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clearfix]
1. 개요
'''America has no permanent friends or enemies, only interests.'''
'''미국에게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존재할 뿐이다.'''[2]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외교관, 행정가."키신저는 절대로 멍청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그를 믿는 사람들은 확실히 멍청한 사람들이죠."
대표적 정치현실주의자이자 보수주의 정치인으로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정부 시절 중요 관료였으며, 좋든 싫든 1970년대 미국의 외교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그는 정의나 감정에 치우친 판단보다는 미국의 국익을 위한 판단을 내렸지만, 이로 인하여 부정적 결과[3] 가 초래되기도 하였다. 특히 정치현실주의로 어떠한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성향[4] 으로 인하여 정통 보수주의자와 대안우파,[5] 진보주의자 모두에게 비판받았다. 197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지만, 그의 현실주의적이고 반 인도주의적인 행보로 인하여 가장 크게 비판받는 수상 중 하나로 언급되는 편.
'''1923년생'''으로 현재 '''98세'''이며, 현재도 정정히 생존중이다.
2. 상세
리처드 닉슨 대통령 밑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각료급. 우리나라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해당)과 국무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이 두 자리는 보통 서로 다른 관료들이 맡게 되어 있지만, 키신저는 이 둘을 자기가 번갈아 맡게 됐다. 1973~1975년에는 두 직책을 혼자 겸임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당시 미국 외교 정책의 전권자'''였던 인물이다. 닉슨 행정부 시기, 미*소 '전략무기 제한협정'(SALT), 중국과의 관계 개선 등을 통해 공산 진영과의 데탕트(Detente : 긴장완화)를 성사시킨 주역으로 유명하다.
한스 모겐소나 케네스 월츠와 같은 대가는 아니었지만 수준급의 학자였고, 그런 실력과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 국제정치에서 역사에 남을 업적을 달성했다. 국제정치학 전공자들 중에서 일종의 '''덕업일치'''를 이룬 대표적 인물. 부시 행정부에서 같은 코스(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 국무장관)를 걸었던 콘돌리자 라이스의 선배격.
그러나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 지원 문제에 관한 것 때문에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헨리 키신저의 악행이 '''세계기록유산에 공식적으로 등재되기까지 할 정도이기 때문에'''(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키신저를 냉전기 미국이 저지른 온갖 더러운 행위의 배후로 지목하며, 그를 전쟁 범죄자로서(인본주의자 입장에서) 국제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헨리 키신저는 세치 혀로 수백만의 죽음을 만들어낸 대악마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그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게 아이러니이기도 한데, 노벨평화상 수상자 가운데는 역설적으로 국제법정에 서야 할 자들도 많다. 죽어라 싸우다 화해했다고 주는 상도 꽤 되고. 노벨평화상의 경우 정말 평화나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정치적 행적에 의해 수여되는 경우도 많다. 사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요컨대, 수만 명이 죽는 전장에서 수백 명을 구해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지만, 전쟁질 해서 수만 명을 죽이다가 전쟁 그만둔 사람에게 수십만 명 안 죽였으니 참 잘했다고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존의 베트남전쟁이 이미 프랑스에서 평화 협상 진행 중이었음에도, 공산주의 세력 억제와 키신저 개인의 권력 획득 및 유지라는 이유로 당시 대통령 후보인 닉슨과 개인적인 줄다리기를 하면서 남베트남(월남)에 미국의 지원을 다짐시켜주어 전쟁을 2차전으로 끌어들여 수많은 전쟁사상자를 냈다는 것이다. 또한, 그 후의 평화협상 내용은 기존 전쟁의 평화협상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고 그의 전직 동료들이 확인시켜준다.
3. 생애
1923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본 이름은 독일식인 '하인츠 알프레트 키싱어(Heinz Alfred Kissinger)'였고, 헨리 키신저는 미국 이민 후 영어식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이민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에 위치한 시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회계학을 파트타임 학생으로서 공부했다. 1943년 초반에 미군에 입대함으로 학업이 중단되었다. 이때 훈련을 받으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다.
