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 아테네 올림픽
- 이전의 올림픽은 고대 올림픽 참고 바랍니다.
'''Κηρύσσω την έναρξη των πρώτων Ολυμπιακών Αγώνων της Αθήνας. Ζήτω το Έθνος, ζήτω οι Έλληνες.'''
짐은 아테네에서 열리는, 첫 번째 올림픽 개최를 선언하노니. 그리스 만세. 그리스인 만세.
[clearfix]
1. 개요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열었던 대회. 이후에 올림픽이란 것을 알려주는 최초의 계기가 된다. 일단 모토는 기원전에 열린 고대올림픽이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3] 원래는 1900 파리 엑스포와 같은 시기 거행되려고 했지만 그러면 관심이 식는다고 1896년부터 시작하기로 한 것.[4]
고대 올림픽이 중단된지 1503년 만에 고대 아테네에서 파나텐 제전을 개최하던 장소인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에서 13개국 311명의 참가 선수들로 개막. 아테네 올림픽은 1위와 2위에만 상을 주었으며, 미국은 은메달(1위) 11개를 차지하여 이때 부터 국제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개최국 그리스는 은메달 8개 2위로 간신히 체면 치례를 했다.
2. 개최
유럽의 소국이었던 그리스의 왕실은 혼란스러운 국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기존의 일부 인사들의 스포츠 잔치 수준에 머물렀던 근대 올림픽의 스케일을 키워 고대 올림피아 제전처럼 다국가 다종목의 체전으로 부활시킴으로서 왕실의 위신을 세우고 국민들의 지지를 다시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초기 올림픽에는 모든 경기 운영을 개최국에 일임했기 때문에 그리스 왕실은 모든 시합의 심판을 왕실 대공들이 맡도록 하였고 그들의 부인이 시상식을 맡았다.
지금 보면 몇 나라 안되지만, 당시 사정을 생각해본다면 상당히 많은 국가가 참가한 대형 운동대회였다고.[5] 사실 참가자수로 따지면 169명의 그리스가 20명이 채 되지 못하는 다른 나라 선수단(도합 78명)보다 월등히 많았다.[6]
처음엔 개최비용으로 100만 드라크마 정도를 예상했지만, 최종 비용은 374만 드라크마였다. 그리스의 부호 요르요스 아베로프가 주경기장인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의 재건 자금 92만 드라크마를 기부했으며[7] IOC 초대 위원장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와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조직위원장으로 조달한 기부금으로 33만 드라크마나 되는 자금을 확보했다. 특별 우표 세트가 발행되기도 했으며 여기서만 40만 드라크마의 수익을 올렸다. 티켓 판매로는 20만 드라크마를 추가했다. 이상 모인 돈이 185만 드라크마.
당시 아테네 올림픽 수준으로 국제적으로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는 스포츠 체전은 없었기에 초대 올림픽은 열광 속에 성공리에 끝났으며 4년 후에 제2회 올림픽이 열리면서 근대 올림픽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대회가 끝난 뒤 쿠베르탱과 IOC는 올림픽을 그리스에서 계속 열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리스는 다음 올림픽 역시 아테네에서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미 파리에서 제2회 올림픽의 준비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결국 올림픽은 아테네 단독 개최가 아닌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개최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렇게 제2회 올림픽은 1900 파리 올림픽이 되었고 미련이 남았던 요르요스 1세는 1906년에 아테네 올림픽 개최 10주년 기념으로 1906 아테네 중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나 이는 IOC가 정식으로 인정한 올림픽 대회가 아니었다.[8] 때문에 그리스는 초대 올림픽이 열린지 108년이나 지난 2004년에서야 2번째 올림픽을 개최한다.
3. 특징
'''1894년에 IOC에서 새로 만든 첫 규정은 올림픽에는 오직 아마추어 선수만이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펜싱 경기를 제외하고는 아마추어 규정에 입각해서 진행되었다. 경기 규정과 같은 것들은 체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직 위원회는 각 국의 제각기 다른 규정들 속에서 새로운 규정을 정해야 했다. 심사 위원회, 심판, 경기 감독관은 고대 올림픽 때와 같은 명칭을 사용하였다.
