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사

 





1. 개요
2. 신라
3. 계보
3.1. 사료의 연대에 대한 여러 견해
3.2. 상고 시대
3.3. 성골 왕실(중고)
3.4. 무열왕계 왕실(중대)
3.5. 원성왕계 왕실(하대)
4. 금석문이나 기타 문헌에만 등장하는
5. 비정통 군주
6. 석씨·김씨 또한 박성 왕조였다?
7. 6부의 수장이었던 신라의 군주
8. 참고 문서


1. 개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991년 동안 56명의 왕이 있었다. 역사 시대의 한국사 왕조 중 가장 즉위한 왕이 많은 나라이다.[1][2] 약 500여 년 존속한 조선 왕조 27명의 2배를 넘는다. 평균 재위 기간은 17년인데, 이는 하대의 왕족 및 귀족들이 왕위를 두고 현실판 배틀그라운드를 했던 것도 있고, 요절 징크스도 심해서 평균을 팍팍 깎아먹기 때문으로 건국부터 중대까지 평균 재위 기간은 23년이라 고구려와 별 차이가 없다. 참고로 후대 왕조의 평균 재위기간은 고려 14년, 조선 19년 2개월이다. 그 외 태조 성한왕 등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신라 왕의 이름이 몇몇 전한다.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여성 군주가 존재했다. 그것도 3이나.'''[3] 그리고 특정 가문이 왕위, 왕족을 독점하는 게 상식이었던 동아시아의 주요 왕조 중에서도 특이하게도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가면서 왕위를 이은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여러모로 동아시아 왕조 중에서는 특이한 부분이 많았던 나라. 경주 김씨 왕조가 586년으로 가장 오래 집권하였고, 박씨 가문 232년, 석씨 가문 172년이 뒤따른다. 특이한 부분은 박씨 가문이 신라 말기에 왕위를 되찾는다는 것.
최장 재위한 왕은 혁거세 거서간 61년, 진평왕 54년, 흘해 이사금내물 마립간 47년, 눌지 마립간 41년 순이다. 모두 통일 이전 상대의 왕이다. 통일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커서, 이후의 왕 중에서는 30년 넘게 재위한 왕도 성덕왕 (36년) 딱 한 명, 20년 넘게 재위한 왕도 경덕왕 (23년), 문무왕 (21년) 고작 둘뿐이다.
반면 최단 재위신무왕 181일, 정강왕 365일(1년), 민애왕소성왕 2년, 희강왕 3년 순인데, 모두 통일 이후의 왕이다. 짧게 재위한 왕이 많은 신라 하대라고는 하지만 의외로 고려의 창왕이나 조선의 단종마냥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상황 파악도 못 하다가 간 경우는 별로 없는데, 희강왕은 손자까지 있었고 소성왕도 아들이 있었으며 신무왕과 민애왕도 피튀기는 왕위쟁탈전 끝에 즉위했다가 얼마 못 간 경우이다.

2. 신라


순서
왕호
재위 기간

비고
'''<신라 상고>'''
'''박씨 이사금조''' : 8대 241년[4]
1대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 (61년)
박혁거세
[image]
신라의 건국자, 최초의 박씨 군주
2대
남해 차차웅(南解)
4년 ~ 24년 (21년)
박남해
혁거세 거서간의 아들
3대
유리 이사금(儒理)
24년 ~ 57년 (33년)
박유리
남해 차차웅의 장남
4대
탈해 이사금(脫解)
57년 ~ 80년 (24년)
석탈해
최초의 석씨 군주, 남해 차차웅의 사위, 유리 이사금의 매제
5대
파사 이사금(婆娑)
80년 ~ 112년 (33년)
박파사
유리 이사금의 차남, 탈해 이사금의 처조카
6대
지마 이사금(祇摩)
112년 ~ 134년 (22년)
박지마
파사왕의 아들
7대
일성 이사금(逸聖)
134년 ~ 154년 (21년)
박일성
유리왕의 장남 또는 조카, 지마 이사금의 백부 또는 당숙
8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
154년 ~ 184년 (30년)
박아달라
마지막 박씨 이사금, 일성 이사금의 장남
'''석씨 이사금조''' : 8대 172년
9대
벌휴 이사금(伐休)
184년 ~ 196년 (12년)
석벌휴

10대
내해 이사금(奈解)
196년 ~ 230년 (34년)
석내해

11대
조분 이사금(助賁)
230년 ~ 247년 (17년)
석조분

12대
첨해 이사금(沾解)
247년 ~ 262년 (14년)
석첨해

13대
미추 이사금(味鄒)
262년 ~ 283년 (22년)
김미추
최초의 김씨 군주.
14대
유례 이사금(儒禮)
283년 ~ 298년 (12년)
석유례

15대
기림 이사금(基臨)
298년 ~ 310년 (12년)
석기림

16대
흘해 이사금(訖解)
310년 ~ 356년 (47년)
석흘해
마지막 석씨 이사금.[5]
'''김씨 마립간조''' : 6대 159년
17대
내물 마립간(奈勿)
356년 ~ 402년 (47년)
김내물
삼국유사에는 마립간,
삼국사기에는 이사금으로 기록됨.
18대
실성 마립간(實聖)
402년 ~ 417년 (16년)
김실성

19대
눌지 마립간(訥祗)
417년 ~ 458년 (41년)
김눌지

20대
자비 마립간(慈悲)
458년 ~ 479년 (21년)
김자비

21대
소지 마립간(炤知)
479년 ~ 500년 (21년)
김비처
원 이두는 비처(毗處) 마립간.
소지는 고친 것이다.
22대
지증왕(智證)
500년 ~ 514년 (14년)
김지대로
초기에는 지증 마립간이었다가
503년부터 국왕 칭호 사용
'''<신라 중고>'''
'''김씨 성골 왕조''' : 6대 140년
23대
법흥왕(法興)
514년 ~ 540년 (36년)
김원종[6]
지증왕의 장남
24대
진흥왕(眞興)
540년 ~ 576년 (36년)
김삼맥종
법흥왕의 외손자
25대
진지왕(眞智)
576년 ~ 579년 (4년)
김사륜
진흥왕의 차남
26대
진평왕(眞平)
579년 ~ 632년 (54년)
김백정
진흥왕의 손자, 진지왕의 조카
27대
선덕여왕(善德)
632년 ~ 647년 (15년)
김덕만
[image]
진평왕의 장녀
28대
진덕여왕(眞德)
647년 ~ 654년 (8년)
김승만
진흥왕의 증손녀, 선덕여왕의 사촌 자매
'''<신라 중대>'''
'''통일신라 시대''' 개막
'''김씨 무열왕계 왕조''' : 8대 126년
29대
무열왕(武烈)
654년 ~ 661년 (8년)
김춘추
[image]
진지왕의 손자, 진평왕의 외손자, 진덕여왕의 5촌 조카, 묘호 태종
[8]
30대
문무왕(文武)
661년 ~ 681년 (21년)
김법민
[image]
태종 무열왕의 장남
31대
신문왕(神文)
681년 ~ 692년 (12년)
김정명
문무왕의 장남
32대
효소왕(孝昭)
692년 ~ 702년 (10년)
김이홍
신문왕의 장남
33대
성덕왕(聖德)
702년 ~ 737년 (36년)
김흥광[9]
신문왕의 차남, 효소왕의 남동생
34대
효성왕(孝成)
737년 ~ 742년 (5년)
김승경
성덕왕의 차남
35대
경덕왕(景德)
742년 ~ 765년 (23년)
김헌영
성덕왕의 삼남, 효성왕의 남동생
36대
혜공왕(惠恭)
765년 ~ 780년 (16년)
김건운
경덕왕의 장남
'''<신라 하대>'''
'''김씨 내물왕계 왕조''' : 16대 132년
37대
선덕왕(宣德)
780년 ~ 785년 (6년)
김양상
내물왕 10대손, 성덕왕의 외손자, 혜공왕의 고종사촌
38대
원성왕(元聖)
785년 ~ 799년 (13년 353일)
김경신
'''묘호 열조(烈祖)'''
선덕왕의 외내삼종숙[10]
39대
소성왕(昭聖)
799년 ~ 800년 (2년)
김준옹
원성왕의 장손
40대
애장왕(哀莊)
800년 ~ 809년 (10년)
김중희[11]
소성왕의 장남
41대
헌덕왕(憲德)
809년 ~ 826년 (18년)
김언승
애장왕의 숙부
42대
흥덕왕(興德)
826년 ~ 836년 (11년)
김경휘[12]
헌덕왕의 동생
43대
희강왕(僖康)
836년 ~ 838년 (3년)
김제륭
흥덕왕의 당조카
44대
민애왕(閔哀)
838년 ~ 839년 (2년)
김명
희강왕의 처남
45대
신무왕(神武)
839년 (181일)
김우징
민애왕의 외조카
46대
문성왕(文聖)
839년 ~ 857년 (19년)
김경응
신무왕의 장남
47대
헌안왕(憲安)
857년 ~ 861년 (4년)
김의정
문성왕의 숙부
48대
경문왕(景文)
861년 ~ 875년 (14년 181일)
김응렴
헌안왕의 사위
49대
헌강왕(憲康)
875년 ~ 886년 (11년)
김정
경문왕의 장남
50대
정강왕(定康)
886년 ~ 887년 (365)
김황
경문왕의 차남, 헌강왕의 남동생
51대
진성여왕(眞聖)
887년 ~ 897년 (10년 154일)
김만
경문왕의 장녀, 정강왕의 여동생
'''<후삼국 시대>'''
52대
효공왕(孝恭)
897년 ~ 912년 (15년 11개월)
김요
헌강왕의 서자, 진성여왕의 조카
'''후기 박씨 왕조''' : 3대 16년
53대
신덕왕(神德)
912년 ~ 917년 (6년)
박경휘
728년만의 박씨 왕, 아달라 이사금의 후손[13], 헌강왕의 사위, 효공왕의 자형
54대
경명왕(景明)
917년 ~ 924년 (8년)
박승영
신덕왕의 장남
55대
경애왕(景哀)
924년 ~ 927년 (4년)
박위응
마지막 박씨 왕, 신덕왕의 차남, 경명왕의 남동생
'''후기 김씨 왕조''' : 1대 9년
56대
경순왕(敬順)
927년 ~ 935년 (9년)
김부
[image]
마지막 김씨 왕, 문성왕의 직계 후손, 경애왕의 이종사촌

