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찬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강규찬은 1874년 음력 8월 15일 평안남도 선천군 읍내면 교서리 염수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기록이 산일해 제대로 알기 어렵지만, <창립 100주년 신성학교사>에 따르면 강규찬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혀 한학자로서 명성이 높아 1909년 신성학교 교사로 부임하기 전에는 주로 지방의 서당과 여러 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T.스탠리 살타우 선교사는 회고록에서 강규찬이 한학에 탁월한 학자였음을 증언했다.
강규찬은 35세 때인 1909년부터 1914년까지 신성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신성중학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양전백 목사가 1906년 7월 선천남교회당에서 김석창, 노창권과 함께 설립한 기독교 학교였다. 초기 신성중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가장 어린 사람이 20세였고 연장자의 경우 25세가 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 학교는 1909년과 1910년에 각각 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가진 지도자들을 배출했다.강규찬은 이 학교에서 한문과 작문을 가르쳤다.강규찬 목사는 한학자였다. 그는 중국 고전을 완전히 통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복잡한 중국 고사성어를 암기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대 철학과 윤리규범이 한국인의 삶과 문화에 강하게 영향을 미쳐 온 논어나 맹자, 그리고 다른 중국 성인들의 어록을 늘 암기하기 때문이다.
2.2. 105인 사건
1911년, 일제는 105인 사건을 날조해 신민회에 가입하거나 평소 배일의식을 갖춘 것으로 의심된 사회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이때 혐의자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이들이 389명이었는데, 그 중 선천군 출신이 145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중 신성중학교 10명의 교사와 18명의 학생들이 기소되었는데, 그 중엔 강규찬도 있었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강규찬은 재산이 3만원으로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으며, 1909년 봄 신민회에 가입했다고 한다. 또한 강규찬은 신민회의 목적을 묻는 검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편 일제의 취조 조서에 의해 작성된 1911년 대한신민회 국내조직상황표에 따르면, 강규찬은 이승훈이 회장으로 있는 선전치회 산하 선천지역 평의회 회원이라고 한다. 이후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1913년 풀려난 강규찬은 신성중학교 교사로 복직했지만 일제 경찰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서 청년을 교육하고 향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 그 기회를 틈타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체회복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대한 일이므로 당시로서는 부역배 및 5적(을사오적), 7적(정미칠적) 대신을 암살하는 데 있었다.
2.3. 평양신학교 진학과 산정현교회 부임
강규찬은 41세가 되던 1914년 선천북교회 장로로 선임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신성중학교 교사 직을 그만두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강규찬은 1914년 변인서 등 31명과 함께 신학공부에 전념했고 1915년 2월 23일 선천읍북예배당에서 소집된 제7회 평북노회 때 신학생 취교자 명단에 올랐다. 이후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치고 3학년에 진학한 강규찬은 1916년 2월 15일 제9회 평북노회에서 평북노회 신학생 취교자 명단에 그대로 올랐다.
1916년 평양신학교 요람에 따르면, 강규찬은 당시 43세였고, 선천읍에 주거를 정하고 있었으며, 북회당 장로이자 조사라고 한다. 당시 그는 평북 일대의 6개 군에 산재한 82개 교회와 65개 학교를 순회하면서 교회와 학교를 돌보는 이중 책임을 떠맡을 정도로 평북 일대 기독교계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강규찬은 1917년 5월 평양신학교를 제10회로 졸업했고, 목사 인수와 더불어 산정현교회 동사목사로 부임했다. 동사 목사는 선교사와 함께 공동으로 담임 목회를 하는 것으로, 강규찬은 선교사가 부재중일 때는 단독으로 교회를 이끌어갈 임무를 맡았다.
당시 산정현교회는 1916년 3월 11일 한승곤 목사가 사임하고 미국으로 간 뒤 거의 1년여 동안 목사 없이 지내고 있었다. 선교사 번하이젤이 그 공백을 어느 정도 메꿨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에 강규찬이 동사 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산정현교회 목사로서 2년간 교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남녀 전도인을 세워 몇 개월씩 전도시켰고, 황주읍교회의 정명리를 청빙하여 1주일간 사경회를 실시했다. 그 결과, 산정현교회는 갈수록 발전해 1917년 4천여 원의 건축비를 투자해 건물을 증축했으며, 남녀주일하교가 1917년 남녀 2반 20여 명에서 1918년 200명으로 늘어났다.
강규찬은 주일학교를 강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교회의 체계를 다졌다. 그는 1918년 1월 6일 집사 양성춘[1] 을 장로로 선임했고, 김동원을 주일학교 교장으로 임명하고 청년회를 조직했으며,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낸 인사 중 한 사람인 김찬성을 초빙해 사경회를 개최했다. 이렇듯 산정현교회를 잘 이끌던 그는 3.1 운동에 뛰어든다.
2.4. 3.1 운동
1919년 3월 1일 장대현 교회, 남문외교회, 사창골교회, 산정현교회, 서문외교회 등 평양 6개 교회가 연합하여 숭덕학교에서 3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고종 황제 서거 추모 예배를 드리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강규찬은 김선두, 이일영 목사와 함께 이 일에 적그적으로 앞장섰다. 그는 이날 군중들에게 자주독립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고취하는 강연을 해 그들이 독립의식을 갖추도록 기여했다.
