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야르 왕국
1. 개요
힘야르 왕국은 과거 예멘 및 남부 헤자즈 지역에 존재했던 베두인계 왕국으로 성경에도 나오는 사바 왕국을 정복하고 한때 메카와 메디나 지역까지 세력을 떨칠 정도로 강성했다. 그러나 콥트교를 믿는[2] 에티오피아 악숨 왕조가 예멘 지역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지원을 받은 후 힘야르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2. 역사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제국의 기록에는 기원후 1세기 무렵 '''Homerite'''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하며, 사바(Saba') 왕국의 오랜 중심지였던 마리브(marib/ma'rib)가 아닌 자파르 인근에서 초반 정복활동을 벌였다. 기원전 25년경 쇠락해가던 사바를 정복한 뒤 기원후 200년경에는 카타반(Qataban), 300년경에는 하드라마우트(Hadhramaut/Ḥaḍramūt)를 정복하고 280년경에 사바의 마지막 잔존세력에 막타를 가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사실 인과관계를 따져보자면 카타반과 사바는 2세기 초반에 힘야르 본토에서 떨어져 나갔다가 카타반을 하드라마우트가 정복했는데 힘야르한테 얻어맞고 카타반을 다시 토해내고 사바를 힘야르가 재정복한 뒤 하드라마우트마저 힘야르가 정복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두 나라가 떨어져 나가지만 않았으면 그냥 하드라마우트 하나만 굴복시켜도 될 일을 100년 넘게 온갖 뻘짓을 해가면서 겨우 수복한 것이나 다름없다.
기원후 380년경에는 왕이 에티오피아에서 물 건너온 유대교로 개종하면서 비유대인 국가가 유대교를 믿는 상황이 되었다. 옆 나라인 에티오피아 악숨 왕국은 339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한창 콥트교로 발전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북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오히려 로마 제국의 기독교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도 아닌 유대교를 믿은 덕분에 서로 적대하는 두 제국 사이에서 정치적 및 종교적 중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농업 외에도 중계무역으로 먹고 살던 힘야르의 상업 발달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기원후 390~400년경에는 북부 아라비아(정확히는 헤자즈 지방)에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군대를 보내기도 했으나 현지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실패하고, 나중에 이슬람교의 성지가 되는 메카 지방까지 정복하는 것에 만족하게 된다. 그러나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힘야르 왕국의 확장지향적 정책을 좋지 않게 보았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의 상인들이 힘야르 영토 내에서 살해당한 것을 명분삼아 악숨에게 힘야르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악숨의 대대적인 공세로 인해 525년 멸망하였다. 그러나 악숨은 힘야르 멸망 이후 점령 지역에서 가혹한 통치를 했다. 악숨은 반란 세력과 외부의 베두인 부족들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고 마리브 댐의 붕괴 위기로 근방에 대혼란이 일어나자 철수하고 말았다.
3. 언어, 문화, 경제
기본적으로 유구한 전통을 지닌 사바 왕국의 문화에 베두인 특유의 문화, 그리고 유대교 개종 이후에는 유대 전통이 합쳐진 형태로 나타났으며 메소포타미아나 고대 그리스의 양식이 섞인 동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지정학적 특성상 항해에 특화되기도 해서 동아프리카 연안의 무역도시들에 자국의 문화를 전파하고 큰 영향력을 가했다. 반대로 자국보다 문화가 더 발전한 대국인 동로마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등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힘야르 왕국을 지탱하는 산업 구조의 근간은 댐과 관개 수로를 이용한 집약적 농업이었으며, 이외에 몰약이나 유향 등 고급 향료들을 인도와 동로마 제국에 공급하고 아덴 항을 중심으로 수단에서 소말리아에 걸친 동~북아프리카 지역과 인도, 페르시아, 시리아 등지를 연결하는 무역을 중계하는 것을 주된 교역 방식으로 삼았다.
힘야르 내부에서 쓰였던 공용어는 힘야르어(Himyaritic language)였다. 이는 셈어파에 속하는 언어였지만 당시 남부 아라비아 반도와 에티오피아에서 광범위하게 쓰였던 고대 남부 아라비아어군과의 관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에티오피아에서 쓰였던 언어인 암하라어와는 계통이 가깝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연관성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힘야르와 악숨 사이에서 많은 문화적 교류(혹은 충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4. 여담
당시 힘야르 왕국은 아라비아 반도의 모든 부족들 및 연맹국가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아라비아 전역의 힘의 균형을 맞추는 데에 일조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와 악숨 왕조에 의해 힘야르가 멸망한 이후에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라비아 남부에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하기 시작했고 유력 부족들 간의 잦은 싸움으로 인한 레반트 지역의 혼란을 가져왔다. 더 나아가서 아라비아를 꽉 잡고 있던 유대교 세력이 날아감에 따라 다수의 종교들이 공존하고 섞이게 되고 이는 '''이슬람의 탄생'''이라는 중대한 결과까지 가져오게 되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오히려 악숨과 연합하여 사산 왕조를 포위하려 했을 수도 있었다. 당시 악숨과 로마는 같은 기독교국가이자, 동맹국가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그렇게 되기는 커녕 이해관계가 없어 거리낄게 없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으로 결국 이 결정은 동로마가 이집트, 시리아를 상실하고 마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한편 동로마는 이슬람의 흥기를 막을 다른 세력 역시 스스로 날려먹었는데 유스티누스 2세와 티베리우스 2세 시절에 충성스러운 베두인계 속국이었던 가산 왕국의 명군 문디르 3세가 그 주인공. 문디르 3세의 군사적 재능은 탁월했으며 사산 왕조에 원정을 떠났을 때 로마군과 함께 페르시아 영내에서 포위되었을 때에도 이를 쳐부수고 귀환했고 이후 로마 제국이 원정에서 입은 큰 손실을 회복하는 일 때문에 지원군을 보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페르시아와 그 속국 라흠 왕국의 연합 군세를 모조리 격파했다. 심지어 라흠 왕국의 경우 공격할때마다 격파하고 역습을 가해 수도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로마는 이런 그를 경계했고 따라서 그를 암살하려 하거나 감옥에 가두는 트롤짓을 반복했다. 이는 제국에 대한 아랍인들의 신뢰도를 낮추었고 그 결과 동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이 되었고 결국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이슬람 세력이 만들어지는 원인 중 하나를 낳는 꼴이 되었다.
게임 토탈 워: 아틸라에서 사막 왕국 DLC로 플레이 가능한 세력으로 나온다. 주 종교는 유대교와 셈 다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