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도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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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A]
'''시호'''
[A]
'''지위'''
호쇼이 예친왕(和碩睿親王)[1] (1636 ~ 1650)
섭정왕(攝政王) (1643 ~ 1644)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 (1644 ~ 1649)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 (1649 ~ 1650)
''''''
아이신 교로 도르곤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ᡩᠣᡵᡤᠣᠨ
愛新 覺羅 多爾袞
'''생몰 기간'''
1612년[2] 11월 17일 ~ 1650년 12월 31일(총 13924일) 향년 38세
'''재위 기간'''
섭정왕[3]: 1643년 ~ 1650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숙질 간의 제위 쟁탈전
2.3. 명나라의 멸망과 청군 입관
2.4. 권력 강화와 대륙 통치
2.5. 사망과 이후
2.6. 추증
3. 평가
4. 가족관계
5.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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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초기 군인이자 정치가. 청나라의 명재상이었고 섭정을 맡아 어린 황제를 제대로 보필했다. 청의 태조 누르하치의 14남으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며, 형 홍타이지 밑에서 십수년 연상의 조카와 형들을 압도하는 군공을 세우며 중용됐다. 청나라 팔기군 중 정백기의 수장이었으며, 청나라 최초의 섭정왕이 되었다.
황부섭정왕으로서 순치제 재위 초기 7년간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실권을 행사했다. 청나라를 반석 위에 올린 것은 도르곤이라고 후대에 재평가된다.
조선과는 악연이 있는데, 병자호란 때 쳐들어와 강화도세자봉림대군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그다. 사로잡은 왕자들을 데리고 남한산성인조를 압박하면서, 조선의 저항 의지가 꺾였다.

2. 생애



2.1. 초기


1612년 11월 17일 당시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떨치던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의 14째 아들로 태어났다. 도르곤은 만주어로 오소리를 뜻한다.
도르곤의 어머니는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세 번째 정실, 즉 암바푸진(amba fujin 大福晉, 대부인을 뜻함) 울라나라 씨였다. 어린 나이에 시집 와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고 그녀의 자식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컸다. 도르곤이 5살 때인 1616년 1월 누르하치는 칸을 자칭하며 건국했고, 1618년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정하니 이것이 바로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이다.
1626년(천명 11년) 누르하치가 사망하자[4] 누르하치의 아들들 가운데서 8남인 형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가 차기 칸(한)으로 옹립되었다. 칸이 된 홍타이지는 버일러(beile 貝勒)들의 지지하에 도르곤 형제의 모친인 울라나라씨를 누르하치의 순장 대상으로 지목하여 강제로 죽인 후 순장했다.[5] 울라나라씨의 소생인 도르곤과 그의 형 아지거, 어린 동생 도도는 졸지에 고아가 됐다. 홍타이지는 그들을 모두 버일러에 봉하여 조정에 출사케 하였다.
1628년(천총 2년), 홍타이지는 군사를 몰아 몽골의 차하르를 공격하였는데 이 때, 17세의 도르곤도 종군하였다. 도르곤은 선봉에 서서 차하르의 군사를 대파하였고 1200여명의 차하르인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1635년(천총 9년) 2월에는 직접 군사를 몰고 몽골을 공략하여 몽골의 마지막 칸 에제이 칸의 항복을 받아내었고 옛 원나라의 옥새를 획득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타이지는 도르곤을 크게 치하하고 이듬해인 1636년(천총 10년), 국호를 금에서 청(淸)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도르곤은 그간의 전공으로 호쇼이 친왕(hošo-i cin Wang 和碩親王)에 책봉, 머르건 친왕(mergen cin wang 睿親王 예친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같은 해에는 조선 침공시 홍타이지가 친정한 서로군과 별개로 두만강을 건너 들어온 동로군 별동대를 이끌며[ 평안도황해도, 함경도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 때 홍타이지의 장남이자 도르곤의 세 살 위 조카인 호오거도 도르곤을 따라 별동대에 종군했다. 홍타이지의 본군과 합류한 후에는 조선의 왕자인 봉림대군인평대군, 그리고 세자빈 강씨가 피신해 있던 강화도를 공략하였으나 홍타이지가 엄명을 내려 조선의 왕족들을 살육하지 말라 하니 그 명을 쫓아 포격을 하는 대신 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결국 강화를 지키던 봉림대군은 농성을 풀고 도르곤을 성 안으로 영접하였고 도르곤은 대군들과 세자빈 강씨를 사로잡아 남한산성에 숨어있던 조선의 국왕 인조를 압박하였다. 이듬해인 1637년(숭덕 2년, 조선 인조 14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를 올렸다. 전쟁이 끝나자 청군은 조선인 포로와 인삼, 금 등의 공물과 공녀 수백여 명을 사로잡아 수도인 묵던으로 귀환하였다.
1638년(숭덕 3년) 8월, 홍타이지는 도르곤을 봉명대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몰아 산해관을 북서쪽으로 우회하여 명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 때 홍타이지의 장남이자 도르곤의 세 살 위 조카인 호오거도 도르곤을 따라 종군했다. 이후 하북성과 산서성의 여러 도시를 공략, 이듬해인 1639년(숭덕 4년) 3월에야 묵던으로 회군하였다. 도르곤은 성 36곳을 함락시키고 6곳의 투항을 받아냈으며 12만여 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1641년(숭덕 6년)에는 홍타이지의 명을 받고 정친왕 지르갈랑과 함께 10여만의 군사를 이끌고 산해관을 공략하였다. 전선 뒤에서는 황제인 홍타이지도 친히 참전하여 응원군을 이끌고 있었다. 명군에서는 당시 북방의 행정과 병력을 관장하던 계료총독 홍승주(洪承疇)가 송산성에서 지휘하였으나 송산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멸하고 성이 무너진 후 생포, 투항하였다. 이후 예전에 홍타이지에게 금주성의 병력을 설득해 항복을 시키겠다 둘러대고는 금주성에 들어가 지휘관이 되어버린 조대수(祖大壽) 역시도 생포하였다. 이로써 명나라는 산해관 이북의 땅을 모두 잃었고 청나라는 요동을 차지하였다.