2.1. 추존


시호

비고
세조(世祖)
김알지
'''묘호 세조(世祖)'''
김알지. 조선왕조실록 근거.
성한왕(星漢王)
''' 묘호 태조(太祖)'''[14]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문무왕릉비, 흥덕왕릉비 등 신라 시대 금석문에서만 등장하는 인물. 1차 사료에 있어 신라에 태조라고 불리는 인물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15]
사요왕
유리 이사금의 장인.
허루 갈문왕
파사 이사금의 장인. 별칭 허루왕, 이찬 허루.
마제 갈문왕
지마 이사금의 장인. 별칭 마제국왕, 마제.
일지 갈문왕
일성 이사금의 외조부.
지소례왕
일성 이사금의 장인.[16]
아도 갈문왕
파사 이사금의 손자.
세신
석골정
둘째 아들 첨해왕이 추존함. 별칭 홀쟁 갈문왕.
구도갈문왕
성한왕의 현손자.
이칠 갈문왕
미추 이사금의 장인.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이비 갈문왕으로 기록되었다.
내음 갈문왕
내해 이사금의 장남. 유례 이사금의 외조부.
파호갈문왕
내물 마립간의 차남. 자비 마립간의 장인 중 한 명.
습보 갈문왕
지증왕의 아버지.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기보 갈문왕으로 기록되었지만, 이쪽은 눌지왕의 조카가 아닌 동생으로 적었다. 소지 마립간의 장인 중 한 명.
지도로 갈문왕
금석문에만 기록. 왜 재위 중에도 갈문왕 작위를 썼는지는 학자별로 의견이 분분하다.
입종갈문왕
울진봉평리비에서는 사부지 갈문왕으로 나온다. 별칭 사부지왕(울주천전리각석 기록).
동륜왕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동륜왕으로 기록되었는데, 국왕이 아니라 갈문왕을 뜻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 경우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나오는 갈문왕과 동일인물로 여긴다.
복승 갈문왕
진평왕의 비 마야부인의 아버지.
음갈문왕
선덕여왕의 남편.
진정 갈문왕
김백반
진평왕의 남동생. 삼국유사 왕력편에 기록된 선덕여왕국서 음갈문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17]
진안 갈문왕
김국반
진평왕의 남동생. 별칭 국분 갈문왕. 진덕여왕의 아버지. 이쪽도 음갈문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18]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국기안 갈문왕으로 기록되었다.
문열왕(文烈王)
소벌도리
태종 무열왕이 추존함. 돌산고허촌의 촌장. 박혁거세의 양부.
만천 갈문왕
박노
삼국유사 왕력편 기록. 국반 갈문왕의 아내 월명부인의 아버지.
문흥대왕(文興)
김용수
태종 무열왕이 추존함.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용춘각간문흥갈문왕으로 기록되었다.[19]
흥무대왕(興武)
김유신
흥덕왕이 추존함. '''신라 왕족이 아님에도 대왕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20]
개성대왕(開聖)
김효방
선덕왕이 추존함. 선덕왕의 아버지.
현성대왕(玄聖)
김법선
원성왕이 추존함. 원성왕의 고조부.
신영대왕(神英)
김의관
원성왕이 추존함. 태종무열왕의 사위, 원성왕의 증조부.
흥평대왕(興平)
김위문
원성왕이 추존함., 원성왕의 조부.
명덕대왕(明德)
김효양
원성왕이 추존함. 원성왕의 아버지.
혜충대왕(惠忠)
김인겸
소성왕이 추존함. 소성왕의 아버지.
익성대왕(翌成)
김헌정
희강왕이 추존함. 희강왕의 아버지.
선강대왕(宣康)
김충공
민애왕이 추존함. 민애왕의 아버지이자 희강왕김균정의 장인. 별칭 충공 갈문왕.
혜강대왕(惠康)
김예영
신무왕이 추존함. 신무왕의 조부.
성덕대왕(成德)
김균정
신무왕이 추존함. 신무왕의 아버지.
의공대왕(懿恭)
김계명
경문왕이 추존함. 경문왕의 아버지.
혜성대왕(惠成)
김위홍
진성여왕이 추존함. 진성여왕의 남편
선성대왕(宣聖)
박예겸
신덕왕이 추존함. 신덕왕의 아버지(삼국사기).
성무대왕(成武)
박순홍
신덕왕이 추존함. 신덕왕의 외조부.
흥렴대왕(興廉)
박문원
신덕왕이 추존함. 신덕왕의 아버지(삼국유사).
성희대왕(聖僖)
김대존
경명왕이 추존함. 경명왕의 장인.
의흥대왕(懿興)
김인경
경순왕이 추존함. 경순왕의 조부.
신흥대왕(神興)
김효종
경순왕이 추존함. 경순왕의 생부.

