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왕
1. 군주의 칭호
1.1. 고구려 군주의 칭호
1.1.1. 개요
'''太王'''.
삼국시대 고구려 중기에 사용된 군주의 칭호. 태왕 용어의 성격에 관해서는 기존의 군주를 높여부르는 존칭인가, 제도적인 기반이 있는 군주호인가 등에 대해 이견이 다소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정체가 막 드러난[1] 구한말~일제강점기 때는 광개토대왕 한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의 일부로 인식된 것이 시작이었으나 이후 서봉총, 중원 고구려비, 태왕릉, 모두루 묘 등이 연구되어 고고학적 성과가 나타나자 고구려의 여러 군주를 가리키는 미칭 내지는 군주호로 주목받았다.
직접적으로 태왕호가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은 70~80년대에 일본 학자들이 천황 이전에 일본에서 통용된 대왕호 연구에 대해 주변국 사례로 부속적으로 다룬 것이 시작이었다.
중원 고구려비가 발견되고, 양기석, 노태돈 등에 의해 고구려의 천하관 연구가 시작되면서 해당 분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단어 중 하나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외에 태왕릉, 고구려의 금석문 관련된 연구에서도 그 주인공을 밝히는데 단서로써 해당 용어의 성격을 다루기도 한다.
1.1.2. 배경
'''기존 천손사상의 발전 + 중앙 집권화 + 중화사상 독자적 수용 + 5호 16국의 벤치마킹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5호 16국 시대를 연 북방 민족들은 천왕호를 칭하여 중화사상을 자기 나름으로 소화하면서 제민족을 아우르는 제국적인 위상을 도모했다. 고구려도 이에 자극받아 국제적으로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아우르는 입지를 갖추고, 국내적으로는 제종족을 거느리며 왕권과 군주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기존의 천손의식과 결합하여 천하관을 정비하고, 태왕호가 등장했으리라 보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왕중왕을 가리키는 단어가 황제만으로 굳어져 있으니 일반인들 사이에선 태왕에 대해 '황제라기에는 부족하고, 그냥 왕이라기엔 허전해서 붙인 칭호'라고 격이 낮은 호칭으로 여기는 인식도 적지 않다.
오히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최강대국, 대제국의 위상을 지닌 국가로써 중국식 칭호인 황제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태왕' 이라 불린 것이 더 근거가 있다. 초창기 일본의 태왕호 연구에서도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국제 관계를 상정하여 이를 이해하는 범위에서 생긴 칭호라거나, 제호가 아니라 왕호 파생 단어이기 때문에 중국과의 국제적인 마찰 문제도 비켜 날 수 있다는 계산 등도 가능성으로 제기되기에 아주 없는 말은 아니지만 오늘날 통용되는 적절한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연구에서는 대왕, 태왕의 혼용이 많았을 뿐[2] 태왕호 자체가 동아시아 조공 책봉체제에서 통용되는 왕작과는 독립적으로 기능하며 종래의 왕의 위상을 초월한, 내지는 왕중왕의 위상을 지닌 용어로 이해되며 이것이 제도적인 기반이 있는 칭호인지 여부가 더 크게 갈리는 듯 하다.
'''왕(왕검)'''이란 용어 자체가 고조선 때 '천자(天子)'의 의미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용어이며, 고대에는 황제를 단순히 왕보다 더 높은 칭호가 아닌, 중화권에서나 통용되는 이질적인 칭호로 받아들인 정황에 주목하여 태왕이든 대왕이든 왕에서 파생된 단어이되 중화권에서 황제, 북방에서 가한(카간)이 통용되듯 최고 지도자의 칭호로 의의를 찾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 또는 한반도 국가에서 왕중왕을 황제라고 칭하는 것은 민족구성이나 신화적 맥락에서 연관성이 없다. 위에 언급된 천왕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이라는 글자가 들어간다고해서 황제의 위상을 담지 못하거나 격이 낮은 칭호가 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당장 세계사적으로 봐도 '왕'보다 더 높은 칭호를 만들 때 중국의 '황제'처럼 기존의 칭호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칭호를 굳이 별도로 만들지 않고도 왕중왕이니 지고왕이니 상급왕이니 하는 것처럼 기존의 '왕'에 해당하는 칭호에 수식어를 붙여 '왕'보다 더 높은 군주라는 의미를 가진 칭호를 만드는 일은 매우 흔했다.
