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군영
1. 개요
五軍營
오군영은 조선 후기의 다섯 군영을 말한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설치된 훈련도감과 후금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그리고 이후에 수도를 방위하기 위해 설치된 금위영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이중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한양도성을, 총융청은 북한산성, 수어청은 남한산성을 방어했다.
2. 개설
조선 초기의 오위는 이미 유명무실해진지 오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 중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된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후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이 설치되면서 최종적인 오군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군영 중에서도 실제 중앙군의 핵심은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이었으며 이들 삼군문(三軍門)은 후일 서인, 특히 노론, 세도정치기 정권유지에 병력 통제 및 재정 확보[1] 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나머지 총융청·수어청은 수도 외곽의 방어를 전담하는 군영이었다.[2]
3. 편제
3.1. 훈련도감
약칭은 훈감(訓監), 훈국(訓局), 훈영(訓營) 등. 도감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5군영 중에 가장 오래된 군영으로[3] 1593년 임진왜란 와중에 중앙군으로서 류성룡의 건의로 설치되었는데, 조총병 위주의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포수(조총수), 사수(궁수), 살수(창,검수)로 이루어진 삼수병을 훈련시켰는데 이는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따른 것이다. 소속병들은 일반적인 조선군과 달리 모두 장기근속의 직업군인들이었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다. 따라서 훈련도감의 구성원은 유생이나 한량으로부터 공노·사노와 승려에 이르기까지 신분적으로 다양했다. 입대자 대다수는 생계형이었으며, 정부가 전공을 세운 자에게는 면천 등의 특혜를 주었기에 신분 상승을 노리고 입대한 자들도 꽤 있었다.
1593년 설립 당시에는 고작 200여명의 포수가 고작이었으나 전쟁 중 2천여명까지 증강되고 삼수병 체제의 일환으로 살수, 사수등이 추가되면서 점차 중앙 군영의 중핵이 된다. 특히 번상군으로 구성되어 최대 2천여명 정도가 궁성 수비에 동원되었던 어영청이나 금위영과는 다르게 항시 5천여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여 궁성 수비의 중심을 맡았고, 유사시에는 반란 진압등에도 동원되어 조선 후기 최정예군으로서 활동하였다. 임무가 철저하게 국왕의 근접호위에만 국한되었던 금군 및 호위청과의 주된 차이점이 이것. 세 조직 모두 정예 직업군인으로 구성되었으나, 훈련도감은 실전도 꽤 충실하게 겪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실제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훈련도감병중 일부가 북방으로 파견되어 청군과 교전한 경험이 있으며, 남한산성 수성전에서도 청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두 전쟁보다 좀 이전의 일이지만 사르후 전투에도 소수의 경군 (당시 중앙군 군사조직으로는 훈련도감이 거의 유일하였으므로 훈련도감으로 보는 것이 옳다.)과 항왜 혼성부대가 편제된 바 있으며, 이인좌의 난 당시에도 훈련도감 기병 400기가 큰 활약을 하였다. 후기인 홍경래의 난에서조차 진압군인 순무영[4] 의 중핵을 형성한 것이 훈련도감이었으니 가히 사직의 방패라 할 만하다.
19세기에 조선왕조의 쇠락과 더불어 다른 군영, 특히 금위영과 어영청이 규모가 감소하는 가운데도 훈련도감은 그 규모를 유지하면서 세도정권의 물리적·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고종 18년이던 1881년에 군제 개혁으로 별기군이 설치된 이듬해 훈련도감은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18세기 기준으로 훈련도감의 병력은 포수 20초 2,440명('초'는 인원/지휘체계 인정 등에서 현대의 중대와 유사한 개념), 살수 6초 738명, 기병 7초 833명등 총 4,011명의 전투병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 국출신 150명, 별무사[5] 68명, 무예별감 198명, 난후초 100명, 아병 93명, 당보수(척후병) 73명 등의 특수 병종과 뇌자(헌병) 118명, 순령수 111명, 대기수(기수) 166명, 취수 358인, 취고수 183인[6] 등 전투 지원병력이 포함되어 약 7,000여명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였으며, 약 1,300여명 규모의 잡무 수행을 위한 표하군까지 포함되었다. 별거 아닌거 같지만 훈련도감병의 급료 지급에만 조선 왕조 전체 예산의 3.4%가 소모될 정도로 재정에 부담이 되었으며, 후기 조선 왕조의 만성적 재정 적자의 원인이 된다.
