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폭동

 

1. 개요
2. 배경 : 독일 내외부의 환경
3. 독일투쟁동맹, 그리고 바이에른 정부
4. 맥주홀
5. 사후처리
6. 뮌헨 폭동의 의의
7. 뒷이야기


1. 개요


1923년 11월 8일~9일동안 바이마르 공화국 뮌헨에서 있었던 국가 전복 시도 사건. 이 사건으로 '''아돌프 히틀러'''라는 지역 극우 정치인이 일거에 전국구 스타 정치인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뮌헨 폭동, 뮌헨 맥주홀 쿠데타, 맥주홀 폭동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2. 배경 : 독일 내외부의 환경


베니토 무솔리니로마 진군은 사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아니었으면 실패했을 확률이 매우 높은, 어설픈 도박이었으나 결과론적으로는 대성공하여 정권을 차지했고, 이는 유럽 각지의 극우세력과 파시스트들에게 일종의 롤모델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프랑스레몽 푸앵카레 정권은 1923년 1월 벨기에와 함께 군대를 파병하여 독일의 루르 지방을 점령한다. 이는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상의 전쟁배상금 지불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강제징수'''를 위해 선택한 극단적 방법으로서 라인란트 일대가 동 조약상 독일군의 주둔이 금지된 지역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문제는 프랑스의 일방적인 영토 불법점령에 이념과 진영을 뛰어넘어 전 독일인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안겨다주었다는 것이고,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베를린의 중앙정부에 대한 지지가 상승했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공공연히 무력항쟁을 선택하지 않은 중앙정부에 대한 비판, 그리고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이 혼재되어 있었다.
바이에른 지방은 베를린 등 프로이센 지역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뮌헨에서 있었던 사회주의 정권의 진압에 기반한 강력한 우파진영의 근거지가 되었고, 좌파세력이 강했던 베를린에 대한 불만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3. 독일투쟁동맹, 그리고 바이에른 정부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3년 9월 1~2일 뉘른베르크 독일의 날 집회에서 극우파 세력들은 <독일투쟁동맹>이라는 연합단체를 결성하였다. 나치당과 오버란트 동맹, 제국깃발 등 온갖 남부 극우단체들이 결집하였고, 에른스트 룀의 사전공작으로 히틀러는 독일투쟁동맹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나치당과 달리 투쟁동맹에서 히틀러는 절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이는 투쟁동맹 자체가 애시당초 다양한 생각과 꿍꿍이를 가진 이들의 오월동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투쟁동맹 참여자 중에 힌덴부르크와 함께 명콤비로서 탄넨베르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있었다.
오히려 히틀러가 투쟁동맹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잡고 있었다면 쿠데타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문제는 투쟁동맹 내에서의 불확실한 위치로, 투쟁동맹 내부에서 쏟아져나오는 '''결단''', '''거사'''와 같은 요구와 압력을 거스를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투쟁동맹 내 중간간부진들도 '''경제난과 사회혼란 속에서 투쟁동맹 조직원들 및 일반인들이 극좌로 넘어갈 수 있다'''며 그러한 일이 발생하기 전에 결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이에른 주 정부는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에 사실상의 독재권을 부여했다. 카르는 극좌파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극우세력의 집회요청도 대부분 불허하는 등 적극적으로 치안을 통제했다. 내부의 압박 속에서 바이에른 정부마저 이렇게 나오자 히틀러는 바이에른의 우파민족적 정부 역시 '''결국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된다.
사실 바이에른 주 정부 인사들도 결코 민주적인 양반들은 못되었다. 이 인간들도 프로이센과 그들이 중심이 된 베를린의 사회민주당 좌파 정권에 대해 분노하긴 매한가지였고, 이들은 투쟁동맹을 이용만 하고 팽한 다음에 베를린의 좌파 정부를 타도하고 군부독재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카르, 그리고 바이에른 주 경찰청장 한스 리터 폰 자이서, 바이에른의 독일군 지휘관 오토 폰 로소프 3인이 주축이 된 바이에른 정부 세력은 로마 진군을 모방, 바이에른과 그 주변의 준군사조직 및 무장단체를 총동원해 베를린으로 진군한 다음 거국적 독재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이를 위해 베를린의 육군총감 한스 폰 젝트와 면담했으나 젝트는 이 어설픈 계획에 전혀 찬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압의 의지를 표현했기에 이들의 계획은 말 그대로 상상으로 끝난다.
젝트의 강력한 거부의사를 받은 바이에른 정부 인사들은 혈기넘치는 투쟁동맹을 제어하여 자신들의 통제범위 바깥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일을 막고자 했다. 이들은 여러 루트를 통해 투쟁동맹에 압력을 가했으나 이는 역효과만을 가져왔다. 히틀러는 계속되는 아래로부터의 궐기 요구를 받아들여 전격적으로 바이에른 주 정부를 장악한 다음 베를린으로 진격한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히틀러는 11월 6일 주요 참모들과 논의한 후 쿠테타를 결심했고, 11월 7일 투쟁동맹 지도자 회의에 쿠데타 계획을 내놓았다. 쿠데타 시기는 바로 다음 날인 11월 8일이었다. 혁명 5주년 기념 행사가 근교 맥주홀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여기에는 카르, 자이서, 로소프가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다.