3. 계보


둘 이상의 기록이 충동하는 왕의 계보는 1차로 당대 금석문의 계보를, 2차로 삼국사기의 계보를 우선으로 기입했다. 정식 사서가 아닌 것은 기입하지 않되, 삼국유사는 당대 금석문이나 삼국사기와 상충하지 않으면 기입했다.
칭호가 왕인 경우는 보라색, 왕이 아닌 경우는 녹색으로 표시했다. 아내의 이름은 아랫첨자로 표시했다.
삼국사기에서 김알지탈해 이사금 시기에 등장하나, 이후 다른 가문과 비교했을때 너무나 세대차가 많이 나는 점과 유리 이사금의 장인으로 사요왕 김씨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그 이전에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아달라 이사금 20년(삼국사기 상 173년)에 조공했다는 히미코가 실제로는 고령에 즉위해 248년 사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신라의 시조묘
신라는 6년, 즉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4∼24) 3년 1월에 처음으로 시조묘를 건립하고, 제사장으로 왕의 누이인 아로(阿老)를 임명해 사계절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다. 시조묘의 주신(主神)은 건국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이며, 곡령신(穀靈神)의 성격을 띠었다. 남해차차웅 이후 시조묘에 대한 제사는 즉위 의례로서 이사금(尼師今) 시기까지 거의 모든 역대 왕들이 주 지했다. 한편 마립간(麻立干) 시기에 김씨(金氏)에 의한 왕위 독점이 확립되고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하면서, 국왕의 성격과 더불어 시조묘 제사의 내용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487년(소지마립간 9) 2월 시조의 탄생지인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설치하면서 종래 시조묘의 역할을 신궁이 대신하게 되었다. 신궁 설치 이후 시조묘에 대한 기사는 신라 말인 801년(애장왕 2) 2월, 813년(헌덕왕 5) 2월, 833년(흥덕왕 8) 4월의 세 차례를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특히 신라 중고기(中古期)와 중대(中代)에는 한 차례도 보이지 않는다.
  • 시조묘와 신궁과의 관계
시조묘와 신궁의 관계에 대해서는 계승관계설과 병존관계설로 크게 나누어지며, 그와 관련해 신궁의 주신도 박씨 시조설, 김씨 시조설, 태양신설 또는 천지신설 등이 있다. 한편 신라 중대 초인 신문왕(神文王, 681∼691)대에 중국적 종묘(宗廟) 제도로서 오묘제(五廟制)가 등장했으며, 그 주신은 김씨 시조신과 왕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신라의 묘제가 이처럼 시조묘→신궁→오묘제로 변천해 간 것은 신라 사회의 발전과 왕실 세력의 교체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박씨에서 석씨, 다시 김씨로의 왕위 계승, 김씨족 내에서 가계의 분화에 따른 가계 간의 왕권 교체, 그리고 사회의 분화·발전과 중국 유교 문화의 수입·정비에 의한 왕자(王者)의 샤먼적 성격의 탈색 등의 변화는, 농경신으로서의 박혁거세를 모시는 시조묘의 기능을 제한·축소시켜 나갔다. 시조묘는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묘제의 최초의 모습으로, 그 역할과 기능이 신궁과 오묘제로 계승, 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고려·조선시대의 묘제인 원묘(原廟)와 종묘제(宗廟制)로 계승되었다.

3.1. 사료의 연대에 대한 여러 견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초기기록을 읽다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나오고, 기록 자체의 전후 모순도 다수 발견된다. 따라서 일본학계에서는 신라의 초기기록 전체를 허구 내지 조작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료의 한계만을 들어 도외시한다면 신라 초기사는 언제까지나 공백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자료의 한계를 무시하고 섣불리 접근하려 한다면 연구의 진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초기사 해명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초기기록의 자료적 한계를 염두에 두면서 기왕의 극단적 불신론이 제기한 의문점들에 대해 어느 정도 합리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논의되는 대표적인 부분들을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 혁거세의 즉위가 갑자(甲子)로부터 시작될 뿐 아니라 그 재위 또한 일주갑(一周甲)이 된다는 점. 이는 실질적인 석씨계(昔氏系) 첫 왕으로 보이는 벌휴이사금의 경우도 그러하다.
  • 유리(儒理)-일성(逸聖)간, 구도(仇道)-나물(奈勿)간, 우로(于老)-흘해(訖解)간, 미추(味鄒)-나물(奈勿)간 기년의 신장(伸長) 가능성
  • 탈해(脫解)대 등장하는 알지(閼智)와 구도(仇道)간의 세대수가 다른 성씨에 비해 너무 많다는 점
이에 대한 초기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세계(世系)의 순서를 변경하거나 재위한 왕의 수를 줄임으로써 기년의 인하를 추구했다. 즉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순차적으로 나온 박(朴), 석(昔), 김(金) 3성의 세계를 본래 병렬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기년이 상승된 이유에 대해서는 부족연맹을 이루고 있던 당시에는 실제로 연맹장인 이사금에 선출되지 못하고 자기 부족의 족장에 그친 인물들이 있었는데, 후대에 이들도 이사금이었던 것처럼 인식되어 이사금의 대수가 늘어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후대 사서 편찬 과정에서 나물 이후에도 그대로 계속되는 김씨세계와 나물 직전까지 이사금들이 나왔던 석씨세계는 기년상의 위치를 비교적 원상태로 두고, 석, 김과 병렬적이었던 박씨세계만을 석씨세계 이전으로 올려놓음으로써 전반적인 기년의 인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3성 세계(世系)를 병렬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실제 이사금이 아니었던 인물들을 왕계에서 제외시킨다면 기년이 사실과 가깝게 인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결국 신라의 건국시기는 3세기 정도이다. (김철준, 1975)
이후 기년의 조정을 위해 세계 자체를 무리하게 이동시키지 않고 일단 박, 석, 김 3성세력의 계기적 계승을 사실로 인정하고 출발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박씨세계 속에 끼어 있는 탈해와 석씨세계 속에 들어있는 미추의 경우에 대해서는 세계상의 위치를 의심하였다. 이에 탈해와 벌휴(伐休) 양자를 왕계에서 제외하고, 미추의 왕계상의 위치를 내물 직전으로 끌어내림으로써 기년의 인하를 추구한 것이다. 이러한 기년조정의 근거가 된 것은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아달라이사금 20년조의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어 내빙하였다.(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라는 기록이다. 이 때의 비미호가 대략 240년대를 전후로 활약한 인물이므로 비미호가 신라에 견사(遣使)한 시기도 이 때를 크게 벗어나지 않다고 추정하여 아달라이사금 20년(173)의 시기를 70여 년 내려보아야 한다고 보았다.(김광수, 1973)
그러나 이렇게 세계의 순서를 변경하거나 재위한 왕의 수를 줄이는 방식은 그 근거가 명확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이러한 방식을 배제하고 초기기록의 왕실계보나 왕의 즉위순서 등을 당시의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견해가 등장하였다. 즉 초기기록에는 착오 내지 의도적 윤색이 있을 수 있지만 지배층의 친족계보나 그들의 동향 등은 문자가 없던 시대에도 최우선적으로 기억, 전승되어야 할 관심사였을 것이므로 세계의 조작이 결코 쉽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계보상의 등장인물의 출생시기를 추적하는 방법을 통하여 기년의 인상 정도를 확인하는 방식을 택하였는데, 주로 눌지의 모계(母系)를 추적하였다. 그 결과 탈해시기의 실제기년의 상한은 250년대 이후였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벌휴를 비롯한 석씨계 이사금의 재위시기는 4세기 전반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으며, 김씨 나물의 즉위시기도 『삼국사기』의 기년보다 20여년 하향되는 380년 전후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아울러 3세기 후반은 첨해, 미추, 유례, 기림, 흘해, 나물의 재위시기가 몰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강종훈, 2000)
한편 기년의 조정에 있어서는 앞서의 연구들과 동일하지만 신라 왕실계보 자체를 이원화 한 경우도 있다. 곧 유리가 229년에 즉위한다고 보고 파사-지마-일성-아달라까지를 박씨왕실로, 탈해는 262년에 즉위한다고 보아 벌휴-나해-조분-첨해-유례-기림-흘해까지를 병립했던 석씨왕실로 본 것이다. 이후 박씨왕실은 356년에 끝나는 아달라 이후 미추부터 시작되는 김씨왕실로 넘어간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라의 초기왕실계보를 229년부터 356년까지의 박씨왕실과 356년부터 이를 계승하는 김씨왕실, 이와는 별개로 262년부터 438년까지 병립했던 석씨왕실로 완전히 이원화하였다.(선석열, 2001)

3.2. 상고 시대


'''1.혁거세'''
알지
'''2.남해'''
세한
'''3.유리'''
'''4.탈해'''
아도
'''7.일성'''
'''5.파사'''
구추
수류
'''8.아달라'''
'''6.지마'''
'''9.벌휴'''
욱보
아도
골정
이매
구도
물품
'''11.조분'''
'''12.첨해'''
'''10.나해'''
'''13.미추'''
말구
제상
'''14.유례'''
걸숙