2.2. 숙질 간의 제위 쟁탈전


1643년(숭덕 8년) 9월 21일, 홍타이지는 아무런 유조도 남기지 않은 채 52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홍타이지는 생전에 아무런 후계자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은 큰 파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홍타이지 사후 5일 후에 당시 황족 중 가장 서열이 높았던 누르하치의 차남이자 도르곤의 이복형 예친왕(禮親王) 다이샨은 성경 황궁의 숭정전(崇政殿)에서 의정왕대신회의를 소집하여 다음 황위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중 도르곤과 도르곤의 세 살 위 조카이자 홍타이지의 장남인 숙친왕 호오거(豪格)가 각축을 벌였다. 도르곤의 친형 무영군왕 아지거와 동복 아우인 예친왕(豫親王) 도도를 비롯한 당여들은 그의 서열이 호오거보다 위이고 전공 또한 호오거보다 높은데다 원래 누르하치가 도르곤을 한에 앉히려 하였으나 그 자리를 홍타이지를 비롯한 4대 버일러[6]가 가로채갔다고 주장하였다.[7]
호오거는 홍타이지가 아들로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것을 전례로 하여 다음 제위도 부자승계로 이어져야 한다고 맞섰다. 당시 도르곤은 팔기군 중 정백기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의 동생 도도는 양백기를 관장하며 정백기와 양백기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호오거는 자신이 관장하던 정람기는 물론 홍타이지의 예하 부대였던 정황기와 양황기의 지지를 얻으며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이 사이에 의정왕대신회의의 의장인 다이샨이 정홍기를, 정친왕 지르갈랑이 양람기[8]를 거느리며 두 세력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중 다이샨의 아들인 패자 쇼토(다이샨의 2남, 석탁)와 다이샨의 손자인 영군왕 아달리(다이샨의 3남 살합린의 1자)가 몰래 도르곤을 제위에 앉히려 도모하였다가 발각되었다.[9] 이에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도르곤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도르곤은 이 사건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항변하고 둘을 바로 참형에 처한 후 자신이 제위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10] 그리하여 그는 호오거가 주장하는 부자승계의 예를 따르되, 홍타이지의 아홉 번째 아들인 푸린을 제위에 올리고 자신과 중도파인 지르갈랑이 좌, 우 섭정왕으로서 국사를 돌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명분상으로는 다이샨이 섭정왕에 오르는 것이 맞았지만 장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들며 건강이 나빠지고 권력욕도 옅어지던 다이샨이 도르곤과 지르갈랑에게 전권을 위임한 형태인 이 제안에 다이샨은 물론 지르갈랑과 호오거도 동의하였고 그리하여 홍타이지가 붕어한지 17일 뒤인 10월 8일, 6살에 불과한 푸린이 성경의 독공전(篤恭殿)에서 즉위를 하니 이가 순치제이다.

