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9F 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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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mman F9F Panther and Cougar'''
운용과 퇴역
첫 비행: 1947년 11월 24일
퇴역: 1958년 (미국 해군), 1969년 (아르헨티나)
초도비행
1947년 10월 24일
도입
1949년 (미 해군)
퇴역
1969년 (아르헨티나)
생산
1,382 기
F6F Panther
제원
F9F-2
분류 : 단발단좌 터보제트 전투기
승무원: 1명
전장: 11.3 m (37 ft 5 in)
주익폭: 11. 6m (38 ft)
전고: 3.8 m (11 ft 4 in)
주익면적: 23 m² (250 ft²)
자체중량: 4.220 kg (9,303 lb)
적재중량: 6.456 kg (14,235 lb)
최대이륙중량: 7,462 kg (16,450 lb)
엔진: 1 × 플랫 & 휘트니 J42-P-6/P-8 터보제트 엔진
최대속도: 925 km/h,마하 0.755
상승력: 26.1 m/s
무장
20mm 기관포 4문(기총당 190발)
내부 장착 포드 2곳에 1000파운드급 폭탄이나 150갤런들이 보조연료탱크
외부 장착 포드에는 250파운드 폭탄이나 5인치 HVAR 장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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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실전 투입
3. 전후
4. 퇴역
5. 파생형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개요


미합중국 해군은 다가오는 제트기 시대에 대비하여 1945년 9월 함상 제트전투기 개발사업을 시작하였다. 미 해군의 요구사항은
1. 주/야간 전천후 작전이 가능할 것
2. 2명의 승무원이 탑승하는 복좌기
3. 레이더를 장착할 것
이었고 이 사업에는 더글라스와 커티스 사가 참가하였다. 그루만 사는 이 경쟁에 상당히 늦게 뛰어들었고 자사의 쌍발 전투기였던 F7F 타이거캣을 베이스로 주익에 제트엔진을 장착하고 20mm 기관포 4문을 장착,기수에 레이더를 탑재한 사내 모델명 G-75를 개발하였고 이는 곧 XF9F-1 이라는 제식명을 부여받게 된다. 당시 미 해군은 커티스 사의 제안보다는 더글라스 사가 제안한 XF3D-1에 관심이 더 있었지만 해당 시제기의 성능이 ROC를 충족하지 못하였고 더글라스 사의 제안이 뒤집어질 경우에 대비하여 그루만 사에 XF9F-1의 개발을 지속할것을 요구하였다.하지만 XF9F-1은 비행 테스트에서 XF3D-1보다 뒤떨어지는 비행성능을 보여 그루만 사는 이 경쟁에서 퇴출될 위기에 놓였다.
한편 그루만 사는 복좌 제트전투기 사업과는 별개로 사내 모델명 G-79로 불리는 단좌 제트전투기를 자체 개발하고 있었다. 이 전투기는 동체에 영국제 롤스로이스 넨 엔진(이 엔진은 2차대전 후 영국이 소련에 라이센스를 받고 제공해 MiG-15 엔진에 베이스가 되기도 한 엔진이다)을 장착하였는데 해군은 이 기체에 만족하였고 XF9F-2 라는 제식명으로 사업에 계속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원형기에 플렛 & 휘트니 사의 J42 터보제트 엔진을 장착하고 4문의 20mm 기관포(문당 탄약 190발)로 무장한 F9F-2가 1949년 9월 제식 채용되었고 그루만 사는 자사의 전투기에 고양이과 동물의 별명을 붙이는 전통을 따라 표범이라는 뜻의 Panther 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초 배치는 미 해군의 곡예비행팀 인 블루엔젤스에 이루어졌고 항모전투단에는 VF-51 스크리밍 이글즈에 최초 배치되었다.

