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 남분 금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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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631호)과 금동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금동관 4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일괄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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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남분 금동관 4점의 주요 삽도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 신라 금관과 국가 통치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의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4점으로,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서기 300~400년대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7만여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당시 여성왕의 무덤인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금관인 황남대총 북분 금관이 발견되었고, 남성왕의 무덤인 남분에서는 모두 4점의 맞가지식 금동관과 황남대총 남분 은관이 발견되었다. 이중 4점의 금동관은 3개의 7단 맞가지식의 입식이 대륜에 장식된 점은 동일하나 대륜의 문양, 맞가지의 각도 등에서 변화를 보인다
대륜의 문양은 파상점선문인 것과 점선문으로 나누어진다. 맞가지식의 각도는 둔각에서부터 묘주가 착장한 금동관 같이 직각인 것이 있다. 4개의 금동관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맞가지식 입식이 직각이고 몸체 너비가 일정하며 곡옥과 보요 장식이 첨가된 묘주 착장의 금동관이 제일 마지막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녹각형 입식이 첨가된 것은 여성의 무덤인 황남대총 북분의 것이다. 북분의 관이 황금인 것은 남녀간 신분의 차이로 해석되기도 한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은 신라관의 완성 단계로 파악된다.
신라시대의 금동관은 금관총, 천마총, 금령총, 황오동 16호분 1, 2, 4곽, 황오동 32-1호분, 황오동 34호분, 인왕동 A군 1호 등 다수의 고분에서 출토되었으며, 경주 이외의 부산 복천동, 대구, 경산, 창녕, 양산 등지의 지역 고분에서도 신라식 금동관이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또한 신라는 5~6세기경의 금동관 대여섯점 정도만 출토된 백제, 고구려와는 달리 고대 국가 중 가장 늦은 7세기까지도 수많은 금동제 관들이 쏟아져나오는데, 7세기의 것들은 주로 새롭게 진출한 거점지역(단양, 상주, 파주 등)에서 출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현존하는 신라의 금동관은 대략 80여 점에 이르고 있다.국립나주박물관 - [지도] 신라지역 출토 금관. 금동관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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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KBS역사추적 - 17세 가야소녀는 왜 순장당했나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견된 남성왕의 금동관 4점 및 관꾸미개들은 경산 지역에서 발견된 경산 임당동 금동관과 양식이 거의 똑같아 학계의 눈길을 끌었다.
당시 신라는 가야를 직접 통치하는 대신 토착 지배세력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정책을 펼쳤는데,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출(出)자형 금동관이다. 이러한 금동관은 지역 유력자에게 신라 왕실에서 하사한 위세품(威勢品)이었다. 경주의 황남대총에서 경산 지역 지배자들에게 수여하던 하사품이 4점이나 나온 이유는 아직 미스터리이다.
또한 여성이 높은 신분을 상징하는 금관을 쓰고 남성이 그보다 낮은 금동관을 쓴 이유 또한 황남대총의 대표적인 미스터리로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에 황남대총이 4세기 내물왕의 무덤이라는 학설이 한중일 학계에 새롭게 대두되면서 이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한중일 학계에서는 황남대총의 축조 시기를 5세기로 잡았었으나, 2020년대의 최근에는 내물 마립간 시기인 4세기, 즉 서기 300년대 무렵으로 한세기 앞당겨 보고 있는데, 이종선 서울시립박물관장(고고학)은 저서 ‘고신라왕릉연구’에서 황남대총을 내물왕 부부의 무덤으로 보는 최근의 학설에 따라 내물왕이 미추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 가문이 보반부인에 비해 서열이나 세력에서 떨어지므로 왕비의 무덤에만 금관을 묻을 수 있었다고 설명하였다.동아일보 이 학설에 따르면 이 금동관들은 356년~402년 무렵에 사용되던 것이 확실하다.
