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1. 개요
2001년 11월 7일 실시하였다. 1983년 3월 ~ 1984년 2월생[1] 이 응시하였다. 응시자 수는 총 718,441명으로 98~01의 4년간 유지되어 온 80만명선이 무너졌다. 재미있는 것은 02수능 이전의 모든 수능은 모두 02수능보다 응시자 수가 많고,[2] 02수능 이후의 모든 수능은 02수능보다 응시자 수가 적다는 것이다.[3][4][5] 201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이 속성을 가진 유일한 수능이었으나 저출산으로 인한 수험생 감소로 인해 18수능[6] 부터는 종전 역대 최저 응시자수였던 08수능[7] 보다 응시생 수가 적어지게 되면서 유일 사례에서는 탈출하였다. 이후 19수능도 18수능의 응시생 수에 아주 살짝 못 미치고 20수능은 본격적 저출산 시대의 시작으로 응시생 수가 급감하면서, 18-20수능[8] 이 연속으로 이 속성을 갖게 되었다. 악명 높은 그 '''이해찬 세대'''의 첫 수능시험이기도 하다.
이 해 수능의 수준은 역대 수능 '''최고난도'''를 자랑하는 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후로 가장 '''어려웠기 때문에'''[9] 전영역 만점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결국 1999년 이해찬의 교육개혁 당시 "특기 한 가지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 한마디로 느슨한 분위기에서 공부를 한 당시 고3들은 피눈물만 흘리게 되었다.
지난해의 물수능을 지나치게 의식했는지 02수능에서 갑작스러운 수준 상향조정을 단행한다. 98년 이후 쉬운 수능에 포인트를 맞춰 공부한 학생들은 여기에 대규모 크리를 맞으니, 상위 50%의 총점이 전년도에 비해 66.8점이나 하락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상위 50%가 아닌 전체 응시 집단으로 확대하면 하락폭은 더 커진다. 문과는 '''무려 98.2점''', 이과는 '''91.3'''점이나 대폭 하락한 것이다. 그것도 언수외 3개 영역에서만 말이다. 100점 가까이 전국 평균이 내려간 것. 이게 얼마나 무서운지는 상상에 맡긴다.
2001학년도 수능이 수준 조절에서 실패함에 따라 어느 정도 수준이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쉬운 수능'이라는 큰 기조 하에서 약간의 수준 상승 - 총점 평균 약 10~20점 정도의 하락이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전년도 입시에서 수능 만점자가 서울대 법대 특차를 탈락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제2외국어까지 만점은 아니었고 내신이 2등급이었다)로 인해 '그래도 만점자는 서울대 법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의 수준 상승' 정도로 예상하고 있던 것이 당시 일반적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런 예측을 가볍게 뛰어넘는 점수 하락폭이 나온 것.
또한 특차모집이 폐지되고 치르는 첫 시험이며 이 수능부터 '''등급제'''가 시행되었다.[10]
소위 '''불수능'''. 이 때에는 전년도와 완벽히 대조되는 명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앞부분에서 이런 문제가 나올 리가 없는데" "이건 평상시에 보던 문제가 아닌데"'''
6차 수능에 한정해서 최고 수준이다.[11] 02수능은 전체적으로 볼 때에 대충 5차 시절의 98수능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97수능보단 상당히 쉬웠다. 일단 97학년도 수석이 370점대였으나 02학년도는 390점 넘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는 사실(문과 수석은 393.5점)이 이를 증명하며, 97수능 항목에 나와 있는 주요 대학 커트라인 및 실제 시험지를 보면 97수능과는 수준 비교 자체가 무리.[12]
2. 시험의 상세
시험은 다음과 같이 총 5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제2외국어 영역(선택)
수준은 언어, 수리가 6차 최고의 불수능이었으며[13] , 전체적으로도 6차 최고의 불수능이었다.
