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구
1. 개요
1937년 인천 출생, 1965년에 사고사한 대한민국 육군 소령. 생전 계급은 대위이며, 사망 후에 육군장이 치러지고 나서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수류탄 이야기 하면 사고 사례로 꼭 언급되는 사람이다.[2]
2. 생애
1956년 육군사관학교에 16기로 들어갔고[3] , 나중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보병학교, 수도사단 제1연대 소대장, 1군 부사관학교 수류탄 교관을 역임하였다. 1965년 한국군 1개 사단의 월남파병이 결정됨에 따라 맹호부대 제1연대 제10중대장에 보직되었다.
그해 10월 4일, 베트남으로 파병을 앞두고 홍천군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했는데, 부임 전 제1군 부사관학교에서 수류탄 교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누구보다 수류탄의 위력과 유의사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 분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3. 사고
훈련 중에 한 이등병이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실수로 놓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손을 몸 뒤쪽으로 올린 상태에서 놓친터라 수류탄은 불행히도 몸 뒤로 빠져 중대원들 쪽으로 굴러갔고, 그 광경을 본 그는 본능적으로'''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막았다.''' 수류탄은 매정하게 터져버렸고, 그는 중대원 100여명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했다. 그래도, 그나마 그가 몸으로 수류탄의 파편을 막아준 덕에, 강재구 본인 한 명을 제외하면 주위에 있던 중대원들은 큰 부상이나 사망자 없이 전원이 무사할 수 있었다.
4. 원인
채명신 장군의 베트남전 회고록을 보면 훈련장 자체도 굴곡이 심한 위험지대에 설치되어있었으나 '''실전적 훈련'''이란 명목하에 위험지대 훈련을 강행했었던 탓도 있다고 한다.
5. 사후
이후 육군장을 치르고 태극무공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이 사례는 수류탄 투척법에 미숙하면 얼마나 큰 사고가 날 수 있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맹호부대는 부하를 아끼고 위했던 당시 대대장의 건의가 국방부의 승인을 받아 3대대의 이름을 '재구대대'로 바꾸었으며, 그의 추모 기념관까지 생겼다. 재구대대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제1 보병연대 예하 3대대에서 현재는 제1기계화보병여단 예하 제133 기계화보병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지금도 재구대대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대 마크에서 호랑이에 수류탄이 있다. 다만 호랑이+수류탄 마크는 부대마크가 아니라 전우회 마크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담당했던 10중대는 현재 제133 기계화보병대대 2중대로 바뀌었다. 133대대와 같이 133대대 2중대의 별명 또한 재구중대이다.
또한 1여단 내에는 재구공원이라는 조그마한 공원이 있는데 부대 깊숙한 곳에 있는지라. 면회하는 민간인들은 못보고 부대 개방행사 시나, 아니면 부대 방문 행사때 잠깐 가볼 수는 있다. 장병들은 잘 안가지만, 아침 뜀걸음 코스에 포함 루트여서 전 장병이 한번 씩은 공원 앞을 지나간다. 공원 주 용도는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기 위한 제사인 재구제[4] 를 지내는 용도로 많이 사용한다.
사단 신병교육대에는 재구관이라는 추모관이 있는데, 주용도는 306보충대에서 수기사로 신병 교육을 받는 장정들이 가장 먼저 입소하는 장소로 많이 쓰이고, 사단에 행사가 있을시에 많이 사용을 한다.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제17보병사단 영내 실거리사격장의 이름도 '재구사격장'이다.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그가 생도시절 소속되어 있던 생도대 2중대의 공식명칭을 재구 2중대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광개토1중대, 무열5중대, 문무8중대 등 역사적 위인의 호칭을 딴 것과 비교할 때 강재구 소령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6. 여담
육군사관학교에 가면 강재구 소령의 동상이 있다. 왼손에는 당연히 수류탄을 가지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생도들은 받은 꽃다발을 강재구 소령 동상에 거는데, 가장 먼저 꽃다발을 거는 생도가 동기 중에서 가장 먼저 장군에 진급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육사 졸업식날 동상이 꽃다발로 덮이고, 심지어 올라가서 걸려있는 꽃다발을 쳐내거나 상에 올라가서 같은 과가 걸기 전에 걸리지 않게 방해하는 촌극도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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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도 강 소령의 흉상이 학교 뒷마당에 세워져있다. 우수한 전투중대장에게만 표창하는 상으로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재구상'''이란 것이 있다.[5] 그리고 홍천에는 이 분의 이름을 딴 강재구 공원이 있는데 제11기계화보병사단에서는 너무 유명한 코스 이다.
사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원한다면 강재구 소령의 아들에게 육사에 진학하는 것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강재구 소령의 아들은 적성을 살려 공대를 갔다. 그런데 그 학교가 '''서울대'''였다고. 특전이 필요 없이 육사에 충분히 진학하고도 별까지 달 수 있었을 인물이었을지도.
이후 1966년 8월 11일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투이호아 전투에서 이인호[6] 해병 소령(추서계급, 전사 당시 대위로, 직책은 대대 정보참모이며 베트남전 참전초반엔 청룡부대 3대대 5중대장이다가 이후 대대 정보참모로 변경되었다.)이 1966년 8월 11일 청룡작전중 지하진지로 추정되는 동굴탐색 과정에서 조우한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서 아군을 살리고 자신을 희생해 부대가 임무를 완수토록 한 일이 일어났다.[7]
[1]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어머니가 권사로 있었다고 한다. # [2] 강재구 소령 외에도 수류탄 사고로 유명한 사람으로는 1970년 27사단의 차성도 중위(3사관학교 1기, 사고 당시 소위),1989년 6사단의 공완택 병장(사고 당시 상병),2004년 35사단의 김범수 대위(학군 40기 사고 당시 중위)등이 있다.[3] 장세동이 한때 동기였다.[4]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기 위한 제사로 매년 한번씩 하는 제사이다. 이 날은 사단장도 꼭 한번씩와서 재구공원에 있는 재구상에 예를 표하고 가기 때문에 여단 장병들이 무조건 청소를 한다. 근데 사람들이 많이 안다녀서 그렇게 많이는 안 해도 되고 낙엽만 쓴다고 한다.[5] 중대장 보직을 역임중인 대위에는 최고의 영예로 꼽히며 소령 진급에 유리하다.[6] 1931년생, 대구 대륜고 졸업, 해군사관학교 11기[7] 장남 이제욱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사 40기로 임관하여 해병대 장교의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