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곤잘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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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뛰었던 전 야구선수. 별명은 '''이고르'''[2]
2. 텍사스 시절
1986년 아마추어 자유계약[3] 으로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한 후안 곤잘레스는 마이너 시절엔 딱히 돋보이지 않는 타격성적을 찍었다. 그러나 .293의 타율과 21홈런을 기록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한 1989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였고 1991년부터 풀타임을 소화했다. 1991년 21세의 나이로 27홈런 102타점이라는 준수한 활약을 펼친 그는 참을성 없이 아무 볼에나 방망이가 나가는 막스윙을 펼치면서도 화끈한 장타력을 바탕으로 새미 소사와의 중견수 경쟁에서 살아남았고[4] , 1992년에는 마크 맥과이어를 한개차로 제치고 43홈런으로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에 오른다. 이듬해 1993년에는 다소 공갈포 기질이 있던 이전과 달리 3할 타율까지 달성하는 대활약으로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첫 실버슬러거를 가져간다.
1994년에는 선수노조 파업과 부상의 여파로 기대에 못미치는 19홈런을 기록했으나 이듬해에는 (역시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90경기에서 27홈런 82타점을 기록한다. 그로부터 다시 40홈런의 사나이로 발돋움하며 1996년[5][6] 과 1998년 MVP, 98년 2루타 1위와 타점왕[7][8] , 96~98 실버슬러거 3연패의 기록을 남겼다. 1996년에는 ALDS에서 팀이 4경기만에 탈락하는 동안 5홈런을 갈기는 괴력을 발휘했다.
3.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시절
1999년을 마치고 그는 블록버스터 트레이드[9] 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로 이적하게 되는데,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일급 타점머신이었던 그에게 디트로이트는 8년 $140M이라는 당시 기준으로나 지금 기준으로나 어마어마한 계약을 오퍼했으나 곤잘레스는 이를 거절하고 FA 시장에 나가기로 한다. 하지만 부상과 투수친화적인 광활한 구장의 문제[10] 가 겹치며 FA로이드는커녕 FA 시즌을 망쳐버린다. 그는 결국 1년 $10M이라는 비교적 헐값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FA재수나 다름없는 계약을 맺었다.
몸값 깎이고 잘하기라도 하는걸까, 그는 다시금 최고의 타점머신으로서의 면모를 회복하며 다시금 올스타에 선정되고 실버슬러거를 가져가는 대활약을 펼친다.
4. 텍사스 복귀, 그리고 은퇴에 이르기까지
클리블랜드와의 계약이 만료된 그는 다년 계약을 노렸지만 2년 2400만 달러의 계약을 제시한 친정팀 텍사스 레인저스로 복귀한다. 그리고 400홈런 클럽에도 가입하는 등 향후 쿠퍼스타운을 노릴 수 있는 타자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70경기에서 OPS 8할을 채우지 못하는 부진을 겪고 이듬해에도 90경기 출전에 그치는 등 친정팀에게 마지막 좋은 인상을 남기는데 실패하고 시즌 후 자유계약으로 풀린다. 그리고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계약하지만 등 부상으로 제 기량을 펼치는데 실패하고 이듬해 클리블랜드에서는 첫 타석에서 내야 땅볼을 치고 달리다가 햄스트링이 완전히 찢어지는 큰 부상을 입고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리게 된다. 이후 독립리그인 아틀란틱 리그의 롱아일랜드 덕스와 계약하나 또 부상. 그렇게 2007년은 푸에르토 리코 리그를 뛰는 것 외엔 푹 쉬고, 2008년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스프링캠프에 합류하지만 복부 통증으로 인해 세인트루이스 측으로부터 건강해져서 돌아오라는 통보를 받고 푸에르토 리코로 귀국하나 돌아오지 못했다.
한때는 고향 베가 바하 야구팀의 구단주 겸 지명타자로 활동했고
현재 모국 푸에르토리코 야구 대표팀 감독이다.
5. 약물 복용과 HOF 투표 결과
2005년 호세 칸세코의 자서전이 발간되었는데, 그는 이 책에서 마크 맥과이어, 제이슨 지암비, 라파엘 팔메이로, 이반 로드리게스, 그리고 후안 곤조를 약물 복용자로 지목했다. 그런데 퍼지를 제외한 앞선 세명은 모두 도핑 테스트에 걸리거나 BALCO 스캔들에 연루되거나 또는 스스로 스테로이드 복용을 인정하는 등의 형식으로 약물복용이 까발려졌다. 이고르도 예외는 아니어서, 미첼 리포트에 의해 약물 복용자로 지목되었고, 결과적으로 1990년대를 호령했던 타점머신의 위엄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선수 본인은 강경하게 부인하고 있다지만 명예의 전당을 노리던 강타자의 면모는 온데간데 없이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2회만에 탈락하고 말았다. 30대가 되며 훅 간게 걸리긴 하지만 20대에는 알버트 푸홀스 부럽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던 것을 생각하면 처참한 결말.