(벌지 전투에 참전 했었다는 기사 가 있다.)
미국으로 귀국해서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1950년 학사 학위를 최우수(summa cum laude) 성적으로 취득했다. 그 후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1951년에는 정치학 석사, 1954년에는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하버드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정부 관련 일을 했다.
1957년에 <핵무기와 외교>라는 저서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량보복전략'을 비판하여 학자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당시 키신저의 저서는 미국 뿐만 아니라, 적성 국가였던 '''소련의 군부'''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당시 소련 군부는 핵무기 만능주의를 맹신한 흐루쇼프가 100만 단위의 병력을 감축하고, 함대 건설 프로젝트를 취소하며 남은 자원을 미사일과 핵무기에만 쏟아붓자 이에 크게 반발하며 핵 보복에 대한 집착은 결국 멸망과 백기투항 두 개의 선택지만 남겨 놓을 것이라면서 그 근거로 키신저의 저서를 들었다.
아울러 그는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주도했던 '빈 체제'에 정통했다. 키신저의 박사학위논문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 1812-1822'')』가 바로 빈 체제를 다룬 논문이었다. 이는 훗날 자신이 외교관으로 재직할 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69년 리처드 닉슨이 미국 대통령이 되자 국가안보보좌관에 발탁되었다. 이 당시 키신저의 업적 중의 하나가 베트남전을 종식(정확히는 평화협상 체결)시킨 것이었다. 당시 호치민이 이끌었던 북베트남은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미국과의 협상을 거부했는데, 미국으로서는 아무리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어도 답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닉슨 행정부는 핵 전쟁으로 페이크를 걸면서 소련을 위협함으로써 소련을 움직여 북베트남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이렇게 허세와 쇼를 적절히 섞은 전략이 바로 '미치광이 전략'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을 상대로 이 전략을 구사하면서 유명해졌던 바로 그 전략이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미국은 미치광이 전략으로 모양새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는데 성공했다. 남베트남은 포드 행정부 시대에 망하고 말았지만.
1971년 7월, 미국 최고위급 인사 중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을 '''극비''' 방문했다. 이때 키신저를 맞이한 것이 예젠잉과 황화(1913). 미국 측 비밀 특사로서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을 개최, 저우언라이를 만나 미-중 양국의 관계 개선 방안을 논의했고, 이듬해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이 시기는 소련과 중국의 관계 악화가 심화중이던 시기이고 이때 미국은 중국을 미국편으로 끌어들여 이용해 소련을 견제해기 위함이었다.
1973년 닉슨이 재선되자 백악관 안보보좌관 직책에 국무장관까지 겸임하게 됐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에게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도 두 직책을 계속 지키다가 1975년에야 백악관 안보보좌관 자리를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에게 물려주고 국무장관 직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스코우크로프트는 예비역 공군 중장 출신으로, 10여 년 후 조지 허버트 부시에 의해 다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어, 1991년 걸프전 승리에 공헌했다. 1977년 지미 카터의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공직을 떠났고, 세계 외교계의 원로 대접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김대중 납치 사건 때 헨리 키신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것을 계기로 그와 개인적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키신저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예정된 일이었다며 축복하였고, 당시 국내 언론은 키신저를 평화의 전도사처럼 소개하였다.
물론 키신저는 결코 선의의 평화주의자가 아니며, 자국의 이익이라면 타국 정치에 대한 개입이나 독재에 대한 옹호도 서슴지 않은 어떻게 보면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였다.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키신저는 전형적인 '''고전적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학자로서도 한스 모겐소와 케네스 월츠 사이의 가장 중요한 현실주의 학파 국제정치학자 중 한 명이다. 이들은 도덕을, 승자의 정의이자 포장된 권력 유지 이념으로 보기 때문에 '''국제정치에서 합의 가능한 도덕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다.'''