2. 실전 투입



2.1. 한국전쟁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미 해군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들과 본토의 항공모함들이 모여들어 한국 해역에서 작전을 시작하였고 1950년 7월 3일 평양비행장 공습에서 최초로 실전에 데뷔하였다. 이날 비행장을 공습하기 위해 A-1 스카이레이더 공격기와 F4U 콜세어 전폭기가 이륙하였고 팬서는 이들의 공중 엄호를 담당하였다. 이날 공습에서 VF-51 소속 레오나르도 플로그 중위가 Yak-9 을 격추하는 등 총 2기의 야크기를 격추하여 성공적으로 실전에 데뷔하였다. 이 전과는 한국전쟁에서 미 해군이 거둔 최초의 적기 격추이기도 하다. 이후 한동안 북한 상공을 제집 안방 드나들듯 하다가 MiG-15가 출현하였는데 MiG-15는 후퇴익을 채용하여 속도가 팬서보다 약 160km/h 가량 빨랐고 더 뛰어난 상승력과 기동성 등 비행 성능이 팬서를 능가하였다. 미 해군은 미그기 출현지역으로의 출격을 중단하고 미그기와 전투를 벌이는건 주로 공군의 F-86이었지만 세상일이 맘대로 되지는 않는 법, 미그기의 활동영역이 넓어지면서 팬서도 미그기와 조우하는 횟수가 늘어나게 된다. 한국전쟁 기간 중 팬서는 2기의 Yak-9과 7기의 MiG-15를 격추했으며 2대가 적에게 격추되었다.
최초의 미그기 격추는 1950년 11월 9일 VF-111 선다우너즈 소속의 윌리엄 '빌' 아멘 소령이 기록하였다. 동년 동월 18일에 2기의 미그가 더 격추되었으며 마지막 4기의 격추는 1952년 11월 18일에 기록되었다. 이날 VF-781 소속 로이스 윌리엄스 대위는 회령시의 항구 공습 임무를 띄고 항모 오리스카니에서 이륙하였는데 두만강 상공에서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륙한 소련 해군항공대 소속 MiG-15 4기를 단독 격추하였다. 이 전과는 1992년 소련 정부에서 빌리코프, 반달로프 대위, 파콤킨, 타쉬노프 중위 총 4명의 해군 조종사가 1952년 11월 18일 실종되었음을 확인해주면서 공식 인정받았다. 하지만 미국 정부에서는 이 전과를 오랫동안 묻어두었는데 한 조종사가 단일 공중전에서 4기를 격추한건 좋은 선전거리이지만 소련이 한국전에 개입 중인 것이 외부에 드러날까봐 그랬다고 한다.
F9F 팬서를 조종했던 해군 조종사 중에 후대에 유명하게 된 사람이 좀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선수인 테드 윌리엄스는 현역 선수이면서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F4U 코르세어로 비행교관을 지냈고 한국전쟁에 또다시 참전하여 이번에는 F9F 팬서를 몰고 수십차례의 전투출격을 감행함으로써 한군두의 표상이 되었다. 그러고도 다시 메이저리그에 복귀해서 전설적인 기록을 써내려 갔다.
미국 최초의 지구궤도비행을 성공시킨 우주인이자 국회의원까지 지낸 존 글렌도 한국전쟁 당시에 F9F 팬서를 몰았다. 그의 보직은 바로 테드 윌리엄스의 윙맨(...)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도 F9F 팬서 조종사 출신이다. 암스트롱은 퍼듀(Purdue) 대학에 재학중 미합중국 해군 항공대 조종장교로 임관하였으며, 제51전투비행대대(VF-51) 소속으로 미 해군 항공모함 에식스(CV-9 Essex)에 배속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함경북도 성진시 일대를 정찰하던 중 지상 대공포에 격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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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9F 닐 암스트롱 탑승기, 제51전투비행대대(VF-51), 항공모함 에식스 배속, 1951년

3. 전후


전후 팬서는 미국의 한국전쟁 영화인 "The Bridges of Toko-ri[5](한국명 원한의 도곡리 다리, '''1954년작''')"에 무려 당시 아직 현역이던 '''목재갑판 항모, 2차대전 구축함들'''과 함께 출연했다. 그 이후로도 퇴역 시까지 미해군 함재기로서 활동하다 퇴역을 맞게 된다.

