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성 6부제
1. 총강
3성 6부제란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당나라의 중앙통치조직으로 고대의 관료제라고 볼 수 있다.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3성(省)과 그 성 아래의 이, 호, 예, 병, 형, 공부의 6부로 이루어진 체제'이다. 명목상 당 제도를 기반으로 이후의 중국 왕조와 주변 국가에서 변형·수용한 형태를 통틀어 '당송제(唐宋制)'라고 한다.
이를 채용하여 통치한 국가가 한국사에도 둘 있었는데, 첫째로 발해는 3성 6부를 그대로 따 왔으나 그 명칭과 운영방식에 서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1] 둘째로 고려는 3성 6부제를 모방한 2성 6부제를 운영하였다.[2] 하지만 고려의 경우는 도병마사(都兵馬使), 식목도감(式目都監)[3] 이라는 특유의 귀족회의가 있어 귀족적 성격을 가진다.
동양의 중앙행정체제로, 그 시작은 수나라이지만 중국을 통일하고도 40년도 가지 못한(...) 수나라의 짧디 짧은 역사로 인해 아무래도 초기의 3성 6부제는 당나라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밑의 발해와 고려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라의 실정에 맞게 형태를 고치거나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흔했다. 고려같은 경우 나중에는 중서성이라는 이름을 썼으나 초기에는 내의성이라는 이름을 써 최고 장관의 직함도 내의령이었다. 중서성의 최고 장관은 중서령, 문하성의 최고 장관은 문하시중, 상서성의 최고 장관은 상서령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 성의 장관은 그 품계도 최고위급에 해당하는 정 1품, 혹은 종 1품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시대 상황에 따라서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아니면 생존해 있는 사람은 거의 임명되지 않고 죽은 후에 추존으로나마 직함이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시대와 권력관계, 국가에 따라 역할이 다르긴 했으나 중서성과 문하성이 일종의 입법기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 상서성은 6부를 통솔하여 직접적인 행정과 관련되는 역할을 맡았다. 중서성이 제안을 하면 문하성이 그 제안을 심사하고, 문하성에서 통과된 안이 상서성 산하의 6부를 통해 시행되는 형태였다.
대체로 중서성과 문하성의 업무범위 문제로 이 두 기구는 사실상 하나의 기구로 운영되었다.[4] 당나라 정사당(政事堂)은 중서·문하성의 장관이 합좌하는 회의기구로 당 중기(8세기)에 중서문하(中書門下)로 바뀌었다. 이 중서문하 산하에 5방(이방, 추기방, 병방, 호방, 형례방)이라는 자체 실무기구가 생기며 상서성은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3성 6부제는 일종의 통치 이상향으로서 그 형식만 남게되었다.
당제(唐制)는 명목과 실제가 다른 복잡한 운영방식 때문에 채용한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송나라에서는 추밀원(樞密院, 군정)과 삼사(三司, 재정)의 등장으로 중서문하(민정, 보통 중서로 축약)의 업무범위가 축소되었다. 금나라에서는 상서성만을 운영했으며 원나라에서는 중서성만을 운영하며 모든 지방을 행중서성(行中書省, 중서성 업무대리)으로 개편하였다. 재상제도를 폐기한 명나라는 중서성을 혁파하고 황제 - 상서 6부 독재체제로 전환하였다.
발해와 고려는 물론, 일본에까지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의 경우 성과 부의 형태가 아닌 관과 성의 형태(2관 8성)의 형태로 나타났다. 종교적 업무를 담당하는 신기관과 행정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태정관이 있고, 태정관 산하에 중무성[5] , 식부성[6] , 치부성[7] , 민부성[8] , 병부성, 형부성, 대장성[9] , 궁내성의 8성이 존재하였다.
1.1. 주요 정무 기구
- 상서성(정책·행정집행)
- 상서도성, 상서육부(이, 호, 예, 병, 형, 공)
- 문하성(왕명출납, 정책심의, 행정승인)
- 중서성(기밀사항, 정책발의, 행정승인)
2. 발해의 3성 6부제
- ( )안은 당의 관제임.
구조적으로 당의 명목상 제도를 그대로 본따 이름만 바꾼 것이다. 하지만 명목과 실질의 괴리가 큰 당 제도의 특성때문에 사료에 기록된 제도 그대로 운영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발해만의 독자적인 운영형태로 볼 수 있다.[10]
- 정당성(상서성)의 장관은 대내상(상서령)으로 좌사정(상서좌승상) 밑에 좌윤(상서좌승), 우사정(상서우승상) 밑에 우윤(상서우승)을 두고
- 좌사정 담당 좌육사(상서좌사) 밑에 충부(상서이부) ,인부(상서호부), 의부(상서예부)
- 우사정 담당 우육사(상서우사) 밑에 지부(상서병부), 예부(상서형부), 신부(상서공부) 를 두었다.