2.3. 명나라의 멸망과 청군 입관


예친왕 도르곤과 정친왕 지르갈랑은 섭정왕이 되자 친왕, 군왕, 패륵 등의 종친들이 부족 업무를 관장하는 것을 정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여 순치제 초기의 청나라 조정은 각부 패륵들이 중심이 된 합의정체에서 섭정왕 2인에 의한 통치 체제로 변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의정왕대신회의의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다. 비록 도르곤은 좌섭정왕으로서 병권을 책임지고, 지르갈랑은 우섭정왕으로 조정의 국사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청나라의 모든 권한은 순치제 즉위 직후 이미 도르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를 눈치챈 지르갈랑은 조정의 의결권까지 그에게 넘겨줌으로써, 도르곤은 단순히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섭정왕이 아닌 사실상의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순치제가 즉위한 이듬해인 1644년(순치 원년) 4월, 숙친왕 호오거의 수하 하락회(何洛會)가 도르곤에게 밀고하였는데 호오거가 도르곤을 죽이고 자신이 섭정왕에 오를 것이라고 모함하였다. 이미 황위 계승을 놓고 호오거와 극심한 알력을 빚었던 도르곤은 이 말을 믿고 즉시 호오거를 체포, 숙친왕의 작위를 박탈하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 당여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이 사건으로 도르곤은 자신의 부하들을 호오거가 거느리던 정황기와 양황기의 요직에 임명하며 청나라의 최정예 부대인 상삼기(上三旗)의 지휘권을 손에 넣었다. 이후 호오거는 백의종군으로 군공을 세워 같은 해 10월에 숙친왕으로 복작되어 1646년(순치 3년)에 사천 지역을 평정하는 전과를 올리지만 같은 해 3월 6일에 다시 죄를 받아 작위를 박탈당한 채 유금을 당하였으며, 1648년(순치 4년)에 연금에서 풀리지 못한채 사망하였다. 호오거 사후에 도르곤은 호오거의 아내를 자신의 잉첩으로 취하기도 하였다. 도르곤은 이렇게 자신에게 대항하던 이들을 제거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발판을 마련하였다.
같은 해,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명나라는 이미 틈왕(闖王)을 자처한 이자성의 농민군에 의해 세력을 급격히 잃어갔고 이자성군은 수도인 북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1644년(순치 원년, 명 숭정 17년) 4월 21일 이자성의 군대는 북경성에 공격을 가하였고 그 다음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금성 뒤의 후원인 매산에서 목을 매 자진하였다. 이로써 명나라는 1368년 주원장에 의해 건국된 이후 277년만에 그 종말을 고하였다. 청나라의 만주족 대신들은 지금이 중원을 차지할 호기라 주장하였으나 명나라의 항장(降將) 출신으로 청나라 조정에 출사하고 있던 홍승주나 범문정 등은 이자성이 먼저 북경을 함락하게 내버려두고 때를 기다렸다가 명나라 황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이자성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명나라로 들어갈 가장 중요한 관문인 산해관(山海關)에는 총병관 오삼계가 버티고 있었다. 도르곤은 오삼계를 여러 차례에 걸쳐 설득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북경을 함락한 이자성의 군사가 오삼계의 아버지와 애첩을 끌고갔다 하자 오삼계는 분노하였고 결국 청군과 손을 잡아 산해관의 빗장을 열었다. 이로써 청군은 아무런 전투도 벌이지 않고 손쉽게 산해관을 통과하여 중원 땅으로 진입하였다.
도르곤은 이 때 총사령관으로서 청군을 지휘하여 오삼계와 연합군을 결성하였고 결국 산해관 근처의 일편석(一片石)에서 이자성군과 대치하였다. 청군과 오삼계군은 이자성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고 이자성은 몰래 북경으로 돌아와 자금성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이렇게 도르곤은 1644년(순치 원년) 6월 5일, 북경성을 점령하고 황궁인 자금성을 장악하였다. 곧이어 자진한 숭정제의 장례를 후하게 치루고 그 유해를 명십삼릉에다 장사지내는 등 멸망한 명나라의 황실을 존중함과 동시에 북경의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그는 이어서 북경으로의 천도 작업을 서둘렀고 이자성에 의해 불탄 자금성을 복구하였다. 같은 해 10월 19일, 도르곤은 북경성 북문에서 황제인 순치제와 황족들을 맞이하고 열하루 뒤인 10월 30일에 순치제를 모시고 천단에서 제를 올려 이제 북경이 청나라의 수도가 되었으며 순치제가 새로이 중국의 천자가 되었음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2.4. 권력 강화와 대륙 통치


1644년(순치 원년) 11월 8일, 순치제는 자금성 태화전에서 다시 한번 즉위식을 가졌다. 여기서 순치제는 도르곤의 그간의 공적이 고대 중국의 주공 단과 같다며 크게 치하하였으며 도르곤의 칭호를 섭정왕에서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으로 올렸다. 또다른 섭정왕이었던 지르갈랑은 보정숙왕(補政叔王)으로 제수하였는데, 이는 종전의 섭정왕보다 더 낮은 작위였다.
이듬해인 1645년(순치 2년)에 도르곤은 자신에게 올리는 모든 장계에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이라 일컫게 하는 등 스스로의 권한을 강화하는 동시에 옥좌에 한단계 더 다가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말년인 1649년(순치 6년)에는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 자칭, 줄여서 황부왕이라 하였다.
도르곤이 숙부와 황부 등의 호칭에 크게 신경을 쓴 이유는 여러 황족들과 같이 친왕이나 군왕 등의 작위로 불리는 것보다 황제의 숙부, 황제의 부친으로 공인받아 불리는 것이 더 격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1647년(순치 4년)에 도르곤은 지르갈랑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의 작위인 정친왕을 정군왕(鄭郡王)으로 격하시켰으며, 공석이 된 보정숙왕에는 자신의 아우 도도를 황숙보정왕(皇叔輔政王)에 앉히는 등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또한 어릴 때 순장된 자신의 어머니 대복진 울라나라씨를 효열무황후로 추숭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높였다.[11]
북경에 들어온지 이틀 후, 도르곤은 칙령을 내려 관리들에게 앞머리를 깎고 변발을 하면 조정의 출사를 허용케 한다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도르곤은 3주 만에 이 정책을 취소하였는데 북경 주변 도처에서 단발을 거부하는 백성들의 민란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편 도르곤은 북경 이북의 땅을 팔기군에게 하사하여 북경의 방위를 책임지도록 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북경 이북의 전답 또한 종전의 한족에게서 몰수하여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리하여 한족들은 새로이 지주가 된 만주족들에게 일정량의 곡물을 바치며 소작농으로 살아가야 했다.
비록 청나라가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차지하였으나, 남쪽에는 여전히 명나라에 충성하는 신하들과 종친들이 건재하였다. 숭정제가 자살한 직후, 숭정제의 사촌인 복왕 주유송[12]이 남경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홍광(弘光)으로 정하였다.
아직 청나라가 차지한 영토는 중원의 화북 지방에 그쳤기 때문에 도르곤은 친왕들과 여러 장수들을 남쪽의 전선으로 파견하여 명나라의 잔당을 토벌하게 하였다. 도르곤은 특히 자신의 친동생인 도도를 총사령관으로 내려보내어 남경을 압박하였고 결국 남경은 함락되고 도도는 청군에게 항거했던 백성들을 살육하는 양주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도르곤은 한족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고 1645년(순치 2년) 7월 21일, 모든 한인에게 변발을 틀 것을 명하고 이를 거부하면 극형에 처할 것이라는 칙령을 내렸다. 한인들은 효경의 구절인 “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 신체발부, 수지부모, 부감훼상, 효지시야”(몸과 머리, 피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이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모든 효의 시작이다.)를 들어 변발을 극렬히 반대하였다.
단발령은 한인들의 적개심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고, 도르곤과 북경의 조정은 명나라에서 항복해 온 장수들을 앞장세워 항거하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참살하였다. 일부 한인 지식층은 산 속 깊숙이 은거하며 청나라의 중원 통치를 끝까지 부정하였다.

