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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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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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욕 양키스가 기나긴 침체를 걷고 있을 무렵[2] 마리아노 리베라, 데릭 지터, 호르헤 포사다, 앤디 페티트와 함께 양키스 왕조의 재건을 이루어낸 5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또한, 리그 최고의 수비력을 가진 중견수로 활약했으며,[3][4] 실제로 양키스는 버니 윌리엄스의 기량이 쇠퇴하면서 쓸만한 중견수를 구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2. 선수 경력
2.1. 뉴욕 양키스와 계약을 맺다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야구보다는 음악 쪽으로 더 큰 재능을 발휘하던 윌리엄스였지만 양키스에서 푸에르토리코로 파견한 스카우트 로베르토 리베라는 버니 윌리엄스를 보고 차세대 데이브 윈필드[5] 로 판단, 윌리엄스가 17세 생일을 맞자마자 바로 직접찾아가서 계약을 맺는다.
2.2.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윌리엄스는 양키스 팜의 최고 유망주로 성장했고 게다가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데이브 윈필드의 뒤를 캐기 위해 사설 탐정을 고용하다 적발되면서 직무 정지를 당하는 바람에 메이저리그 무대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1991년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윌리엄스는 1993년부터 양키스의 주전 중견수로 활약하였고 매해 두 자릿수 홈런과 10개 안팎의 도루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1995년부터 2002년까지 8년 연속 3할타율을 기록하였으며 1998년에는 타율 0.339를 기록하여 타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6]
특히, 포스트시즌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불방망이를 휘두르며 윌리엄스는 양키스팬들에게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된다.[7][8]
그러나 윌리엄스는 타격보다는 수비에서 더욱 더 큰 실력을 발휘했는데 1997년부터 2000년까지 4년연속 외야수부문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며 양키스의 외야를 견고하게 지켰다. 당시 같은 중견수 자리에서 수비로 라이벌 관계를 가졌던 선수가 켄 그리피 주니어였다. 둘을 비교하자면, 그리피는 몸을 사리지 않는 다이나믹한 수비를 펼쳤고, 윌리엄스는 안정적이면서 우아한 수비를 선보였다.
윌리엄스가 활약한 이 기간동안 뉴욕 양키스는 6번의 월드 시리즈 진출[9] 과 4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10] 을 한다.
3. 은퇴, 그리고 그 후
2003년, 부상을 당하며 40여 경기를 쉬어야 했던 윌리엄스는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였고 이 후, 나이도 30대 중반에 들어서며 내리막을 걷게 된다. 결국 2006년을 끝으로 윌리엄스는 메이저리그에서 은퇴한다.[11]
그리고 그 후, 윌리엄스는 음악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이미 재즈 기타리스트로 유명하던 그는 선수생활을 하던 2003년에 《The Journey Within》이라는 앨범을 발매했다.
2012년에는 KC 카우프먼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스타 퓨처스 게임에서 월드 팀 감독을 맡았다.
2015년 2월 16일(현지시각), 호르헤 포사다와 함께 뉴욕 양키스의 영구 결번자로 확정, 이로서 양키스는 앤디 페티트를 포함하여 한 해에 3명이나 영구 결번시키는 진기록을 쓰게 되었다.
3.1. 뉴욕 양키스의 영구결번 No.51
버니 윌리엄스의 No.51에 대한 영구결번식이 2015년 5월 24일(현지시각) 뉴욕 양키스의 홈구장인 양키 스타디움에서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데릭 지터, 마리아노 리베라, 호르헤 포사다, 앤디 페티트, 폴 오닐, 티노 마르티네즈, 데이비드 콘과 조 토레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12]
이로써 이제 공식적으로 양키스의 영구결번이 된 버니 윌리엄스의 No.51에 대하여 좀 더 부연해보면, MLB에서 51번을 달고 뛴 투수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명예의 전당 헌액자 '빅 유닛' 랜디 존슨은 양키스로 이적하여 버니 윌리엄스와 함께 뛰던 '05~'06년 시즌에 이제껏 자신이 이전 팀들에서 사용하던 51번이 버니와 겹치는지라 이 번호 대신에 41번으로 바꾸어 달았었고,[13] 버니 윌리엄스가 '06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로서의 커리어가 중단된 이후에 양키스의 일원이 되어 '12~'14년 시즌을 함께한 스즈키 이치로도 양키스에 몸담았던 동안만큼은 버니 윌리엄스를 존중하여 51번이 아닌 31번을 자신의 져지번호로 하였었다.
버니 월리엄스는 그의 고향#s-1인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져지번호를 No.51으로 정한 것이란다.