3. 고려의 2성 6부제
성종 때 편제된 중앙정치조직이다. 그 전까지는 신라의 관제를 약간 변형한 태봉의 광평성 체계를 고려시대 초기에도 사용했다.
당나라식 3성 6부제를 받아들였지만 중국에선 제도 바깥에서 관습적으로 운영된 중서문하를 공식화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2성을 두고 그 하위로 6부를 두었다. 당과 조선과 달리 6부의 순서는 이·병·호·형·예·공이다. 당나라는 6부를 좌사와 우사로 나누어 좌사에 이부-호부-예부 순으로, 우사에 병부-형부-공부 순으로 배치하였다. 당나라와 조선에서 이·호·예·병·형·공으로 읽은 것은 좌사→우사 순서로 읽은 것이고, 고려에서 이·병·호·형·예·공으로 읽은 것은 좌·우사를 번갈아가며 읽은 것이다. 고려에서 이 순서대로 읽은 것은 재상의 등급과 관련이 있다. 수상부터 이·병·호·형·예·공의 순서로 판사직을 겸임한다. 다만 판이부사, 판병부사를 제외한 나머지 부서의 판사직은 순서가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다.
중서문하성은 그동안 중국에서 관습적으로 운영되어 온 중서성과 문하성의 합의기구인 중서문하를 명시된 기관으로 구체화 시켰다는 점에서 고려의 운영특색을 보여준다. 중서성과 문하성의 통합 운영 자체는 고려만의 실상이라기보다 3성 6부제 자체의 특징이다. 고려의 특징은 3성 6부제 도입국가에서 나타나는 관습적 운영을 제도에 최대한 반영하여 성문화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난다.
4. 9시(구시)
당나라는 6부가 발달하기 전에 6부가 하는 일을 도맡아 하던 9시라는 기관들이 있었다. 장관은 기관명+경(卿)이다.
태부시-국가재정담당(호부의 역할)
사농시-농사와 국세담당(호부의 역할)
홍려시[11] -조공품 담당(호부의 역할)
대리시[12] -사법, 형옥 담당(형부의 역할)
태복시-왕실의 가축과 왕의 말 담당
종정시-황실친족담당
위위시-궁성경비담당(병부의 역할)
광록시-궁중경비, 숙직담당
태상시-제사담당(예부의 역할)
이는 3성6부제도가 원활히 돌아가게 되면서 할 일이 줄어들다가 6시로 개편되게 된다.
[1]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이 그것. 그리고 6부의 명칭도 유교적 이념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특색있다.[2] 중서문하성, 상서성의 2성, 이, 병, 호, 형, 예, 공부의 6부[3] 제도와 규정 설치를 담당하는 기구이다. 6부 기준으로 예부(禮部)의 업무에 해당한다. 도감(都監)은 기구의 명칭으로 대개 일정 기간이 소요되는 담당업무가 끝나면 없어지는 임시기구를 의미하지만 고려와 조선에서는 상설기구화되는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례는 조선 후기 5군영의 하나인 훈련도감이다.[4] 중서성과 문하성의 체계를 보면 같은 기관이 좌, 우로 나뉜 것임을 알 수 있다. 3성제 설립 이전에도 중서령과 시중은 한 사람이 겸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5] 천황을 시종들며 각종 궁중 사무와 호적 등의 사무를 관장.[6] 문관의 인사와 조정 의례, 학교 등을 관장. 758년에서 764년에는 잠깐 '문부성'이라는 이름을 쓴 적이 있다.[7] 장례, 종교, 문화, 외교 사무를 관장.[8] 민정, 특히 조세 · 재정을 관장. 호적 · 논밭을 담당.[9] 단 율령제 당시에는 호조보다 공조에 가까운 위치였다. 대장성이 지금과 같이 재무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재무부 역할을 하던 민부성을 합병하면서부터이다.[10] 명목상 당제는 중서성과 문하성에 대한 상서성의 우위를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서·문하성이 의결기구가 되고 상서성은 집행기구로 운영되었다. 중서성, 문하성 관료가 상서성으로 전임하는 것은 강등 수준이 아닌 파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기록된 발해 관제는 명목상 당 제도가 정리된 당육전(唐六典)의 구조를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다.[11] 홍로시, 전객시라고도 했다.[12] 정위시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