2.5. 사망과 이후


하지만 도르곤은 이전의 송산성과 금주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건강이 나빠져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자주 각혈과 중풍을 앓았다. 1648년(순치 4년), 도르곤의 위세를 두려한 신료들이 도르곤의 건강을 핑계로 들어 순치제에게 도르곤의 신하의 예를 생략할 것을 주청하였고 순치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르곤은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갔고, 도르곤은 계속 국사에 전념하며 사실상의 황제로서 청나라를 통치하느라 피로가 가시지 않았던터라 이로 인해 건강을 회복할 시간이 없었다.
1650년(순치 7년) 12월 8일, 도르곤은 카라호툰(중국명 열하(熱河))으로 친왕, 군왕, 패륵, 패자 등을 이끌고 사냥을 나갔다. 그러나 사냥을 나간 사이 갑자기 병세가 위중해져 북경을 떠나고 23일 뒤인 12월 31일에 카라호툰 성에서 39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위특(魏特)의 《탕약망전》(湯若望傳)에는 사냥 중 넘어져 부상을 입고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담천(淡遷)의 《북유록》(北游錄), 〈기문〉(紀聞)에는 무릎관절이 벗겨지는 부상을 입었는데 약을 잘못 복용하여 사망한 것으로 적혀있다. 순치제는 도르곤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장례를 국상으로 하며 황제의 격에 따라 치르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도르곤이 죽고 난 후 도르곤을 추종하던 신료들은 순치제에게 상소를 올려 황부섭정왕 도르곤을 황제에 추숭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도르곤이 죽었으나 명목상으론 여전히 실권이 없던 순치제였기에 그 주장에 따랐고 결국 순치제는 도르곤이 사망한지 며칠 후 도르곤에게 성종(成宗)의 묘호와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의 시호를 올려 황제에 추숭하였으며 그의 장례를 국상으로 치루었다.
그러나 도르곤의 국상을 치루고 한달 반 후, 도르곤의 수하에 있던 정백기와 양백기의 장군들이 도르곤의 형인 영친왕 아지거를 새로이 섭정왕으로 모시고 자신들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려 도모했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은 도르곤에 의해 실각되었던 정군왕 지르갈랑에게 호기가 되었으며 곧 도르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대신들과 팔기군의 장수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아지거는 이에 자진하였고 역모에 관련되어 있던 정백기와 양백기의 장수는 모두 처형되었다. 1651년(순치 8년) 2월 1일, 지르갈랑은 친왕의 작위를 회복함과 동시에 순치제에게 대권을 봉환하였고, 14살의 순치제는 그날로 친정을 개시하였다.
얼마 후, 지르갈랑은 순치제에게 도르곤이 섭정왕으로서 전횡을 휘두르고, 황제만 입을 수 있는 황포를 수시로 입었으며, 또한 순치제의 이복형인 호오거를 모함하여 옥사하게 하고 자신은 그 첩을 취하였다는 등을 쓴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순치제는 이에 격노하여 도르곤의 묘호와 시호를 모두 추탈하고 황실 대동보에서 그의 이름을 제명하였으며, 태묘에 봉안된 그의 신주를 내쳤다.
또한 그의 능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어 그 시체를 황야에다 버리고 몽둥이로 시체를 수십 차례 때리는 형벌을 내렸으며 그 유해의 머리를 잘라서 각지마다 그 머리를 돌려 효수하게 하는 등 도르곤에 대한 순치제의 적개심은 매우 컸다.

2.6. 추증


도르곤은 이후 순치제의 아들인 강희제 연간에 가서야 신원되었으나, 여전히 황족으로서의 신분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후 1778년(건륭 43년), 건륭제는 비록 소인들의 간계에 빠져 전횡에 휘둘렀으나 개국에 큰 공이 있으므로 개국 당시 활약했던 다이샨이나 동생 도도 등과 같이 태묘에 배향됨과 동시에 도르곤에게 예친왕의 작위를 다시 내리고 시호로 충(忠)을 붙여 예충친왕(睿忠親王)으로 추증하였다.
도르곤은 생전 아들을 두지 못하여 동복아우인 도도의 셋째 아들 도르보를 양자로 들였고 세월이 흘러 건륭제가 도르곤을 추증할 때 도르보의 5세손인 순영(淳潁)으로 하여금 예친왕으로 봉하여 그 후사를 잇게 하였다.

