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G-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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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기 계보
MiG-9

'''MiG-15'''

MiG-17
1. 개요
2. 개발사
3. 상세
4. 실전
5. 그 외
6. 둘러보기


1. 개요





МиГ-15
소련군제2세계 국가에서 1950년대 초반부터 운용한 제트 전투기다. 미그 설계국의 작품으로 주 생산국은 소련이지만 중국에서도 카피판을 생산했다. NATO 코드명은 <'''Fagot'''>.

2. 개발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치 독일에서 입수한 후퇴익 기술과 제트기 기술클레멘트 애틀리가 2차 대전 후 연합국간 우호 유지의 과시를 위해 무상으로 소련에 넘겨준 글로스터 미티어 계열의 영국제 제트엔진의 자료를 바탕으로 개발된 기체이며 여러모로 서방제 항공기들을 참고로 하여 만든 기체이다.
F-86 등과 마찬가지로 50년대 초기 제트전투기들의 전형적인 기수에 설치된 공기흡입구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당시 전천후(야간)전투기가 아닌 이상 레이더를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근거리에서만 사용이 가능했기에 대형 노즈콘을 설치하지 않고 비행기의 자세에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당시 신뢰성이 아직 낮던 제트엔진에 비교적 안정적인 공기흐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런 콧구멍 스타일은 겉보기엔 볼폼없어 보이고 공기저항을 많이 받을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비행에 방해가 될 정도로 공기저항을 심하게 받거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엔진에 공기를 바로 맞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영국소련의 제트엔진 거래는 1946년에 이뤄졌다. 이 당시 영국의 노동당 정권의 수상인 클레멘트 애틀리는 소련에 비교적 우호적이었고[1] 제트엔진 기술 이전을 해달라는 소련의 요청을 승인했다. 소련은 무단 복제가 아니라 1946년에 비군사용으로만 쓴다는 조건으로 영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서 '''정식'''으로 영국 롤스로이스사와 계약을 했고, 라이센스와 설계도, 시제품을 들여와서 카피했다.[2]
이러한 기술 제휴는 당시 반공주의자였던 윈스턴 처칠이 수상에서 물러난지 오래된 상황이라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3] 사실 처칠은 상기한 대로 절대로 소련에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소련을 믿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처칠은 1945년 독일 항복후 언싱커블 작전(Operation Unthinkable)을 통해 영국군과 미군이 유럽에 전개한 소련군을 공격,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당시 작전수립의 요청을 받은 영국 육군참모부가 "3:1로 병력면에서 열세이기 때문에 소련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포기한다.[4] 거기에 독소전쟁 이전의 독일과 우주경쟁 초기의 미국처럼 영국도 소련의 기술력을 얕보고 있었는데. 제트 기술에 대해 뒤쳐진건 사실이긴 하지만 카피를 넘어서 응용까지 할 수 있는 기초적인 기술력은 있었으며, 이는 1944년에 제트엔진 개발을 명령 받은 아르힙 률카가 1946년에 자체적인 실용엔진인 TR-1을 만들 정도였고, 롤스로이스로 부터 라이센스를 받아 RD-45 엔진을 만든 클리모프도 이미 Me 262의 엔진인 유모004 엔진의 카피를 쉽게 해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제트엔진 기술을 외부로 전파하지 않았고, 이를 모르는 영국은 미래의 적에게 핵심기술을 넘겨줬다.