고대 올림픽을 표방했기 때문에 여자는 참가할 수 없었으며, 경기도 철저히 남자들을 위한 경기뿐이었다. 특이하게도 마지막 전날(14일)은 어떠한 경기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대올림픽에서는 시행되지 않았던 마라톤 경기가 처음으로 시작된 대회다. 마라톤의 길이는 약 40.2km(25마일)[9] 로 현재보다 더 짧았다고 한다.[10] 그리스의 목동 출신인 스피리돈 루이스가 2시간 58분 50초로 1위를 차지하여 그리스인의 자부심을 높였다.[11] 마라톤의 출발점은 바로 마라톤의 역사적인 기원이 되었던 마라톤 전투의 그 마라톤 마을이었으며, 2386년 전의 그 극적인 승전보는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프랑스와 호주선수들을 차례로 제치고 아테네로 입성한 스피리톤 루이스에 의해 재현된다. 그의 승리가 그리스 모두의 것임은 옛날과 같았지만 그는 쓰러져 죽지 않았고, 수많은 현상금과 부상으로 갑부가 되었다. 마라톤 뿐 아니라 올림픽 승리자에 대한 부의 보장은 이때 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12]
영국의 조지 S. 로버트슨(George S. Robertson)이 고대 그리스어로 지은 시(Ode)를 낭송했는데, 그 시에 감동한 그리스 국왕은 그에게 '명예메달'을 줬다.
또한 대서양을 건너야했던 미국 팀의 지각 덕분에 미국 팀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대회가 시작되었다고. 달력이 달라서[13] 날짜 오차도 있었다.
당시에는 경기에서 우승을 해도 그자리에서 메달을 수여하지 않았으며, 기록만 적어놨기 때문에 당시 기록을 추합해서 메달을 정리해보면[14] 개수로는 그리스가 1위,(46개. 은 10, 동 17, 3위 19) '''은메달''' 우선으로는 미국이 1위(11개)를 기록하였다고 자료가 나와 있다.
시상식은 모든 경기가 끝난 뒤 국왕 요르요스 1세에 의해 일괄적으로 치러졌다. 우승자와 준우승자 이외에도 모든 참가자에게 기념메달을 선사했다.
4. 종목
개최 종목은 레슬링 / 사격 / 사이클 / 수영 / 역도[15] / 육상 / 체조 / 테니스 / 펜싱이 있었다. 전쟁 내지 스포츠의 역사를 인류와 함께한 매우 유서깊은 종목들로 하계올림픽 종목 틀에도 저것들은 별도 표시가 되어 있을 정도이고, 메달의 권위도 타 종목을 능가한다.
때론 좀 많이 황당한 대회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사이클 '''12시간 주행'''이라든가 수영 '''100m 해군 자유형'''[16] 이라든가...[17]
도리어 할것 같은데 안한 경기들도 있었다. 올림픽 종목에 관한 첫 공식 발표에서 축구나 크리켓과 같은 스포츠가 예정되었지만 이 계획은 최종단계까지 이르지 못했으며[18] 결국 이 스포츠들은 최종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조정과 요트는 열릴 예정이었지만 경기가 열릴 날이 되자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취소되었다. 참가자가 없어서 취소됐다고도 한다.
[image]
짤방과 같이 '''로프 등반'''이라든가 같은 경기들...여튼 좀 특이한 종목이 유독 1회에 많았다. 2회 대회때부터는 어느정도 시정이 되어서 이런 종목들이 삭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카를 슈만이 레슬링[19] 과 체조[20] 에서 4개의 은메달을 따서 가장 많은 은메달을 획득했다. 가장 많이 메달을 딴 선수는 체조선수 헤르만 바인게르트너로 6개[21] 의 메달을 땄다. 둘 모두 독일 출신.
두 번째 경기인 군사권총 경기에서는 두 미국 형제인 존 페인과 섬너 페인이 1, 2위를 차지 했는데 이것은 형제가 처음으로 1, 2위를 차지한 경기이였다. 관객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형제는 둘 중 섬너 페인만이 자유권총에 나가기로 합의를 보고, 섬너가 1위를 했다. 이로서 페인 형제는 최초의 형제 은메달 리스트가 되었다.[22]
5. 이모저모
-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은메달 리스트[23] 에게 개별적으로 상금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 딸을 준다고 하던 사람도 있었다.[24][25] 상품도 많았는데 말이나 마차를 별도의 개인 증정 상품으로 받은 선수도 있었다. 반대로 고작 우산 하나를 상품으로 받은 선수도 있었다고 한다.(...)