예를 들어 샤한샤(왕중왕), 아르드리(지고왕), 카간(대칸) 등등. '태왕'도 마찬가지로 태왕이란 칭호에 '왕'이 들어가있다고 해서 격이 낮다고 볼 수는 없고 거서간이나 마립간처럼 고구려에도 고유의 칭호가 있었으며, 태왕은 단순히 그것을 번역한 말일 가능성도 있다. 그랬다면 고유의 군주 칭호를 가진 고구려가 보기에 황제라는 칭호는 중국의 이질적인 칭호일 뿐 그것이 자신들의 칭호보다 더 높다고 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카간'이 한족의 '황제' 칭호보다 뒤떨어지는 칭호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황제라는 용어가 기타 군주 칭호에 대해 우위의 격으로 교통정리가 되는 시기는 빠르게 잡아도 고구려 멸망 이후이다.
1.1.3. 여러가지 태왕호
대한민국에서 가장 익숙한 태왕호 사용례는 광개토대왕비의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이다. 그리고 중원고구려비의 '고려태왕'. 이 두 사례만 봐도 태왕호에 여러 종류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단순히 '태왕'에서 여러 미칭이 추가된 태왕호도 있다.
삼국사기엔 '태' 자가 빠지고 '호' 자, '상' 자만 붙은 태왕호도 보인다. 이는 태왕호의 단편적인 일종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단편적 태왕호가 보이는 미천왕 대부터 태왕호가 사용됐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1.1.4. 사용 시기
광개토대왕비, 모두루 묘지명 등을 보면 고구려 초기 임금들을 추모왕, 유류왕, 대주류왕으로 이름을 기재하는 걸로 보아 초창기에 태왕호를 제정했을 확률은 낮다.
4세기 후반 고국원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국강상성태왕이라는 용례가 가장 이른데 태왕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대는 미천왕~고국양왕까지 설이 갈린다.
1.1.4.1. 광개토대왕 전용 칭호설
우선 태왕이라는 칭호가 발견된 것이 광개토왕릉비이기 때문에 가장 처음 퍼진, 익숙한 설이다. 이미 학설로선 거의 설득력이 없지만 태왕비, 호태왕 등의 용어나 태왕사신기 같은 대중문화에서의 작명센스 등도 어찌보면 그런 흔적이랄 수 있다.
1.1.4.2. 4~5세기 한정 사용설
현재 금석문 상으론 4세기 말, 5세기 중에서 용례가 확인된다. 다만 남아있는 고구려인의 태왕호 기록이 해당 시기 밖에 없기 때문에 5세기까지만 사용되었다하고 선을 긋기엔 애매한 부분.
1.1.4.3. 6세기 이후 사용설
광개토왕 때 ~호태왕이라는 칭호가 비문에 등장한 이후의 시기, 삼국사기에는 ~호왕이라는 칭호가 고구려 임금의 이명으로서 많이 남아있다.
태왕호가 5세기에도 사용된 것은 확실하고 또한 특별히 칭호를 낮출 이유는 없는 점과, 삼국사기에 남은 왕호는 당대 쓰인 풀네임이 아니라 그 파편이고 그 와중에 태왕 칭호가 생략된 것 등에 착안해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호왕[10] 이라는 단어를 'ㅇㅇ호태왕'의 약칭으로 이해하여 6세기 말 이후까지 사용을 추정하기도 한다.
고구려 유민 고을덕 묘지명에도 7세기에 영류왕을 '건무태왕'이라 지칭하는 용례가 등장한다. 당시 우리 삼국에 피휘 관습이 약했다는 점, 이미 고려태왕이란 칭호가 사용됐던 기록을 들어 영류왕이 자신의 이름을 덧붙인 태왕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높아보인다.