3. 상세


강력한 N-37 '''37mm''' 기관포[5]와 NR-23 23mm 기관포 2정을 장착하였으며, 우수한 상승력, 속도와 기동성으로 매우 위협적인 기종이었다.
6.25 전쟁Yak-9와 함께 인민해방군 공군조선인민군 공군에 대량으로 지원되어 우리에게 악연이 깊은 기종이기도 하다. 당시 북한군은 파일럿이 모자랐기 때문에 '''많은 소련군 조종사들이 북한 라운델을 단 MiG-15를 타고 참전'''하였다.
당시 미합중국 공군의 주력기인 F-80 슈팅스타, F-84 썬더제트 등은 이 기체를 상대조차 할 수 없었고, 최신형인 F-86 세이버조차도 일부 성능에서 열세였다.[6] 여기에 당시 해군 항공대의 주력기인 F9F 팬서 역시 성능 열세여서 해군의 경우 가급적이면 교전을 피하려 하였다. 때문에 한국전쟁에서 B-29가 개털리는 결과를 낳았다.[7]
MiG-15의 등장 당시 미국의 충격은 상당하여 이 기종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기체를 통째로 가져오는 사람이 있으면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현상금을 내건 적도 있었다. 다행히 1953년 폴란드의 조종사와 북한의 조종사 노금석 대위가 각각 MiG-15를 몰고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노획한 MiG-15를 몰아본 미군 파일럿들은 전투의 승패를 가른 요소가 조종석의 시야와 유압계통의 반응속도, 조준장치 같은 사소한 부분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참고로 MiG-17은 사실상 MiG-15의 개량형이나 다름없었기에 MiG-15는 4~50년대를 관통한 소련 전투기의 역사가 된다.
MiG-17이 사실상 MiG-15의 개량형이나 다름없는 기종이 된 것에는 사연이 있는데, 바로 냉전 당시의 소련의 독특한 군용기 개발방식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신형 군용기의 개발 및 시험을 하면서 장래의 유망성이 확인되면 개발 및 시험의 완료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해당 기종의 생산을 준비하기 시작한다는 관례가 있었고, 이후의 변경점은 생산이 시작되고 난 후 개수라는 형태로 적용한다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다. 이는 신형기의 개발과 배치에 있어 서방권에게 조금이라도 뒤쳐지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발악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MiG-15의 경우 개발 및 시험이 완전히 완료된 것은 아예 형식번호 자체가 새롭게 변경된 MiG-17이 되고 나서부터였다고 한다. 따라서 데뷔전인 한국전쟁 당시의 MiG-15는 아직도 개발 및 시험이 안 끝나서 여전히 결함을 잡기 위한 테스트가 진행 중인 '''미완성''' 기종인 채로 부랴부랴 급거 생산되어서 최전선에 투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왠지 개발 및 시험과 생산이 동시에 진행되는 특유의 프로젝트 진행방식으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F-35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4. 실전