그들에게 국제정치의 유일한 정의는 권력(power)과 국익(national interest)이다. 따라서 키신저의 냉정하고 교활한 국익 추구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파의 입장에서는 이견 없이 합리적인 것이다. 현실주의자들의 입장은 간단하다. 일견 비도덕적이고 냉혈하게 보이는 행동들이 도덕적 행동들보다 차라리 평화를 지키는데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타국에 대한 내정 간섭이나 독재에 대한 옹호로도, 중국과의 핑퐁 외교와 같은 유연한 정책으로도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키신저의 도덕성에 대한 공격은 현실주의 학파 전체에 대한 공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학파 발생 시기부터 자유주의 학파와 죽어라고 싸우느라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키신저가 네오콘의 스승이라는 공격도 있다. 그런데 키신저는 '''네오콘을 싫어했다.''' 심지어 '''전향한 놈들'''이라고 깠다[6] . 또한, 1960년대 미국의 트로츠키파 학생운동권이 이후 대거 네오콘으로 전향한 것을 두고 신뢰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 평가했다.
또한 키신저는 국무장관 시절 중국을 이용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파격적으로 친중 노선을 주도했던 사람이다. 현실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네오콘의 사상은 이상주의적이기 짝이 없는 순진한 발상이다. 미어샤이머를 비롯한 다수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뉴욕타임즈에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광고를 냈던 적도 있다.
'국가 간 상호 협력으로 평화 유지가 가능하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네오콘의 주장은 너무나 일방적이다. 이는 네오콘 자체가 국제정치학의 학파들처럼 깊은 학문적 뿌리를 가졌다기보다는 그냥 '''여기저기서 자기 입맛에 맞는 개념만 끌어다가 만든 키메라'''에 가깝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의외로 NLL이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발언했었던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 #
과도하게 공약을 지키려는 당선 초기 도널드 트럼프에게 모든 공약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친러 인사를 국무장관으로 기용한 건 훌륭한 선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기사에 따르면 키신저가 닉슨이 중국을 이용해 소련을 견제한 것처럼 훗날 강해지는 중국을 상대로 러시아를 이용해야 한다고 예견했다고 한다. # 헨리 키신저는 미국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개선되길 바란다며 그 시간이 곧 올 것이라고 밝혔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판데믹으로 인해 국제질서가 영원히 바뀔 수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에 칼럼을 기고했다.#
4. Realpolitik
키신저의 외교, 정치관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바로 현실정치(Realpolitik) 이다. 이념이나 도덕보다는 현실적 권력에 따라서 정치, 외교를 수행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론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20세기 초 유럽과 전 세계에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를 퍼트리려고 한 '윌슨주의'(Wilsonianism)가 이상정치(Ideapolitik)에 가깝다면 (물론 현실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상관 없다고 말하는 키신저의 주장은 현실정치에 해당한다. 키신저 본인은 자신이 이상정치(Ideapolitik)와 현실정치(Realpolitik)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고 해명한다.
5. 비판
[image]
키신저에 대한 도덕적인 비판은 곧 정치현실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과도 밀접하다. 키신저의 정치현실주의는 국익의 측면에서도 상당한 실책을 범했다. 키신저의 정치현실주의 정책은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장기적인 판을 말아먹는 정책이었다.''' 키신저의 정책은 MAD에 의거해 미소 냉전이 끝없이 계속되는 상황을 가정하여 수립된 것이었는데, 이는 베트남전과 중소 분쟁 이후 다원화의 형태로 흘러가는, 즉 서로 같아보이는 세력이더라도 내부적으로는 여러 파벌이 나뉘어 갈등이 일어나는 시대상을 무시한 단편적인 결론이었다.'''키신저를 기소하지 못한다면 어떤 초거대 권력도 법을 초월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원칙이 침해당할 것이며, 전쟁 범죄나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어떤 제3세계 독재자도 법정에 세울 수 없을 것이다.
