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왕(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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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발해의 제3대 국왕이자 가독부. 아버지인 제2대 무왕이 외치에 힘을 기울였다면 문왕 대흠무는 무왕 대무예가 만들어 놓은 세력을 기반으로 내정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발해의 기록 자체가 부실해서 재위 기간이 길음에도 불구하고 문왕의 행적 역시 가려져 있는 부분이 많다.
재위 기간이 무려 57년으로 발해의 왕 중에서 가장 길고 문왕 이후 한국사의 어느 통치자도 그의 집권 기록을 깨지 못했다.[3] 이후 시대에 그나마 문왕의 재위 기록에 가까이 다가갔던 군주가 고려 고종(45년), 조선 영조(51년)와 숙종(46년), 고종(44년)[4] 정도다. 그러다보니 대흠무의 재위 기간은 228년 발해 사직의 25% 수준이나 된다. 이를 보면 즉위 당시의 나이는 변성기도 오지 않았을 수준으로 어렸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청년기에 즉위해서 80 언저리까지 살다 갔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2. 내정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내정을 닦고 외교에 힘을 기울였다. 수도를 여러 번 천도했는데 지방 통제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천도했고 780년대에 다시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옮긴다. 대학 기관인 주자감도 설치한다.
3. 외교
당나라, 신라와 본격적으로 통교하였으며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하면서 국서를 보냈는데 여기서 고려국왕 대흠무로 자신을 지칭해 고구려 계승 문제에서도 중요한 사료로 취급받는다.지금 보내온 국서(國書)를 살펴보니 부왕(父王)의 도를 갑자기 바꾸어 날짜 아래에 관품(官品)을 쓰지 않았고, 글 끝에 천손(天孫)이라는 참람된 칭호를 쓰니 법도에 어긋납니다. 왕의 본래의 뜻이 어찌 이러하겠습니까.····· 고씨의 시대에 병난이 그치지 않아 조정의 위엄을 빌려 저들이 형제를 칭하였습니다. 지금 대씨는 일없이 고의로 망령되이 사위와 장인을 칭하였으니 법례를 잃은 것입니다.
《속일본기》권32
또한 속일본기 기록에 문왕이 천손을 자칭하는 등 일본 조정 입장에서 불쾌하다는 식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일본이 신라를 치려고 준비할 당시 아쉬웠는지 일본이 먼저 발해에 도와달라 사신을 보내기도 했으나 문왕은 괜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를 거절한다.
또 그의 치세에 당나라에 안사의 난이라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 역시 개입하지 않았다. 756년 평로유후 서귀도가 "금년 10월에 안록산을 쳐야 하니 기병 4만을 동원해 도와주셔야 한다"고 했으나 의심해 보류한 것.
762년 당나라 측에서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했다. 이전까지는 '발해군왕'이라 해서 제대로 된 왕으로도 안 쳐주던 상태였는데[5] 발해가 시간이 지나며 확실하게 국가로 자리를 잡아버렸으니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4. 기타
- 무왕의 본명이 대무예라서 문왕의 본명이 대문예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문왕의 본명은 대흠무이며 대문예는 무왕의 동생으로 문왕에게는 작은아버지이다. 대문예는 흑수말갈 공격에 반대했다가 무왕에게 차단당하고 당나라로 망명했다.
- 딸 정혜공주가 737년생이라는걸 감안하면 그녀가 차녀라는걸 보아 최소한 710년 후반대 생이 아닐까하고 짐작한다. 사망년도는 유득공의 발해고에 따르면 대흥(大興) 57년(793년) 3월 4일이다.
- 딸바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왕은 과거 둘째딸 정혜공주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는데 막내딸 정효공주가 792년 사망했을 때 슬픔을 이기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심리적인 충격이 상당했던 듯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아끼던 막내딸이 기껏 시집보냈더니만 남편이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 나이에 사망하여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버렸고 그녀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딸마저 사망하는 참척을 겪었다. 이쯤 되면 정효공주의 상태는 심리적 충격은 고사하고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그러한 딸을 지켜봐야만 했던 아버지인 문왕의 심정은...... 아무튼 정효공주의 사망이 문왕에게 심리적, 육체적 타격이 꽤 컸던지 정효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1년도 채 안된 793년 3월 문왕도 결국 세상을 떠난다.
- 문왕 사후 발해에 15년 동안 왕이 6명 바뀌는 등의 혼란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아 문왕이 제대로 후계 구도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한 것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정효공주의 요절이 문제의 발단이었을 수도 있다. 장남인 대굉림이 본인보다 먼저 사망한것도 원인일지도.
5. 가족 관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장녀, 차녀 정혜공주(貞惠公主), 3녀 정연공주, 4녀 정효공주(貞孝公主)가 있었다. 본인들보다 무덤으로 유명한 공주들로 수능 국사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동모산 근처 육정산에서 출토된 정혜공주묘는 고구려 양식 무덤(굴식돌방, 모줄임구조)임에 비해 중경 부근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는 고구려 + 당나라 양식 무덤(모줄임, 벽돌무덤, 벽화)이다. 이는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와 당나라의 문화를 균형있게 받아들인 사례로 거론된다. 그리고 비문에는 문왕을 황상으로 칭하고 있어 발해가 외왕내제를 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 자녀들은 모두 아버지 문왕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문왕이 사망한 후 문왕의 사촌동생인 대원의가 즉위했는데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태자의 아들이자 문왕의 손자인 성왕이 즉위했다. 하지만 성왕도 일찍 죽어 문왕의 막내아들이 뒤를 이어 강왕으로 즉위했는데 아내는 효의황후(孝懿皇后)이다. 2005년 중국 지린성 룽터우산 고분군에서 발해국 효의황후 무덤이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6. 같이보기
[1] 문헌이 아닌 2004년~2005년 육정산 고분 조사에서 이름이 나왔다. 다만 간왕의 부인 순목황후와 마찬가지로 이름 외의 정보가 알려진 바가 없다.[2] 유득공의 발해고 신고 기록.[3] 발해 문왕 이전 시대에서 찾으면 고구려의 태조왕과 장수왕, 신라의 박혁거세 재위 기간이 57년을 넘는다. 다만 태조왕과 박혁거세의 경우 고대 기록이다 보니 불분명한 측면이 있어 장수왕 정도가 확실히 문왕보다 오래 집권했다고 볼 수 있는 왕일듯.[4] 다만 고종은 태황제로서의 기간인 3년과 경술국치 이후 이태왕으로서의 기간까지 모두 더하면 56년(+15일)이 되어 문왕의 기록에 근접하기는 한다. 물론 나라가 사실상 망했을 때인데다가 이태왕 시기에는 통치 기간을 따져봐야 소용이 없기는 하지만 망국과 갑작스러운 서거만 아니었다면 문왕의 기록을 뛰어넘었을 가능성도 있다.[5] 군왕(郡王)이 국왕보다 격이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