한국전에서 10:1이라는 격추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는 1:5.8 수준이었다. 10:1이라는 격추비가 나온것은 소련개입 사실을 숨겨야 했기 때문에 소련 파일럿들은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으므로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전장 이탈을 시전했고, 이에 격추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세이버의 무장은 12.7mm 중기관총이었고 그걸로는 제트기인 MiG-15를 격추시키기에는 화력이 부족했다.[8] 중국군 파일럿들이 조종하는 기체는 훈련도가 불충분해서 프로펠러기에도 격추당하는 예도 있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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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군 박물관에 전시된 6.25 참전 "인민지원공군" 소속 MiG-15기. 기수에 한자로 소속을 적어놨지만, 라운델은 정규 인민해방군 공군 것을 그대로 썼다.
MiG-15와 F-86의 공중전은 주로 미그 앨리(MiG-alley)라고 불리던, 개마고원과 평안북도, 함경북도 상공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제공권이 미군측에 있었기 때문에 미그기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본거지에서만 출격했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출격하는 MiG-15는 만주기지에서 출동했는데, 당시 미국 공군의 전투기들은 조중 국경을 넘어 추격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다.[10] 그래서 F-86의 M3 중기관총에 맞은 MiG-15가 검은 연기를 뿜으며 하강하여 만주 방면의 기지로 도주해버리는 사례가 잦았다. 미국 파일럿들은 이렇게 연기를 내품으며 만주방면으로 도주한 미그기들을 대개 격추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과장된 기록이 나온 경우가 많다. 또 MiG-15 조종사들도 이런 기만전술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래야 확인사살을 당하지 않고 어쨌든 살아 돌아갈 수 있을테니... 하지만 실제로는 무사히 살아 돌아간 기체가 많다. 즉, 일부러 터무니 없이 과대포장을 한 게 아니라 파일럿들이 격추했다고 생각하고 격추보고한 MiG-15중 많은 기체들이 실제로는 손상만 입은 채 어떻게든 기지로 돌아갔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오차는 있더라도 전과확인은 최대한 엄중하게 하는게 상식이다.[11] 외부에는 선전목적으로 어느정도 왜곡할 수는 있어도 내부보고에서까지 전과보고가 엉망이면 지휘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12]
아무튼 10:1의 승률에 비하여 실제 교환비는 6 내지 3:1로 F-86에 열세. 그것도 소련 파일럿을 제외한 중국-북한군 파일럿 대부분은 조종사 훈련을 마치고 갓출전한 초보들이었지만[13][14] 미군에는 상당수의 2차대전 베테랑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런 교환비로 기체자체의 성능을 따지는 건 어렵다. 또한 MiG-15는 자체가 B-29 요격도 상당한 비중을 갖고 있었기에 F-86에 비해 전과상 불리한 점도 있었다.[15] 나중에 2차대전에 참전했던 베테랑 소련 조종사들이 탄 MiG-15도 F-86에게 밀렸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도 선회성능의 차이가 아닌 미국 조종사들의 숙련도 및 다른 요소에서의 성능이 더 높았던 결과로 볼 수 있다.[16]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련군 최고의 에이스는 예브게니 페펠랴에프 대령으로 22.5기 격추를 기록했다.[17] 니콜라이 슈탸긴 소령이 22기 격추로 그 뒤를 이었다.
좀 더 최근의 연구자료(2008년)에서는 MiG-15와 F-86의 교전비를 1.8:1 정도로 더욱 근소한 열세로 보고 있으며 소련군 파일럿이 탄 MiG-15의 경우에는 1.3:1 정도에 불과하다. 여기에 MiG-15는 폭격기 요격임무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F-86과 동등한 성능의 기체라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다. 최근의 연구자료에서는 오히려 소형기체로 인한 추중비 우세 등으로 선회전 만큼은 MiG-15의 우세로 파악하고 있다. 다만 공중전은 선회력 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에 시야, 조준기, 화망 및 탄도 등 다른 요소에서 F-86이 유리한 점도 많고 조종사의 숙련도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F-86이 좀 더 좋은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는 추세이다.[18][19] 일례로 F-86의 미군 파일럿들은 이미 "G-Suit"를 입고 있었지만, MiG-15의 파일럿들은 여전히 2차 대전 때나 마찬가지의 조종복을 입고 근성으로 버티며 전투를 치러야했다. 그런 요소들 중 특히 조준기의 차이는 조종사의 기량 차이에 더해, 비교적 자주 언급되는 요소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직후부터 거리측정 레이더와 연동된 건사이트를 개발 도입했고, F-86에도 AN/APG-30 거리 측정 레이더와 연동된 A-1CM 건사이트를 장비하고 있었다.[20] 반면 Mig-1G는 2차 대전 후반 전투기들과 마찬가지로 자이로 건사이트만을 장비하고 있었다.[21]