키신저 혼자서만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정말로 역겨운 일이다. 우리가 그처럼 역겨운 상황을 방치한다면, 법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만 강한 거미줄과 같다는 고대 철학자 아나카르시스의 주장을 옹호하는 수치스러운 꼴밖에 안 된다.
이제 유명 무명의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름으로 법의 심판을 가할 때가 되었다.'''크리스토퍼 히친스, <키신저 재판> 中
대표적인 예로 미국을 지지해주기만 하면 독재 정권조차도 옹호하고 지원했다. 이런 모습은 미국이 민주주의의 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냉전이 지속되면서 자본 민주진영 VS 공산 독재진영이라는 레토릭과는 달리 수많은 독재 정권이 친미 정책을 피며 정권을 유지한 사례가 생겼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의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에 환멸감을 심어주었고, 장기적으로 수많은 국가에 반미감정을 확산시켰으며, 민주주의 진영의 명분을 퇴색시켜 친미 동맹의 결속력을 극도로 약화시켰다. 이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그토록 중시한 미국의 실리도 훼손하였다.
냉전사의 권위자 토니 주트는 키신저가 메테르니히를 자주 참고했음을 지적하며, 중남미 정책 뿐만 아니라 그의 경력 전반을 조롱한다. "키신저는 (그의 학창 시절 연구주제인) 자기가 닉슨이라는 품격 떨어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보필하는 메테르니히라는 착각과 허영에 빠져 있었다. 막상 자신의 직업은 전제군주의 가신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국무부 직원이며, 헌법과 여론의 구속을 받는다는 사실은 망각했다"라며, 그는 키신저와 닉슨이 구축한 비밀스럽고 독단적인 대외 정책 수렴 과정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국무부, 국방부, 의회의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며 밀실정치로 이루어지는 대외 정책 결정이 미국의 민주주의와 장기적인 대외 정책 방향성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밀실정치식 정책 결정은 주로 당대의 적국인 '''소련'''에서 이뤄졌다. 지하운동을 하던 비밀결사 시절의 버릇이, 스탈린 시기에 그대로 국정 운영 방식으로 정착되어버린 것. 토니 주트가 했던 해당 발언은 폴아웃: 뉴 베가스에서 아케이드 개넌이 카이사르를 깔 때 약간 변형되어 등장한다.
사실 이러한 비판은 키신저가 롤 모델로 삼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행보와도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메테르니히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눈 앞의 단기적 이익에 골몰하다가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에게 최후 통첩을 보내는 등 빈 체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이는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이라는 민족주의 국가의 탄생과 1차 대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해체되는 결말을 맞이하였다. 키신저의 정책도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이익을 생각해 접근하다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 것을 보면 묘한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
5.1. 남미
가장 유명한 사례는 칠레이다. 그는 1973년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데 분명한 책임이 있다. 당시 그가 칠레 군부를 지원할 의도가 있었음을 CIA 문서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후 군부 독재 정권이 들어서자 "반공 전선" 운운하며 환영했다.
그러나 민주 정권이 들어서고 피노체트의 실상이 드러나자, 그는 칠레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모임에서 누군가가 칠레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그의 보좌관들이 막아 서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중에 칠레에서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증인으로 소환 요구를 하자, "내가 이걸 해도 될 지 모르겠습니다."라면서 병을 핑계로 출석을 거부했다.[7] 그는 이에 대해 여러 차례 변명했다. "그때 당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칠레 국민에게 유감을 표시한다."
1976년 아르헨티나의 쿠데타도 묵인, 지원해서 이사벨 페론 정부가 붕괴되고 호르헤 비델라의 군부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또한, 키신저는 남미 근-현대 역사상 최악의 정치 탄압인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을 조장했고, 브라질과 우루과이, 볼리비아, 파라과이의 독재 정권이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것에 대해서도 묵인하였다. 그리고 이 콘도르 작전 과정과 결과에 의해서 희생당한 남미인들은 최소 6만 명 이상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콘도르 작전에 참여한 국가는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 브라질 등이며 이 과정에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을 통해서만 최소 1만에서 최대 3만이 사망했고, 1만여 명이 실종되었다.