4. 플레이스타일
우투양타로서 활약하던 윌리엄스는 스위치히터의 재발견을 이루어낸 선수이기도 하다. 매 시즌마다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으며 전성기때는 3할타율과 20~30개의 홈런, 90~120타점을 기록해내는 타자였다. 또한 도루 수는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빠른 판단력과 빼어난 풋워크를 바탕으로 주루플레이에서도 강점을 보인 선수였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윌리엄스의 진가는 타격보다 수비에서 발휘되었는데 중견수로서 통산 수비율이 0.990에 달할 정도로 상당히 안정적으로 외야를 지킨 선수였다. 결국, 윌리엄스의 은퇴 후, 양키스는 윌리엄스를 대신할 중견수를 구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자니 데이먼, 멜키 카브레라 등이 양키스의 중견수로 활약했지만 윌리엄스만큼의 수비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이 문제는 커티스 그랜더슨의 영입으로 어느 정도 해소된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안정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세이버매트릭스 진영에서는 그의 수비가 과대평가되었다고 본다. UZR, DRS를 기준으로 하면 그의 수비는 최고는 커녕 맷 켐프보다 못한 수준이다.
5. 음악가
윌리엄스는 재즈 기타리스트로도 유명한데 선수생활 중이었던 2003년에는 《The Journey Within》이라는 앨범을 발매했고 선수생활을 마친 현재는 전업 음악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윌리엄스는 유명인이 그냥 심심풀이로 음반을 내는 것과는 달리 미국 재즈계에서도 최고의 레이블로 손꼽히는 GRP[14] 의 소속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9년 발매한 ''Moving Forward''로 그래미상 라틴음악 부문에 후보로 오를 만큼 실력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또한, 폴 오닐이 양키스에 있던 시절의 양키스 클럽하우스에서는 윌리엄스의 기타와 오닐의 드럼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6. 명예의 전당 입성 실패
3000안타를 기록하지 못했고 500홈런도 기록하지 못하는 등 누적스탯이 뛰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선수들[15] 이 약물복용을 한 것으로 드러난 이후에는 버니 윌리엄스는 깨끗한 이미지로 어느 정도 플러스요인을 받았다.
그러나 첫해에 투표율이 고작 9.6%에 머무르고 둘째 해에 5%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명예의 전당 입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7. 연도별 기록
[1] 미국 내 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 출신.[2] 강팀이기는 했지만 1981년 월드 시리즈 준우승 이후로 15년 간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3] MLB AL 골드 글러브(OF) 4회('97, '98, '99, '00).[4] 다만 세이버 스탯으로는 2013년의 추신수, 맷 캠프의 중견수 수비급 재앙으로 평가받는다. 로빈슨 카노와 에릭 호스머가 세이버 스탯으로는 나쁜 수비수지만 현장에선 좋은 수비를 한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한 사례.[5] 그러나 윈필드는 양키스 유니폼을 입던 시절을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양키스팬들도 윈필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데이브 윈필드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때, 가장 오랫동안 뛰었던 뉴욕 양키스가 아닌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모자를 쓰고 입성한다.[6] 이 시즌을 마치고 FA가 되었는데 양키스에게 예상보다 섭섭한 대우를 받자 보스턴 레드삭스행을 결심하기도 했지만 양키스가 알버트 벨을 붙잡는데 실패하자 다행히 잔류가 확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벨이 양키스로, 버니가 레드삭스로 갔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7] 2015시즌까지를 기준으로 통산 포스트시즌#s-2.1.2 기록이 경기수: 3위(121), 타수(AB)-타석수(PA): 각각 2위(각각 465AB-545PA), 득점: 2위(83), '''안타#s-3: 2위(128)''', 총루타수: 공동 2위(매니 라미레즈와 함께 223), 2루타: 2위(29), '''홈런: 2위(22)''', '''타점: 1위(80)''', 볼넷: 3위(71), 삼진: 4위(85)(...), 단타: 2위(77) 등 거의 모든 누적스탯의 상위권에 랭크되어있다.통산 및 단일시즌 포스트시즌 타격리더 - 베이스볼 레퍼런스[8] 물론 버니 윌리엄스에 앞서 뛰었던 레전드 선수들과의 객관적인 비교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이, 일단 이 선수의 현역시절엔 리그 챔피언십과 월드 시리즈만 치르던 메이저 리그의 포스트시즌#s-2.1.2에 디비전 시리즈가 추가되어 경기수가 늘어났고, 또한 양키스가 버니 윌리엄스의 전성기에 월드 시리즈의 단골손님이었다는 걸 감안해야한다.[9] 1996, 1998, 1999, 2000, 2001, 2003[10] 1996, 1998, 1999, 2000[11] 강팀이었던 양키즈에서는 후보가 되기도 힘들었지만 전력이 약한 다른팀으로 이적한다면 충분히 메이저 경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평가였다. 양키맨으로 남기 위해서 커리어 연장을 포기한것.[12] Yankees retire Bernie Williams' No. 51, unveil Monument Park plaque - ESPN.[13] 랜디 존슨의 No.51은 '15년 1월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14] 포플레이, 데이브 그루신, 리 릿나워 등이 이 레이블의 주요 뮤지션이다.[15] 배리 본즈라든가 마크 맥과이어라든가 새미 소사라든가 로저 클레멘스라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