때문에 AK-47 VS M16 만큼은 아니지만 F-86 VS MiG-15도 상당한 떡밥이며, 이게 화제로 떠오르면 외국의 밀리터리 사이트나 유튜브 등지에서 치열한 댓글전쟁이 벌어진다.
한국전쟁에서의 F-86과 MiG-15 공중전을 가장 자세히 파고든 Douglas C. Dildy와 Warren E. Thompson의 2013년 분석에 따르면 F-86과 MiG-15의 한국전 기간 교환비는 1:5.835이다. 이들에 따르면 RAND 연구소의 세이버 대 미그 교환비는 과도하게 낮다.
이들은 격추 전과 주장을 배제하고 미 공군과 소련 공군, 그리고 중국 공군의 손실 자료만을 분석하여 이상의 결과를 얻었는데, 이에 따르면 미 공군에 기록된 전쟁 기간 F-86 손실은 224기이며, 이 중 40대는 비작전손실, 61대는 적이 아닌 요인에 의한 작전중 손실이다. 18대는 적 대공포화에 격추됐으며, 한 대는 Po-2의 야간공습에 의해 파괴됐다. 따라서 104대가 공대공 전투에 의한 피해의 최대치인데, 이 가운데 78기가 MiG-15에 의한 피격추로 확실히 확인되었고, 14대는 공대공 전투로 인한 연료부족으로 추락했다. 남은 12기는 작전 중 귀환하지 못했으나 손실 원인이 관측되지 않았고 조종사 또한 MIA로 처리된 경우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하면 F-86의 MiG-15에 의한 손실은 최소 78기, 최대 104기이다.
소련측 문서는 한국전 기간 동안 335기의 MiG-15 손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319기가 전투중 격추되었고, 319기중 10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세이버에 의해 격추당했다. 중국측 기록은 399기의 MiG-15를 상실했다고 적었고, 이 가운데 격추된 기체는 224기로, 모두 세이버의 전과였다. 북한 공군의 손실은 명확하지 않지만 1953년 포로 혹은 망명자의 증언에 따르면 약 100여기의 MiG-15를 손실했는데, 이 가운데 1/3이 세이버에 의한 격추라고 한다. 따라서 대략 566기의 MiG-15가 한국전 기간 동안 F-86에 의해 격추되었다.
세부적인 분석에 들어가면 이 가운데 49기만이 소련 공군의 정예 항공사단(제303, 제324 항공사단) 소속이었으며, 나머지 517기는 모두 상대적으로 기량이 떨어지는 소련 방공군, 중국 공군, 북한 공군 소속이었다. 따라서 전체 교환비는 1:5.835였으나 소련 공군의 정예 항공사단과의 교환비는 1:1.4 수준이었다. 흥미롭게도 제324 항공사단이 초기형 MiG-15를 몰 때 F-86A와의 교환비는 1:8까지 벌어졌으나 MiG-15bis가 도입된 이후로는 1:1.2까지 좁혀졌다. 그러나 소련 방공군, 중국 공군, 북한 공군을 상대로 한 F-86A/E/F의 교환비는 1:9.07에 달했다.
참고로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에 건국되었고 그 전에는 공군이라고 할만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창설된지 1년도 안되는 인민해방군 공군이 세계 최강 미군에 도전한 것은 대단한 감투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북한에 전개된 인민해방군 공군은 MiG-15 54대로 시작했고, 이 수는 점차 늘었다. 3년간의 전투에서 자오바오퉁과 왕하이가 각각 9대를 격추하였고(이것은 미국도 인정한 기록) 에이스는 이들을 포함해 7명이 나왔다. 특기할만한 것은 당시 중공군 공군으로 참가한 조선족 출신 리영태 공군중장(예비역)이 MiG-15를 몰고 미군기 4대를 격추했다고 한다.# 이 전과인지 몰라도 소수민족 출신으로는 유례없이 중국 공군 부사령관까지 올랐다고.
북한이 주장하는 MiG-15 에이스는 대표적으로 김기옥(대좌, 11기 격추), 김지상(대좌, 6기 격추), 백기락(소좌, 5기 격추), 리동규(대위, 5기 격추), 리문순(대위, 5기 격추) 등이 있는데, 이들이 격추했다고 주장하는 날 미군기 출격기록이 없는 등 진위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소련이 중국에 참전하도록 꼬드겨서 MiG-15를 팔아먹었는데, 우방국 혜택을 주지 않고 거액을 중국에 청구하여[22] 후에 배신감을 느낀 중국은 소련측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중소결렬의 한 원인이 되었다. 지금도 중국 사람한테 "러시아 사람들 어때요?"라고 물어보면 "욕심많은 작자들이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카더라.
1958년 중화민국군중국 인민해방군이 충돌한 진먼다오(금문도) 사태 때도 중국군의 MiG-15[23]는 대만군의 F-86과 대결했는데, 이때 중국군은 전투기 11대[24]를 잃었고, 대만군은 3대를 잃었다. MiG-15가 선회력, 추중비 등에서는 더 유리했음에도 상당히 큰 격차로 패배했는데 이 결과는 중국군의 미그기들이 기관포만을 사용한데 반해, 대만군이 처음으로 실전배치된 적외선 유도방식의 사이드와인더 AIM-9 미사일을 사용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량과 시야 및 조준기 등 수치화하기 힘든 세부적인 격차가 컸기 때문이다. 당시 사이드와인더는 후방 및 낮은 G부하 하에서만 발사가 가능했기에 신무기인 AIM-9 및 그로 인한 공포 및 쇼크로 털렸다고 보기 힘들다. 중국군은 미그기의 동체에 명중했으나 불발하여 동체에 꽂힌 미사일을 소련에 넘겼고, 소련은 이를 역공학으로 카피하여 소련제 사이드와인더인 아톨 미사일(러시아 제식명 K-13)을 개발했다. 자국무기에 대한 다른 나라의 무기의 영향을 대체로 부정하는 러시아도 아톨 미사일만큼은 사이드와인더를 베꼈다고 인정했다.