3. 평가


누르하치, 홍타이지청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발전시켰다 하더라도 그들의 재의 기간 동안 청나라는 만리장성 넘어에 있는 북방 민족 만주족의 국가에 불과했다. 그랬던 청나라를 중원의 제국으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섭정왕 도르곤이었다. 청나라가 많이 강성해졌다곤 하지만, 만리장성을 돌파하여 중원의 지배자가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랬던 과업을 이룩해낸 이가 도르곤이었다. 도르곤은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교묘한 책략 등 여러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 끝에 베이징을 차지할 수 있었다. 사실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중원이 혼란에 빠진 그 좋은 찬스 때 청나라의 권력투쟁으로 혼란이 계속되었거나 도르곤이 아닌 다른 이가 섭정 자리에 있었다면 베이징에 입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청나라 역사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아야 할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가 아니었고, 결국 그의 라이벌이었던 이복형, 홍타이지의 후손들에 의해 부관참시되며 격하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 그래왔듯이 도르곤 역시 쿠데타를 통해 조카를 제거하고 본인이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사실 당대에도 도르곤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순치제도 도르곤을 항상 경계했다. 오히려 도르곤이 끝내 정변을 일으키지 않고 황부섭정왕의 자리에 만족한 것을 기이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다. 일각에서는 도르곤이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를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그녀의 아들인 순치제를 해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설을 바탕으로 중국에서는 '대청풍운'이라는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픽션일 뿐이다. 도르곤이 제위에 등극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제기되고 있다. 일단 그는 팔기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당시 양황기 대신들은 그의 편이 아니었고 효장태후라는 구심점을 통해 도르곤과 대립했다. 또한 효장태후의 뒤에 있는 몽골 세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도르곤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설령 도르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제위를 차지한다 해도 물려줄 후계자가 없던 것이다. 실제로 도르곤은 자신의 제위 계승권을 정당화하며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하고 순치제는 태자로 강등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도르곤은 황부섭정왕이라는 자리에 만족하고 여생을 마쳤는데, 이것이 워낙 전례가 없는 자리였는데다가 공식적으로 황실의 종친에 불과한 처지였기 때문에 당시에 유교적 관점에서 도르곤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선의 세조가 한 짓을 생각하면 오히려 유교적 관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법한 일인데도 말이다.
예수회 선교사인 마르티노 마티니(중국명 위광국(衛匡國))는 자신의 저서 《타타르 전기》에서 위아래 모두 도르곤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그를 감히 직접 마주하여 말을 꺼내지 못하였고, 그가 외출하였다 돌아올 시에는 백관이 정렬하여 그를 알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학자 샤오이산(蕭一山)은 청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에 도르곤의 섭정이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중국의 역사학자 옌총니엔은 도르곤이 명-청 교체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개국에 큰 공이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권력욕이 강하여 황부라는 극존칭까지 자칭하는 등 죽을 때까지 조카이자 황제인 순치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하였다.
미국의 역사학자 프레드릭 모트는 도르곤이 비록 훌륭한 정치가요 용맹한 장군이었다고 평했다. 다만 섭정왕에 오른 뒤 오만방자해졌으며 그 오만함이 황족들과 대신들의 불안감을 야기하여 결국 도르곤 사후 그의 모든 명예를 추탈하는데 큰 일조를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효종실록〉에도 도르곤에 대한 평이 남아 있다. 병자호란의 여파로 인한 극도의 반청 정서와 북벌 운동이 한창일 때의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실록에 따르면 정친왕 지르갈랑이 순치제에게 아뢰기를 도르곤이 숙부로서 맹세를 어기고 권력을 자행하고 스스로 황제의 아버지를 자처하는 등 도를 넘은 전횡을 휘둘렀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숙친왕 호오거를 모함하여 죽이고 그 부인을 차지하는 등 패륜을 저질렀으며 좋아하는 사람에겐 한없이 높은 관직을 주었으나 싫어하는 자는 내치거나 턱없이 낮은 관직을 주는 등 붕당을 형성했다고도 하였다.
조선인들의 반청 정서와 별개로 도르곤 본인은 소현세자에게 잘 대해줬음을 감안하면, 만약 홍타이지가 아니라 도르곤이 후금의 한위를 계승했다면 명나라와의 적대관계와 별개로 조선을 침략하지는 않았던 아버지 누르하치의 외교 노선을 그대로 계승했을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실제 역사에서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조선의 적이 된 것도 형인 홍타이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13] 의순공주와의 결혼도 조선인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별개로 도르곤 본인에게는 딱히 악의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청나라의 만주족은 결혼동맹을 통해 몽골인 같은 이민족과의 친선관계를 강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말 그대로 의도만 좋았던 케이스라고 봐야겠지만...