병 이외의 소속 관원으로는 군영의 최고위직이었던 도제조 (정승 중 1인이 겸임) 1인, 부제조 (판서 중 2인이 겸임) 2인, 군영대장(종 2품), 중군(종 2품) 각 1인, 천총(정 3품) 별장(정 3품) 각 2인, 국별장(종 3품) 3인, 파총[7] (종 4품) 6인, 종사관(종 6품) 4인 (후일 2인으로 감원), 초관[8] (종 9품) 34인, 금송참군[9] 1인, 군관 77인등이 있었으며, 이외에도 마의, 침의, 서리등의 잡관이 50인 정도 존재하였다. 특이한 점으로는 부사관과 하급 장교 계층이 부족하였던 조선군 치고는 부사관/하급 장교에 해당하는 초관+참군+군관의 수가 그래도 충분하게 확보되었다는 것으로, 훈련도감이 조선군 최정예이자 중앙군의 중핵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되었다. 소속 군관들이 한량이나 양반들에게 돈을 받고 내려졌던 선무군관등이 대부분이었던 여타 5군영과 달리 훈련도감 소속 군관들은 하급 무사 계층이 주축이 되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금군, 호위청등으로 전출되었다는 점에서 기량도 뒤지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3.2. 어영청
1623년 인조반정으로 국내 정세가 어수선하고 인조와 서인의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자 한양의 중앙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후금에 대해 강경책을 표방한 서인 정권은 인조가 친정(親征)을 하여 군대를 이끌고 개성으로 나아갈 것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면으로 개성유수에게 260여 명의 화포군을 선별하여 훈련하게 했는데, 이것이 어영군의 시초다. 다들 알다시피 인조의 친정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지만, 개성유수가 훈련시킨 화포군은 해산되지 않았고, 다음해 개성에서 도성으로 거처를 옮겨 국왕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어영군은 새로운 편제 직후에 일어난 이괄의 난 당시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했고, 정묘호란 직후에는 7천명으로 그 수가 크게 증강되어 5군영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효종의 북벌계획에 의해 어영청은 크게 강화되어 그 규모가 3배 가까이 늘어난 2만 1천명의 부대가 된다.[10]
어영청은 주로 포수(조총병)와 화병(중화기 사수), 포병을 양성하였는데, 이때문에 훈련도감과 함께 5군영의 최정예로 손꼽히기도 했다. 대장은 어영대장으로 종2품의 당상관이었다. 주로 문관이 역임하였으나, 이완 같은 무인이 대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어영청은 주로 국경지대 수비나 반란진압에 투입되기도 했다. 대표적인게 나선정벌,이인좌의 난과 신미양요다.
고종 때 이르러 그 이름을 장어영(壯禦營), 친군총어영(親軍摠禦營)으로 바꾸기도 했던 어영청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한편 '''어영부영'''의 어원이 바로 이 어영청이다. 처음에는 군기가 엄한 정예군이었으나, 조선 말기로 갈수록 군기가 문란해져 당나라 군대가 되어감에 따라 사람들은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다'라는 뜻으로 '어영비영(御營非營)'이라고 불렀고, 이후 발음의 편의상 어영부영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괄의 난 시기에 인조를 공주까지 호위한 공이 있고, 북벌의 총군영이라 급격히 성장하였으나 나중에는 한강이 얼기 시작하는 겨울철에만 충청 전라 경상의 군사들을 번상시켜 1000명을 채웠기 때문에 군기가 느슨해졌다.[11]
어영청의 주력군은 지방에서 2달마다 번상하던 번상정군 5초 625명이었으며, 모두 포수였다. 이외에도 포병이던 별파진과 겸별파진 50명, 별무사 22명, 교대 없이 복무하던 직업군인 기병 기사 15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잡무를 처리하던 표하군 및 지원 병종까지 포함하여 3천여명에 가까운 병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전투 병력은 번상정군 및 기사, 별무사, 별파진 및 겸별파진 1,000명 이하가 끝이었으며, 소수의 병력으로 인해 독자적인 작전 수행보다는 훈련도감, 금위영 등에서 차출된 병력들과 합동작전을 펼쳤다.