언어영역 만점자는 없었으며(!) 1개 틀린 사람이 인문계 11명(117.8점 1명, 118.0~118.2점 10명), 자연계 4명이었다. 2002 수능의 언어 1등급컷이 인문계 '''98점''', 자연계 '''101점'''[14] 이었으며 110점 이상의 인원이 인문계 931명(0.230%), 자연계 780명(0.402%)였다. 인문계는 104점 받아도 1.3퍼 수준이었고 원점수 108점을 받아도 누적인원이 1808명(0.446%)이라 백분위 100이 나왔다. 인문계, 자연계, 예체능계 통합으로 점수를 줄 경우 1등급컷 원점수 98~99점(98점까지 인원이 32754명), 104점까지 백분위 99(인원 10050명), 108점(100점 환산시 90점)까지 백분위 100(인원 3397명)이 나왔을 것이다. 참고로 평가원 사이트에 나와있는 영역별 원점수 누적분포를 토대로 이를 100점 만점으로 바꾼 후 언어영역의 표준점수를 7차 교육과정식으로 바꾸면 인문, 자연, 예체능 통합으로 만점 표준점수가 '''153점''' 정도로 추정된다.(표준편차가 17도 안될 것으로 추정됨)
수리는 인문계의 경우 1등급컷이 80점 만점에 '''61점'''(100점 만점에 76점 정도)이었고 만점자가 '''196명(0.05%)'''이었다. 원점수 70점 이상이 4678명(1.15%)이었다. 자연계는 1등급 컷이 '''72점'''(100점 만점에 90점)이었고 만점자는 '''875명(0.45%)'''이었다. 원점수 74점까지 누적 인원이 6546명(3.37%)였다. 언어영역처럼 7차 교육과정 이후처럼 표준점수를 낼 경우 인문계의 만점 표준점수는 '''169점''', 자연계 만점 표준점수는 144점으로, 표준점수만 보면 문과는 어마어마한 불이었고 이과는 무난한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중하위권 수험생들이 인문계나 예.체능계로 대거 몰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과생들이 점수에 비해 등급이 좋지 않게 나온 경우가 많았다. [15]
그러나 사실 2000년대 6차수능 수리영역의 경우 인문계의 문제 수준이 자연계의 그것보다 어려웠던 것이 작용했던 점도 감안해야한다. 동일출제영역인 공통수학 수학1의 경우 인문계 출제문제를 자연계의 그것보다 좀 더 꼬아냈던 것.
사탐과 과탐도 언어나 수리까진 아니었지만 꽤 어려워서 뒤통수를 때렸다. 인문계에서 사탐 1컷은 72점 만점에 '''62점''' 정도였으며 만점자는 '''128명(0.03%)'''이었고 과탐 1컷은 48점 만점에 '''41점''' 정도였으며 만점자 수는 '''45명(0.01%)'''이었다. 자연계에서 과탐 1컷은 72점 만점에 '''66점 정도'''였으며 만점자는 '''75명(0.04%)''', 사탐 1컷은 48점 만점에 '''44점''' 정도였고 만점자 수는 '''450명(0.23%)'''이었다.
외국어는 적당한 난이도였으나 언수사과에서 불쇼를 경험하고 제정신으로 외국어 영역을 치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문과는 80점 만점에 1컷 '''74점''', 이과는 1컷 '''76점'''이었다.[16] 각각 만점자는 '''1724명(0.426%), 1447명(0.746%)'''. 사실 1컷이나 만점자를 보아 생각만큼은 쉽지 않았던게, 1999학년도 수능을 포함한 3년간의 시험동안 외국어 영역이 지나치게 쉬웠기 때문에 이정도면 괜찮았던 편이다. 단지 이 당시 다른 과목에 비해 공부할 필요를 잘 못느껴서 그렇지...
당시 인문계 총점(변환표준점수) 1등급(4%)은 344.43, 2등급(11%)는 322.90, 3등급(23%)은 300.31, 4등급은 276.48 였으며, 자연계는 1등급 359.17, 2등급 344.62, 3등급 325.93, 4등급 302.56 이었다. 참고로 400점 만점. 인문계의 경우 1등급 원점수는 320점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100점 만점에 80점 맞으면 전국 4%였다는 이야기... 자연계의 1등급 원점수는 350 근처였다.