5. 그 외


MiG-15의 테스트 파일럿 중에는 그 유명한 척 예거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획한 미그기를 테스트한 것으로 몇 차례 목숨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실제 MiG-15에는 실속 경고기능이 없어 최대선회율을 유지하다가 스핀에 빠질 뻔하기도 했고 급강하 도중에 조종성을 상실하여 겨우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문제는 이런 부분들이 애초에 설계를 잘못하여 발생하는 문제였기에 비행기를 살리는 것 자체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소련 측 사람들은 척 예거의 이야기를 듣자 '''"그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 아무도 없다"'''란 반응을 보였다고. 그러나 역시 러시아제답게 관리 측면에서는 매우 간단하고 빠르게 보수할 수 있는 기체였다. 구 소련군 내부에서는 'Soldier Aircraft'라는 별명도 붙여줄 정도로 유지 보수가 용이했다고 한다.
인류 최초로 우주에 나간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임관을 받고 처음 실전배치를 받은 비행기이자 사망한 비행기이다. 훈련기 버전으로 비행하다가 추락해서 사망했다.
귀순한 미그기 테스트 영상#
1953년 9월 21일, 노금석(1932년생)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상위가 귀순할 때 타고 온 전투기이기도 했다. 현재 그는 미국에 Kenneth Rowe라는 이름으로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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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당시 MiG-15와 F-86의 교전에서 피격되어 조종사가 탈출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포착된 희귀 사진이 있다. 참고로 이 사진은 '''버즈 올드린'''이 찍었다! 한국전에서 세이버 조종사로 복무하며 미그와의 격돌에서 2킬을 올린 올드린의 후일담에 따르면 이 당시 미군이 숨겨서 안 알려졌다 뿐이지 저 조종사는 소련군이었다고. 왜 미국이 이걸 숨겼냐면, 바로 소련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만 소련이 동맹국에 대한 체면치레로만 찔끔찔끔 전투기를 투입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소련 공군/방공군이 한국전쟁 전 기간을 합쳐 전투중 상실한 MiG-15는 319여기에 달하며, 중국 공군의 MiG-15 전투손실 224기를 훌쩍 뛰어넘는다. 소련 공군/방공군은 명백히 공산측 공군의 주력이었다. 이 사진은 그런 케이스를 포착한 것. 그 외에도 미군 에이스 파일럿 Bud Mahurin은 "비상착륙한 MiG-15에서 붉은 수염의 러시아인이 나왔다. 상부에 보고하였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 라고 증언했다. 전쟁 내내 미국 국방부에 관련 보고가 지속적으로 들어갔지만, 상부는 이것을 의도적으로 묵살하였다.