4. 퇴역


팬서는 1956년 일선 임무에서 물러났으며 1958년까지 미해군,해병 예비항공대에서 훈련기로 사용되었다. 1960년대까지 소수의 팬서가 사용되었으며 1962년 해군,해병,공군간 항공기 제식명이 통합되면서 (사실 해병대는 해군의 제식명을 그대로 썼지만) F-9 이라는 새로운 제식명을 받게 된다.

5. 파생형


XF9F-2 : 최초로 생산된 2대의 시제기
XF9F-3 : 3번째 시제기
F9F-2 : 최초의 양산형, J42엔진 장착
F9F-2B : 추가 무장을 위한 장착 포드 설치, 이후 모든 F9F가 이와 같은 개량을 거치면서 뒤에 B라는 명칭이 삭제됨.
F9F-2P : 한국전쟁에서 사용된 비무장 정찰기 .
F9F-3S : J42 엔진 대신 J33엔진이 탑재되었으니 이후 다시 J42엔진으로 교체[6]
XF9F-4 : F9F-4 개발 과정에서 사용된 시제기
F9F-4 : 동체 길이 및 연료탑재량 증가, F9F-3처럼 J33엔진을 장착하였으나 이후 대부분의 기체가 다시 J42엔진을 장착함. F9F-4는 엔진의 컴프레셔와 연소실에서 나오는 기류를 이용하여 앞전 플랩을 작동시켰던 최초의 항공기이며, 이륙시 실속속도가 9노트 감소하였으며, 착륙시에는 7노트 감소하였음.
F9F-5 : F9F-4을 프랫&휘트니의 J48엔진으로 교체
F9F-5P : 비무장 사진촬영용 정찰기
F9F-5K : 표적용 무인기
F9F-5KD : 5k 무인기에 대한 통제기로, 1962년에 DF-9E로 명칭이 변경됨.
F9F-Turret : 폭격기의 후방 기총을 피하기 위해 기수 부분에 360도 회전하는 터렛(!)을 달아놓은 사양. 1950년 Emerson사가 제안하였고 시제기도 성능이 좋았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1954년에 취소.
F9F-6 : 주익에 후퇴각을 준 모델. 나중에 F9F 쿠거(Cougar)라고 재명명된다.
[7]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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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중 왼쪽 멀리 보이는 116번기 조종사가 닐 암스트롱 소위다. NASA 우주 비행사6.25 전쟁 시기에 비행하는 사진이 남아있는 보기 드문 사진. 그러나 암스트롱은 팬서를 조종하다 대공포에 격추되어 죽다 살아나는등 여러모로 못볼 꼴을 많이 보고 일찍 전역을 선택했다.[2] 출처 Jet fighters Inside Out; Jim Winchester[3] 역명판들에 있던 그당시 영문표기가 이즈음에야 거의 변경되거나 역째로 폐역되었기 때문.[4] 일제의 영향이 짙게 남아있던 시기다. 참고로 이 표기법의 실질 사용 시기는 2000년대 중반 들어서야 겨우 끝났다...[3][5] 당시에 도곡리를 Toko-ri 라고 표기한건 당시 한국의 공식 영어표기명 방식(부산을 당시엔 Busan이 아닌 Pusan으로 표기)때문이다.[4][6] J42엔진의 실패에 대비하여 J33엔진을 장착하였으나, 추수감사절에 J-42엔진을 장착한 XF9F-2의 시험비행이 성공하면서 다시 J-42로 교체됨. 출처[7] 출처 Jet fighters Inside Out; Jim Winchester, http://en.wikipedia.org/wiki/Grumman_F9F_Pan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