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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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知明
1. 개요
2. 활동 내역
3. 필모그래피
3.1. 드라마/시트콤
3.2. 영화
3.3. CF
3.4. 수상
4. 근황
5. 여담


1. 개요


대한민국남자 배우. 1939년 3월 5일 (85세) 서울특별시 출생이며, 본명은 오진홍(吳鎭洪). 혈액형A형이다.

2. 활동 내역


1967년영화 "무남독녀"로 데뷔했다. 지금은 코미디 영화에 주로 나오지만, 초기에는 하드보일드 영화에서 악역으로 자주 나왔었다. 1939년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나 상경하여 서울에서 살던 중 중학교 3학년때 6.25 전쟁을 피해 대구로 피난와서 텃세로 고생했다.[1] 오지명은 서울에서 왔다고 많이 맞았으며 동남 방언을 익혔다고 한다. 대구상고 시절 학교 짱까지 됐을 정도로 2학년까지는 공부에 거리를 뒀으나 3학년 승급 후 공부에 몰두했다고 한다. 원래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를 두 번이나 지망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했지만 현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던 중 연극에 빠졌다. 대학교 2학년 시절 우연히 명동에 붙은 국립극단 단원 모집 광고를 보고 응모하여 국립극단 연구생으로 입문했던 지성파 배우였다. # 젊은 시절에는 액션영화와 반공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그 시절의 메이저급 영화는 팔도사나이암살자(둘 다 1969년 작)로 그는 여기서 조연으로 나왔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TV 드라마에 주력했다. MBC 113 수사본부의 중앙정보부 요원 역할이 이 시절의 대표 배역. 또한 이 시기에 조선왕조 오백년 남한산성에서 강홍립 역을 맡기도 했으며 제3공화국에서는 이후락 역을 맡았다.
그 뒤 50대로 접어들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시트콤인 오박사네 사람들에서 엽기적이고 웃긴 할아버지 캐릭터로 주연을 맡으며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고, 이후 60세가 다 된 나이에 순풍 산부인과로 대박을 터뜨린 뒤에는 시트콤 위주로 활동하면서 코미디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코스비 가족 만세를 많은 부분에서 벤치마킹했다. 2004년에는 최불암, 노주현 등과 같이 영화 까불지마를 촬영하여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흥행과 평단 모두 안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도 노장 배우들의 열연과 재미 등으로 숨은 팬들은 꽤 있었다. 2008년에는 OBS 경인TV의 시트콤 오포졸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이 작품을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임했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 이후로 2020년 현재 작품 활동이 전혀 없어 사실상의 은퇴작이 된 듯. 항간에는 감독으로서 차기작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있다.
정웅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오지명이 너무 코믹 연기만 하지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도 코믹 이미지가 각인되는 것에 꽤나 부담이였던 듯. 그리고 이런 오지명의 조언이 훗날 정웅인을 훌륭한 악역 배우로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시트콤의 영향으로 코믹한 이미지로 굳어져서 대외적으로는 재미있는 할아버지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과거의 액션 배우 이미지처럼 실제로도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최불암조차도 오지명 앞에서는 꼼짝을 못했을 정도라고 한다. 최불암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유일한 연예인이기도(?)... 참고로 최불암이 오지명보다 1살 아래다. 주먹 실력도 대단했다고 한다.
2019년 케이블 방송에서 한창 재방송 중인 1990년대 대히트 KBS 드라마 서울뚝배기만 보더라도 식당 사장 역으로 나오는 오지명의 무척 진지하고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볼 수 있다. 시트콤에서 보던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나사 빠진듯 한 모습만 기억하던 사람들에겐 꽤 색다른 모습일 것이지만, 원래 매우 진지한 정극 전문 액션 배우였다.
왕년에는 방송가에서 오지명이 "얘 무조건 출연시켜!"이 말 한마디면 감히 거역을 못하고 그 사람을 캐스팅해야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건방져 보이는 PD를 폭행했다는 얘기를 토크쇼에서 직접 말하기도 해서 물의를 빚었고, 그 외에도 꽤 많은 구설수와 좋지 않은 소문이 있다. 이종환처럼 어두운 측면이 좀 보인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경찰들과 싸운 적도 있다고 한다. 친구들은 다 퇴학 당하고 본인만 무기정학을 당했다고.
마초같은 성격과 더불어 말을 굉장히 험하게 하는 편이다. 연기에서나 실제 언어로나 흑인에게 깜둥이, 이발사를 깍새, 구두닦이를 딱새라고 하는 등, 직업이나 인종에 대해서 필터링없이 막 말하는 편. 물론 80이 가까운 연세이신지라 전형적인 옛날 사람으로 필터링 없이 말하는 경향이기도 하다.
순풍 산부인과 출연진 전원이 카렌스 CF를 찍었을 당시 박영규미달이의 출연료를 갈취하자 오지명이 박영규를 구타했다는 루머도 있는데, 해당 루머는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2]에도 언급될 정도로 연예가에서 매우 유명했던 루머지만, 현실적으로 김성은의 부모도 있는데, 박영규가 김성은의 출연료를 갈취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아들인 오승익은 '머저리오'라는 예명으로 래퍼와 배우 활동을 하고 있으며[3], 친동생인 오진우는 영화 음악감독이다.
2004년 11월 11일에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시절에 여탕을 훔쳐본 적이 있었다고 했다. 모 영화 촬영 중에 후배 탤런트가 여탕 훔쳐보기 좋은 장소가 있다고 그를 꼬셔서 같이 여탕을 훔쳐봤는데 그렇게 한참 여자들의 알몸을 감상(?)하던 중 더 자세히 볼려고 앞으로 가다가 문을 여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성난 여자들이 벌떼 같이 달려와서 싸대기 몇 대 맞고 달아났다는 일화가 있다. 해피투게더 출연 방송
해피투게더 출연 당시 시험에서 컨닝을 한 이야기도 했었는데, 방영 며칠 전에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대규모의 부정행위 사태가 있었던지라 이에 대해 비판이 있었다. 물론 프로그램의 녹화는 수능 전에 있었던지라 녹화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어도 PD가 알아서 편집을 했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던 것이다. 후에 그도 필름2.0과 한 인터뷰에서 PD가 생각이 없었다면서 PD를 디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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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시절의 사진이 권상우를 닮았다고 한다.