3. 주요 특징
2002학년도 수능이 유독 잘 회자되는 이유는 단순한 수능 점수의 폭락 뿐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일이 맞물리면서 전국을 대혼란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3.1. 처음으로 등급제와 과목 선택제 도입
과목별 총점과 총점 석차를 성적표에 기재하지 않는 제도가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17] 물론 총점은 과목별 점수 전부 더하면 구할 수 있기는 했다. 2000년까지 사용했던 대입진학자료를 전부 활용하기 힘들게 된 상황에서 학생들 수능 점수가 대폭락하자 학교의 진학지도는 말 그대로 대혼란.
사실 02수능은 총점, 각 영역별 과목 배분, 변환표준점수 제도 등에서 99~01수능과 거의 유사했기 때문에 이 점에서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02수능에서는 그 이전의 수능과는 달리 총점 백분위 및 그에 의한 누적분포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었고, 이에 따라 사설 입시기관의 전국석차 추정치만으로 입시전략을 세워야 했던 것이 가장 문제였다.
그리고 01수능까지는 정시 때 전과목 총점(과목별 반영비율은 다를지라도)을 반영하여 뽑았으나 02수능 때 최초로 수능 전과목이 아닌 일부과목을 대학에서 선택하여 반영하는 대학들이 등장했다. 안그래도 수준 때문에 난리가 났었는데 무조건 총점이 아니기에 더욱 혼란이 있었다.
예를들면 서울대학교와 한양대학교 이과는 언어와 사탐을 모두 반영하지 않았었고 고려대학교 이과는 사탐만 반영하지 않았었고 경희대학교 이과는 언어만 반영하지 않았다. 연세대학교는 전과목을 반영했었다. 그래서 총점이 같더라도 어느 과목을 잘 보고 어느 과목을 망쳤냐에 따라 쓸 수 있는 대학이 달랐었다.
3.2. 교차지원
이 당시에는 교차지원을 허용하는 대학이 7차 교육 과정에서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수능점수와 내신을 잘 받기 위해 일부러 자연계열(이과)에서 인문계열(문과)로 넘어오는 상위권 학생이 많았다. 그런데 결과는 망했어요. 당시 교차지원 열풍이 수년간 불어 안그래도 점차 이과생이 줄고 있었는데, 2002년도 수학능력 시험에 이르러서는 자연계열 응시생은 전년도보다 6만명이나 줄어버렸고, 아무래도 교차지원을 허용하는 학교는 상위권 대학보단 중하위권 대학에 훨씬 많아서 주로 중하위권 수험생이 자연계열에서 인문계열로 이동해 버린 탓에, 자연계열 수능 등급 커트라인이 인문계열 수능 등급 커트라인보다 매우 높게 나오는 데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총점 기준 '''인문계열 1등급''' 커트라인(전국 '''4%''')와 '''자연계열 2등급''' 커트라인(전국 '''11%''')은 변환표준점수 기준으로 400점 만점에 각기 344.43과 344.62로 '''자연계가 약간 높았던 수준'''이었다. 심지어 수리영역의 경우 인문계는 80점 만점에 61점이 1등급 커트라인이었지만, 자연계는 72점이 1등급 커트라인이었던 바람에 그 불지옥을 뚫고 70점이나 71점을 받고도 2등급으로 밀려날 정도. 수능 성적표 배부 직전 있었던 2002월드컵 조추첨 당시 죽음의 조로 불리었던 F조(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잉글랜드-스웨덴)를 연상케 한다.