날음
우로
'''17.나물'''
대서지
'''15.기림'''

'''16.흘해'''
'''19.눌지'''
복호
미사흔
'''18.실성'''
'''20.자비'''
습보
내숙
'''21.소지'''
'''22.지증'''
물품
이사부[21]

거칠부
석씨 집단은 9대 벌휴 이사금이 집권하기 시작하면서 왕실 내에 장남 골정 계열(骨正)과 차남 이매 계열(伊買)로 분화되었다. 골정은 구도갈문왕의 딸 김옥모와 혼인했으며, 이매는 지마 이사금의 딸이자 선왕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인 박내례와 혼인을 맺었다. 이 두 집단은 벌휴 이사금 시기부터 외척을 등에 업고 대립적인 소지를 지니고 있었다.
석씨 이사금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족내혼'''을 사용한다. 벌휴 다음인 10대 이사금에는 골정의 사위인 이매계 석내해가 즉위했고 11대 이사금에는 선왕 내해의 사위인 골정계 석조분이 즉위했으며 12대 이사금에는 선왕 조분의 사위인 이매계 석우로가 즉위...해야 했으나 정작 즉위한 것은 조분의 동생이었던 첨해 이사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매계 핵심 세력인 석우로는 일본인들에게 끔찍하게 화형당하면서 두 집단의 정치적 균형이 붕괴되었다. 당시 이사금인 첨해 이사금과 골정계를 지지했던 김구도계는 원래대로라면 이사금이 되어야 했을 석우로가 왜군에게 살해됨을 방관하였다. 석우로의 죽음으로 이후 이매계는 급격히 약화되어 권력 중심에서 사실상 퇴출되었고,[22] 뒤이어 첨해 이사금도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최초의 김씨 이사금인 미추 이사금이 조분 이사금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첨해가 이사금위에 계속 있으면 첨해와 인척관계가 없는 미추의 왕위 계승은 어려워지기 때문에 골정+김구도계의 공공의 적이었던 이매+박아달라계가 몰락하자 골정계와 김구도계의 대립구도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구도계와 골정계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물론 미추는 일단 석씨의 사위 신분으로 왕위를 이은 것이라 미추 사후에는 다시 석씨 집단이 일단 왕위를 잇지만, 이미 김씨의 도움이 없으면 제대로 나라를 이끌 수 없는 상태였음이 여러 사례에서 등장한다. 계속해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성장한 구도계 김씨의 입김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미추의 즉위로 김씨 가문이 강해진 상황에서 후대의 석씨 왕들이 제대로 된 세력 확장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김씨 가문에게 왕위를 내줬다.
그뒤 구도계 김씨가 고구려와도 손을 잡고, 뒤로 밀려난 박씨 집단과는 혼인 정책으로 연합 상태를 이루게 되었으니 석씨 집단은 결국 역사의 흐름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석씨 세력의 피가 섞인 실성이 내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데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후 눌지가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 석씨 왕실도 같이 몰락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본다. 실성 이사금 사망 1년 전 시점에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3장이나 솟아오르다."라는 구절은 이를 은유한한 듯하다.
이는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인 김씨가 토착 세력인 박씨와 혼인 관계를 통해 세력을 확장한 것과 대비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눌지 마립간은 김씨 마립간가의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 자신의 동생들인 복호미사흔의 자손들과의 혼인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그의 손자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근친혼 관계였기 때문에 자손들을 많이 갖기는 어려웠으며, 복호계의 경우 지속적으로 왕비 배출에서 미사흔계에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6부가 5세기를 통해서 순차적으로 혹은 3부가 분화하여 성립했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탁부와 사탁부가 마립간시대 김씨 왕실 직속의 세력기반이라고 간주한다.
5세기에는 탁부 매금왕이 신라 국왕이었고 사탁부 갈문왕은 이를 보좌하는 사이였다가 탁부의 후계자 혼란을 틈타 사탁부의 지증왕이 6부 수장 자리를 가져갔다. 이 때 지증왕은 연제부인으로 대표되는 박씨 집안과의 결탁을 통해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눌지 마립간 이후 박씨 왕비가 없었던 신라 왕비사에 박씨 왕비가 잔뜩 늘어나는 시점이 바로 이 시점이다.
이 때문에 지도로 갈문왕(지증왕)은 탁부의 수장을 사부지 매금왕(법흥왕)에게, 사탁부 수장을 입종 갈문왕에게 넘겼고 입종 갈문왕의 아들이 진흥왕이 되면서 탁부와 사탁부의 수장은 통합되었다. 법흥왕 시대의 비문을 보면 탁부와 사탁부의 대표는 숫자가 동일했으며 입종 갈문왕은 부왕급의 지위를 누렸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혁거세 거서간을 발견한 것은 양산촌이었으며 고허촌에서 혁거세 거서간알영부인을 보살폈다고 하는데, 5세기 김씨 왕권은 훼부 출신이었고 6세기 이후부터 사훼부 김씨에게 왕권이 넘어갔기에 그러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듯하다.

3.3. 성골 왕실(중고)


동륜태자의 자손들은 모두 석가모니 가족의 이름을 땄다. 성골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있는 대목.
'''22.지증'''
'''23.원종'''
입종
지소
'''24.삼맥종'''
숙흘종
동륜
'''25.사륜'''
구륜
만명
'''26.백정'''
백반
국반
용수
선품
'''27.덕만'''