4. 가족관계


  • 대복진/정복진 경효충공정궁원비 보르지기트씨(敬孝忠恭正宮元妃 博爾濟吉特氏, 1611년 ~ 1649년) - 시호는 경효충공의황후(敬孝忠恭義皇后).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문황후의 사촌언니.
  • 대복진 이씨(大福晉 李氏, 1635년 ~ 1662년)
  • 계복진 퉁기야씨(繼福晉 佟佳氏) - 상서 몽아도(蒙阿圖)의 딸
  • 계복진 보르지기트씨 - 이름 찰이망(紮爾莽). 찰로특부 태길 근두이(紮魯特部 台吉 根杜爾)의 딸.
  • 계복진 보르지기트씨 - 커얼친 태길 납포희서(拉布希西)의 딸
  • 계복진 보르지기트씨 - 커얼친 태길 색낙포(索諾布)의 딸, 숙친왕 호오거의 적복진.
  • 측복진 궁기트씨(側福晉 公齊特氏): 차하르 태길 포연도(布延圖)의 딸
  • 측복진 보르지기트씨: 태길 두사갈이탁농(杜思噶爾卓農)의 딸
  • 측복진 기이모트씨(側福晉 濟爾莫特氏) : 방도무(幇圖武)의 딸
  • 측복진 이씨(側福晉 李氏) - 조선 여인, 이세서(李世緖)의 딸.
    • 동아격격(東莪格格)
  • 오이고예(吳爾庫霓) : 커얼친친왕 오극선(吳克善)의 노비, 도르곤 사후 순장.
도르곤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예친왕 도도의 5남인 예친왕 도르보(睿親王 多爾博, 1643년 ~ 1673년)를 양자로 들였다.
한편, 자식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초혼으로부터 25년간 십수명 이상의 여자를 처첩으로 들이면서 아들딸 전혀 없이 사망 직전 한족도 만주족도 몽골족도 아닌 '조선인' 측복진으로부터 얻은 딸 하나만 남았다는 점은, 혹시 사후 숙청 과정에서 도르곤 일가에 대한 조직적인 기록말살형이 이뤄진건 아닌가 하는 의문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도르곤이랑 친하게 지냈던 소현세자가 볼모로 지내던 시절의 기록인 심양일기에도 도르곤의 '(장성한) 자식'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고, 황실 족보를 털어보며 도르곤을 예충친왕으로 복권한 건륭제조차 도르곤의 후손은 찾아내지 못하고 양자 도르보의 후손에게 작위를 주는데에 그쳤다. 그냥 자식 복이 없었던 듯.[14]
한편 2005년엔 뜬금없이 광저우에 사는 어떤 남성이 갑툭튀하여 자신의 선조가 도르곤의 아들인데 도르곤의 사후 숙청 당시 정백기의 도움으로 숙청 당시 자금성을 탈출하여 중국 남쪽 끝 광동성까지 도망쳐서는 곤(袞)자와 비슷한 원(袁)씨 성의 한족으로 신분 세탁을 하고 숨어 살아왔다면서[15] 자신은 도르곤에게는 10세손이 된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었으나 만주사학계나 청조 종친들에게나 인정받지 못했다. 이 떡밥은 중문 위키백과에 소개되어 있고 영어 위키백과에도 이 일화가 소개되어 있으나, 기사도 쉬이 찾아볼 수 없고 학자들에게도 믿거나말거나 취급을 당하며 잊혀졌다.

4.1. 형사취수


청 태종의 비이자, 순치제의 어머니인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유목 민족의 풍습이던 형사 취수를 했다는 것인데, 은근히 증거가 많이 있어 대중에서는 거의 정설로 여긴다. 순치제의 등극부터, 도르곤 사후의 복수까지 맞아 떨어지는 점이 많다. 도르곤을 황'''부'''섭정왕으로 책봉한 것, 태후가 혼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장황언의 시, 태후였던 효장문황후가 어린 순치제와 매우 떨어진 궁에서 살았고 얼굴 보기 무척 힘들었다는 점, 각종 문헌에서 '도르곤이 황궁 내원을 드나들었다'는 구절이 발견된다는 점, 청조 역사에서 존경받는 효장문황후가 심양 북릉(베이링(北陵))의 홍타이지와 합장되지 않고, 청동릉에서도 풍수담 바깥에 안장된 점 등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 증거들은 다소 부족한데…
먼저 황부(皇父)의 경우 그 의미가 무거운 것은 맞으나, 실제 부자 관계가 아니라도 존경의 의미를 담아 부(父)로 호칭한 사례가(아부, 상부 등) 종종 있었기 때문에 증거로는 불충분하다. 또 장황언의 시에 태후의 혼인을 준비한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나, 장황언이 반청복명 인사[16]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시를 순수하게 믿기는 어렵다. 사실, 당시 도르곤은 조카인 숙친왕 호거(홍타이지의 장남)의 푸진 보르지기트씨[17]를 이미 취했다(...). 그래서 이 일이 효장문황후의 일로 와전되었고, 청조를 미워했던 장황언이 이를 일부러 시에 넣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한편 여러 문헌에서 '도르곤이 황궁 내원을 드나들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맞지만, 어디까지나 '드나든' 것이지 '기거한' 것은 아니고(...), 만일 정말 도르곤이 효장과 혼인했다면 내원에 드나든 것은 죄가 되지 않을 것이나, 도르곤이 내원에 드나든 것은 후일 도르곤의 죄 중 하나로 지목된다. 효장문황후의 무덤의 위치 역시 도르곤과의 혼인 탓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굳이 "남편 홍타이지의 무덤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다"는 효장문황후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게다가 도르곤과 효장문황후가 정말로 혼인했다면, 순치제가 도르곤의 시신을 파내어 매질까지(!) 하는 상황을 효장문황후가 방관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재 역사 학계에선 효장문황후와 도르곤이 혼인했을 가능성을 부정한다. 연인이나 정치적 파트너일 수는 있어도 혼인까지 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 다만 사극들은 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다는 설을 많이들 택하고 있고, 여러 사극들에서 그려낸 두 사람의 로맨스는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18]

