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1. 개요
스페인의 체육인, 외교관. 위의 명칭에서 볼 수 있듯 스페인의 귀족이기도 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제7대 위원장을 역임한 인물로 유명하다.
2. 생애
경영학을 전공한 후 기자로 활동했으며, 한동안 가업인 섬유업에 종사하였다. 1955~1962년에는 바르셀로나 시의 체육 분야 공무원으로 재직했고, 1964년부터는 10여년 동안 스페인 하원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의 철권 통치 말기에 해당했고, 때문에 이 때의 전력으로 그가 독재 정권에 부역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프랑코 총통의 사망으로 스페인이 민주화된 후에도, 그는 체육부 장관과 바르셀로나 주지사 등을 지내며 승승장구하였고, 1977년에는 소련 대사로도 임명되었다. 이러한 경력으로 공산권에서도 외교적 지지를 얻었고[4] , 마침내 198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제7대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IOC 위원장으로 무려 20년 동안 재임하였고, 1980~1990년대 세계 스포츠계의 명실상부한 최고위 거물로 군림했다. 이는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이 약 30년 동안 위원장으로 재직한 것에 이어, 2번째로 긴 장기 재임 기록이다. 그는 재임 기간동안 올림픽의 세계적 열기를 부흥시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스포츠의 상업화를 부추겼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의 유치 과정에서 불거진 뇌물, 부패 사건이 대표적. 당시 프랑스에선 사마란치에게 "쿠베르탱의 유골은 올림포스에서 쉬고 있지만 사마란치의 유골은 월 스트리트에 뿌려질 거다"라는 야유가 나왔을 정도다.
2001년 자크 로게에게 위원장직을 넘겨주었고, 2009년 덴마크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는 2016년에 열리는 제31회 올림픽 유치전에서 모국인 스페인의 마드리드를 지원하는 데 참여했다.[5] 이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듬해인 2010년 4월 21일에 향년 89세로 타계했다. 그의 사후 바르셀로나의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기념관이 '사마란치 올림픽-스포츠 기념관'으로 개명되었고,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경기장도 '사마란치 올림픽 홀'로 바뀌었다.
3. 한국과의 관계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당시의 IOC 위원장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서울의 개최를 확정짓는 1981년 독일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의 "세울~!" 발표도 그가 한 것이었다. 서울평화상의 첫번째 수상자로도 선정되긴 했는데, 이 상 자체가 논란이 많은 편이다.
사마란치와 11살 차이로 IOC 부위원장을 역임한 김운용과는 비교적 원만한 사이였으나[6] 2001년의 후임 위원장 선출을 두고 갈등을 빚자 자크 로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결정은 이후 김운용이 몰락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사적으로는 친구로 남았고, 2010년 사마란치가 타계하자 김운용이 조의를 표할 정도로 애증의 관계였다.
또한 그는 한국의 2002 월드컵 개최에도 큰 힘을 보태주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요청으로 당시 피파 회장이였던 주앙 아벨란제와 만나 엄청 압박을 주었다. 이는 김운용의 사마란치 회고록에도 나온다.
4. 기타
- 1남 1녀를 두었는데 그와 이름이 같은 아들인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1959~)도 현재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다. 그런데 정작 사마란치 후작위는 딸인 마리아 테레사가 승계 받았다. 스페인 귀족작위 계승법이 2000년대에 절대장자상속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 모국어인 스페인어 외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1] 카탈루냐어 이름은 조안 안토니 사마랑 이 토렐료(Joan Antoni Samarach i Terelló)다. 통용되는 명칭은 여기서 이름 부분만 스페인식으로 바꾼 것이다. 즉, 성씨 부분은 원래 카탈루냐식으로 읽어야 한다.[2] 사마란치 뒤에 있는 사람들 중, 왼쪽 두 번째의 인물이 프랑코다.[3] 사진에서 프랑코 옆의 왼쪽에서 첫 번째, 송충이 눈썹을 달고 있는 사람은 후기 프랑코 정권의 2인자이자 73년 총리로 지명을 받았던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Luis Carrero Blanco) 해군 제독으로 보인다. 그는 프랑코 정권의 가장 유능한 실무자로서 프랑코 사후 후계자 자리가 확실했지만, 그 위세가 정점에 달했던 1973년(프랑코가 서거하기 불과 2년 전)에 바스크계 독립 테러 조직 ETA의 폭탄 테러로 인해 살해당했다. 결국 프랑코는 급히 후계자 선정을 다시 해야 했고,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후안 카를로스 1세였다.[4] 이는 프랑코의 서거 전후인 1970년대의 스페인이 미국 및 자유 진영으로부터 외면받던 중립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30년대 후반 파시스트 정당으로 내전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프랑코는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끊임없는 참전 요구를 거절하고 납작 업드려 있었는데 그 덕에 연합군에 점령당하는 것을 면했지만, 파시스트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 뒤로 오랬동안 미국과 서방 세계에서 왕따를 당했었다.[5] 여기서 마드리드는 끝내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패했고, 2016년 올림픽은 다들 알다시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렸다.[6] 특히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측 IOC 위원이었던 박종규가 사망하자 한국 정부는 '''노태우'''를 비롯한 정권 주변 인사들을 검토중이었는데 사마란치가 대놓고 김운용을 적극 지지했다. 이에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마란치를 설득하려 했지만, 도리어 사마란치는 '''"김운용 말고는 안 된다. 만약 다른 사람을 고집할 경우 한국은 IOC 의원 없이 올림픽을 개최해야 할 것이다."'''라고 완강한 입장을 나타냈고, 결국 전두환이 물러서야 했다. IOC 위원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진 IOC 위원장이 김운용을 직접 추천한 것이니 제 아무리 전두환이라 해도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