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로마 올림픽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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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Giochi della XVII Olimpiade'''
Games of the XVII Olympiad
본디 1908년 올림픽은 로마에서 개최하기로 되어있었으나, 1906년에 베수비오 화산이 활동해버리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개최권을 런던에게 넘겨서 1908 런던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그 후 52년이라는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까스로 올림픽 개최권을 다시 얻어서 개최한 올림픽 게임이다. 경쟁도시로는 스위스의 로잔과 미국의 디트로이트 등이 있었다.
2. 특징
소련에서 여자 체조선수들이 18개의 메달중에서 총 15개를 쓸어가는 기염을 토해냈다[1] . 남자부까지 합친다면 소련이 체조에서 메달을 총 26개(금 10, 은 8, 동 8)를 쓸어가버려서[2] [3] 체조에서 소련이 강하다는것을 입증시켜주었다.
또 하나의 진기한 기록이 있었는데,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는 '''맨발로 완주'''하여 '''금메달'''을 차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프리카 흑인 최초로 메달을 딴 선수이기 때문에 에티오피아에서 나중에 영웅으로 추앙받았었다.[4] 아베베는 이 다음 대회인 1964 도쿄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했고, 그 다음 올림픽인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도 출전했는데 이 때는 페이스 메이커로 출전했다. 멕시코 올림픽 당시 다른 마라토너들은 당연히 올림픽 마라톤 2연패의 아베베를 의식하지 않고 달릴 순 없었는데, 실은 이때 아베베의 컨디션이 좋지 못해 에티오피아는 마모 웰데를 우승주자로 밀고 있었고, 아베베는 다른 선수들을 '''낚기 위해''' 출전했던 것. 결국 에티오피아는 올림픽 마라톤을 3연패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는 국가가 된다.
이 대회의 복싱 라이트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딴 캐시어스 마셸러스 클레이 2세는 나중에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을 하여서 활동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뒤에 바로 프로로 데뷔를 하였다고.
차기 대회 개최국이던 일본은 금메달 4개 은메달 7개 동메달 7개를 따내며 종합 8위를 기록, 다음 대회에서의 선전을 예고하였다.
한국 대표팀도 9개 종목에 36명의 선수단을 내보내며 참가를 하였지만 이 대회에서는 '''단 1개의 메달도 따내지 못하고 참가하는 데만 의의를 둔 대회였다'''. 그나마 메달을 기대할 만한 종목이었던 마라톤과 복싱에서의 부진이 매우 컸다. 레슬링 자유형 라이트급의 원봉욱과 역도 페더급의 김해남이 4위로 아쉽게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면서 한국 대표팀은 이 대회를 노메달로 마감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한국 역사상 하계 올림픽에서 유일하게 메달을 따지 못한 대회로 기록이 될 듯. 당시 단장으로 선수단을 이끌었던 손기정 옹이 사죄의 의미로 머리를 삭발하고 귀국하였다. 메달을 못딴 원인으로는 선수선발과 관리감독을 두고 대한체육회 vs 학교체육회 vs 대한올림픽위원회 3자간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 꼽힌다. 결국 이 대회 이후 대한체육회가 학교체육회를 흡수하고 대한올림픽위원장이 체육회장을 겸임하면서 사실상 조직을 통합하게된다. 또한 4.19 혁명으로 인한 국내 정치의 후유증도 선수들이 대회에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한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행인지 모르지만 북한은 이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북한의 첫 하계 올림픽 참가는 1972 뮌헨 올림픽이다.[5]
또한 이 올림픽부터 메달에 끈을 달아서 목에 걸 수 있도록 메달을 제작하였다. 그 전까지는 전용 상자에 메달을 담아서 선수들에게 주는 형태였다.
그리스의 마지막 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가 왕세자 시절에 요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었다.
3. 대한민국 하계올림픽 성적
■ 1960년 17회 로마 올림픽 (1960 Summer Rome Olympics)
- 기간 : 8월 25일~9월 11일
- 규모 : 82개국 5348(여)명 참가.
- 종목 : 근대5종, 농구, 레슬링, 복싱, 사이클, 수영, 승마, 양궁, 역도, 요트,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펜싱, 하키
- ▶대한민국 참가 현황 : 임원 31명, 선수 36명 참가.(레슬링, 복싱, 사격, 사이클, 수영, 승마, 역도, 육상, 체조)
- ▶대한민국 참가 성적 : 메달 없음.
[1] 어마어마한 수치다. 단체전은 1개국 1팀이니까 메달 2개는 못 따는 거고, 그거 빼고 나면 딱 한 개를 다른 나라에 내줬다는 거. 그런데 그 한 개가 바로 금메달. 결국 소련이 금메달 싹쓸이는 못했다.[2] 이 수치는 당시 소련 총 메달 수(103개)의 1/5이 넘어가는 수치이다. 남자부 금메달은 일본과 소련이 하나 빼고 정확히 나눠가졌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핀란드가. 단, 공동 1위가 있어서 실제 금메달 수는 세부종목 수보다 많았다.[3] 승승장구에서 손연재양이 말하기를 러시아 부모들이 소녀들에게 체조를 시키는건 한국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태권도를 시키는것과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하였다.[4] 당시 마라톤 골인 지점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었는데, 아프리카인으로는 로마시대때 부터 포로나 노예로만 통과할 수 밖에 없었던 개선문에서 흑인선수가 당당히 승리자로 개선하는 모습을 연출해 에티오파아인들에게는 더욱 극적으로 비쳐졌다고 한다. 특히 에티오피아는 무솔리니에 의해 침공당한 적이 있어 그 감회는 더욱 남달랐을 것.[5] 그리고 첫 참가부터 사격의 리호준이 금메달을 획득하여 1945년 해방 이후 남북한 통틀어 첫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