'''28.승만'''
'''29.춘추'''
백제도 과거에는 서양처럼 인칭+왕을 사용하고 동성왕 때부터 시호를 사용했지만[23] 신라는 유독 시호를 사용한 시기가 늦은 편이다.
신라 시호 제도의 시초에 대한 기록은 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지철로왕조에서는 지증왕의 시호인 지증(智證)이 최초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법흥왕의 시호인 법흥(法興)이 최초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참고하자면 신라인들은 지증왕 혹은 법흥왕 즈음부터 시호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당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이야기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예컨데 법흥왕이 아직 죽지 않고 왕위에 있었던 535년 경, 울주의 천전리각석에 새겨진 명문(「울주천전리각석 을묘명」)에 따르면 법흥왕은 이미 살아있었을 적에도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 불렸음이 확인된다. 또한 진흥왕이 생전인 568년 즈음에 변방을 순수한 후에 세워진 「북한산비」 · 「황초령비」 · 「마운령비」 등의 진흥왕순수비에서도 모두 진흥왕을 '진흥태왕(眞興太王)'이라 일컬었다.
이런 케이스는 국내의 금석문 뿐 아니라 중국 측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예컨데, 『북제서』에서는 진흥왕의 이름을 '김진흥(金眞興)'이라 하였다. 또한 『수서』에서는 진평왕의 이름을 '김진평(金眞平)이라, 『구당서』에서는 선덕여왕의 이름을 '김선덕(金善德)'이라, 『장안지』에서는 진덕여왕의 이름을 '김진덕(金眞德)'이라 하였다.
지증왕~진덕여왕까지만 해도 생전부터 사용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시호가 아니다. 거기다 명명법을 보면 불교적 법명이나 이명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름+군주명을 사용했던 신라의 초기 관습이 진덕여왕 때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역사를 크게 상고 · 중고 · 하고의 3단계로 구분한 바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중고기의 왕들, 즉 불교를 공인한 것으로 유명한 23대 법흥왕으로부터 24대 진흥왕 · 25대 진지왕 · 26대 진평왕 · 27대 선덕여왕 · 28대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불교적 관념이 짙게 베어든 왕호를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이는 모두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왕이 죽은 이후에 붙여지는 시호로 보기에는 어려우며, 왕들의 불교식 법명 내지는 존호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여겨진다. (그 이전의 20대 자비마립간과 22대 지증왕의 이름도 불교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신라의 왕실의 불교의 수용과 공인을 통해 그 권위를 강화시켰던 점에서 기인한다. 법흥왕의 경우를 보더라도, 불교 공인(528) 이전에는 「울진봉평비」(524)에서 "모즉지매금왕(牟即智寐錦王)"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었으나, 이후의 금석문인 「울주천전리각석 을묘명」(535)과 「울주천전리각석 추명」(539)에서는 각기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무즉지태왕(另卽知太王)" 등의 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처럼 신라에서 왕을 뜻하는 토속어인 "매금"이 "대왕" 혹은 "태왕"의 칭호로 대체되고 있는 모습은 국왕의 권력과 위상의 변동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왕의 권위와 불교신앙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었음을 그 외의 사례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예컨데 진흥왕은 흥륜사를 창건하였고, 자신의 두 아들들에게 동륜과 사륜(훗날의 진지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고대 인도에서 왕권의 강화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했던 불교의 이상적 군주관, 즉 전륜성왕 관념과 연관이 깊다.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과 그 두 아우 등에게는 백정 · 백반 · 국반 등을 비롯하여 석가모니의 부친 및 숙부들에게서 차용한 이름이 붙여졌고, 진평왕의 왕비 또한 석가모니의 모친에게서 차용한 마야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는 왕실의 일원들을 석가모니의 혈족과 동일시하여 그 권위와 신성성을 강화하는 이른바 성골(聖骨) 관념이 작용된 결과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신라의 왕들이 불교식의 법명과 존호를 사용했던 것 또한 이러한 추세와 무관하지는 않을 터이다.
한편 이렇게 볼 때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서 신라에서 최초의 시호로 전해지는 지증왕이나 법흥왕 등의 명칭은 사실은 시호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이는 법흥왕 이후로 즉위한 다른 중고기의 신라 국왕들(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등)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점이다. 당시의 왕들이 불교식 법명 내지는 존호를 사용했던 것이 훗날에 시호를 사용했다고 와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추사 김정희는 태종 무열왕(김춘추)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호가 사용되었으리라 보았다. 실제로 김춘추는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인 문무왕(김법민)으로부터 "태종(太宗)"이라는 묘호와 "무열왕(武烈王)"이라는 중국식 시호를 받았다. 신라에서 시호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도 무열왕과 문무왕이 등장한 신라 중대 이후일 것이다. 기록에는 사장되지만, 이때 김씨의 시조인 성한왕이 태조로 추존되었다고 본다.
한편 진흥왕의 두 아들 동륜태자와 진지왕계열의 문제로 인해 성골 개념이 생겨났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동륜태자의 아들로 진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평왕은 자신의 왕위계승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 계열을 성골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사후 두 여왕들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오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골개념의 강조 속에서 근친혼이 누적되면서 성골 남성 자손은 원래 진골로 강등이 되었던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 계열만 남게 되었고, 결국 김춘추가 여왕의 치세 때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김해 김씨 계열과의 돈독함을 통해 세력을 공고히 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3.4. 무열왕계 왕실(중대)


'''29.춘추'''
'''30.법민'''
(공주)[24]
'''31.정명'''
?
?
위문
'''32.이홍'''
'''33.흥광'''
?
?

효양

사소
중경
'''34.승경'''
'''35.헌영'''
일성
지렴

'''38.경신'''
'''37.양상'''

'''36.건운'''
중고 시기가 불교의 시기였다면, 중대 시기는 유교의 시기였다. 무열왕과 문무왕은 삼국통일전쟁과 후속 전쟁인 나당전쟁을 치루느냐 내치를 돌보기에는 힘들었지만 나당전쟁이 마무리 된 시점에 즉위한 신문왕은 통일 공신들의 세력을 억눌러가면서 왕권 강황에 나서 신라 중대가 태평성대로 흘려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어린 왕의 등장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강화된 왕실을 통해 꽤나 정리된 모습을 보여왔었다. 하지만 누적된 왕실과 귀족들간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는 결국 혜공왕 즉위 때 터지게 되었고, 혜공왕은 신라 왕사에서 보기 드문 시해당한 왕으로 정식 기록이 되면서 신라 하대의 정신 없는 왕위 계승사를 보여주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이후 즉위한 선덕왕은 비록 왕계가 넘어가긴 했지만 뒤에 왕위를 잇는 원성왕계와는 혈통이 다르기 때문에 내물왕계로 구분하는 기록과는 달리 실상은 선덕왕의 경우 중립적 위치에서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김주원의 강력한 지지자도 사소부인이었고.

3.5. 원성왕계 왕실(하대)


'''38.경신'''
인겸
예영
'''39.준옹'''
'''41.언승'''
'''42.경휘'''
충공
헌정
균정
'''40.중희'''
체명
심지
?
'''44.'''
'''43.제륭'''
'''45.우징'''
'''47.의정'''

?
계명
'''46.경응'''

?
단의
'''48.응렴'''
위홍
?
청광
신광
예겸
'''49.'''

'''50.'''
'''51.'''
양정
인경
'''53. 경휘'''
'''52.'''
효종
억렴
'''54.승영'''
'''55.위응'''
효렴
'''56.'''
유렴
선덕왕 사후 즉위한 사람은 원성왕 김경신이다. 김경신은 태종 무열왕계와도 꽤나 거리가 먼 새로운 왕실 계통이라 봐도 되겠다. 그의 집안은 태종 무열왕 이래로 잡찬 관등을 계승해왔다. 원성왕의 고조부인 마차의 이름이 불교식 명칭이 아닌 것을 보면[25] 진흥왕계는 아닌듯 보인다.
원성왕계의 왕위 계승은 원성왕이 오래 사는 것과 달리 그의 아들들이 일찍 죽으면서 생긴 점이 강하다. 또한 원성왕이 본인의 왕위 계승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손자들을 상대등, 시중 등에 앉히면서 그들의 권력만을 강화시키면서 생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왕위는 그의 장손이자 시중 자리에 올랐던 준옹 즉 소성왕에게 이어가게 되었는데 소성왕도 왕위에 오른지 얼마 못가 죽게 되면서 나이 어린 중희가 애장왕으로 오르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애장왕에게는 욕심 많은 삼촌 언승, 수종이 버티고 있었고 결국 애장왕과 그의 형제는 삼촌들에게 살해 당하면서 신라 왕실에 암운이 드리운다.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언승 즉 헌덕왕은 인겸계의 왕위 계승의 안정화를 위해 세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원성왕 자손계열 중 인겸계 못지 않게 자손이 번창 중이었던 예영계를 끌어들이게 된다. 애장왕 말년에 시중 자리에 있었던 예영의 장남 헌정의 시중자리를 그대로 유지시켜주고, 차남 균정에게 헌정의 시중자리를 물러주고, 헌정은 이후 병부령까지 올라가게 된다. 또한 인겸계는 충공의 딸들을 각각 헌정의 아들인 제륭과 균정에게 시집 보내면서 두 계통의 안정화를 꾀하였다.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김헌창의 난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김헌창의 난은 신라 왕실에 있어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미증유의 난에 가까웠다.
김헌창의 난 진압 이후 즉위한 헌덕왕의 아우 흥덕왕의 경우 안정화를 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하지만 흥덕왕은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뒤를 잇는 왕위 계승이 또 다시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당시 실권을 쥐고 있었던 예영계와의 결합이다. 그래서 인겸계의 사실상 유일한 남손에 가까웠던 김명이 살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헌정의 아들인 제륭이 인겸의 양자가 되어서 어느 정도의 왕위 계승권을 갖게 되었고, 대신 그의 뒤를 충공의 아들 김명이 미는 상황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김헌창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헌정에게도 어느 정도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헌정의 아들 우징을 시중에 올리기도 하였고, 이후 헌정을 상대등에 올리면서 역시 왕에 못지 않은 권한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편에는 무열왕계의 김양이 힘을 보태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되리어 흥덕왕 사후 제륭과 헌정의 왕위 계승 다툼만 부르게 되었다. 우징의 경우 자신의 아버지 균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본인에게 훨씬 유리했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를 왕위로 밀었을 것이고, 이것은 이전에 약속된 왕위 계승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결국 제륭-김명 연합군과의 결전을 펼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균정이 살해당하고 우징과 김양은 세력만 간신히 부지한 채 청해진으로 도피하게 된다. 그리고 제륭이 희강왕으로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희강왕이 왕위에 오르자 왕위에 욕심이 생긴 김명은 이홍과 결탁하여 희강왕을 살해하고 결국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바로 민애왕이 된다. 한편 희강왕의 자손들 역시 아마도 이 때 도피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도피가 후대 손자 김응렴이 경문왕으로 오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청해진으로 도피한 우징의 세력은 상황을 꾸준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민애왕이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점이 결국 반란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나 희강왕의 자손들도 여기에 힘을 보태면서 이른바 예영계가 다시금 힘을 모을 수 있게 되었고, 사실상 유일하게 혼자 남은 인겸계의 민애왕은 아무리 많은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하더라도 애초에 군대를 이끌었던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었고, 그에 비해 김양이나 우징, 그리고 장보고 등은 이미 군대 경력이 넘쳐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상대가 안 되었다. 결국 민애왕은 대패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고 우징이 신무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후 왕위는 예영계에서 가져가게 된다.
하지만 신무왕이 얼마 못가 죽게 되고, 뒤를 이은 문성왕은 각종 반란을 진압하느랴 바쁜 상황이었고, 결국 그 상황에서 장보고의 반란과 청해진의 혁파와 같은 뼈아픈 일도 맞게 된다. 그리고 신무왕의 뒤를 이어 그의 숙부인 헌안왕이 오르게 되는데 이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왕위 계승에 가깝다. 어찌 되었든 헌안왕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 못가 병으로 쓰러지게 되고 이후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오래전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밀려났던 희강왕 계열의 응렴이 헌안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를 다시 생각해본다면 헌안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희강왕의 남은 자손 계열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헌안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응렴 즉 경문왕은 각종 난장판을 정리하는데 애쓴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왕위 계승에 대한 안정도 확보하여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왕위가 안정적으로 세습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신라는 이미 이전 대에 저질러놓은 엄청난 문제점들을 바로 잡기에는 이미 시일이 많이 지나 버린 셈이었고, 결국 그의 딸인 진성여왕 시기 때 신라가 분열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왕위계승도 그의 서손인 효공왕 대에 마무리가 되게 된다.
19세기 초반에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에 따르면 경순왕문성왕의 6세손이라고 하였는데, 좀 이상한 부분이 많다. 문성왕이 언제 태어 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을 최소 880년대생으로 본다면 최대 810년 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문성왕과 70년 차이가 난다. 여러 학자들이 경순왕이 문성왕의 5대손이 아닐 것이다 라고 비정하기도 하는데 과거에 결혼 적령기가 10대 였다는 걸 가정해 본다면 가능하다. 즉, 문성왕의 후손들이 17,8세에 아들을 얻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계산이지만 조금 억지가 있다. 문성왕 역시 그 아들이 있었음으로 즉위 당시 적어도 20대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김안과 김민공은 실제 왕계와는 관계없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4. 금석문이나 기타 문헌에만 등장하는


