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불협상

 

Entente[1] Cordi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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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협상의 체결 당시 등장한 풍자화.[2]
1. 개요
2. 배경
3. 내용


1. 개요


1904년 프랑스영국 사이의 식민지 문제를 둘러싼 협정. 그러나 이 협정의 역사상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단순히 강대국 사이의 식민지 배분을 둘러싼 타협 때문이 아니라, 백년전쟁 이후로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 대립을 했던 유럽의 영원한 라이벌, 절대로 서로 손잡지 않을 것이라 보았던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맺은 동맹의 시초가 되었기 때문.[3] 여러모로 20세기동맹의 역전. 또한 이 영불협상은 러불동맹영러협상과 합쳐져 삼국 협상으로 발전했으며, 이 협상으로 맺어진 양국간의 동맹관계는 1차대전 후에도 이어져 2차대전에서도 양국은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게 되고 그 이후로도 쭉 이어지게 된다. 다만 이러한 구도는 영국의 브렉시트로 인해 깨지게 되고, 오히려 2020년 현재에 이르르면 프랑스와 독일이 다시금 유럽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2. 배경


19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 양 측은 모두 외교적 고립 노선을 겪는다. 차이가 있다면,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에 의해 타의적으로 외교적 고립을 당한 반면 영국은 '영예로운 고립 (Splendid Isolation)'을 내세우면서 자발적으로 고립을 자처한 것.[4]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우선 독일 제국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내쫓은 후 빠르게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망쳤고, 이런 외교적 실책에 힘입어 프랑스는 러시아 제국과 러불동맹을 체결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영국도 이 시기에 들어와 동맹국을 구하기 시작했다. 남아프리카에서 벌인 줄루 전쟁보어전쟁에서의 졸전으로 군사적인 자신감이 대폭 꺾인데다가, 산업화의 후발주자였던 독일이 매서운 속도로 따라붙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영국은 독일과 동맹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에 돌입하지만 독일은 비밀동맹 영국은 공식동맹을 고집하면서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고 만다. 독일 측이 '영국이 설마 오랜 원한관계를 가진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겠어?'라는 생각으로 배짱을 부린 면이 없지않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외교관계로만 따지자면, 영국은 영일동맹의 일원이고 프랑스는 러불동맹의 일원이었으니 서로 충돌이 생겨야 정상적이었겠지만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던 양측은 모두 충돌을 원치 않았다.[5] 프랑스는 러시아가 일본에게조차 고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단히 실망하여 새로운 동맹국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영국 역시 독일을 견제할 만한 동맹국이 필요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 양국의 외교관들 사이의 물밑접촉이 시작됐고, 1904년 4월 마침내 양국은 합의안을 도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동맹관계가 탄생한 것이다. 다만 이 협상의 합의 당시에는 공식적인 동맹관계는 아니었다. 1907년 영러협상이 타결되면서 영-불-러의 삼국 협상이 체결되어 공식적인 동맹관계로 확정되었다.

3. 내용


영불협상에서 양국은 합의 사항을 크게 3개의 문서로 남겨 놓았다.
  • 1차 문서: 이집트 및 모로코 문제
    • 프랑스가 이집트에서의 영국의 활동을 "훼방"놓지 않는 대신 영국은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 및 지원"하는 것을 인정한다.
    • 상황이 급변할 경우 양국은 이집트와 모로코를 각각 합병할 권리를 가지며 양국은 두 나라의 합병을 서로 인정한다.[6]
    • 양국은 수에즈 운하를 자유롭게 통과할 권리를 가진다.[7][8]
  • 2차 문서: 뉴펀들랜드 및 서아프리카 문제
    • 프랑스는 뉴펀들랜드 섬 근해의 영해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영국은 프랑스 선박의 그 해역 일대의 자유로운 조업 활동을 허용한다.
    • 프랑스가 뉴펀들랜드 섬 근해의 영해 주장을 포기한 대가로 영국은 야르부텐다[9]와 로스 섬[10]을 프랑스에게 할양한다.
    • 양국은 나이저 강 동쪽의 영국/프랑스령 식민지[11] 간의 경계를 명확히 정한다.
  • 3차 문서: 태국과 마다가스카르, 뉴헤브리디스 제도 문제
    • 영국은 차오프라야 강 동쪽의 태국 영토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권을 인정하며 프랑스는 차오프라야 강 서쪽의 태국 영토에 대한 영국의 영향권을 인정한다.
    • 양국은 태국을 완충지대로 남겨두며 더이상의 태국 영토의 합병을 중지한다.[12]
    • 영국은 마다가스카르의 프랑스 당국에게 관세 지불을 거부하는 주장을 철회한다.
    •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사법권 미비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국은 조속히 협정을 체결한다.[13]

[1] 어떤 국가들 간의 견해와 이해관계가 동질하다거나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한 정책을 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aliance(동맹)와 good relations(선린 관계)의 중간 정도를 의미한다.[2] 맨 좌측 홀로된 남자는 카이저 수염에서 알 수 있다시피 독일이며, 중절모를 쓴 남자는 영국, 삼색기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프랑스를 상징한다.[3] 다만 양국이 동맹을 맺은 건 이때가 처음이 아닌데 펠리페 2세부터 30년 전쟁까지의 합스부르크 가문, 영국-네덜란드 전쟁 당시의 네덜란드, 사국 동맹 전쟁 당시의 스페인, 크림 전쟁 당시의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사례가 있다.[4] 영국이 전통적으로 유럽 내에서 세력균형의 추를 자처했던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외교노선이기도 하다.[5] 영일동맹은 동맹국이 2개국 이상과 전쟁을 벌일 경우 선공이던 후공이던 참가하는 것을 조항으로 삽입했다. 프랑스가 일본에 선전포고하거나 영국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거나의 상황이 일어난다면 자동으로 세계대전 완성.[6] 이 사항은 기밀사항이었다.[7] 사실 이 사항은 1888년 콘스탄티노플 회담에서 유럽의 주요 열강들 전부가 합의한 사항이었는데 프랑스가 승인을 보류하는 바람에 효력이 정지되었다가 영불협상을 기점으로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8] 이후 수에즈의 운영권은 쭉 영국이 가지다가, 2차 대전 후에 이집트의 나세르가 수에즈를 국유화한다. 영국은 격노하여 프랑스, 이스라엘과 제2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수에즈를 다시 점령하지만 미국의 협박으로 철수하여 결국 이집트가 가져가게 된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들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독자 핵개발을 추진하여 핵보유국이 된다.[9] 세네갈(당시 프랑스령)과 감비아(당시 영국령)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다.[10] 기니(당시 프랑스령) 해안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11] 나이지리아(당시 영국령)와 니제르(당시 프랑스령).[12] 덕분에 태국은 세계에서 단 4개국만이 누렸던 '제국주의 국가도 아니었고 식민지도 아니었던 국가'가 된다. 2차 세계대전 때의 일본도 태국을 합병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13] 이는 양국이 결국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공동으로 지배하는 것으로 합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