1992년 발견된 '공포의 문서'에서는 이 과정에서 5만 명이 살해, 3만이 행방불명, 4만이 투옥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재판은커녕 최소한의 조사도 없이 체포한 사람들을 헬기나 군함에 태워 '''바다에 수장'''한 일이 수천 건이다) 이러한 탄압은 198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지다가 중남미 전역이 민주주의의 길로 접어들면서 끝이 났지만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이 남미에서 독재정권을 오히려 옹호해준 꼴이 되었으니 비웃음거리가 된 건 덤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남미 군사독재정권들의 행태가 수록된 기록물들이 세계기록유산에도 당당히 수록되는 영광(?)까지 안았으니 '''정말로 빼도박도 못 한 일이 되었다.'''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에서 200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1960년대부터 80년대 초중반까지의 군사독재정권의 행적에 대한 기록물들을 유네스코에 신청해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는데[8] 미국에 대한 기록물들도 상당수 들어 있다.
2000년대에 기밀 해제된 미국 정보 문서에 의하면, 키신저는 남미 지역의 쿠데타에 대해서 쿠데타 당일에도 해당 정보를 보고받았다. 이는 콘도르 작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중남미 국가들은 헨리 키신저에 대해서 치를 떨고 있으며, 키신저는 냉전 이후로 중남미 국가들을 전혀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냉전사의 권위자인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이를 두고 '''"소위 현실주의자라고 자뻑하는 인간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근시안적인 착각과 음모에 심취하여 장기적인 판을 말아먹는다"'''며 키신저의 중남미 정책과 그의 대외관 자체를 신랄하게 깠다.
도덕성 문제는 너무 심각해서 논외 수준이고, 현실주의자가 주장하는 '실익'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손해를 봤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냉전 이후 2000년대에 반미 정권들이 집권하고 미국의 개입으로 막장화된 남미 국가들이 마약을 재배해 미국에 팔기 시작하면서 미국도 마약 문제에 시달리는 등 장기적으로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다만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 중남미에서도 좌파세력의 힘이 약해지면서 미국과의 관계도 개선되는쪽으로 바뀌고 있다
5.2. 베트남
키신저는 베트남전을 끝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여기에서 그는 협정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려고 북폭(폭격)을 확대하는 무리수를 저질렀으며, 출구전략을 만드는 과정에서 핵 협박을 했다. 그래서 공동수상자로 지명된 베트남 정치가 레둑토는 노벨평화상을 거부했다. 정작 키신저가 노벨상을 받은 뒤에 터진 사건도 가관이다. 월맹은 고작 3년 뒤에 협정을 날렸고, 월남은 월맹 때문에 사라졌다. 게다가 협상 파트너였던 레둑토는 그저 전시 지도자라서 전쟁에서 이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평화는 나중 문제라서 자기가 상을 받을 까닭이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와 비교되면서 헨리 키신저에게는 더욱 능구렁이 위선자 이미지가 박혀버렸다.
5.3. 캄보디아
베트남전이 고착상태로 빠져들고 점점 전황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닉슨 행정부는 적의 보급로(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고자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동부 베트남 접경지역을 폭격하기로 결정했다. 캄보디아가 정신나갔다고 자국 영토를 폭격하는 걸 좋아할 리 없었을 테고, 여기에 (꽤나 공산권과 사이가 좋았던)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은 길길이 날뛰며 미국을 비난했으나 그게 해가 바뀌어 1970년이 되자 상황이 뒤바뀌었다. 바로 친미 성향의 론 놀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누크를 축출해 버린 것이다.[9][10] 이때 키신저는 캄보디아에 친미 정부가 들어서는 것에 환영하는 입장이었으며 묵인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지원까지 해줬을 거란 의혹을 사고 있다.