4. 맥주홀


1923년 11월 8일 오후 8시, 뷔르거브로이켈러(Bürgerbräukeller)의 맥주홀에서 예정대로 혁명 5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다. 뮌헨과 바이에른 정부의 유력자들이 모두 참석하여 행사가 진행중이던 오후 8시 30분, 나치 돌격대의 무장병력들이 홀을 포위하였고, 뒤이어 무장병력들의 호위 속에 히틀러가 홀에 나타났다. 히틀러는 연단에 올라 '''바이에른 주 정부의 해산과 과도정부의 수립'''을 선언했고, 이 과도정부에 카르, 자이서, 로소프 3인의 참여를 요청했다. 물론 말이 요청이지 사실상 무력을 동원한 강요였기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히틀러의 강압에 이끌려 과도정부 참가를 약속하는 연설을 했고 곧이어 루덴도르프도 연설을 통해 쿠데타의 지지 및 과도정부 참여 의사를 밝혔다.
히틀러는 자신을 내각 수반으로, 루덴도르프를 군 총사령관으로 하고 국방장관 로소프, 경찰청장 자이서, 바이에른 주지사 카르를 각각 내정하는 계획을 밝혔다.
동시각, 룀은 돌격대를 지휘하여 뮌헨의 주요 관공서를 습격했다.[1] 뮌헨의 군 사령부와 병영, 경찰청가 주요 관공서들이 하나둘씩 접수되었다. 그러나 아마추어에 불과했던 돌격대원들은 곳곳에서 엉성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군 사령부를 기껏 점령하고도 '''가장 중요한 통신실을 신경쓰지 않아서''' 군 사령부는 예하 부대에 계속 병력출동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 직후 히틀러는 이 날 가장 중요한 실수를 하는데, 돌격대가 접수하지 못한 부대의 접수를 지원한다는 차원에서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을 떠나면서 '''카르, 자이서, 로소프 3인을 석방'''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감시할 병력을 붙인 것도 아니었다. 이들의 석방을, 히틀러가 아닌 루덴도르프가 지시했다는 말도 있는데 어찌되었던 쿠데타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인물들을 쉽게 놓아주었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날짜가 바뀐 11월 9일 2시경부터 카르를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 정부는 쿠데타 세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며 병력 및 경찰력을 동원하였고 애시당초 어설픈 무장의 돌격대로는 제대로 된 정규군을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했기에 돌격대원들은 접수한 시설에서 철수, 도망치기 바빴고, 히틀러와 루덴도르프는 멘붕해서 밤새도록 가만히 있었다.(...)
11월 9일 정오무렵, 히틀러와 루덴도르프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가두행진에 나서 '''혁명의 대의'''를 외치기 시작했으나 동조하는 시민들은 없었고 곧 이들을 가로막은 경찰병력과 접촉, 짧은 총격전 끝에 시위대 14명이 죽고 모두 도망쳤다.(...) 경찰은 4명이 죽었다.
히틀러와 어깨동무를 하며 행진중이던 다른 지도자급 한 사람도 총에 맞아 죽었고 히틀러는 어깨가 탈골된 채 도망쳐 당 동지의 집에 머무르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5. 사후처리


그러나 이러한 실패가 역설적이게도 '''히틀러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주기 시작'''한다.
우선 대부분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다 오스트리아 등지로 국외망명했다는 점이 컸다. 물론 튄건 히틀러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히틀러는 독일 국내에 있었고 곧 체포되었으며 법정을 발언대삼아 자신의 주장과 이념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던 것이다. 이는 극우 파시스트 세력에게 히틀러만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믿음을 안겨다 주었다. 또다른 주모자급 인물인 루덴도르프는 '''난 억지로 끌려나온거임'''이라는 언플과 전쟁영웅의 힘을 내세워 무혐의 처분받았으나 오히려 '군인이 비겁하다'는 여론에 휩쓸려 영향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사실 히틀러와 다른 지도자들의 차이는 '''얼마나 잘 도망갔냐'''일 뿐인데 도망치는 실력이 잼병이었던 히틀러는 이를 기회로 되살린 것.
히틀러는 체포되기 전 구술서를 통해 당 지휘부를 재편한 다음 구속되어 란츠베르크 요새에 수감되었다. 뒤이은 재판에서도 바이에른 우익세력들은 저열한 배신자들대신 당당하게 맞선 히틀러를 더 높이 평가하며 열렬히 응원했다. 아울러 히틀러는 법정에서도 쿠데타에 대해 '''무능한 의회 통치에 대한 국민적 방어권 행사'''라는 개드립을 적절히 포장하는 한편, 바이에른 정부 및 정부 우익 인사들이 자신과 투쟁동맹에 어떠한 지원을 하고 얼마나 자주 만났는지 등등을 다 기억한다는 협박전술을 구사했다.
그리고 이 협박전술과 히틀러의 포장술이 완벽히 맞아 떨어지면서 뮌헨 법정은 히틀러에게 5년형을 선고한다. 이후야 뭐 편안한 옥중 VIP 생활을 즐기며 나의 투쟁을 구술하다가 13개월 만에 가석방.(...)
사실 이 법정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 반역죄인 만큼 지방법원이 아닌 라이프치히의 상급법원에서 다뤄져야 하지만, 히틀러의 협박 전술을 두려워한 바이에른의 높으신 분들이 베를린의 중앙정부를 설득해서 뮌헨 법원에서 재판이 이뤄졌다. 때문에 히틀러에 우호적인 방청객들이 가득찰 수 있었고, 법정도 바이에른 주정부의 입김을 강하게 받았다.
  • 히틀러는 1922년 1월 폭력선동죄로 일종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 기간중에 재범을 저질렀으니 가중처벌되어야 정상이나 그러지 않았다.
  • 반역죄에 연루된 외국인은 추방해야 한다는 법률조항에 따라 오스트리아 국적의 히틀러는 즉시 추방되어야 했으나 법원은 국적은 독일이 아니더라도 독일계이며, 스스로 독일인이라 여기고 독일인으로 행동하며, 1차대전에서 독일군으로 참전했으니 해당 법률을 적용할 수 없다는 기괴한 주장을 한다.
  • 주심판사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극우 민족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자였다.
결국 히틀러는 편한 감옥생활 끝에 석방되어 나치당의 지도자 자리에 다시 올라간다.