4.2. 의순공주


도르곤은 조선인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조선 미녀를 얻고 싶어한 것도 있었겠지만, 딸 밖에 없어서 자신의 후사를 얻기 위해 혼인을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1650년(효종 1년) 그는 효종의 딸과 혼인하려 했으나, 딸을 다시 청나라로 보내기 싫었던 효종[19]은 "혼기에 있는 딸이 없다"고 거짓말했다.
당시 청나라에 효종의 딸이 겨우 2살이라서 혼인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실제론 그 당시 기준으로 혼인을 생각할 만한 딸들이 있었다. 즉, 숙안공주는 15살, 숙명공주가 11살이었다. 효종은 자기 딸만 숨긴 게 아니라 조카 딸, 즉 소현세자의 딸들도 지키려고 "이미 혼인했거나 너무 어리다"고 거짓말을 했다. 소현세자에게는 민회빈 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5명이 있었는데, 그 중 2명은 어려서 일찍 죽었고 3명의 군주(세자의 적녀)가 생존해 있었다. 여담으로 이 3명 모두 조선인과 결혼하였다. 왕실 종친들도 다 딸들을 숨기기 급급했다고 하는데, 공녀도 아니고 정식 구혼 신청에 이런 반응이었으니 당시 반청 분위기를 알 만하다.
실제론 이때 효종과 소현세자의 딸들은 혼사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자라 있었고, 숙안공주는 이미 혼사가 진행 중이었다. 실제로 효종은 이 해에 서둘러 소현세자의 장녀인 경숙 군주를 혼인시켰고 다음해 1월에 숙안공주도 혼인시켰다. 이 때 효종은 청나라의 눈에 띌까봐 왕의 딸 혹은 왕의 조카딸로서는 이례적으로 간소하고 급하게 혼인을 진행했다. 원칙적으로 왕이 죽고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왕녀의 혼인은 미루어져야 하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던 것.
이러던 와중에 금림군 이개윤[20]이 자신의 딸을 보내기로 나섰다. 기록상으로는 금림군이 자원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왕실과 조정에서 금림군에게 어떤 압력을 가했을 수도 있고, 왕족이지만 가난했던 금림군이 청나라에 줄을 대기 위해 딸을 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효종은 금림군의 딸을 양녀로 삼고 의순공주[21]로 책봉해 청나라로 보냈다. 물론 청나라에게 효종의 친딸이라며 속인 것은 아니고, 시집 갈 나이의 친딸이 없어서 종친의 딸을 대신 보내는 것으로 공식 합의하였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당시는 병자호란의 상처로 인해 반청 분위기가 대단했기 때문에, 금림군은 "청나라가 지참금조로 보낸 비단을 노리고 딸을 보냈다"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핍박을 당했다. 또한 후에 청나라에서 귀국한 의순공주도 "오랑캐에게 시집가 정조를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오랑캐 친족과 재혼까지 했다"면서 환향녀로 치부하여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금림군이 청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뭔가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금림군에 대한 나쁜 소문은 그를 모욕하던 이들의 악담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금림군의 의도야 어쨌든 간에, 모두가 딸을 보내는 걸 기피해서 조선 조정이 매우 난처해했다가 금림군과 의순공주 덕에 모면한 걸 생각하면, 금림군과 의순공주를 욕했던 자들은 뻔뻔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후 의순공주가 조선에 귀국하자, 금림군은 삭탈 관작 당했다가 이후 복귀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의순공주 또한 공주 직위를 잃었다.
그런데 정작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오자, 도르곤의 눈에 의순공주시녀들의 외모가 매우 빈약(...)해서 조선 측에게 시녀들을 다시 보내라며 불평을 터뜨렸다. 하지만 청나라가 사실상 중국을 평정한 상태에서 그 실권자에게 시집 보내는 여자가 상대방이 화낼 정도로 추녀였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다. 처음에는 의순공주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송골매'라는 별명을 지어줬다는 걸 생각해 보면, 조선을 기 죽이기 위해 트집을 잡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시녀 중 1명을 측복진(양첩)으로 맞이했고, 그 시녀에게서 유일한 딸을 얻었다.
이 혼담이 오갈 당시, 청나라에서는 김자점 등 친청 세력에 대한 숙청, 산성의 축조 등 조선의 반청 정책들에 대해 정면으로 지적하며 조선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이는 도르곤의 청혼을 조선에서 수용하고 이경석 등 일부 대신이 책임질 것을 자청해서 청나라 측이 이를 수용하여 넘어갈 수 있었다. 위에 언급된 도르곤의 불평 때도 겉으로는 이러한 트집을 잡은 뒤 대놓고 "미녀들을 보내면 황부왕(도르곤)이 기뻐하고 무마해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신을 수십 번 보내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서 조선은 이를 수용해야 했다.
도르곤 본인이 제후국 왕실 여자를 구혼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의순공주는 측복진(후실)이 아닌 적복진(정실)임은 물론이고 혼례를 올리자마자 정실 중 으뜸인 대복진이 되었다.
이 때 만약 도르곤이 의순공주와 혼인한 뒤 요절하지 않고 찬탈을 이뤄냈다면 어쨌든 대복진이었던 의순공주는 '''황후'''가 되었을 것인데, 이렇게 되면 조선 왕실의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졌을 것이다. 청나라 법도에 따르면 청나라에서 황후나 태후에 오른 비빈은 친정까지 통째로 정황기 또는 양황기 만주인으로 옮겨 일종의 측근세력을 구성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의순공주는 법적으로 효종의 양녀로써 도르곤과 혼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르곤이 황제에 즉위할 경우 전주 이씨 전체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이성계 이래 효종까지 이어온 왕통 정도는 '정백기 만주 이기야(...)씨'[22] 같은 형태로 팔기에 편입되었을 테고, 효종에게 "님이랑 님들 가족도 이제 전부 만주족ㅋ"이라면서 번왕도 아니고 '친왕'에 봉하는 칙서가 날아왔을 것이다.[23] 그것뿐이겠는가? 만주인도 되었겠다 황제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입조를 요구했을 수도 있고, 변발과 만주족의 복식을 강요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황제 추숭 이후 '황후'로 높여지지는 않은 점은, 역대의 황제 추숭 사례에서 혈연관계도 없는 추존황제의 생존한 부인을 황후로 받든 전례는 없다[24]는 점과 조선과의 난처한 외교관계도 분명 감안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순치제의 성모황태후는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계시니까 의순공주를 '태후'로 모신들 의순공주의 황궁 내에서의 입지는 굉장히 난감했을 것이다. 설령 도르곤이 요절하지 않고 의순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얻었다 해도 순치제의 성모황태후가 살아있는 한 황위 찬탈의 명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 도르곤이 미약한 명분 따위는 아랑곳않고 찬탈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도르곤과 의순공주의 후손들 또한 단순히 조선 왕실과 혈연 관계가 있는 청나라 황족 정도로만 남을 뿐 청나라 황위 계승권을 노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25]