6. 기타
- 여자 문제가 좀 그렇다. 결혼을 4번이나 했으니... 첫 아내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포수로 활동한 하비 로페즈의 누이였다고. 그리고 두번째 아내 올가 타뇬[11] 과의 사이에서 딸이 있는데, 전세계 50명 뿐인 세바스찬 증후군[12] 환자라고 한다.
- 레인저스 구단주였던 조지 W. 부시 前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라고 한다.
- 푸에르토 리코 윈터리그 산 후안 세너터스에서 당대의 여러 전설적인 선수들과 드림팀을 이뤄 캐리비안 시리즈에서 우승한 적이 있다. 카를로스 델가도, 루벤 시에라, 로베르토 알로마, 버니 윌리엄스, 카를로스 바에르가, 에드가 마르티네즈가 이고르와 함께한 멤버들이라고.
- 굉장한 커리어에 비해 마구마구에서는 안습취급 당하는 외야수중 한명이다. 그도 그럴것이 도루수에 비례해서 스피드를 책정하는, 게다가 외야수의 수비능력중에 첫째덕목이 스피드인 마구마구에서 통산 26도루의 선수가 좌익수나 우익수수비를 보는것은 핵탄투를 짊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는 매니 라미레즈, 짐 에드몬즈, 랜스 버크만, 괴물시절의 배리 본즈, 좌익수 시절의 알버트 푸홀스가 있다.
[1] 미국 내 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 출신.[2] 어린 시절 프로레슬러 Igor The Magnificient에 반해 스스로를 이고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3] 비슷한 시기 새미 소사가 입단했고 2년 후에는 이반 로드리게스가 입단한다. 더 어릴 적 푸에르토 리코 유스 리그에서는 버니 윌리엄스의 뒤에서 4번타자를 맡았다고. [4] 이후 소사는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 되었고 그 이후엔 같은 시카고 팀으로 이적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각성하여 MVP가 된다.[5] MVP를 차지한 1996년부터 포지션을 우익수로 옮겼다.[6] 다만 1996년 MVP는 30홈런 100타점에 2루타도 54개나 쳤으면서 타율 0.358로 역대 최연소 타격왕에 오른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받았어야 되었다는 말이 그 당시에도 엄청 많았었기에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MVP 중 하나이다. WAR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두 선수의 WAR을 비교해보자면 후안 곤잘레스의 WAR 는 3.8,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WAR는 9.4 였다. 물론 둘다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다는 점에서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내용이다.[7] 1995년부터 1998년까지 경기당 1타점 이상이라는 비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514타점/511경기)[8] 1998년에는 전반기에만 무려 101타점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한시즌 최다타점의 주인공인 핵 윌슨이 해당시즌 전반기 78경기에서 겨우 82타점을 기록한 것과 비교했을때는 정말 어마어마한 페이스였고 팬들은 200타점까지 기대했으나 45홈런 157타점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전반기에 후안곤조보다 많은 타점을 기록한 선수는 행크 그린버그(103타점) 뿐이며 곤조의 뒤를 잇는 선수는 2013년의 미기(95타점)와 크데(93타점)이다. 전반기 최다홈런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는 2001년의 본즈(39홈런)이다.[9] 텍사스 레인저스 get 프랭크 카탈러나토, 프란시스코 코데로, 빌 헤이즐먼, 게이브 캐플러, 저스틴 톰슨, 앨런 웹.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get 대니 패터슨, 그렉 자운, 후안 곤잘레스 [10] 전형적인 풀히터였고 타격 친화 구장인 알링턴 야구장에 익숙했던 이고르에게 너무나 먼 좌측 담장은 큰 부담이었기에 구단에 좌측 펜스 당겨달라고 땡깡을 부리기도 했다.[11] 가수인데, 이고르가 첫 아내와 결혼 중일 때 푸에르토 리코 산후안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이고르에게 키스를 하더니 이고르가 아내와 이혼해버리고 타뇬과 결혼해버렸다.[12] 혈액이 응고되는 장애의 일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