미국을 사실상의 뒷배경으로 업고 쿠데타를 성공한 론 놀 정부는 곧바로 미국의 폭격을 용인하는 쪽으로 180도 선회했다. 여기엔 왕당파 잔당과 국지적으로 활동하던 게릴라(이들은 후에 크메르루즈의 전신이 된다)들을 소탕하기 위한 론 놀 나름의 명분도 있었던 걸로 보인다. 거칠 게 없어진 미국은 베트남전이 종전을 맞기까지 신나게 스봐이 리응과 껌퐁 참 지역을 수시로 폭격했다. 미국이 '얼마나 열심히' 원래 목적인 "적 보급로 차단"을 수행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불투명하나 무차별 폭격으로 수많은[11] 캄보디아 민간인들이 학살되었으며 이는 국민들이 미국과 캄보디아 정부에 극심한 반감을 가지기에 아주 좋은 빌미가 되었다. 결과는 킬링필드라는 대학살로 돌아왔다. 키신저 나름의 현실주의 철학이 돋보이는 부분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또 정작 1975년에 론 놀 정부가 크메르루즈에게 털리고 캄보디아가 공산화 됐을 땐 (그땐 미국에도 워터게이트 사태가 터져서 정권이 바뀌긴 했지만) 그냥 신경을 꺼버렸다. 키신저가 물러난 이후인 지미 카터 행정부는 더 문제였는데,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벌어지자 '''(후임자) 카터 정부는 은근히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카터 행정부 시절 백악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 '중국과 태국에 '''폴 포트'''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라고 말한 것이나, 동남아 국가들에 무기를 대줘서 이 무기가 크메르 루즈에게 흘러들어가게 했다거나 하는 일들이 줄줄이 드러났다. 이건 정말로 완벽한 뻘짓이었는데, 우선 크메르 루즈도 공산주의 쪽인 것은 마찬가지였고 미국 정가는 이들과 베트남 공산정권의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실제로는 베트남은 친소에 가까웠고, 크메르 루즈는 친중에 가까우면서 소련을 수정주의 취급했다는 등의 정치이론적 차이가 존재했다. 도덕성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이 최악이었다.
즉, 카터 행정부가 크메르 루즈를 지원한 것은 순전히 자신들을 약 올린 베트남을 엿먹이기 위한 목적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크메르 루즈는 단순한 공산주의 독재정권이 아니라 역사상 유례가 없는 학살자였다. 이 때문에 캄보디아에서 미국의 평가는 최악이다. 위의 중남미의 경우처럼 실제로 현지 상황과 현지의 외교적 조류와 역사, 세세한 집단 간 역학 관계는 하나도 제대로 모르면서 대충 자국의 색안경에만 보이는 편견과 눈 앞의 이익만 따라가다 미국의 대외 정책 역사에 씻을 수도 없는 진득한 오점만 하나 거하게 싸지른 경우로, 이 역시 위의 중남미의 경우 처럼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적 게으름과 근시안적 사고방식'이란 비판이 딱 들어맞는 경우라 하겠다.