3.3. 총융청
1624년, 전해에 발발했던 이괄의 난 때 반군이 관군의 저지선을 너무도 쉽게 뚫고[12] 한성을 점령하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도성의 북부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국제정세에서 조선과 후금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악화일로를 걸었던 만큼 총융군은 처음부터 수도를 직접 방위하고 왕을 호위하는 목적이라기보다, 후금과 조선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해 수도 방어를 증강하기 위한 목표로 설립되었다.
보유병력이 설립당시에는 겨우 2천에 불과하였으나, 병자호란 직전에는 2만명으로 확정된 총융청은 북한산성 방어를 담당하며 약 200여년간 조선의 도읍이었던 한양의 북부 방어선을 책임졌다. 헌종 연간에 국왕 주도하에 총위영(摠衛營)으로 개편되어 정조 연간의 장용영(壯勇營)처럼 다른 군영들의 병력을 이전받아 세를 확장하기도 하였으나, 헌종이 사망하고 철종이 즉위하자 원상 복구되었다. 1884년 고종의 개혁정책에 따라 폐지되었다. 총융청의 대장은 총융사(摠戎使)였다. 장부 상 병력은 2만여명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였다.
하지만 상당수가 속오군으로 구성되었던 수도 외곽 방어 군영이었던만큼 '실제 전력'이 2만 3,500여명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이는 후술할 수어청도 비슷하다.), 주력군인 속오군이 후기로 갈수록 유명무실화되가는 것을 감안하면 총융청의 병력은 별무사 750명, 별파진 100명을 포함해 약 2~3,000여명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보는게 옳다. 나머지 병력은 유사시에만 소집되어 북한산성 방위를 맡았으나 정기적인 훈련이 갈수록 줄어들어 결국 수포군화 되었다. 탕춘대성에 본부가 있었다.
3.4. 수어청
인조 4년이었던 1626년 도성 남부와 남한산성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경기병사 겸 총융사였던 이서(李曙)의 관할하에서 남한산성의 축조를 담당했으나 병자호란 이후 독립적인 군영으로 분리되어 수하에 수어청을 설치하게 된다.[13] 초기에는 본부가 도성 북부에 설치되고, 한성부윤이 수어청의 업무도 겸하되, 주요 방어거점인 남한산성은 광주부윤(종2품)이 운영하였다. 이런 지휘계통의 이원화는 당연히 문제를 불러일으켰고, 거기다 붕당이 극심화되면서 특정 당파의 군사력 독점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정조는 1795년 본부를 아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유수(정2품)가 수어사를 겸하게끔 하였다. 그리고 한성에 있던 수어청은 호조로 편입되었다.[14] 참고로 남한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수어장대(守禦將臺)[15] 가 있다. 수어청의 대장은 수어사(守禦使)였다. 수어청은 약 1만 6,500명의 병력을 보유하였으며, 이들의 주요목표는 남한산성의 방위였다. 수어청은 1795년 정조가 장용영을 만들면서 통채로 흡수되었다가, 정조 사후 장용영이 공중 분해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물론 예하 병력 대다수가 각 고을 소속이나 속오군화되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던 수어청이었으나, 정조 이후에는 아예 수어사가 광주유수 겸임으로 바뀌어 독자적인 지휘체계를 갖지 못하게 되고, 군영으로서의 성격을 잃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3.5. 금위영