3.3. 수능 최저기준 미달
수시모집에서 2차까지 합격했는데 수능 최저 기준을 받지 못해 탈락하는 학생이 대거 발생했다. 서울대 합격자 1천156명 중 12.5%인 144명, 성균관대 합격자 960명 중 28.6%인 275명, 한국외국어대 수시모집 담임교사추천 특별전형 합격자 350명 중 42.3%인 148명, 경희대 서울캠퍼스 합격자 640명 중 11%인 70여명, 이화여대 합격자 853명 중 31.2%인 266명이 수시 2차 수능 자격 기준 미달로 탈락했다. 서강대의 경우 2학기 수시모집 선발인원 482명중 22.19%인 107명, 386명을 뽑는 학교장추천전형에서 87명, 65명을 선발한 가톨릭지도자추천전형에서 10명, 31명을 뽑은 특기자전형에서 10명이 탈락했다.
문제는 수능 때문에 수시를 떨어지면 정시로 가야 한다는 것. 당시 고등학교에서는 내신성적의 평가 방법으로 절대평가에 의한 평어(수우미양가)를 사용했는데,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내신을 대거 상향조절해 버렸다. 즉 평어 반영 방식의 대학교를 지망할 경우 절대평가 기준의 내신 점수로 수능 점수를 만회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
3.4. 절대평가
절대평가에 의한 평어 제도가 문제가 되었다. 이때의 절대평가는 이후의 절대평가와도 매우 크게 다른데, 수우미양가를 주는 기준이 오직 점수 뿐이었다는 것이었다. 즉, 극단적으로 한 학교의 학생 전원이 90점 이상이면 모두가 '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02학번들이 고1이었던 1999년부터 내신 부풀리기가 몇몇 학교들에서 조금씩 시작되었고, 이들이 고3이었던 2001년에는 사실상 모든 학교가 '수'를 퍼주기에 이르렀다. 사실 02학번 이전 세대부터 평어에 의한 내신 평가 방식이 대세가 되어 왔고 이에 따른 내신 변별력 상실이 문제시되었는데, #(대성학원 자료. 01학번에 이미 평어 반영 대학이 과반수에 이름) 이것이 점점 심화되어 02학번 때에 정점에 이르게 된 것.
위의 서술대로 02학번 이전에도 수우미양가는 있었으며, 02학번에게도 상대평가에 의한 석차백분율이 있어서 수우미양가와 함께 표시되었다. 따라서 내신 성적표의 외관 자체는 02학번과 01학번 이전의 세대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며, 서울대를 위시한 국공립대에서는 02학번의 입시에서도 주로 이 석차백분율을 썼기 때문에 내신을 그나마 합리적으로 반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고대를 위시한 유명 사립대들의 대부분은 절대평가를 썼고, 이는 내신 부풀리기를 부추겼다. 더욱이 1999년도 고1 - 즉 02학번들부터 고교 내신 평가 방법에 수행평가가 추가되었는데, 이게 대놓고 내신 뻥튀기를 위해 악용되었다.[18] 내신 성적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상황이라 당시 고3들은 믿을 것이 수능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9]
3.5. 비교내신
'수능 등급 = 내신 등급'이라는 비교내신산출법[20] 을 삼수생 이상이 아닌 재수생에게까지 적용한 대학이 상당히 많았다. 비교내신 적용 범위는 교육부에서 일률적으로 정한 게 아니라 각 대학에 일임되어 있어 학교마다 다 달랐고, 02학번의 내신성적표에도 석차백분율과 수우미양가가 같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01학번 이전과 외면적으로 유사했기 때문에 이전 세대와 같은 기준으로 내신을 평가하는 것은 일단 가능했다. 실제로 02학년도에도 삼수생, 혹은 그 이상부터 비교내신을 적용하는 대학들이 다수 있었다. 일례로 영남대학교의 2002학년도 정시요강에는 99학번에 해당하는 나이, 즉 4수생부터 비교내신을 적용한다 되어 있다. http://enter.yu.ac.kr/jungsi/Data_Read.php?num=45&page=1&category=&sF=&sT= 23페이지 참조. 간혹 교육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02 수능을 01학번들이 치고 01 수능을 02학번들이 쳤다면 교육정책이 그토록 욕먹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당시 수능 수준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을지 몰라도 이해찬 1세대에게 그 수능을 치게 한 것은 엄청난 실책이었다.[21][22] 교육정책과 수능이 완벽히 반대로 놀았고, 일부 대학의 경우 비교내신이 재수생에게까지 적용되며 재수생들에게는 내신 버프까지 달아준 꼴이 되어버렸던 것이었다.[23]