6. 뮌헨 폭동의 의의


일단, 대부분의 간략한 서술에서는 히틀러 개인의 쿠데타라고 보지만 실은 상당히 복잡한 구조 속에 진행된 사건이다. 기계로 치자면 히틀러도 분명 중요한 파츠였지만 루덴도르프도 쿠데타 이전부터 히틀러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카르, 자이서, 소르프 역시 쿠데타를 진압하긴 했지만 그 이전에는 히틀러와 극우 준군사조직, 무장집단을 쿠데타 목적으로 활용하고 팽하고자 하는 의지가 명백했다.
오히려 히틀러가 아닌 루덴도르프를 실질적 주동자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
다만, 이런 복잡한 구조 속에서 히틀러가 우연찮게나마 그 중심에 있었고, 본인 스스로의 결단으로 쿠데타의 트리거를 당겼다는 점은 분명하며, 훗날 그에게 엄청난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하게 된다.

7. 뒷이야기


  • 사건을 다룬 주심판사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히틀러 집권 후 히틀러로부터 은혜를 보답받으며 바이에른 대법원장까지 승승장구한다. 나이트하르트는 1941년에 죽었으며, 그의 유족들은 탈나치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고 한다.
  • 반쿠데타 진압에 앞장섰던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는 이때의 원한을 잊지 않은 히틀러에 의해 장검의 밤때 숙청, 사망한다. 소르프와 자이서는 숙청은 피한다.
  •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자신의 명성을 앞세워 무죄판결을 받아내지만 민족주의 진영에게 많은 불신을 받았고, 이후 대선에서 자신의 상관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 의해 처참히 발리고 정계를 떠난다.
  • 이 쿠데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노병들은 이후 나치당에서 대부분 유력한 위치에 오른다. 다만 기이하게도 히틀러와 함께 가장 강경한 인물로, 바이에른 검찰이 끝까지 가석방에 반대했던 헤르만 크리벨은 괴벨스, 리벤트로프 등 새로 떠오른 거물들과의 불화로 인해서 주중 군사고문, 상하이 총영사, 국회의원 수준에서 커리어를 끝냈다.
  • 쿠데타가 일어난 뷔르거브로이켈러는 이후 나치당의 성지가 되어 회의도 자주 열리고 기념식도 이곳에서 개최되었으나 1939년 히틀러 암살기도[2]때 터진 폭탄으로 크게 파손되었다. 이후 나치는 이곳을 수리, 복원하고자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의 물자부족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연합군의 공습 당시에도 운 좋게 폭격을 면했으나 1979년에 지역 재개발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현재는 호텔과 문화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 그저 장소를 대여했을 뿐인 맥주회사 뷔르거브로이는 전후에 같은 뮌헨에 사는 뢰벤브로이에 인수되었다.
  • 이 사건은 훗날 영화 강철의 연금술사 샴발라를 정복하는 자에서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 폭동 당시 사망한 나치당원의 피가 묻은 하켄크로이츠 깃발 블루트파네(Blutfahne)는 나치당에서 신성한 물건이 되어 히틀러가 공식 행사에 주로 사용하였다.

[1] 이 때, 뮌헨 경찰서에 가장 먼저 총알을 발사한 사람이 광신도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이며, 이로 인해 슈트라이허는 히틀러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2] 1939년 11월 8일 발생한 사건이다. 게오르그 엘저(1906~1945.4)라는 사람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폭탄을 설치했는데, 그가 평소와 달리 일찍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엘저는 사건 발생 시간 직전에 스위스 국경에서 체포되었고, 이 암살 기도의 주모자임이 밝혀지자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행방이 묘연해지는데, 독일의 패전 직전인 1945년 4월 수용소에서 상부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