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열왕후

 


'''조선 제19대 왕비
인열왕후 | 仁烈王后
'''
존호 · 휘호 · 시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1px"정유명덕정순인열왕후
(正裕明德貞順仁烈王后)
<colbgcolor=#bf1400> '''시호'''
인열왕후(仁烈王后)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출생'''
1594년 12월 16일 (음력 갑오년 11월 7일)
조선 강원도 원주읍내 우소(寓所)
'''사망'''
1636년 1월 16일 (음력 을해년 12월 9일)
(향년 41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여휘당 산실청
'''능묘'''
장릉(長陵)
'''재위'''
'''조선 왕비'''
1623년 4월 13일 ~ 1636년 1월 16일
(음력 계해년 3월 14일 ~ 을해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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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본관'''
청주(淸州)
'''전호'''
숙녕전(肅寧殿)
'''부모'''
부친 서평부원군 한준겸(西平府院君 韓浚謙)
모친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檜山府夫人 昌原 黃氏)
'''형제'''
2남 5녀 중 3녀
'''부군'''
인조
'''자녀'''
6남 1녀[5]

1. 개요
2. 생애
3. 성격
4. 사망과 사후
5.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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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 16대 군주인 인조의 정비이자 조강지처이다. 소현세자효종,인평대군의 어머니이다. 인렬왕후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다.

2. 생애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이며 어머니는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이다. 한준겸은 개국공신 한상경[1][2]의 7대손이고, 세조 때 명신 한계희의 5대손으로서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호를 부탁받은 유교 7대신 중 한명이다.[3] 실학자의 선구로 유명한 한백겸은 한준겸의 형이고, 광해군 때 폐모론에 동조했던 우의정 한효순은 한준겸의 백부이다.
1594년(선조 27년)에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으며, 1610년(광해군 2년)에 17세의 나이로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과 혼인하여 청성현부인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 장남인 이왕(훗날 소현세자)를 낳고, 7년 후에 차남 이호(훗날 봉림대군, 효종)를 낳았다.
1623년(광해군 15년) 남편 능양군이 쿠테타로 광해군을 쫓아내고 보위에 오르면서(인조반정) 아내 한씨도 왕비가 되었다. 이후 한씨는 적극적으로 남편 인조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하기도 하였다.
1635년(인조 12년) 12월 5일에 창경궁 여휘당에서 아들을 사산, 그 충격으로 한씨는 산욕열에 걸려 나흘 후에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635년 12월 9일).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열(烈)이라 하여 '인열(仁烈)'의 시호를 받았다.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의 시호를 내리길 원하였으나, 대사헌이었던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의 의향대로 할 수 없다" 하여 바꾼 것이다. 전호는 숙녕(肅寧), 능호는 장릉(長陵)이다. 후일 정유(正裕)의 휘호를 받았으며, 아들인 효종이 명덕정순(明德貞順)의 휘호를 더 추상하였다.
인조는 인열왕후의 장릉(長陵)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만들어두었으며, 인조 승하 후에 효종이 그곳에 아버지를 봉릉하고 장사지냈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雲川里)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묘 주위에 뱀과 전갈이 살기 시작하자 영조가 현재의 파주 갈현리로 이장하였다.
자녀는 6남 1녀이나 안타깝게도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을 제외하면 모두 태어난지 얼마되지않아 죽었다.

3. 성격


왕가에 시집을 왔지만 중전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후덕하면서도 강단있는 성격으로 보였다.
현부인 시절에 살림이 어려워졌는데, 직접 자신의 재물을 모아 팔아서 살림을 꾸렸다고 한다. 왕비가 된 이후에 내명부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중전으로서 엄하게 다스려 내명부가 안정되었으며 자식 교육에도 엄격했다고 한다. 다만 자애롭과 관대한 면모도 보인 일화가 있는데, 인열왕후는 광해군과 폐비 유씨를 따른 나인들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기용했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광해군을 모신 노 상궁이 인조를 몰래 헐뜯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이는 사사를 당해도 할 말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처벌하지 않고 질책만 하고 넘어갔고 이후 오히려 소현세자의 관리를 맡겼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인열왕후는 인조반정 이후 피를 보는 일을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남편 인조에게도 항상 살생을 하지 말고 긴장의 경계를 풀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녀의 노력으로 인해 민심은 인조에게 향했다고 한다. 인조와 사이도 좋아서 6남 1녀를 낳았다.

4. 사망과 사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인 1636년, 당시로는 적지 않은 나이인 43세로 7번째 아이(아들)를 낳았다. 하지만 왕자는 곧 죽었고, 인열왕후는 정신적인 충격이었는지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출산 7일도 채 되지 않아 산실에서 사망한다. 이 때문에 인조는 왕비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고 왕실의 봉보부인인 응옥이 벌을 받아 강령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4]
그녀가 죽은 후에 바로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인열왕후의 아들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다.
3년 후 44살의 인조는 당시 15살이었던 조창원의 딸(장렬왕후)과 혼인한다. 장렬왕후가 너무 어려서 주변 후궁들의 세력이 커지자, 인열왕후가 철저하게 잡아 두었던 내명부의 기반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와 강빈 부부를 자주 모함하여 인조와 소현세자 간의 관계를 악화하게 만들었다. 그로인해 소현세자가 의문사를 당하고 조씨가 강빈을 음해하여 사약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만약 인열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끔찍한 비극은 아예 없었을 것이기에 그녀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운 죽음이다. 만약 그녀가 살아있는 상황이라면 며느리(강빈)을 죽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또 인열왕후는 법도를 엄히 지키는 여자였기에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소현세자 사후 적장손인 원손이 왕위를 계승했을 것이고 그녀는 대왕대비에, 세자빈인 강빈은 왕대비에 봉해졌을 것이다.
원주시 인동(仁洞)은 그녀의 출생지인데서 유래한 이름이며 인근 개운동에 인열왕후 탄생지비(誕生地碑)가 있다. 이 지비는 6.25 전쟁에서 불타 이후에 새로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특이한 점이라고 하면 대부분 언덕이나 도시 외곽에 보존되어 있는 여타 비석들과 다르게 도심 한복판, 그나마도 도로 코앞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

5. 창작물


1981년 KBS 드라마 대명에서 서우림이 연기했다.
1986년 MBC 드라마 남한산성에서 김도연이 연기했다.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 이승아가 연기했다.
어째서인지 조선로코 녹두전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이미 능양군의 부인이고 아들 이왕까지 있는 상태인데도 남편이란 놈은 다른 년놈들과 썸을 타고 있다...

[1] 한상경의 형이 한상질이고 한상질의 손자가 그 유명한 한명회다.[2]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와는 9촌이다.[3] 유영경, 한응인, 박동량,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 '''광해군일기''' 광해 즉위년 2월 2일 7번째 기사. 선조가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이 기사가 선조실록이 아닌 광해군일기에 등장하는 것에서 인조 정권의 광해군 정권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묻어난다.[4] 조선 시대 여성의 유배 기록은 많지 않은데, 왕이나 왕비가 사망했을 당시 어의를 벌주던 것과 비슷한 개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