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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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국민정부 중앙감찰위원'''
'''한문'''
謝持
'''한국식 독음'''
사지
'''영문'''
xiè chí
''''''
명삼(銘三)
'''출생'''
1876년, 청나라 쓰촨성 푸순현[1]
'''사망'''
1939년 4월 16일, 중화민국 쓰촨성 청두시
'''국적'''
청나라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 [image]
'''학력'''
노주경위학원
'''직업'''
정치가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5. 말년과 죽음
3. 참고문헌
3.1. 저서
3.2. 논문


1. 개요


청말의 혁명가, 중화민국의 정치인.
국민당 우파 원로들의 모임인 서산회의파의 주요 인물로 국민혁명 시기에는 반공활동을 전개했으며 반장전쟁 시기 반장파를 원조하여 반장활동을 하였으나 1차 양광사변 이후로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쓰촨성 푸순현 사람. 7세에 사숙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899년 회양서원에 들어갔다. 1902년, 우위장 등과 함께 노주경위학원(瀘州經緯學院)에 진학했으며 지역 관리들의 부패 행위를 고발하다가 1907년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여 고향인 쓰촨성과 산시성에서 혁명활동을 전개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1년 충칭시 바현의 여자사범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참여했다.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시작되자 1913년 계축전쟁에 참여했지만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쑨원이 재조직한 중화혁명당에 가입했다.
이후 호법운동이 전개되면서 광동 군정부에 참가했다가 1923년 국공합작이 추진되면서 후한민, 왕징웨이, 린썬, 리다자오와 함께 의장단을 조직하여 쑨원의 중국 국민당 개조 논의에 참여했다. 1924년 1월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거행되면서 1기 중앙집행위원 선거가 실시되자 덩쩌루, 우징헝, 리스쩡, 장쥐와 함께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공산당에 대하여 국민당을 내부에서 잠식하려는 것으로 간주하고 1924년 6월 18일, 덩쩌루, 장계와 함께 쑨원에게 <공산당 탄핵안>을 제출하여 국민당 안에 가입한 공산당원은 공산당적을 버리거나 국민당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당에 이에 반발하여 셰츠 등을 공격했고 1924년 8월 중국 국민당 1기 2중전회는 "본당에 가입한 공산주의자는 그 행동이 중국 국민당의 주의와 정강에 합당하였는가 또는 아닌가에 대하여만 책임을 물을 수 있고, 그 밖에 대하여는 물을 수 없다."고 결의했다.