다만, 내신 적용 문제에 대해서는 위에 서술된 내용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에 대해 일률적으로 단정하긴 힘들다. 절대평가에 의한 내신성적 부풀리기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01학번 혹은 그 이전부터 문제가 되어 왔었고, 02년에도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 내신을 쓰는 학교가 다수 있었으며(서울대를 위시한 거점국립대학교 등),[24] 비교내신 산출법의 경우 일률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각 대학마다 적용 대상 및 산출법이 각기 다 달랐기 때문에 '''비교내신이 버프가 아니라 디버프가 되어 재수(혹은 그 이상)생이 고3보다 불리한 경우도 많았다.'''[25] 언제나 그렇듯이 입시 상황은 고3 현역과 재수(혹은 그 이상)생의 차이 못지않게 각 개인별 사정에 따른 차이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법이므로, "절대적으로 저러했다"라기보단 "저런 경우가 많았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4. 총평
학교는 축제 분위기에서 줄초상 분위기로 바뀐데다[26] 교사도 학생도 진학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없으니 헬게이트가 열려버렸다.
즉, 수시 제도의 문제점, 전년도 대입자료의 무용지물화, 이해찬씨의 립서비스, 제한 없는 절대평가로 인한 교실 붕괴 등 여러 문제가 얽히고 설킨데다 교육부에서 모의고사 실시를 전면 금지하는 바람에 모든 문제점이 한꺼번에 다 폭발해버렸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바로 모의고사 실시 전면 금지였다. 비록 5차 교육과정보다는 나아졌지만, 이 당시도 수능과 공교육의 괴리는 상당히 커서 교과서 중심의 공교육만으로 수능을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각 과목과 각 단원의 영역이 확실히 구분되어 있는 교과서 중심의 공교육 시스템에서는 통합교과형 문제와 통합적 사고에 대처할 수 없었고, 이 괴리를 메꿔주던 것이 바로 학교에서 실시하는 모의고사였다. 모의고사 실시를 통해 수능 시스템에 적응시키고, 이후 각 과목 교사들이 모의고사 문제 풀이를 통해 공교육과 수능의 괴리를 메꿔오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모의고사를 전면금지했으니 분명히 수능 중심의 대학교 입시에서 대참사 한 번 제대로 크게 날 거라고 모두가 예상하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고3들은 학교에서 정식적으로 모의고사를 치룰 수 없었다. 몰래 모의고사를 치루기는 했지만, 모의고사를 실시하기 전에 교육부에 신고가 들어가면 치룰 수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간에, 그리고 몇몇 막장 고딩들에 의해 신나게 접수가 이루어졌고, 고3 교사들은 모의고사 본다는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 학생들을 단속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당시 유독 대혼란이 발생했던 것. 위에서 언급된 대로 내신으로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학생들은 주변 학생들을 보며 대충의 가늠이라도 해 볼 수 있지만, 학부모는 좋은 점수로 도배된 자식의 성적표를 보며 자식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하기 매우 어려웠다. 그리고 이미 전년도부터 조금이라도 자녀의 대학진학 문제에 관심이 있던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모의고사를 안 치고 어떻게 수능 준비를 하지?' 라는 불안감과 불만이 가득했다.