왕호

비고
이사지왕(尒斯智王)
김이사
(金尒斯)(?)
신라 시대의 금관총에 있는 큰 칼에서만 기록된 인물. 일반적인 왕의 호칭일 가능성 있음.
각절왕(角折王)
미상
일본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신라의 왕.
사부지 갈문왕
울주 천전리 각석에 등장, 입종갈문왕의 다른 명칭으로 추정
어사추안랑왕
울주 천전리 각석에 등장, 사부지 갈문왕의 우매(友妹)와 동행

5. 비정통 군주


신라의 왕족이 신라로부터 독립해 왕이 된 경우가 3명 이상 존재한다.
국가
시호
연호

재위기간
비고
계림대도독부
-
-
김인문
(金仁問)
674년
태종 무열왕의 아들. 당 고종에 의한 강제 즉위.
장안국
-
,<장안국왕(長安國王)>,
경운(慶雲)
김헌창
(金憲昌)
822년
[26]
태봉
-
무태(武泰)
성책(聖冊)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
궁예
(弓裔)
901 ~ 918
[27]
후백제
-
정개(正開)
견훤
(甄萱)
892 ~ 935
[28]
후사벌(?)
-
,<후사벌왕後沙伐王)>,
,<사벌대군(沙伐大君)>,
-
박언창 또는 아자개
(朴彦昌 또는 阿慈介)
919 ~ 929
[29]
'''29.춘추'''
인문
?
?
무월
주원
종기
헌창
장여
정여
범문


작진
왕교파리
원선
상원부인
아자개
남원부인
'''1.
? / 고비'''
능애
대주도금
지훤
용개
보개
소개
'''2. 신검'''
양검
용검
금강
능예
애복
박영규

진호

6. 석씨·김씨 또한 박성 왕조였다?