1.1.5. 기존의 미칭과 다른 점
이외에 고구려 왕의 미칭으로 언급되는 용어들은 성왕(聖王), 신왕(神王), 명왕(明王), 대왕(大王) 등이 있다.
다만 아래에 언급한 점 등에서 미묘하게 다르기에 단순한 왕의 존칭을 넘어 제도적인 군주호로 제기되기도 한다.
- 시호나 관용적인 어구에 국한되지 않고 생시의 호칭으로 이용된다는 점.
- 고구려인들의 자체 기록에서 주로 등장하는 칭호라는 점.
- 유일하게 완전하게 남은 고구려 군주의 시호에서 보이는 칭호라는 점.
그 때문에 단순히 선대왕의 존칭이나 시호가 아닌, 생전의 호칭으로도 사용된 것이 당대 기록으로 남아있는 태왕은 좀 다르게 취급받는 경향이 있다.
1.1.6. 기타
오늘날은 태왕이든 뭐든 왕으로 표기하면서 또 그 왕 가운데 특정한 인물은 존경의 의미로 임의로 높여 대왕이라 칭한다. 또 옛날의 대왕은 왕의 존칭인 경우가 많지만 왕중왕의 개념으로도 간주되기도 하기 때문에 대왕=왕<태왕=황제=왕<대왕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 태왕하면 광개토왕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 현재 학설로선 위력이 없지만 광개토왕=호태왕으로 인식하는 학설이 남아있거나 태왕사신기와 같은 대중문화의 작명센스 등에서는 여전히 비슷한 식으로 흔적이 남아있다.
-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을 지칭하는 용례가 왕이 4~6번, 태왕이 8~12번 등장한다. 이외에 모두루 묘지명, 호우총, 서봉총 등에도 등장한다. 따라서 광개토왕 때는 태왕과 왕의 칭호가 제대로 분화되지 않았거나 태왕=왕의 미칭으로 한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황제의 약칭을 단순히 제라 하듯 태왕의 약칭으로서의 표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 태왕호를 미는 특정 학자는 책을 낼 때마다 출판사와 한번 이상은 꼭 싸운다고 한다. 대왕이 더 익숙한데 굳이 태왕이라 해야겠냐고...
- 앞서 언급했듯 한국사에서 천하관 운운하는 연구는 고구려의 그것에서 시작된 것이며 우리 역사에서 국력 면에서 월등한 성과를 남긴 고구려가 주목받는 경향이 강하긴 하다. 하지만 고구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천하관을 정비하면서 비슷한 경우가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천왕 칭호를 사용한 정복왕조나, 백제, 신라, 왜 등에서도 황왕, 제왕, 천왕, 천황 칭호와 더불어 독자적 천하관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너무 지나친 의의 부여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1.2. 신라군주의 칭호
신라에서도 태왕 칭호를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있는데 울주 천전리 각석에 무즉지태왕(另卽智太王), 성법흥태왕(聖法興太王)이라는 기록이 있고[13] 북한산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에는 진흥태왕(眞興太王), 김천 갈항사 석탑기의 경신태왕(敬信太王) 등의 기록이 있다.
대체로 신라의 태왕 칭호 사용은 좀 더 앞 시대에 태왕 칭호를 사용했던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신라는 고구려의 왕호를 사용하며 동시에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는 것을 통해서 과거 고구려의 반속국[14] 이었던 신세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고구려가 하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듯이 고구려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자국이 천하의 중심에 있음을 선포하려 했다.
또한 진흥왕은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불교 신들의 이름을 따서 짓고, 진평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하는 등 고구려[15] 와 중국[16] 의 천하관과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 강화에 사용하였다.
마운령비나 창녕 척경비에는 태왕 외에 제왕(帝王)이나 짐(朕) 같은 용어도 사용하고 있어서 당시 신라가 천자국의 체제를 사용 했음을 알 수 있다.
