이 전혀 없다." 하는 평을 남겼다.

4. 후손


남편 홍주원과의 사이에서 7남 1녀를 낳았다. 정명공주의 당부를 잘 지켜서 그랬는지, 그녀의 후손들은 조선 최고 명문가의 명성을 이어 갔다.
사도세자의 정실부인 혜경궁 홍씨홍주원과 정명공주의 5대손으로, 《한중록》에서 종종 이를 언급한다. 혜경궁 홍씨가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수 중에 정명공주가 사용하던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정원대원군영조의 5대조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영조혜경궁 홍씨는 12촌이고, 사도세자혜경궁 홍씨는 13촌이다. 또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인 정조는 부계로도, 모계로도 선조의 직계후손이 된다.
정조의 측근 홍국영은 정명공주와 홍주원의 6대손이다. 혜경궁은 정명공주의 장남 홍만용의 후손이고 홍국영은 차남 홍만형의 후손이다. 그러니 혜경궁의 아들 정조와 홍국영은 12촌이 된다.
고종의 친형 흥친왕첫 부인은 혜경궁 홍씨의 숙부 홍용한의 증손녀이자 정명공주 - 홍주원 부부의 7대손이다.

5. 여담


당시 2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혼인하는 바람에 조선의 왕녀들 중 가장 늦게 혼인한 것 같지만, 사실 그녀의 이복동생과 이복조카들은 '''정명공주보다 더 늦은 나이에 혼인했다.'''
이복동생 정화옹주(貞和翁主)는 27살의 나이에 권대항(權大恒)[21]과 혼인을 하였고 이복질녀인 옹주[22]는 25세의 나이로 박징원(朴澂遠)[23]과, 이복종손녀인 현주 이아기(李娥其)[24]는 26세의 나이로 김문거(金文擧)와 혼인을 하였다.

6. 창작물에서


[1] 본관은 풍산, 자는 건중(建中), 호는 무하당(無何堂), 사후에 받은 시호는 문의(文懿)다. [2] 정비 소생인 정명공주와 영창대군 제외.[3] 인빈 김씨의 장남이자 선조의 3남인 의안군은 일찍 죽었다.[4] 이는 당시 명나라의 상황 때문이었는데, 명의 만력제선조와 똑같이 후궁에게서만 아들을 봤다. 그리고 또 선조와 비슷하게, 만력제는 장자가 아닌, 총애하는 후궁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고 싶어했다. 이에 명의 신하들이 "장자를 황태자로 삼으시라"고 요구했지만, 만력제는 "황후가 아들을 낳을 수도 있다"며 계속 미루던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광해군을 인정하면 이를 핑계삼아 만력제가 그 아들을 황태자로 삼는 것이 우려되어 반대한 것이었다. 결국 나중에 장자가 황태자가 되는 것으로 해결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그랬다.[5] 사실 계축일기가 정확한 사료는 아니지만, 분명 광해군 측에서는 인목왕후임신 소식이 환영할 만한 소식이 아니었다.[6] 실제로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질은 물론이요, 인조도 정명공주보다 8살 많다. '''폐세자 이질과 인조는 모두 정명공주의 조카다.'''[7] 사실 계축일기는 정확한 사료는 아니지만,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어린 이복동생들 중에서 적통이라고 해도 애초에 왕위 계승권 자체가 없는 정명공주보다 세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영창대군이 더 미웠을 것이다. 거기다 인간적인 고뇌로 생각해보면, 왕권 문제뿐만 아니라 광해군 본인의 아버지 선조에게 차별받는 서러움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 광해군 본인의 입지 문제 등이 애꿎은 영창대군에게 쏟아졌을거다. 광해군 본인 역시 어린 영창대군이 잘못 없는 줄이야 알았을 테니, 역으로 보란 듯이 그 누나인 정명공주를 더 귀여워했다고 추측된다.[8] 인목왕후의 대비로서의 존호는 소성대비이지, 인목대비가 아니다.[9] 이렇다보니 천연두는 둘째치고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이 많았다.[10] '''서쪽 사는 여자'''라는 뜻이다. 사실상 후궁도 아닌 폐서인 취급을 한 셈.[11] 규합의 기상이 전혀 없다는 말은 여자답지 않다, 남자 같은 글씨체란 뜻이다.[12] 정명공주가 워낙 늦둥이였기 때문에 인조보다 8살 어렸다. 더군다나 인조는 궁녀출신 후궁이 낳은 서출 왕자의 차남이였고, 정명공주는 선왕과 사대부 영애 출신 중전 소생의 유일한 적녀였기 때문에 상당한 출신 차이가 있었다.[13] 조선시대 양반가의 자식들은 성별 불문하고 거의 대부분 15살쯤에 혼인했다. 후사를 빨리 봐야했던 왕족들은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혼인했다. 어머니 소성대비도 임진왜란으로 혼기를 놓쳐 19살에 왕비가 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늦게 혼인한 것이였다.[14] 조선시대에서 부마가 된다는 것은 높은 작위와 많은 재산, 녹봉을 받으며 평생 윤택하게 살고 사후 지제 없이 대대로 제사를 받는 불천위가 된다는 의미였으나, 일반적으로 조정 권신이라든지 대대로 고관대작을 역임하는 집안에서는 꺼려하는 일이었다. 명예상 높은 품계를 받는 대신 대과응시를 통해 청요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사실상 막히고 정계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 그래서 회피할 여지 자체를 피하기 위해서 조선시대에는 부마를 7~8세 가량 아주 어린 나이에 미리 간택했다가 이후에 공주, 옹주와 혼인시켰다.[15] 공신책봉은 그렇다치고, 반정 자체의 뒷수습도 안 끝난 시점이였다. 광해군유배조차 떠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16]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그토록 증오하던 광해군보다 빨리 죽었다. 광해군은 무려 68세(1641년)까지 살았다.[17] 인조실록 권27, 인조 10년 10월 23일(丁亥)[18]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정부에서 발행하는 관보[19] 남자들이야 관직생활을 하니 "볼온한 발언을 했다", "사람을 모았다" 식으로 몰아가곤 했다. 하지만 구중궁궐이나 대갓집 안에 있는 여자들은 그렇게 몰아갈 순 없으니, 몰래 기물 몇개 묻어서 조작할 수 있는 저주로 엮어넣는 일이 많았다.[20] 인선왕후의 친정아버지. 효종의 장인.[21] 정화옹주보다 6살 연하[22] 광해군이 소의 윤씨에게서 얻은 외동딸로 5살 때 인조반정이 일어나 정식적으로 작호를 받지 못하였다.[23] 옹주보다 6살 연하[24] 폐세자 이지가 후궁에게서 얻은 딸로, 광해군의 손녀이다. 6살 때 인조반정이 일어나 고모인 옹주와 마찬가지로 작호를 받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