[image]
위 표는 신라라는 하나의 왕조 국가에서 서로 씨가 다른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번갈아 왕위에 오른 것을 성씨 변화 횟수별로 정리한 것이다. 이처럼 특이한 3성 정치체제는 다른 어떤 나라의 역사사료에도 찾아볼 수 없으며, 거꾸로 신라의 역사사료에서는 ‘역성혁명’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 학자들은 신라 초창기에는 씨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신라의 건국 때부터 성씨의 사용이 나타나지만, 정작 당대인들이 남긴 금석문 등에는 그러한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과의 교류를 꾀한 진흥왕(540~576) 때부터로 추정되는데, 이때 신라 내에 있던 박혁거세 후손 집단, 석탈해 후손 집단, 김알지 후손 집단이 각자 씨를 만들면서 이를 과거에까지 '''소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남긴 기록을 고려시대에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그대로 실으면서, 서로 다른 별개의 씨 3개가 있는 듯 뒤죽박죽 섞어 마치 역성혁명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삼국사기에서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신라가 존속한 기간 중 대부분인 586년간을 '''김'''알지의 후손인 김씨 왕들이 통치하였지만, 그들이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를 시조로 모시며 참배했다고 기록된 것이다. 중국이나 외국 사료에는 박혁거세를 참배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외부에서는 이러한 구체적인 내막을 알지 못하고 그냥 단순하게 왕의 성씨가 김(金)씨니까 신라 왕조를 세운 이 또한 김씨라고 생각한 듯하다. 신라가 성씨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시점은 김씨가 왕으로 있던 때였으므로, 그 이전의 왕들의 성씨가 달랐으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 말기에 신라가 기울면서 김씨의 처남으로 있던 박씨 왕조가 728년 만에 다시 부활하지만 견훤에게 살해되었고, 다시 김부가 왕으로 등극하나 얼마 안 가 고려의 왕건에 항복함으로써 신라는 991년 만에 멸망했다.
앞서 서술한 대로 신라 왕실의 왕이 된 석탈해·김알지 혈통은 석탈해 신당이나 김알지 신당을 시조 사당으로 참배하지 않고 박혁거세를 자신들의 시조로 숭배하였다. 일례로, 제14대 유례왕은 석탈해 혈통이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는 박혁거세 신당을 자기 시조의 사당으로 참배했다. 또 제20대 자비 마립간은 김알지 혈통이지만,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 역시 박혁거세 신당을 시조의 사당으로 참배했다.
이는 석탈해·김알지 혈통이 비록 성은 다르지만 자신들을 박씨 왕실의 일원으로 인식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김씨 왕들이 박혁거세를 자신의 시조로 참배하였다. 예를 들면 제18대 실성 이사금, 제19대 눌지 마립간, 제40대 애장왕,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 등은 모두 김씨이지만 김알지가 아니라 박혁거세 시조를 참배했다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즉, 박·석·김의 세 혈통 모두 박혁거세를 자신의 시조로 모셨다고 볼 수 있다. 김씨가 왕위를 500년 이상 독점할 때에도 박혁거세 시조 참배는 계속되었다. 박혁거세를 시조로 여기는 이러한 인식은 후대에 박씨 왕조가 잠깐이나마 다시 부활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커다란 가문 내에서 작은 가문들이 독자성을 유지하는 모습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성씨 제도, 즉 성과 씨의 제도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원래 성(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는 상위 개념이었고, 씨(氏)는 그 성의 계통을 표시하는 개념이었다.[30] 즉, 신라에 적용해보면 신라왕실이 공동시조로 모셨던 박혁거세의 박(朴)이 성(姓)이고, 성의 하위 개념인 석(昔), 김(金)은 씨(氏)가 된다. 따라서 신라 왕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朴)성 왕실이었고, 따라서 역성 혁명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김씨가 통치했던 시기에도 박씨인 혁거세 거서간을 여전히 시조로 받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과 씨의 구분이 진(秦)과 한 대에 이르러 없어진 채로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현재의 통합된 성씨를 사용하는 후대인들이 신라시대를 보면 마치 박, 석, 김이라는 서로 다른 성씨 종족 3집단이 왕위를 쟁탈하는 전쟁터, 역성혁명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성과 씨가 별개의 개념이었고 다른 나라의 사료에서도 신라의 역성혁명에 관한 기록이 전무함을 감안하면, 국조 혁거세 거서간 때부터 마지막 경순왕 때까지 약 991년간 역성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 모두 박혁거세를 공동시조로 모시면서 같이 발전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요약하면 박혁거세를 시조로 모시는 박(朴)이라는 성(姓)을 가진 왕실 안에서 박(朴)씨 외에도 석(昔)·김(金)의 분파가 용인됐던 것이다. 3개 분파 중에서 김(金)씨가 왕위를 가장 오랫동안 많이 차지해 후손들이 많이 번성하였다.
혹은 신라의 왕계가 조선처럼 오로지 부계로로만 계승된 게 아니라 유럽처럼 모계나 사위 계승도 허가 했을 가능성도 있다. 애초에 석탈해도 사위 계승으로 왕이 되었다. 그렇게 보면 박씨 입장에서는 알영·박혁거세 부부의 여자 후손을 왕비족으로 묶고 왕비족과 결혼해야만 왕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에, 석·김 혈통의 남자가 왕이 된다 해도 박씨 왕실은 '이 왕실은 여전히 우리 것'이라는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비들의 혈통으로만 본다면 박씨 왕실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랬기 때문에 석·김 혈통이 왕이 된 시절에도 박씨들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지키고 왕족의 위상을 유지했고, 나중에는 728년 만에 다시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신라 왕실의 독특한 문화를 신라인들만의 문헌으로 관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대의 우리에게는 그런 행운이 주어지지 못했다. 우리는 부계 중심 계승구도가 자리잡은 고려 중기 문헌인 삼국사기를 통해서만 신라 왕실을 엿볼 수밖에 없다. 고려 중기 관점으로는 고대의 왕비족 개념과 씨, 성의 분리 개념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씨 왕실의 일원이던 석·김 혈통의 왕들을 소개할 때, 당대 개념에 따라 해당 왕들의 부계 혈통만을 주목하는 서술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약 150년 뒤에 저술된 일연의 삼국유사 역시 부계 중심으로 계승 구도를 이해하면서 3개의 왕실이 번갈아 왕위를 나누어 통치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이런 인식은 더욱 굳어지게 된다. 결국 오늘날 신라의 문헌이 제대로 전해 내려오지 않고 고려 중기 문헌만으로 신라를 이해하다 보니, 박씨 왕실이었던 신라 왕실에 대한 이해가 온전치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사료가 부족하여 실제 역사는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나, 이러한 가능성도 분명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7. 6부의 수장이었던 신라의 군주


신라는 6세기 초까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매금왕), 갈문왕 등의 명칭을 사용했고 지증왕이 사탁부의 수장 지도로 갈문왕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6부를 초월한 대왕을 자칭하기 시작하며, 모즉지 매금왕도 탁부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아 탁부의 모즉지 매금왕이라고 하다가 대왕, 태왕 자리로 명칭을 바꾼다.
이는 신라가 6세기 초까지만 해도 6부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는 경상북도 경주시 지역에서 성장한 6개의 지역 정치체, 곧 부(部)가 연합·연맹하는 형태로 건국되었다. 신라 6부는 씨족적 취락으로서 원래는 족장 아래 혈연과 지연으로 결합된 사회 조직인 '촌'이었는데, 유리 이사금
  •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 양부(梁部) = 훼부
  •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 → 사량부(沙梁部) = 사훼부
  •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 점량부(漸梁部) = 모량부
  • 취산 진지촌(嘴山 珍支村) → 본피부(本彼部) = 본파부
  •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 한기부(漢祇部) = 한지벌부
  •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 → 습비부(習比部) = 사피부
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 6부제(六部制)가 실질적인 행정구역으로 기능한 시기는 경주의 행정구역 명칭이 정해진 469년(자비 마립간 12)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경주의 고분군(古墳群)이 6개의 씨족별 또는 촌별로 나누어진다는 고고학적인 조사로 보강되고 있다.
신라 6부는 왕을 정점으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면서 연합⋅연맹을 하였지만, 초기에 각 부는 일정한 지역을 독자적으로 통치하는 단위 정치체의 성격을 유지하였다. 각 부 내부의 통치는 자치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부 내부의 일을 처리하는 부의 관원이 별도로 있었다. 신라 전체의 통치는 각 부의 수장(首長)인 '간(干)'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결정하였다. 신라의 왕은 국가 전체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6부 수장 회의를 주재하였지만,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없었으며 6부 회의의 결정을 따라야 하였다. 왕은 가장 큰 세력 집단에서 배출되었다. 초기 신라의 역사를 보면 김씨 내부에서도 미추 이사금, 내물 마립간, 지증왕이 서로 먼 혈족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이게 이 때문이다.
하지만 4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신라는 6부의 연합·연맹 단계를 극복하기 시작하였고, 6세기 초에 이르면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각 부의 독자성과 자치성은 점차 약화되어 수도의 행정 구역으로 성격이 변하였으며, 6부의 유력자들은 왕권 아래 중앙 귀족으로 변모하였다.
6부 관련 기사에 뒤이어 17관등을 제정했다는 기사가 보이지만, 이 역시 훨씬 후대인 6세기 전반의 사실에 불과하다. 한편 6부의 성립이 종전의 6촌을 개편한 결과라는 역사서의 기록에도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6부는 역시 사로국의 진한 병합의 정치적 산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신라는 연맹왕국 형성 과정에서 병합한 크고 작은 주변 성읍국가들의 지배층을 경주 일원에 이주시킴으로써 왕경 6부를 편제했다는 추정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6부의 성립 시기는 일단 내물 마립간의 시대, 즉 4세기 후반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다만 6부의 성립시기와 관련하여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과연 6부가 어느 한 시기에 성립된 것인가 어떤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은 6세기 금석문 자료에서 볼 때 6부 가운데 탁부喙部(양부梁部)와 사탁부沙喙部(사량부沙梁部) 2부의 압도적인 우세가 간파되기 때문이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마립간 시대에 탁부·본피부·한기부의 3부가 먼저 성립되었다가 뒤에 탁부에서 일부 방계 왕족령과 왕경 외의 지역을 관할로 각각 사탁부와 잠탁부가 설치되었다. 이때 왕경 외의 지역으로 구성된 점탁부岑喙部(점량부漸梁部·모량부牟梁部)는 지증왕의 아내인 연제부인 이래로 왕비족을 배출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증왕의 비 박씨나 진흥왕의 비 박씨는 모두 모량부 출신이라, 어쩌면 모량부가 소위 박씨 족단의 장악 아래 놓인 부였거나, 모량부 출신이라서 후대에 박씨라 불렸을 수도 있다는 추측도 있다. 이에 기반해 김씨 이전에 왕실을 장악했다는 박씨 세력집단이 모량부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본피부本彼部나 사피부斯彼部(습비부習比部)는 매우 미약한 존재로 등장할 뿐인데, 과거 석씨 족단의 거점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본피부에서 왕경 외의 지역을 관할로 사피부가 분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입택에 등장하는 명칭 중 6부를 딴 것이 있는데, 이 중 본피궁은 진평왕 때만 해도 있었던 다른 궁전인 양궁(탁부), 사량궁(사탁부)와는 다르게 신문왕 원년(681)에 건립했다고 한다. 이후 김유신김인문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 이 궁전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둘 중 한 가문의 궁궐[31]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열왕계는 물론 가야계 신김씨 또한 근거지가 사탁부였음을 고려하면 사탁부의 팽창으로 인해 사탁부 소속 왕족 일부가 본피부로 이동한 듯하다.
한기부韓岐部(한지벌부漢只伐部·한지부漢祗部)의 존재는 완전히 몰각되어 있는데 허루 갈문왕 및 마제 갈문왕이 이곳 출신이다. 초창기 김씨 족단의 거점이었다가 김씨의 왕위 독점으로 탁부/사탁부로 대거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증왕의 장인 등흔 각간이 한기부 출신으로 보이며,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등장하는 한지□□굴진지 대일벌간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구진 대각간과 동일인으로 생각된다.