6. 저서
- Diplomacy: 키신저의 저작 중에서는 빈 체제부터 냉전까지의 외교사를 총망라해 가장 학술적으로 유명하다.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 같은 굵직한 사건들 역시 다루는데 보통 전쟁 자체의 진행, 전투들에 주목하는 다른 책들과 다르게 정말 외교 부분만 깊게 다루고 특히 1차 세계대전 직전의 막장 외교상황과[13] 2차 세계대전 말미의 거두들의 회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서술하고 있으니 전쟁의 진행상황과 전쟁사가 아닌 전쟁의 발단, 전후처리와 외교사를 더 알고 싶다면 읽는 것을 추천한다. 외교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비스마르크의 활약에 대해서도 꽤 길게 서술하고 있다. 참고로 책에서 사용되는 영어 단어가 어려운 수준은 아니고 비슷한 단어와 표현을 꽤 자주 쓰는 편이라 사전을 붙들고 읽을 필요는 없으나 문장이 길고 꼬여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태어나고 배운 독자라면 읽기 힘들수도 있다.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안에서 번역을 완료해 교정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2018년 현재까지도 출판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이 책을 국제정치학 강의교재로 쓰는 대학교 학생들은 영어실력이 급상승한다 카더라. 다크서클은 덤. 실제로 한 출판사에서
의 번역서 출간을 계획했으나, 해당 출판사의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번역본 출간 작업이 백지화되었다.[14]
-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On China): 2012년 민음사에서 출판됐다. 자신이 저우언라이, 마오쩌둥과 만나 핑퐁 외교를 전담했던 얘기를 다룬 것같지만 훼이크고 걍 중국 현대사를 외교사 위주로 구성해 집필한 것이다.
- 세계 질서(World Order): 미국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계 질서. 한국인으로서 그냥 이해하기 힘든 미국인의 생각을 알기 위해 읽으면 좋다. 아무래도 디플로머시보다는 훨신 짧고 전반적인 외교사, 특히 유럽 외교사를 다룬 디플로머시와 다르게 중동, 아시아 등 여러 지역의 비교적 최근 외교 정세를 주로 다루기 때문에 꽤 읽는 사람이 많다. 미군 장교들은 거의 다 이 책을 알고 있을 정도. 2016년 7월 민음사에서 출간했지만 번역이 개판이라 비판을 받았고 이 때문에 최형익 교수가 감수한 감수본이 새로 나왔다. 디플로머시를 읽은 후 읽으면 책 앞부분이 디플로머시 앞부분 요약처럼 느껴질 수 있다.[15]
7. 매체
7.1. 책
- 니얼 퍼거슨이 그에 대한 일대기를 집필했다. 제목은 '키신저, 이상주의자'이다. (Ferguson, Niall, Kissinger. Volume 1, The idealist, New York : Penguin Books, 2015.)
- 국내 시간 여행 대체역사소설 동해의 새벽에선 미국을 움직여 일부 강대국들과 세계 질서를 재편함과 동시에 지배하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계획하고 실행한 비밀결사 프리메이슨의 최고 직급인 그랜드 마스터로 등장한다.
7.2.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선 템플 기사단의 일원으로 피노체트, 앱스테르고 사와 서로 짜고 쿠데타를 도와 줬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트로피코 4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크레인 대사는 키신저를 모델로 한 듯. 다만 캐리커처는 다른 인물의 것이다.
7.3. 영화
[image]
왓치맨에 등장. 미국배우 프랭크 노박이 분했다. 소련이 곧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것을 보고하며 매우 음험한 인상으로 등장하지만 비중은 별로 없으며 대체역사물로서의 특징을 살리기 위한 역할에 그쳤다. 로버트 위스든이 분한 닉슨과 거의 커플 수준으로 붙어다니고 "대담한 행동! 헨리, 그게 필요해 저 개새끼들이 우릴 얕봐선 안 돼!"라고 흥분한 닉슨에게 "예, 모두가 빡돈 리처드 닉슨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속삭이며 왠지 모르게 흑막같은 느낌도 준다. 이후 막판엔 초토화된 뉴욕을 보고 흥분한 닉슨이 "세상에 헨리! 어째서 소련놈들의 선제공격을 우리가 알아내지 못했지?"라고 외치자 "대통령님, 방금 공격은 소련이 아니라 '''닥터 맨하탄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끝이다.
[image]
올리버 스톤 감독이 제작한 리처드 닉슨의 전기 영화인 <닉슨>에서도 등장한다. 미국 배우 폴 소르비노가 분했다.