강규찬은 시위대와 함께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큰 거리로 진출했고, 상인들도 철시하고 시위행진에 가담했다. 그들은 평양경찰서 앞에서 천도교구당과 남산현교회 등지에서 행진해온 군중과 합세해 도청, 재판소, 평양역 광장, 평양부청, 평양형무소 등 시가지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7시경, 시위 군중이 평양경찰서 앞에서 경찰과 충돌해 많은 이들이 부상당했고 수백명이 검거되었다. 이후 강규찬은 체포되어 1919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경성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는 투옥 중에도 옥중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많은 이들이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1920년 4월 10일에 만기 출소한 강규찬은 신정현교회로 돌아가서 디모데후서 2장 9절[2] 을 주제로 예배를 집행했다. 그가 강단에 복귀한 뒤 산정현교회는 활력을 되찾았다. 그가 출옥한 지 2달 뒤인 1920년 6월 21일부터 일주일 간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평양의 7개 교회가 연합으로 열린 평양장로회연합부흥회가 열려 평양 지역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후 평양의 일곱 교회 모두 교인들이 크게 증가했고, 교회 내에서 여자 청년회와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2.5. 이후의 경력
강규찬은 산정현교회로 복귀한 뒤 기독교 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물산장려운동에 가담하고[3] 숭덕남학교, 숭인남학교, 승현여학교에 매년 1천원을 지원해 자제들이 교육을 받고 실력을 양성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강규찬은 1929년에 장로회 총회 전도국장을 맡았고, 7월 31일 기독신보에 '재외동포구원문제'라는 제목의 논설을 기고했다. 그는 이 논설에서 중국, 일본과 러시아에 흩어진 백만 이상의 한국인 동포의 구원 문제를 제기했다.
강규찬의 리더십 아래, 산정현교회는 1920년대 말엽에 이르러 평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발전했다. 교인은 강규찬이 처음 맡은 1917년보다 300명 늘었고, 재적교인은 1917년 600명에서 1929년 1,200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1929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민족운동 및 사회운동가 김동원, 조만식, 변홍삼, 박정익, 오윤선, 최정서, 김찬두 등 7명의 장로가 이 교회에서 활동했고, 숭실중학과 숭실대학, 숭인상업학교, 평양신학교 등은 이 교회의 재정 후원에 힘입어 운영될 수 있었다.우리 동포의 생활이 안정치 못하여 북으로 러시아에 유리하고, 서로 지나(중국)에 표박하며, 동으로 일본에 방황하는 자의 수가 백여만 명인데, 그들의 정상이 가련함은 말하지 않아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동포의 생명을 동포들이 돌아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책임이올시다. 마태 십장 육절에 예수께서 12사도를 누구에게 먼저 보내셨으며 로마 9장 3절에 바울이 자기 동포를 위하여 얼마나 간절하였나이까? 그런고로 우리 총회는 이 뜻을 생각하여 외지에 유리하는 동포들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전도국을 설치하고 부활주일연보를 거두로 그 경비를 쓰기로 하였습니다.
과거 성적을 말하면 노령 시베리아에 조사 2인 전도 2인과 중국 만주에 목사 1인과 상해에 목사 1인과 제주에 목사 1인을 파송해 전도했고, 일본에는 조선예수교연합전도국에 매년 경비 1350원씩 지출하여 동경과 대판과 구수지방에 각각 전도사를 두어 전도하는 중인데, 성적이 양호하여 동양 삼국에 흩어진 불쌍한 동포의 생명을 매년 여러 백명씩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제일 난관은 재정이올시다. 각처에서 전도사를 보내어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사면으로 들려오는데 확장은 고사하고 현상유지도 할 수 없으니 이것을 어찌하오리까?
부활주일연보를 적어도 감사일연보만치나 하여야 될터인데 그 절반만치도 하는 교회가 없을 뿐더러 연보를 거둔대로 보내지 않는 교회가 많아 일할 수가 없사오니 전도 사업을 아니하면 총회 체면이 안 되는 것보다도 동포의 생명을 어찌하오리까? 만번 생각해도 우리의 할 일은 우리가 해야 될 터이오니 총회를 사랑하시며 동포를 사랑하시며 예쑤를 사랑하시는 형제자매들은 부활연보와 특별연보와 부인전도회 찬성금을 많이 보내 주시어 금년 총회에는 전도국사업이 일층 확장되어 동양 3국에 흩어진 동포의 생명을 많이 구원하십시다.
1933년, 강규찬은 송창근에게 담임목사직을 이양하고 18년간의 산정현교회 담임 사역을 정리했다. 1933년 5월 30일에 열린 제24회 평양노회 촬요에서는 산정현교회의 지도자 변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강규찬이 산정현교회를 사임한 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다만 <진주 강씨 족보>에 따르면, 강규찬은 1934년부터 3년간 선천읍 동교회 담임목사를 지냈고 1941년부터 2년간 선천읍 북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1940년에 발행된 장로교 연감에 따르면 강규찬이 동봉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고 한다. 이렇듯 말년에도 목회 활동을 수행하던 강규찬은 1945년 4월 고향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강규찬 목사는 10여 년간 시무하던 산정현교회를 금번 사임하고 평신 교수 박형룡 목사가 임시 당회장이 되고 송창근 박사가 전임 시무케 되었는데, 교회에서는 노 목사의 지난 공적을 생각하여 사례금 천원을 진중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강규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