2001년도 수능에서는 다행히(?) 점수가 폭등했고, 당시 고3들은 모의고사를 그래도 몇 번 봤기 때문에 모의고사 금지 논란은 어물쩍 넘어가게 되었다.[27][28] 그러나 2002년도 수능에서는 점수가 폭락하면서 '우리 아이가/내가 수능을 망친 이유는 다 모의고사를 충분히 치루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가뜩이나 모의고사 실시 금지로 끓는 속을 억누르던 학부모들은 총점 석차 비공개에 수능 점수 대폭락으로 분노가 폭발해 버렸다.'''[29]
이러한 널뛰기 수준에 악화된 여론을 의식하여 난이도 조절을 목적으로 2002년 9월 3일 처음으로 KICE에서 직접 모의평가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매년 6월과 9월에 실시하는 수능 모의평가의 근간이 된다.
한편 대학에서는 이 수능의 결과를 매우 만족해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학은 2001학년도 물수능과 내신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사태에 '논술의 대학 본고사화'를 계획중이었고, 이 문제로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었다. 대학에서는 "내신은 이미 개판이요, 수능도 개판이니 무엇을 보고 학생을 뽑으라는 건가? '''우리는 '논술(이라고 쓰고 본고사라고 읽는다)'을 통해 학생을 뽑겠다!"'''라고 했고, 정부는 논술의 본고사화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2002 수능이 불수능임이 밝혀지자 대학은 수능이 변별력을 잘 가졌다고 좋아하며 이 해 논술을 실상 '형식적'으로 치루었다. 그래서 정부와 대학의 논술 고사와 관련된 갈등과 대결은 좀 더 뒤로 미루어지게 된다.[30]
수능이 끝난 뒤 두 자릿 수 대의 학생들이 자살했다는 풍문이 있으나 당시 기사에선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2002 수능 몇 년 뒤 많은 언론들이 두 자릿 수 대의 학생들이 자살했다고 보도해서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5. 같이보기
[1] 이들은 1990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1996년 2월, 마지막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했다.[2] 02 이전 최저 응시생 수는 94 수능의 741,538명[3] 02 이후 최고 응시생 수는 11수능의 668,339명[4] 이렇게 된 요인은 이 수능을 주로 응시하는 1983년생부터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을 보였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이로 인해 수능 응시생수가 2009학년도까지 줄어들다가 에코세대들이 보는 2010학년도부터 일시적으로 늘어났으나, 이는 출산율 외에도 수시 1학기 모집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응시생 수가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2012학년도 이후로는 출산율이 줄어들고 갈수록 수시 모집의 비중도 증가하여 수험생 수도 자연스럽게 감소하였다.[5] 82년생까지는 출산율이 인구대체수준을 한참 웃돌았고 84년생부터는 한참 밑돌았는데, 83년생은 인구대체수준 2.1을 미세하게 하회했지만 그래도 유사했다.[6] 531,327명[7] 550,588명[8] 21수능도 포함될 예정이다. 수험생 41-2만선으로 예측되는 21수능이, 48만 선이었던 20수능보다도 응시생 수가 적을 것이기 때문. 단, 인구절벽이 2002년생부터 진정되면서 이 이후로는 장담할 수 없게 되었으며 22수능 응시생 수는 21수능을 넘을 가능성이 제법 있다.[9] 물수능인 편인 99~01보다는 확실히 어려웠고, 98수능과는 대충 비슷했지만 최소한 더 쉽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10] 또한 이때부터 정시에서 모집 군이 4개에서 3개로 축소되는가 하면, 수시 비중이 커지기 시작한다.