오군영 가운데 그 탄생이 가장 늦어 영조의 재위기간이었던 1754년에야 독립된 군영으로 편제되었다. 금위영의 시초는 1682년 병조 소속의 정초군(精抄軍)[16] 과 훈련별대(訓鍊別隊)[17] 를 통합한 것이었는데 그 통합의 이유가 안습하게도 경비 절감 차원이었다. 훈련도감 항목에 나와있듯이 도감군은 그 시대 다른 조선의 관군과 달리 직업군인이었기에 상당한 인건비를 요구하였는데 이 돈을 아끼고자 정초군과 훈련별대를 통합하여 금위영을 설치한 것이다. 훈련도감·어영청과 더불어 삼군문으로 불리며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의 척추역할을 맡았던 금위영의 대장은 병조판서가 겸임하였지만[18] 영조 연간에 금위대장을 별도 임명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금위영은 어영청보다 늦게 만들어졌지만 훈련도감의 병력이 모태가 되었다는 근거로 어영청보다 앞서는 것으로 대우받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시기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일시적으로 그 위상이 강화되기도 했으나, 고종의 친정 이후 다시 원상복귀되어 1881년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가 1895년에 폐지된다. 어영청과 비슷한 수준의 병력을 보유하였으며, 주력은 5초 (5개 중대급)의 번상정군이었고, 그 수가 625명이었다. 이들은 거의 포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번상정군 외에도 교대 없이 복무하는 기병인 기사 150명, 별무사/별효위 62명, 번상하는 별파진과 겸별파진 50명등, 여러 잡다한 병종들도 포함하여 그 수가 약 3,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영청과 마찬가지로 반란 집압의 선봉으로 활용되어 유사시 순무영을 형성하였으며 이인좌의 난, 홍경래의 난등에 투입되어 반란군을 진압한 바 있다.
4. 용호영(금군청)
금군 항목 참조.
5. 호위청
용호영과 함께 내삼청을 형성하였으며, 국왕의 근접 경호를 맡았다. 시작은 인조 반정 당시 동원되었던 사병들을 반정이 성공한 이후 반정 공신들에게 나누어 분속시킨 것이며, 이 것이 확장되어 금군과 함께 친위군을 형성한 것이다. 총 3청이 존재하였으며, 각 청 하에는 350명의 군관들이 존재하였다. 여타 군영들과 다르게 지휘관은 호위대장으로 정 1품 고위직이었으나, 명예직에 가까웠고 실질적인 지휘는 정 3품의 호위별장이 담당하였다. 정조 연간 숙위소를 설치하면서 1청으로 축소되었으나 정조 승하 후 400여명으로 회복되었다. 실제로 급료를 받는 군관은 400명 중 95명이었으며, 이외에도 뇌자 10인, 순령수 10인, 등룡군 10인, 표하군 12인, 사후군 6인, 장막군 6인이 있었다.
6. 개편(친군영)
1881년 통리기무아문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중앙군을 별기군[19] 과 같은 신식 군대로 개편하면서 구식군대인 5군영은 무위영(武衛營)[20] , 장어영(壯禦營)[21] 2군영으로 감축되었다.1882년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었으나 임오군란이 청군에게 사흘만에 진압당하고 흥선대원군 역시 청나라로 끌려간 후 폐지된다.
이후 1882년부터 청나라의 군제를 모방하여 친군영(親軍營)을 창설해 수도방위를 맡겼다. 친군영은 전영(前營), 후영(後營), 좌영(左營), 우영(右營), 별영(別營) 다섯 개의 병영으로 나누어졌으며 영사(營使)를 최고지휘관으로 하였다. 중앙군의 편제 개혁이 끝나자 지방군도 이를 본따 평양에 친군서영(親軍西營), 대구에 친군남영(親軍南營), 경성에 친군북영(親軍北營), 강화도에 친군심영(親軍沁營), 부평에 친군기연해방영(親軍畿演海防營)[22] 등을 설치하여 해당 지역 군무를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1888년 기존 친군영의 경비가 많이 들고 편제도 중복되는 등 모순이 있다는 지적에 따라 5영이 3영으로 축소 개편되었다. 친군 전영과 좌영을 통폐합한 (친군)장위영, 우영과 후영, 기연해방영을 통폐합한 (친군)통위영, 그리고 별영이 개편된 총어영[23] 이 그것이다. 이후 1891년 통위영 소속 병력 중 구 총융청 병력이 경리청으로 분리되어 최종적으로 4영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1895년 갑오개혁 이후 일본식 군제를 따르기로 함에 따라 장위영, 통위영, 총어영, 경리청은 모두 해체된다.
