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러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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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세력 조정을 놓고 영국과 러시아 제국이 1907년 체결한 협정.
2. 의의
19세기 판 냉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레이트 게임을 종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협상을 통하여 삼국협상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20세기 초반 유럽 외교사에서 엄청난 의의를 갖는다.
3. 과정
3.1. 그레이트 게임
러시아가 19세기 초반 이후로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부 아시아 곳곳에서 남하하면서 세력을 뻗치자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인 인도를 러시아가 탐내는 것이 아닌지에 대하여 강한 불안을 보였고 이에 따라 남하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막으려는 영국 사이의 보이지 않는 암투[1] 가 19세기 내내 전개된다.[2]
3.2. 독일 제국의 등장
이렇게 영국과 러시아가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진행하고 있던 상황에서, 오랫동안 힘의 공백지였던 중부 유럽에서 1871년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는 독일 제국이 등장한다. 독일 제국 창설의 1등 공신 비스마르크가 권력을 쥐고 있을 당시에는, 기존의 열강을 자극하는 것이 독일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3] 비스마르크에 의해 독일은 식민지 개척과 군비 확장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면서 '유럽 내 세력 균형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했다.[4]
하지만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킨 이후로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다. 우선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5] 의 갱신을 거부하면서 러시아 지도층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한다. 이어 세계 정책(Welt Politik)을 내세우면서 독일 제국 해군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한편, 오스만 제국과 협력 하에 이미 영국의 세력권이었던 중동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 경제적으로 독일에게 추월당하고 있다는 우려에 휩싸여있던 영국 내부에서 이런 독일의 호전적인 외교 정책은 상당히 커다란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3.3. 체결
이런 상황에서 1905년 페르시아의 수도 테헤란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난다. 샤를 상징적인 국가 원수로 격하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내세운 이 봉기는 이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던 영국, 러시아 모두에게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양국은 오랜 앙금을 잊고 협상에 돌입한다. 그리고 그 결과 페르시아의 삼분할[6] 을 골자로 하는 영러 협상이 1907년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체결된다.
4. 결과
영러협상의 체결과 동시에 양측은 군사 협력도 진행하기로 발표했고, 기존의 러불동맹, 영불협상과 합쳐져 삼국 협상이 탄생하게 된다. 삼국 동맹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강대국 간 동맹 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1] 크림전쟁을 제외하면 양국간의 전면전이 발발한 적은 없었다.[2] 여담으로 이 그레이트 게임은 거문도 사건을 비롯해 러일전쟁과 영일동맹에 이르기까지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조선 ~ 대한제국의 운명에도 엄청난 영향을 준다.[3] 그리고 그 판단은 실로 정확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4]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발칸 반도를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다툼을 조정해준 베를린 회의이다.[5] 독일 / 러시아 양국 중 하나가 제3국 과 전쟁시 중립을 지키겠다는 조약.[6] 북부는 러시아가, 남부는 영국이, 중부는 중립 지역으로 남겨놓기로 합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