8. 참고 문서



[1] 고조선이나 탐라국은 신빙성 있는 당대에 작성된 계보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조선의 경우는 고고학적인 연구자료에 의하면 국가 형성(군장국가, 도시국가)이 기원전 10세기~9세기에 무렵 정도에 이루워진것으로 보이고, 연맹왕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본격적인 국가체계를 갖춘것은 그보다 늦은 기원전 6세기 정도로 보이기 때문에 존속기간이 800여년 길어봐야 900년 안팍일 가능성이 높아 천년왕국 신라보다 군주 수가 적을 가능성이 높다.[2] 고조선은 단군조선(?명) / 위만조선(3명), 탐라국(45명)이다.[3] 한국사의 다른 왕조들은 정 직계 남자가 없으면 머나먼 방계에서 어떻게든 남자를 구해 데려올지언정 여왕 즉위는 없었다는 것을 볼 때 여성의 왕위 등극에 대한 신라인들의 인식이 좀 달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대에도 밖으로는 당태종, 신라 안에서는 비담 등 여왕의 즉위와 통치에 불만을 가진 자들도 많았지만, 고려나 조선시대였으면 여왕은 '당연히 안 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애초에 논란 자체가 되지도 않는다.[4] 어디까지나 삼국사기 기록상이다.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연대가 현대에는 전부 허구까지는 아니라도 다소 부정확하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혁거세왕의 정확한 즉위년은 무상에 가깝다.[5]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주요 가문으로 존속했고 짧게나마 왕조가 부활하기도 한 박씨와 달리 석씨는 사실상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유명인은 찾아보기 어렵고 인구도 석(石)씨에게 밀린다.[6] 고유어 이름은 모즉지/무즉지.[7] 신라시대 금석문에서는 태조 성한왕이 확인 되기에 이를 포함하면 둘뿐이다.[8] 삼국사기 기록중 유일하게 묘호가 기록됨.[7][9] 원래 이름은 융기였으나 우연히 당나라 황제와 이름이 같아 흥광으로 바꾸었다.[10] 원성왕 입장에서 보면 선덕왕은 증외삼종생질. 원성왕의 증조할머니가 태종 무열왕의 딸이다.[11] 원래 이름은 청명이었으나 왕위에 오른 후 바꿨다.[12] 원래 이름은 수종이었으나 후에 경휘로 바꾸었다.[13] 어머니가 아달라 이사금계라서 직계 후손은 아니다.[14] 태종 김춘추와 더불어 조·종으로 끝나는 묘호 기록이 남은 유일한 왕이다. 고려와 조선은 업적과 중요도를 떠나 연산군 같은 일부 예외 아니면 모든 왕이 묘호를 받았지만, 사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특별한 업적을 남긴 왕만이 묘호를 받았다. 중국도 모든 황제가 묘호를 가지는 건 후기 신라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나라인 당나라 때부터고 고려부터 당나라를 따라한 것이다.[15] 서강대 이종욱 명예교수에 의하면 미추왕이라는 설이 있으나, 학계에서 공인된 정설은 아니다[16] 동시대의 다른 국구와 달리 별도의 수식어 없이 그냥 왕으로 적혀 있다.[17] 만약 김백반=음갈문왕이라면 26~28대 왕위 계승은 전형적인 형제 상속 방식(진평왕 > 진정왕의 아내 선덕여왕 > 진안왕의 딸 진덕여왕)으로 이뤄진 것이 된다. 선덕여왕의 여동생인 천명공주김용춘과의 결혼으로 진덕여왕보다 왕위 계승 순위가 밀린 점도 성골 내 족내혼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높이 시사하는 부분이다.[18] 음갈문왕의 '음(飮)' 자를 '반(飯)'의 오기로 보는 설을 차용해서, 국반 갈문왕과 선덕여왕이 혼인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이 설을 차용했다. 다만 이쪽은 월명부인이라는 다른 배우자가 있기에 학계에서는 음갈문왕은 후계가 알려지지 않은 김백반일 가능성을 더 높게 본다. 만약 김백반에게 아이가 있었으면 진덕여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19] 삼국유사의 다른 판본에서는 용춘탁문흥갈문왕, 용춘각간흥갈문왕, 용수탁문흥갈문왕이라고도 하는데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20] 원래 금관국 왕족 김해 김씨로,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딸 중 하나와 결혼해 문무왕의 외삼촌이자 사돈 관계가 되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신라 왕족에 속한다고 볼 수는 있다. 그리고 어머니 만명부인이 진흥왕의 조카이기에 왕족이라고도 볼 수 있다.[21] 추정[22] 물론 석우로의 아들인 흘해 이사금이 마지막 석씨 임금으로 재위하긴 했다.[23] 이후에도 생전에는 인칭+왕을 여전히 사용했다.[24] 김의관의 아내, 안승의 장모[25] 순우리말 맏-의 음차이다. 문주왕 부여모도, 동성왕 부여말다, 무왕 부여마동, 법흥왕 김모즉, 그리고 기능말다간기 등 삼국시대에는 발에 치이던 인명.[26] 태종 무열왕의 7세손. 강릉 김씨의 시조인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 쟁탈전에서 밀리자 웅진#s-1에서 장안국을 선포했다. 참고로 김주원의 경우엔 도독으로서 명주(하서주 / 강릉시)에서 반독립적 세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명주군왕"이란 이름으로 영지를 세습했다. 다만 명주군왕이란 것이 후대에 생긴 전승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27] 헌안왕서자#s-1유복자였다. 태봉을 선포해 신라로부터 독립했다.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에 따르면 문성왕의 사촌동생으로 김예(銳)가 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문왕 시기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했다고 기록되어 (실제로는 죽지 않고) 이와 연관이 있지 않는가 보는 의견이 있다. 참고로 문성왕 재위 시기 관직은 웅주 기량현령(현 아산시 신창면)으로 궁예가 최초로 등장하는 청주시와 상당히 인접했다.[28]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흥왕의 아들인 김구륜의 후손이다. 후백제를 선포해 신라로부터 독립했다. 설화에 따라 아자개 또는 진골 귀족 출신 지렁이(地龍)가 아버지인데 이 계보는 지렁이 부친설에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29] 상주 박씨의 시조. 경명왕의 아들로 사벌국(후사벌)을 선포해 신라로부터 독립했다고 전해진다. 정사에 나오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로 보이는데 자세한 건 항목 참조.[30] 춘추시대 제나라의 건국자인 강태공 여상은 말 그대로 강성(姜姓) 여씨(呂氏)였다. 강(姜)이라는 종족의 여(呂) 집안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는데 소가, 모노노베, 후지와라, 타치바나, 다이라, 미나모토 같은 귀족성과 씨가 따로 있다.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나모토를 칭했으므로 공식명칭이 ‘미나모토노 아손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즉, 미나모토가 일종의 성이고 도쿠가와는 씨인 것이다. 성이 현대의 성씨에, 씨는 현대의 본관에 대응된다고 보면 얼추 맞는다.[31] 김유신의 경우 신라 시대에 식읍을 하사받은 단 두 명 중 한 명이고, 김인문의 6세손 김주원이 명주군왕이 되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