6. 둘러보기





[1]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자라 소련에 아주 우호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처칠만큼 막나가는 수준은 아니라 소련에게 비교적 유화적이었다. 굳이 애틀리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2차대전기 영국 정치 언론계는 소련에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피터 드러커는 자서전에서, 당시 영국에서 "소련을 경계하라"는 발언을 했다가 곤욕을 치른 사람 이야기를 적었다.[2] 그런데 소련이 계약을 어기고 제대로 로열티를 안줬다며 롤스로이스가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3] 1945년 7월 처칠이 선거에 패해 수상직을 사임하고 노동당 정권 성립.[4]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에서는 이 시기 패튼이 "독일놈들이 옳았어!"라고 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독일이 패망 직전 '미+소+영(+불)'로 구성된 연합군 중 소련을 제외한 나머지 서방국들과만 독립적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동유럽에서 밀려드는 소련군을 독일군이 막아내겠다고 제안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영화 다운폴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물론 현실은 이미 각 연합군이 각국의 이탈 방지를 위해 겹겹의 안전장치들을 체결해 놓은 상태라 그럴일은 없었지만.[5] 미국의 큰 중폭격기 편대를 요격하기 위해서 탑재된 대구경 기관포로, 연사력과 탄속이 느려 전투기와의 공중전에서는 불리하였으나, 일단 한번 맞추기만 하면 전투기고 폭격기고 한방에 파괴되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자랑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미군 조종사들이 37mm 탄을 ''호박탄''이나 "오렌지색 테니스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후방을 잡혀 사격을 당하면 호박만한 불덩이가 줄지어 날아든다고.[6] 그러나 F-86 후기형에선 그 성능을 상당부분 능가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MiG-17이 곧 등장하지만 어차피 17은 15은 개량형이라...[7] 물론 B-29가 도쿄에서처럼 대놓고 대낮에 돌아다닌 탓도 있지만...[8]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프로펠러 전투기들에겐 충분히 효과가 있는 화기였다. 하지만 제트 전투기 시대가 되자 전투기의 덩치는 프로펠러기보다 훨씬 커진데다가 반대로 공중전 시의 상대 속도는 훨씬 빨라져서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짧아져 중기관총 정도로는 충분한 화력을 투사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9] 고고도 기동 때 산소공급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종사가 순식간에 의식 불능에 빠지면서 추락하는 경우도 많았다.[10] 맥아더는 허가를 거듭 요청했지만, 트루먼은 확전의 우려때문에 허가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심지어 만주의 중국공군기지를 폭격하려는 계획도 고려했다.[11] 가장 확실한 건 건 카메라에 찍히는거고 보통은 격추한 파일럿이 최대한 상세하게 격추상황을 보고하고 거기에 더해 동료 파일럿이 목격했다는 증언 등 상세하고도 복수 이상의 전과 확인근거가 있어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냥 파일럿이 "이번 출격에서 적기 격추했음" 이런다고 인정해주진 않는다. 에이스들중에 공식 전과와 비공식 전과기록이 있는데 비공식 전과기록은 본인이 격추했다고 말한 총기록이고 공식 전과기록은 그러한 본인의 주장이 건 카메라나 동료의 증언, 적의 발표(보통은 축소되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전투가 일어난 사실자체는 증명되고 어떤 경우엔 적의 피해 발표규모가 아군의 전과 보고기록보다 더 많은 경우도 아주 간혹 있다) 등으로 확인된 전과기록이다.[12]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티거 전차를 공격하던 미 공군 조종사들은 연기만 나면 격파한 것이라고 판단한 경우가 꽤 있고, 그렇게 보고를 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공세 때 방어에 투입된 티거 수가 예상치보다 훨씬 많았기에 공군은 "도대체 공군놈들은 하는 게 뭐냐"며 욕을 먹기도 했다.[13] 그래서 초기에는 어처구니 없게도 프로펠러기에 격추당하기도 했다.[14] 대만군과 맞붙은 진먼포격전에서 MiG-15가 우수수 털려서 이런 주장을 부정하는 여론도 있지만, 진먼도 포격전에서는 대만 측의 AIM-9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이 처음으로 쓰였기 때문에, 이 또한 기체만의 능력을 판단하기는 부적절한 케이스이다.[15] 다만 F-86 역시 대부분을 적군 영역 상공에서 전투를 하면서도 중국 영토로는 침입이 불가능했던, 공역의 제한 등 성능 외적인 부분에서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각자 유불리를 갖고 있었던 셈.[16] 한국전쟁 당시의 MiG-15의 선회성능은 1000km/h에 가까운 고속이 아닌 이상 F-86에게 우위를 지닌다고 본다.[17] 공동 격추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소수점으로 나타난다.[18] 단순히 숙련도만으로 보기에는 MiG-15는 그 이후에도 우세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 흔히 매니아들은 선회력과 추중비만으로 공중전 능력을 줄 세우려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그외에도 성능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많다.[19] 또한 최근 연구자료 결과를 보면 F-86 vs MiG-15 교전비가 1.8:1 정도로 낮아졌다는 것은 격추된 것으로 판단되었던 MiG-15들이 중국 영공으로 하강해서 귀환했다는 것. 물론 여기엔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F-86의 주무장이던 12.7mm 중기관총이 제트전투기를 상대하기엔 부족했다는 점도 큰 요인이다. 그리고 미군 조종사들이 중국 영공으로 추격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반면 소련군 소속 조종사들 또한 - 어쨌거나 소련은 "공식적으로는 참전하지 않은" 것이므로 - 절대로 적 지역에서 잡혀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UN군 지역에 떨어진 소련군 파일럿 한 명은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권총으로 자살한 경우도 있었고, 나아가 서해상에서 비상탈출한 소련군 파일럿을 다른 미그기가 기총소사로 사살한 사례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소련군 소속 파일럿들 역시 UN군 장악지역 너머로 적기를 추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20] F-86 기수의, 공기흡입구 상단의 약간 튀어나온 검은색 부분이 바로 거리측정 레이더를 위한 레이더 돔이다.[21] MiG-15가 장비하고 있던 자이로 건사이트는 렌드리스된 미군기에 장비되어있던 'K-14' 건사이트를 카피한 것이었다. 이후 소련은 한국전쟁 중 추락한 F-86 기체에서 획득한 레이더 연동 건사이트를 바탕으로 레이더 연동 건사이트를 개발, MiG-15의 '개량형이자 사실상의 완성형'인 MiG-17에서부터 사용했다(그리고 베트남전에서 미군을 괴롭혔다...).[22] 헌데 중국과 대립하던 인도에는 우방국 혜택을 줘서 많은 할인을 해줬다.[23] 중국의 MiG-17 라이센스 판인 J-5라는 설도 있다. MiG-17은 15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서 겉모양만 봐서는 구분하기가 힘들다.[24] MiG-17(J-5) 문서에도 있듯 MiG-15를 포함 29대 손실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