1.3. 고려 군주의 칭호
성종의 아버지인 왕욱은 사후 성종이 즉위하자 왕으로 추존되었는데 묘호는 대종(戴宗), 시호는 고려사절요 기준으로 현헌공신화간예성선경대왕(顯獻恭愼和簡睿聖宣慶大王)이며 고려사 종실 열전에는 '대왕(大王)'이 '태왕(太王)'으로 되어 있다.
다만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사례가 꾸준히 나오는 게 아니고 단발성이라 이 경우는 그냥 잘못 쓴 오탈자일 가능성도 높다. 클 대 자와 클 태 자는 겨우 점 하나 차이다. 현대에도 대통령에 점 하나 더 찍어서 견통령이라 잘못 써서 경을 친 사건이 있었듯이 말이다.
1.4.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사한 칭호 목록
2. 태상왕의 칭호
2.1. 개요
太王.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병탄 당한뒤 일본제국은 왕공족과 조선귀족 제도를 만들어 구 황실과 제후들을 일본제국의 귀족편제에 편입시켰는데 황제는 친왕으로 만들고 친왕은 공으로 만들어 왕공족으로 삼았고 공은 조선귀족으로 봉하는 식으로 한 단계식 급을 낯추었다. 그래서 순종황제는 '왕'(王)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상황인 고종황제는 태상왕에 해당하는 작위로 ''''태왕(太王)''''을 수여받았다.
고종이 봉작된 정식 칭호는 거처+성씨+신분의 방식로 구성된 ''''덕수궁 이 태왕(德壽宮 李 太王: 도쿠주큐 리 타이오오)''''이다.[17]
왕공족의 성립 당시에는 일본의 황실 전범을 준용하는 방식이었으나 1926년 왕공가 궤범이 만들어지고 그 위계가 왕 - 왕비 - '''태왕''' - 태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비 - 왕세손 - 왕세손비 - 공 - 공비의 순서로 명문화 되었다.
2.2. 같이보기
3. 대구광역시의 건설회사
태왕건설 참조
[1] 비석의 존재 자체는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이 고구려 왕릉비라는 것은 잊혀졌다가 구한말에야 재발견했다.[2] 대왕이라는 단어에 익숙했던 시기가 긴데다가 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시기가 길어서이다.[3] 중원고구려비.[4] 광개토대왕릉비.[5] 모두루 묘지명.[6] 모두루 묘지명.[7] 미천왕(?), 문자명왕 본기.[8] 양원왕, 평원왕 본기.[9] 고국원왕 본기.[10] 상술된 단편적 태왕호.[11] 당장 이성계만 하더라도 공식 존호에 성, 신, 명, 대왕 등의 수식어가 한꺼번에 다 들어간다.[12] 우리나라에선 대왕은 단순한 경칭 뿐만 아니라 정식 왕호였다. 대왕 문서 참조.[13] 천전리 각석보다 15년 전에 만든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는 법흥왕을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으로 되어있다. 이 시기 신라에서 태왕과 매금왕(마립간) 두 호칭을 어느 정도 혼용했거나, 혹은 이 짧은 시기 사이에 호칭이 바뀔 만한 계기가 있었거나 했던 것으로 보인다.[14] 광개토~장수왕 초기에 고구려가 가야와 왜군을 격퇴하고 신라를 속국화했다. 이후 신라가 백제와의 나제동맹을 굳히고 장수왕의 남진에 적대하면서 벗어나게 된다.[15] 임금을 태왕이라 칭하는 것.[16] 황제만 정할 수 있는 연호를 제정한 것.[17] 참고로 순종은 ''''창덕궁 이 왕(昌德宮 李 王: 쇼토쿠큐 리 오오)''''이였다. 이태왕, 이왕의 칭호 앞에 붙은 덕수궁, 창덕궁은 당시에도 분가의 명칭을 나타내는 일본 황실의 궁호와는 다른 것으로 인식하고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