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화(1913)
1. 개요
중국의 외교관. 중화인민공화국의 5대 외교부장을 역임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13년 직예성 자현에서 태어났다. 1935년 연경대학교 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일제의 화북분리공작에 항거하는 12.9 운동을 주도하여 베이핑 학생연합회의 책임자를 맡았다. 이후 대학을 중퇴하고 1936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 연안 소비에트에 합류하여 통역관을 맡았으며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우를 베이핑에서 섬북 지역으로 안내했고 이후 마오쩌둥의 인터뷰를 도와 <중국의 붉은 별>이 나오는데 일조했다. 이후 스노와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비롯한 서방 기자들의 연안 취재를 도우면서 중국 공산당의 언론전 승리에 기여했다.
1941년 주더의 정치비서가 되었으며 중공중앙 해외공작위원회 비서장을 역임했다. 1944년 미국의 딕시 사절단이 연안을 방문하자 예젠잉, 천자캉, 조지 하템 등의 1팀에 소속되어 연안의 환경이 살기 편하도록 보이는 공작을 맡았다. 중일전쟁 종결 이후 국민정부와의 협상에 참여했다. 1949년 난징 군사통제위원회 외사처 처장에 임명되어 미국을 비롯하여 중화민국의 기존 수교국들로부터 수교 대상을 중공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였으나 미국과의 협상은 결렬되어[2] 미국 대사 레이튼 스튜어트는 귀국길에 올랐다.
2.2. 외교관 생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6.25 전쟁 정전협상에 중국 대표로 참여했으며 저우언라이를 수행하여 제네바 회담에도 참석했다. 1958년 바르샤바에서 미중 대사급 회담에 참여했으며 1960년에 가나 대사 겸 이집트 대사에 임명되어 1969년까지 재임했다. 1971년 캐나다 대사에 임명되었으나 헨리 키신저의 방문을 맞이하기 위해 부임을 미루고 키신저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였을때 예젠잉과 함께 그를 영접했다. 1971년 11월 차오관화와 함께 유엔총회에 중국 부단장으로 참여하여 중국의 대표권을 중화민국으로부터 받아내고 중국의 초대 유엔 대표 및 안보리 대표를 지냈다. 이후 1973년 제10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덩샤오핑이 1975년 복권되어 정돈사업을 진행할 시에 그를 수행하여 외빈들을 맞이하는 것을 도왔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1976년 차오관화가 숙청되자 5대 외교부장에 임명되었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 덩샤오핑으로부터 미국에게 소련에 강경한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하라고 주문받았다.
2.3. 중일수교와 중미수교
1977년 제11기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가 파견한 일본 외상 소노다 스나오와 회담하여 중일수교에 대한 담판을 지었다. 결과 1977년 8월 12일 중일평화우호조약 체결에 성공했으며 1978년 10월 덩샤오핑의 방일을 수행하여 쇼와 덴노와 덩샤오핑의 회담에 배석했다. 1977년부터 미국 국무장관 사이러스 밴스와 만나 중국과 미국 수교 협상에 참여하여 미국에게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필요할 경우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1978년 5월 21일 방중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와 만나 세계 형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소련-서방 세력균형 문제에 대해 토의했다. 이후 1978년 6월부터 워싱턴을 방문하여 중미수교를 위해 열정적으로 논의했으나 11월에 병으로 입원하여 보좌관인 한녠룽이 대신 참석하였다. 12월에 퇴원하여 다시 중미수교에 대해 논했고 장징궈에게 더 이상 무기를 팔지 말라고 요구했다. 결국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미국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1979년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하자 그를 수행했다.
1980년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으며 80년 12월, 일본 외무장관 이토 마사요시와 일본 해외경제협회기금에서 장기 우대 차관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협정을 체결하여 일본으로부터 많은 차관을 받아냈다. 1981년 기니 정부로부터 기니 국가영예훈장을 수여받았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대만에 무기를 판매하자 이를 항의했다. 1982년 12기 중앙위원을 역임했으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사망하자 장례식에 중국 대표로 참석하여 브레즈네프를 칭송하며 중소관계의 호전을 꾀했다. 귀국 후 외교부장에서 사퇴했다. 1983년부터 88년까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7년 당중앙 고문위원회 상무위원에 임명되어 1992년 폐지될때까지 역임했다.
2.4. 말년
은퇴 후 덩샤오핑 평전을 저술한 에즈라 보걸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2007년 94세의 나이로 <직접 겪은 것과 보고 들은 것(親歷與見聞)>이라는 회고록을 내놓아 60년간 외교관으로 재직하면서 겪은 여러 에피소드를 술회하였다.
2010년 11월 24일,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으며 25일 신화통신에 의해 죽음이 보도되었다.
3. 참고문헌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덩샤오핑 평전, 에즈라 보걸, 민음사.
- 중국공산당 역사 2권 하,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미중화해, 이재방, 장덕환, 법영사.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