2.2. 서산회의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하고 이어 재정부장 랴오중카이암살되자 왕징웨이, 미하일 보로딘을 주축으로 하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득세하여 랴오중카이 암살의 배후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외교부장 후한민을 소련으로 보내고 군정부장 쉬충즈를 숙청하였다. 또한 중산대학 교장 겸 청년부장 쩌우루린썬에게 화북에 국민혁명을 전파하라는 구실로 광저우에서 추방하여 국민당 우파 세력을 거의 실각시켰는데 셰츠는 분노하여 서산회의에 참여, 돤치루이 임시집정정부를 비판하였으며 린썬과 함께 <민치주의동지회>를 조직하여 돤치루이를 비판하는 군중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서산회의의 결의에 따라 상하이에 독자적인 당중앙을 수립하였다. 1926년 1월, 광저우 중앙은 셰츠를 국민당에서 영원히 제명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서산회의파의 최고 강경파로 자리매김하여 광저우의 손문주의학회를 비롯한 반공우파 조직의 결성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26년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크게 환영하였으며 상하이 당중앙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출두하여 회의 주석으로 선출, 중산함 사건에 대해 보고했다. 그리고 광저우로 가서 공산당 및 국민당 좌파와 사생결단으로 싸우자고 주장하는 등 매우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셰츠는 광저우로 회의장소를 옮긴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회의를 종결시켰다. 이후 심정일과 함께 광저우에 특파원으로 파견되고자 했으나 천궁보가 만약 상하이에서 대표가 온다면 즉각 체포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관계로 광저우행을 단념해야 했다. 이때 장제스에게 자신들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으나 장제스가 서산회의파를 국민혁명의 대업을 방해하고 총리를 불신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자 장제스와 틀어지게 되었다.
1926년 6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상하이에 추방되어 있던 쉬충즈를 통해 광저우 측 대표인 샤오위안충과 만나 광저우 중앙과의 합작에 대해 논의했으나 청당이 있기 전에 합작은 있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2.3. 국민혁명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일단 북벌에 대해 지지한다는 입장을 확인하고 사태를 관망하였으나 공산당이 국민당 내부를 잠식하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공산당과 단절한 장제스가 후한민의 제의에 따라 6월 7일, 서산회의파의 당권을 회복한다고 결의하면서 서산회의파에 대한 화해의 손길을 내밀자 서산회의파의 지분을 요구하며 자파 세력 확대를 꾀했다.
국공결렬 이후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의 합작이 타진되자 이때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 9월 15일 성립된 중앙특별위원회에 참가하였다. 9월 16일, 셰츠는 왕징웨이, 차이위안페이와 함께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한때 서산회의파는 계계군벌과의 합작으로 다시 국민당의 지도층을 장악하는가 싶었지만 당계전쟁, 장황사변 등의 급변 이후 장제스가 다시 권좌에 복귀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특히 1927년 11월 22일에 발생한 난징 참안에서 셰츠는 다른 서산회의파 함께 배후로 몰리면서 입지가 크게 좁아졌다. 셰츠는 이것이 장제스 측의 조작이라고 항변했으나 1927년 12월 3일 4중전회 1차 예비회의는 셰츠와 쥐정 등 서산회의파 일원 10명에게 직권정지 및 행동감시 처분을 내렸다. 12월 4일, 서산회의파의 권력 기반이었던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해체가 결정되면서 서산회의파는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셰츠는 특위 존속을 위해 린썬, 쑨커, 리쭝런과 회동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그나마 서산회의파에 우호적이던 리쭝런, 바이충시마저도 장제스의 복직이 기정사실이라 인정하게 되면서 장제스 복직에 대한 축하를 표하고 자신들이 그간 장제스의 복직에 찬성해왔다는 입장을 밝힘에 따라 서산회의파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져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쥐정, 쩌우루, 쉬충즈 등은 해외시찰이란 명목으로 중국을 떠나야 했으며 셰츠는 상하이에 칩거하였다. 1928년 1월 장제스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복직하자 셰츠는 이를 권력지향적 태도라고 맹비난했으며 4중전회의 소집은 국민당의 분란을 가져오는 행위일 뿐이라 비판했다.