갑오개혁으로 설치된 군국기무처는 친군영을 해체하고 일본인 장교의 지휘를 맡는 훈련대와 미군 퇴역 장교의 지휘를 받는 시위대에게 한성의 경비와 치안을 맡게 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경우 친군영들이 폐지된 이후 별도의 지방군 조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사회 질서가 혼란해지고 치안 공백이 발생한다. 수군 역시 통제영과 통어영, 통위영이 해체되자 조직 자체가 해산되고 만다. 이에 1895년 김홍집 내각은 을미개혁을 통해 훈련대와 시위대를 통폐합시켜 친위대를 창설 후[24] 수도를 맡게 하고 각 지방에는 진위대를 창설한다. 진위대가 가장 먼저 설치된 두 곳은 북방의 요충지인 평양과 남부의 요충지인 전주였다.
후일의 역사는 대한제국군 참고.
위의 표는 감영(監營), 병영(兵營) 소속 병력은 제외하고 친군영만 기재해놓은 것이다.
7. 여담
'총융청'이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고려 관련 문제의 오답 선지로 출제되었는데, 모르는 수험생들이 많아서 오답자를 양산했다. 정답 선지는 역분전의 지급이었다.
8. 관련 문서
[1] 어떻게 군대가 재정적 기반이 되는가 싶지만, 조선시대 군영들은 비용 충당을 목적으로 자체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령 훈련도감은 통화 주조권을 가지고 있었다.[2] 총융청과 수어청은 경기도 일대 속오군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사실상 지방군화되었으며, 상시병력은 천여명에 불과하였다.[3] 아이러니하게도 "도감"이란 원래 임무수행이 끝나면 해체될 것을 상정하는 임시 관청들에게 붙는 이름이다.[4] 조선시대 반란이 일어났을 때 편성되던 임시군영. 주로 삼군문(三軍門)의 병력을 차출하여 구성하였다.[5] 정예 기병대로 훈련도감에만 존재하는 편제가 아니라 평안도, 경상도 등 지방군 조직에도 존재하였다.[6] 이중 대포수 15인, 화전수 10인.[7] 현재의 대대장과 비슷한 지위[8] 현재의 중대장과 비슷한 지위[9]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단속하던 군인[10] 당연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조선 조정이 돈이 있을리가 없었고 이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어영청을 먹여살리기 위해 보인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민중들의 불만이 높아지기도 했다.[11] 결국 이로 말미암아 터져버린 사건이 임오군란.[12] 사실 이괄의 난 당시 반군은 조선이 당시 육성했던 최정예 병력이었던만큼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13] 정확히 설명하자면 정묘호란 때 독립적인 군영이 됐으며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 방어를 전담하게 된다.[14] 덧붙여 정조가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에 힘을 몰아주기 위한 정치적 포석도 수어청의 개혁에 한 몫 했다.[15] 남한산성#s-3.3[16] 어영청 병력이 청의 요청에 의해 명과의 전쟁에 투입되자 수도 방위를 위하여 경기 지역의 속오군 중 정예 자원을 가려뽑은 부대[17]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이 모두 직업군인인데 비해, 훈련별대 소속 군인들은 번상하여 군역을 수행하던 농민들이었다.[18] 금위영 설치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숙종 초년의 실세 김석주였기 때문에 빚어진 상황이다.[19] 별기군은 무위영 소속이었다.[20] 종전의 훈련도감, 용호영, 호위청을 통폐합해 만든 군영이며, 궁궐 숙위와 왕의 호위를 맡았다.[21] 종전의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이 통폐합해 만든 군영으로 한성의 경비를 맡았다.[22]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강화도의 수군과 연안 육군을 통제하는 병영. 이전에는 해방아문(海防衙門)이라 불렸다.[23] 1892년 어명에 따라 친군총어영으로 개칭[24] 이는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와 시위대가 교전을 벌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