[image]
바이스에서는 커크 보빌이 분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등장인물인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외모를 노골적으로 키신저의 모습을 본땄다. 영화의 내용이 핵전쟁을 비꼬는 반전 영화임을 생각하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7.4. 애니메이션
퓨처라마에서 DOOP가 아무런 이득도 없는 행성을 점령하기 위한 기획으로 리처드 닉슨은 헨리 키신저에게 협상을 맡기지만 이 협상은 사실 행성 지도층을 날리기 위한 것이라는 게 밝혀지게 된다.
심슨 가족 시즌 5 에피소드 10에서 잠깐 등장한다. 안경을 변기에 빠트렸는데, 그걸 호머가 가져갔다(...) 헨리는 결국 안경없이 길을 나서다가 부딪쳤다고.
로봇 치킨에서는 포켓몬 대결에서 한지우가 상대하는 트레이너의 포켓몬으로 뜬금없이 등장한다. 주 공격은 전쟁범죄(...)라고.# 그래서 키신저는 폭격기를 소환하더니 피카츄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1] 전직 독일 총리였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와 성이 같다. 다만 키신저는 Kissinger를 사용하지만 키징어 총리는 약간 다른 Kiesinger를 사용한다.[2] 영국 수상이었던 헨리 템플의 격언을 변형한 말이다.[3] 대표적으로 피노체트 정권 지원으로 인한 대량학살[4] 대표적으로 데탕트 시대의 개막으로 인하여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친중으로,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신자유주의 독재정권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 지원으로 인한 극우로 몰려서 비판받는다. 전부 도덕적 판단보다는 미국의 국익을 우선시하여 결정한 판단이다.[5] 특히 대안우파 내에서는 사실상 천하의 개쌍놈 취급으로 대안우파 만평가로 유명한 벤 개리슨의 경우 헨리 키신저를 데탕트를 실행시켜 공산권을 살려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빨갱이들 중 하나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여기고 있다. 거의 버니 샌더스와 함께 대안우파의 주적들 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 아무래도 헨리 키신저 자체가 강경한 보수이기보다는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유연한 편이기에 강경 보수인 대안우파와 전혀 맞지 않고, 헨리 키신저는 기본적으로 고전 보수주의에 틀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역시 대안우파와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키신저는 신자유주의자인데, 대안우파의 핵심 이념 중 하나가 반세계화, 반 외세개입, 반 신자유주의이다. 그야말로 보수 진영 내에서는 대안우파의 정반대에 서있는 인물인 셈.[6] 로버트 W.메리 저 "모래의 제국"[7]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키신저 재판 출처.[8] 파라과이 : 공포의 문서, 칠레 인권 문헌 자료, 아르헨티나 인권자료집 1976-1983; 브라질 군사 정권의 정보 및 반정보 네트워크 기록물군.[9] 당시 캄보디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한지 20년이 채 지나지 않았으며 여전히 시아누크는 곧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민족의 아이콘이었다.[10] 시아누크는 이때부터 크메르루즈에 가담하는 등 길고도 파란만장한 망명 생활을 하다가 결국 다시 왕위로 돌아와 2004년에 현재의 왕인 시하모니에게 왕위를 물려주기까지 통치했으며 지금도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11] 베트남 접경지역인 캄보디아 남동부 스봐이 리응 지역에서 최소 4만 명 이상 사망 - 크메르루즈 학살 통계 L'Harmattan, 1995[12] 기파랑 출판사처럼 강성 친미 우파 성향의 책을 주로 출간하고 있다. 해당 성향의 일원인 국제정치학자 이춘근의 저서도 여기서 출간 중.[13] 특히 어떻게 유럽이 전쟁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밖에 없었는지[14] 더 정확히는, 저 출판사의 대표가 국민의 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계에 진출하면서 번역본 출간 사업이 무기한 보류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15] 사족으로 조승연 작가가 뽑은 자신의 인생 역사책 3권 중 하나로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