[1] 그리스 율리우스력으로는 3월 25일 ~ 4월 3일. 3월 25일은 부활절 다음 월요일이자 그리스 독립전쟁 기념일이기도 했다.[2] 이때부터 입장 행렬, 연설은 하였으나 선수 선서는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부터, 올림픽 성화는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부터, 성화 릴레이는 1936 베를린 올림픽부터, 심판 선서는 1972 뮌헨 올림픽부터 시작되었다.[3] 초기에는 올림픽을 최초로 제안한 의사 월리엄 페니 브룩스의 영국 웬록 마을 올림픽# 때문에 웬록에서, 이후엔 영국 런던 등 에서가 제안되었으나 프랑스인이었던 쿠베르텡 남작이 거절하고 이후 아테네가 거론되었다. 웬록은 2012 런던 올림픽의 마스코트이기도 하다.[4] 당시에는 엑스포가 인기가 많았다.[5] 그리스, 미국, 덴마크, 독일, 영국, 스웨덴, 스위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단,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 왕국이 따로 집계되었으며 지금의 세르비아 출신 선수들도 있었다.) 프랑스의 9개 혹은 10개국과 1901년에야 독립한 호주,(1위를 두 개 차지한 육상선수 에드윈 플랙) 칠레,(칠레측의 주장. 기록엔 없다.) 이탈리아(두 명, 단, 한명은 프로선수로 취급되어 배제), 불가리아(단, 선수는 스위스 이름으로 출전)의 4개국이 이름만 올렸다. IOC는 '''14개국'''이라고 말하고 있다.[6] 그래도 종합우승은 미국이 차지했다.[7] 경기장 재건 자금을 기부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워진 아베로프의 동상은 지금도 경기장 앞에 남아있다. 참고로 초기 예상 비용은 58만 드라크마 정도였다.[8] 때문에 IOC는 중간 올림픽의 결과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하지만 이 때 IOC는 1900년 올림픽과 1904년 올림픽의 흥행 부진으로 위기에 몰려있었기에 그리스의 중간 올림픽 준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고 때문에 중간 올림픽은 정식으로 인정한 올림픽이 아님에도 사실상 정식 올림픽 수준으로 치뤄진다.[9] 정작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는 1927년 국제육상연맹의 조사에 의하면 36.75 km다.[10] 사실 1.9km가량이 추가 된 건 1908 런던 올림픽부터였다.[11] 서술한바와 같이 마라톤이라는 스포츠가 아테네 올림픽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닌, 아테네 올림픽을 하면서 처음으로 시행된 스포츠이다.[12] 아테네의 승리를 알리고 죽었다는 마리톤 전투의 병사 이름은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이며 승전보의 전달이 아닌 스파르타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된 전령이었다. 그리고 죽지도 않았고 다시 마라톤으로 잘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 왕복으로 주파한 거리는 240km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리스에서는 마라톤과 스파르타 지역을 왕복하는 진짜(?) 마라톤 경기가 열리며, 2일 동안 선수들이 쉬지 않고 달린다. 물론 실제 페이디데스도 33kg에 달하는 중무장을 한채로 이 거리를 2일만에 주파했다고 한다.[13] 당시 그리스를 비롯한 동방정교회 문화권은 역사상 가톨릭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직도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참고로 그리스가 그레고리력을 도입한 건 1924년이다.[14] '''당시 올림픽에는 금메달이 없었으며 1위를 한 선수가 은메달''', 올리브 화환, 수료서를 받았다. '''2위를 한 선수는 동메달''', 월계관, 수료서를 받았다. 당시 3위를 한 선수는 메달을 받지 않았다. 그러니 이 뒤의 선수들의 순위는 말할 것도 없이 기록되지 못했다. 1/2/3위에게 각각 금/은/동메달을 수여한 것은 바로 다음인 2회 파리 올림픽부터이다. 그나마 3회 대회때부터 메달집계를 시작하였긴 하였다.[15] 이때만 해도 역도는 육상의 한종목으로 체급별 경기가 아닌 한손과 양손들기에 단 두명의 승자만 가렸다.[16] 그리스 해군만 참가할 수 있었다.(...) [17] 수영은 수영장이 아닌 찬 바닷가에서 열렸다. 바닷가에서 정해진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수영 선수들을 떨궈놓고 해안가로 헤엄쳐오게 하는 방식이라, '''바다에 빠져 죽고 싶지 않으면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쳐야 했다!'''[18] 그리고 이것이 영국의 사립학교 출신 선수들의 대거 불참을 불러온다.[19] 체급이 없었다.(...)[20] 단체 평행봉, 단체 철봉, 도마[21] 금 3 - 단체 평행봉, 단체 철봉, 철봉, 은 2 - 안마, 링, 동1 - 도마[22] 페인 형제는 경기 심판들이 그들의 사격 기구가 속사권총 경기에서 요구되는 구경에 적합하지 않아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23] 당시에는 금메달이 없었다.[24] 마라톤에서 그리스 사람이 우승 할 시 자기 딸과 결혼하게 해주고, 지참금도 주겠다고 하였다. 이유는 마지막 종목인 마라톤 전까지 그리스 사람이 1위를 한 종목이 없어서(...) 그러나 마라톤 우승자는 그리스인이었지만 결혼을 거절한데다가 다른 보상까지 다 거절하고 마차와 말만을 받아갔다. 출처는 올록볼록 올림픽.[25] 근데 생각해보면 이거 말이 안되는 게, 애초에 그리스 해군만 참여하는 해군 수영 경기도 있었을 뿐더러 그리스는 1위 은메달을 8개나 따냈다. 그리고 마라톤 우승자도 갑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