2.4. 반장전쟁


상하이에 칩거하던 셰츠는 중앙임시간부위원회를 설립하여 반장활동을 전개하더니 1928년 5월, 광저우를 방문하였다. 광저우 정치분회 비서장 샤오위안충은 셰츠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그를 방문했는데 셰츠의 목적은 광동의 서산회의파를 결집하는 것이었다. 셰츠는 국민당 광동성 당부 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재직하던 중산대학 교수 황계륙과 과거 상하이 당중앙 비서장이었던 구이충지와 회동하여 그들에게 반장활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황계륙과 구이충지는 각각 3전대회 쓰촨성 대표와 장시성 대표를 맡아 후보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됨에 따라 서산회의파와 단절하게 되었다.
1928년 11월 7일, 국민정부는 셰츠를 쓰촨성 정부위원 겸 건설청장에 임명하면서 회유했지만 셰츠는 취임을 거부했다. 이에 국민정부는 셰츠를 3전대회 쓰촨성 대표로 지목하고 3전대회에 출두할 것을 요구했으나 셰츠는 이 역시 거부하며 장제스를 비판했다. 1929년, 호남 사건을 계기로 1차 장계전쟁이 발발하자 5월 중순 셰츠는 쥐정, 쉬충즈와 함께 광저우에서 회동하여 <호당혁명대동맹>을 조직했다. 이들은 계계군벌과 연합, 반장전쟁에 참여했으며 장제스는 서산회의파를 원로로서 우대하던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셰츠를 체포하여 총살하라고 지령했다. 1차 장계전쟁이 계계군벌의 패배로 끝나자 셰츠는 다른 서사회의파 일원들과 함께 북방으로 이동,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파에게 장제스 타도를 위해 연합하자고 호소하는 <반장선언>을 발표했다. 1929년 12월 12일, 난징 국민정부는 셰츠의 국민당적을 박탈하고 지명수배령을 하달했으나 셰츠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12월 13일, 장제스의 출국을 요구하는 전보를 발표했다. 그러자 국민정부는 국무회의의 명의로 셰츠에 대한 수배령을 내림으로 탄압의 강도를 높혔다.
2차 장풍전쟁장당전쟁 등이 모두 실패로 끝나지 셰츠는 쩌우루와 함께 평진으로 이동, 옌시산을 설득하여 반장파에 가담하도록 종용하는 한편 왕징웨이의 개조파와도 힘을 합쳐 적극적인 반장세력 규합에 나섰고 마침내 옌시산의 반장선언을 이끌어내어 1930년 중원대전을 일으켰다. 옌시산이 베이핑 국민정부를 수립하자 셰츠는 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며 8월의 확대회의와 태원약법 작성에 참여, 장제스의 훈정 체제를 독재라 비판했으나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이 장제스를 옹호하면서 중화민국 육해공 부사령관에 취임, 북방에서 가세하면서 베이핑 국민정부는 붕괴되고 셰츠 등은 타이위안으로 피해야 했다. 결국 장제스의 압박으로 펑위샹, 옌시산 등은 모두 하야하여 도주했다. 셰츠 등도 11월 3일, 타이위안을 피해 모두 피할 수밖에 없었다.

2.5. 말년과 죽음


1931년 2월, 탕산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입법원장 후한민이 감금당하고 장호합작은 붕괴되었다. 이에 반장파는 광저우에서 재결집,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는데 이때 서산회의파도 참여하였으나 톈진 조계지에 은거하던 셰츠는 참여하지 않았고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광저우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의 합류를 호소했다. 이때 편측마비로 인하여 반신불수가 되었으며 1932년 장제스가 복직하자 친장 입장을 취했다.
1931년 12월에 열린 4차 전국대표대회와 1935년 11월에 열린 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부위원 겸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쓰촨성 청두에서 거주하며 항일운동을 하였다. 1939년 중일전쟁 중 사망했다. 국민정부는 국장을 거행하여 그를 추모하였으며 시신은 청두에 안장되었다. 동지 쩌우루가 그를 위해 묘비를 썼으며 셰츠의 고향인 쯔궁시는 셰츠를 기념하여 쯔궁시의 중심공원을 혜생(慧生)공원으로 개명했다.

3. 참고문헌



3.1. 저서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송경령 연구, 이양자, 일조각.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의 공화혁명, 민두기, 지식산업사.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중국의 국민혁명과 상해학생운동, 정문상, 혜안.

3.2. 논문


  • 西山會議 召集에 대한 各界의 反應, 김영신, 동국사학.
  • 黨務에 관한 결의를 통해 본 西山會議의 본질, 유지원, 김영신, 중국학연구.
  •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 우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김영신, 동양학.
  • 北伐 前後 中國國民黨의 內紛 : '上海中央'의 활동과 廣州中央의 대응을 중심으로, 김영신, 중국근현대사연구 4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국민당 3전대회 전후의 반장운동, 김영신, 중국학연구 30권, 중국학연구회.
  • 訓政時期約法 제정 논란과 ‘蔣·胡合作’의 파국, 김영신, 동양학 42권,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원.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중국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