3. 필모그래피



3.1. 드라마/시트콤



3.2. 영화


  • 1970년 야광주
  • 1970년 쌍태양
  • 1971년 두 남자
  • 1973년 누명
  • 1973년 축배
  • 1973년 천풍
  • 1973년 동풍
  • 1977년 7호실 손님
  • 2003년 황산벌
  • 2004년 수절
  • 2004년 까불지마

3.3. CF



3.4. 수상



4. 근황


  • 활동을 쉬고 있다.(???) 올해 춘추 83세로, 연예계의 큰 어른으로 통하는 배우 이순재와는 5살 차이, MC 송해와는 12살 차이가 난다.

5. 여담


  • 1998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영화 판권을 담보로 제작비를 지원하는 융자사업 대상작 10편을 선정하였을때 이중 "애국시민 노기찬"이라는 작품으로 입상하였다.[4]
  • 연예계에서도 손꼽히는 싸움 실력의 소유자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 경북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한 후 대구상고에 다니면서[5] 싸움만 하고 다니던 그가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아버지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신문기자로 있던 아버지가 오지명과 여동생을 서울로 불러 영화를 한편 보여주고 식사를 하며 영어로 질문을 하였는데, 여동생은 대답을 한 반면 오지명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고, 이때부터 수험공부를 하여 서울대 상대에 두번 낙방한후 성균관대 경제학과에 진학하였다.

[1] 중앙일간지의 기자였던 아버지는 서울에서 살았다.[2] 참고로 황봉알순풍 산부인과에 단역으로 몇 번 출연했었다. 미달이보다도 바우처 등급이 낮은 것에 한을 품고 SBS를 열심히 깠다.미달이 김성은은 적어도 주조연에 가까운 배역이다. 미달이가 메인롤인 에피소드도 적지 않은 작품인데 단역배우가 고정 주조연 배우보다 높은 등급의 바우처를 기대했다는게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그저 아역이라고 성인인 자신이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것이니 누구의 문제인지는 굳이 말안해도 알일.[3] <까불지마> 개봉 당시 오지명이 필름2.0과 했었던 인터뷰의 내용에 의하면 아들이 배우를 지망하는게 싫어서 아들을 미국으로 조기 유학 보냈으나, 정작 그 아들은 흑인들과 싸우고 학교에서 잘려서 중도 귀국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그 인터뷰에서 오지명은 '깜둥이' 라는 표현을 대놓고 사용했는데, 오지명은 순풍 산부인과 등의 드라마 촬영때부터 껌둥이라는 표현을 작중에서 간혹 썼었다.[4] 함께 선정된 감독들로 김기덕, 김기영, 배창호 등이 있다.[5] 사실 대구상고도 명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