[11] 이과 기준으로 7차 교육과정에서는 이미 2011학년도 수능(90-79-90)(2002 식으로 환산하면 108-63.2-72)이 훨씬 어려웠고 최근 수능에서도 2019 수능(84-92-(95~96))(2002 식으로 환산하면 100.8-73.6-76.4)이 2002학년도 수능과 맞먹는다.[12] 이를테면 97수능 320점은 서울대의 거의 모든 학과에 무난하게 합격이 가능한 점수였지만, 02수능 320점은 서울대를 붙기는커녕 원서조차 못 쓴다.[13] 사실 평가원 공식 채점자료에 의하면 02 수리의 경우 인문계와 자연계 모두 6차 최초인 99수능 수리보다 평균점수가 (아주 약간이긴 하나) '''높다'''. 80점 만점에 인문계 30.0→30.1, 자연계 36.7→40.6. 예체능만 26.7→24.4로 떨어졌다. 따라서 객관적 자료에 의하면 99 수능 수리와 비슷한 수준이라 볼 수 있겠으나, 99수능은 전년도보다 쉬웠고 02수능은 전년도의 물수능에 비해 수준이 급등하여 체감상 더 어렵게 느껴진 것. 수리영역의 경우 주관식은 평이하게 출제되어, 주관식 문제부터 풀었던 사람들이 득을 보았다. 다만 언어는 점수로 보나, 체감으로 보나 6차 최고의 불수능 맞다.[14] 당시에는 언어나 외국어처럼 똑같은 문제로 시험보는 공통과목도 인문계, 자연계, 예체능계별로 석차 및 백분위를 따로 매겼다. 당연하지만 전반적으로 평균점수는 자연계가 가장 높았고, 인문계가 그 다음, 예체능계가 가장 낮았다.[15] 인문계 응시자가 40만명인데 비해 자연계 응시자는 19만명에 불과했으며, 모 이과생은 수리영역에서 불같은 수준을 극복하고 70점을 득점하고도 간발의 차이로 2등급이 나온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절에는 수시 최저요건으로는 영역별 등급이 아니라 총점 등급을 사용했고, 정시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등급이 아니라 점수가 사용되므로, 특정 영역의 등급의 수치 자체는 딱히 의미가 없었다. 물론 낮게 나오면 기분이야 좀 나쁠 수 있었겠지만...[16] 당시 영역별 원점수 기준 1등급 컷 점수(100점 만점 환산)를 낮은(어려운) 순서대로 꼽으면, 자연계는 언어-수리-과탐-사탐-외국어 순이었고 인문계는 수리-언어-과탐-사탐-외국어 순이었다. [17] 다만 이 때의 등급제에는 과목별 등급 외에도 총점 순으로 줄세운 "5개영역(언어, 수리, 외국어, 사회탐구, 과학탐구) 종합등급"이라는 게 있어서, 05학번 이후의 7차 수능보단 총점 석차의 추정이 쉬운 편이었다.[18] 내신에서 수행평가도 02학번들이 고1일때 처음 생기는데, 간혹 교사가 중간고사를 예전 기준으로 내서 학생들 평균이 폭락하면 급히 성적 산출 기준을 바꾸고 수행평가 비중을 대폭 늘리고 기말고사를 엄청나게 쉽게 내서 학생들이 '수'를 많이 받게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애들이 중간고사를 망치면 → 수행평가로 중간고사 점수를 보전해주고 → 기말고사를 엄청나게 쉽게 내서 '수'를 마구 퍼주는 식. 즉 선생이 학생에게 '제발 '수'좀 가져가라고 애걸복걸 매달리는 상황이었다고 보면 된다.[19] '성적 초인플레이션'이라는 대세(?)를 뒤늦게 따라간 학교들도 꽤 많았으며, 이런 학교의 학생들은 당연히 고교 내신이 좋을 리 없었다. 더욱이 당시 도를 넘은 내신 뻥튀기 - 당시 사실상 대부분이 수를 받는 엉터리 내신은 종종 뉴스에 보도되었고, 대학에서는 입시에서 내신을 형식적으로 반영할 것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대학도 이런 내신 초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내신을 아무리 세분화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잘 알았기 때문이다. 90점 이상 획득해야 '수'인데 이게 한 학교의 50% 넘는 학생들이 받는다면 세분화해봐야 의미없는 짓.[20] 교육제도의 변화가 없을 경우, 일반적으로는 3수생부터 이 내신산출법이 적용된다.[21] 01학번까지와 02학번부터의 교육정책은 같은 교과서를 사용할 뿐, 매우 크게 다르다. 02학번이 고1이었던 1999년부터 당시 고1들에게부터 (당시 고2였던 01학번들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적당히 공부하고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정부가 '헛소문'을 공식석상에서 누누이 강조했다. 