지금으로부터 1,700여년 전, 신라의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로, 신라시대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사진 출처 : 황남대총 남분 은관(보물631호)과 금동관
1. 개요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금동관 4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일괄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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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남분 금동관 4점의 주요 삽도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 신라 금관과 국가 통치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의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4점으로,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서기 300~400년대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7만여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당시 여성왕의 무덤인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금관인 황남대총 북분 금관이 발견되었고, 남성왕의 무덤인 남분에서는 모두 4점의 맞가지식 금동관과 황남대총 남분 은관이 발견되었다. 이중 4점의 금동관은 3개의 7단 맞가지식의 입식이 대륜에 장식된 점은 동일하나 대륜의 문양, 맞가지의 각도 등에서 변화를 보인다
대륜의 문양은 파상점선문인 것과 점선문으로 나누어진다. 맞가지식의 각도는 둔각에서부터 묘주가 착장한 금동관 같이 직각인 것이 있다. 4개의 금동관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맞가지식 입식이 직각이고 몸체 너비가 일정하며 곡옥과 보요 장식이 첨가된 묘주 착장의 금동관이 제일 마지막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녹각형 입식이 첨가된 것은 여성의 무덤인 황남대총 북분의 것이다. 북분의 관이 황금인 것은 남녀간 신분의 차이로 해석되기도 한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은 신라관의 완성 단계로 파악된다.
신라시대의 금동관은 금관총, 천마총, 금령총, 황오동 16호분 1, 2, 4곽, 황오동 32-1호분, 황오동 34호분, 인왕동 A군 1호 등 다수의 고분에서 출토되었으며, 경주 이외의 부산 복천동, 대구, 경산, 창녕, 양산 등지의 지역 고분에서도 신라식 금동관이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또한 신라는 5~6세기경의 금동관 대여섯점 정도만 출토된 백제, 고구려와는 달리 고대 국가 중 가장 늦은 7세기까지도 수많은 금동제 관들이 쏟아져나오는데, 7세기의 것들은 주로 새롭게 진출한 거점지역(단양, 상주, 파주 등)에서 출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현존하는 신라의 금동관은 대략 80여 점에 이르고 있다.국립나주박물관 - [지도] 신라지역 출토 금관. 금동관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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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KBS역사추적 - 17세 가야소녀는 왜 순장당했나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견된 남성왕의 금동관 4점 및 관꾸미개들은 경산 지역에서 발견된 경산 임당동 금동관과 양식이 거의 똑같아 학계의 눈길을 끌었다.
당시 신라는 가야를 직접 통치하는 대신 토착 지배세력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정책을 펼쳤는데,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출(出)자형 금동관이다. 이러한 금동관은 지역 유력자에게 신라 왕실에서 하사한 위세품(威勢品)이었다. 경주의 황남대총에서 경산 지역 지배자들에게 수여하던 하사품이 4점이나 나온 이유는 아직 미스터리이다.
또한 여성이 높은 신분을 상징하는 금관을 쓰고 남성이 그보다 낮은 금동관을 쓴 이유 또한 황남대총의 대표적인 미스터리로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에 황남대총이 4세기 내물왕의 무덤이라는 학설이 한중일 학계에 새롭게 대두되면서 이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한중일 학계에서는 황남대총의 축조 시기를 5세기로 잡았었으나, 2020년대의 최근에는 내물 마립간 시기인 4세기, 즉 서기 300년대 무렵으로 한세기 앞당겨 보고 있는데, 이종선 서울시립박물관장(고고학)은 저서 ‘고신라왕릉연구’에서 황남대총을 내물왕 부부의 무덤으로 보는 최근의 학설에 따라 내물왕이 미추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 가문이 보반부인에 비해 서열이나 세력에서 떨어지므로 왕비의 무덤에만 금관을 묻을 수 있었다고 설명하였다.동아일보 이 학설에 따르면 이 금동관들은 356년~402년 무렵에 사용되던 것이 확실하다.
지금으로부터 1,700여년 전, 신라의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로, 신라시대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