또한 교사들이 01학번들의 고교시절처럼 02학번을 잡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았다. 1999년에 '정당봉'이라는 규격 몽둥이가 도입되었고, 내신을 절대평가 위주로 편성하여 어렵게 가르치고 어렵게 시험보는 것 자체를 불필요한 짓으로 만들어버렸다. 모의고사는 01학번도 금지까지는 아니고 연 2,3회정도로 제한되었지만, 일선 현장에서는 모의고사를 여러번 치뤘다. 본격적으로 금지된건 02학번때부터였다. 그리고 어렵게 가르치고 어렵게 시험치는 시스템에서 자란 학생들에게는 어려운 수능을 주는 것이 맞고, 쉽게 가르치고 쉽게 시험치는 시스템에서 자란 학생들에게는 쉬운 수능을 주는 것이 맞는데 이게 2000년, 2001년 - 무려 2년간 반대로 실행된 것이다.[22] 그런데 01학번들 역시 고등학교에 입학한 98년도부터 이미 계속 수능이 쉬워지는 추세였다. 물론 수능이 쉽게 나온다고 한들 절대로 쉽게만 가르치지는 않을껏이다. 수능이 아무리 쉬워도 애들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23] 2001년도 수능 역시 난이도 조절 대실패로 상위권에서 많은 학생들이 재수, 반수, 삼수의 길을 선택했다.[24] 특히 서울대는 공동석차의 경우 상위석차법이 아닌 중간석차법을 적용함으로써, 공동 1등의 양산에 의한 내신 고득점자의 범람을 원천봉쇄해 버렸다.[25] 일례로 연고대를 위시한 유명 사립대는 내신 만점 기준이 절대평가로 매우 느슨했기에 비교내신 비적용자에게 유리했다. 그냥 느슨한 기준대로 만점이면 비교내신자보다 최소한 불리할 일은 없어지니까.[26] 수시 합격했는데 수능 최저 등급을 만족시키지 못해 탈락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27] 사설모의고사가 본격적으로 금지된건 2002년도 수능을 치룬 고3부터이다[28] 2001년도 수능이 실시된 2000년에도 일선 학교에서 사설모의고사를 치르는 것이 완전히 전면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제한도 있고 단속이 있기는 했지만 형식적으로 잡는 시늉만 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이때 고3들의 경험담을 보면 모의고사를 그냥 실시했다는 사람도 있고 신고가 들어가서 실시 못하고 몰래 쳤던 적도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29] 여러 요인이 얽히고 설키었다 하더라도 만약 학생과 학부모가 학생의 실력에 대한 데이터인 모의고사 점수를 자주 접했다면 이렇게 시끄러워질 것 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시험이 어려워져서 점수가 푹푹 떨어졌다고 등수까지 푹푹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2001년도 수능처럼 반대로 시험이 쉬워져야 등수가 푹푹 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된 수시모집에서 2차까지 합격했는데 수능 최저 기준을 받지 못해 탈락하는 학생이 대거 발생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모의고사를 충분히 많이 쳐서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면 내신이 좋다고 저 학교들에 지원했을까? 수시에서 수능 최저 기준이 높을 것 같지만 당시 서울대조차 요구했던 수시 최종 합격 기준으로 내세운 수능 등급은 2등급이었다.(상위 11%니까 객관적으로 낮은 점수는 절대 아니지만 국내 최고라는 대학의 수능 최저기준이라고 보기엔 너무 낮다. 여담으로 당시 서울대 정시에 지원 '''가능'''한 점수대가 상위 4%였다. 당시에는 수시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기 때문에 각 대학이 수시 최저 등급을 상당히 낮게 책정했다.)[30] 2001학년도 물수능 전까지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수능 성적으로 뽑는 데에 큰 불만이 없었다. 대학이 논술 고사를 본고사화하려고 발악하며 정부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본격적으로 수능이 쉬워진 7차 교육과정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