어쨌든 의순공주는 혼례까지 치르고 시녀들을 다시 보내는 등의 소동이 있었으나 불과 7개월 만에 도르곤이 죽는 바람에[26] 어린 과부가 되었다. 이후 도르곤의 시호가 추탈되고 역적으로 규정되자 의순공주는 다른 청나라 황족에게 재가했다가 또 과부가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27], 금림군의 요청으로 조선에 귀국해서 현종 때에 병사했다. 현종 실록(현종 실록 5권, 현종 3년 8월 18일 무오 2번째 기사)에서 금림군의 딸이 사망하자 현종이 상수(喪需, 장례비)를 넉넉히 지급하라는 기록이 있다.
이 과정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상당히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금림군이 도르곤 사후 과부가 된 딸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조선 조정과 사전에 상의 없이, 청나라 조정에 부탁해서 사적으로 환국시켰기 때문이다. 조정에선 "금림군이 나라의 허가도 받지 않고 함부로 귀국시켰다"며 금림군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뒷일에 대한 기록이 중언부언인 걸로 보아 큰 외교적 결례가 되진 않은 듯하다. 의순공주의 귀국에 대해 청나라에서 보낸 문서에서도 '부모 형제와 떨어져서 과부로 혼자 살고 있으니 이를 가엾게 여겨 특별히 돌려보낸다'며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효종실록 16권, 효종 7년 4월 26일 갑술 1번째 기사) 도르곤이 죽은 후 그에 대한 명예를 박탈하는 등의 사후 숙청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한때 도르곤과 혼인했다가 사별한 것 말고는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조선 왕족 여성을 청나라에서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실제로 도르곤이 죽자 정백기 장군들이 그의 친형인 아지거를 섭정왕으로 세우려다가 분노한 순치제와 섭정왕 자리를 잃은 지르갈랑에게 걸려 아지거는 자결하고 장수들은 쳐형되었다.) 그리고 섭정왕 시절 억지로 친모인 아바하이를 추존했는데 신덕왕후처럼 당연히 도로 후궁이 되었고, 도르곤보다 1년 먼저 죽은 도도만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사실 도도도 완전히 화를 피하진 못했다. 도도도 시호를 박탈당했으며 친왕에서 군왕으로 강등되었다.
야사에서는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가기 직전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해서 시신 대신 유품인 족두리를 매장했다고 한다. 물론 의순공주가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분명히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므로, 이런 야사는 당시 민중 사이에 퍼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금림군과 의순공주에 대한 멸시에서 나온 이야기로 추정된다. 의순공주의 묘는 현 의정부시 금오동에 있으며 야사에 따라 '족두리묘'로 불리우고 있다.
도르곤은 의순공주 이외에도 다른 조선인 첩(측복진 이씨 - 이세서의 딸)이 있었는데, 이 조선인 첩이 낳은 여자아이가 도르곤이 남긴 유일한 자녀다. 도르곤에겐 여러 처첩이 있어서 다른 자녀도 몇 명 낳았지만, 조선인 첩 소생의 딸을 제외하면 모두 갓난아이 시절에 죽었다. 대신 동복형제인 도도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지만 사후 그 아들은 다행히 도르곤 사후 화를 입지 않고 살아남는다. 사실 이는 말 그대로 양자라서 무사했던 거라고도 볼 수 있는데, 만약 도르곤이 친아들을 얻었다면 도르곤 본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하는 경우가 아닌 한 도르곤 사후에 그 친아들과 생모까지 숙청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도르곤 본인이 부관참시된 것도 그러한 숙청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도르곤의 장성한 조선인 첩 소생 딸은 말 그대로 딸이라서 황위 계승권과 무관했기 때문에 무사했던 것이다. 비록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도르곤이 친아들을 얻지 못한 게 주변인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위의 각주에 나온 것처럼 대놓고 도르곤의 남계 혈통을 단절시킬 가능성은 희박했을 수도 있겠지만, 도르곤과 의순공주의 친아들이 목숨만 건질 뿐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받으면서 그것이 간접적으로나마 멸족의 원인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격동의 시기였던 청나라 말기의 일이긴 하지만 광서제가 자식을 한 명도 얻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서거한 것은 당시 실권자였던 서태후에 의해 유폐되고 더 나아가 독살당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니, 공식적으로는 숙청에 의해 대가 끊어진 게 아니더라도 비공식적이거나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도르곤의 남계 혈통을 단절시킬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청나라의 황족과 외척 중 정치적 숙청을 당한 이들 대다수는 오삼계급의 대역죄인을 제외하면 적어도 도르곤처럼 비참하게 부관참시되는 일은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무려 창업군주(후금 포함)의 아들이자 창업군주(살아생전에 청나라 황제가 된 첫 군주)의 이복동생이기까지 한 도르곤이 비참하게 부관참시를 당했다는 건 도르곤에게 친아들이 있을 경우 그 친아들도 끝이 영 좋지 않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도르곤이 황위를 찬탈하여 청나라의 황제로 즉위해 조선인 처첩들에게서 얻은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거나 도르곤 본인은 실제 역사처럼 황제가 되지 않은 상태로 죽더라도 도르곤이 살아생전에 조선인 처첩들에게서 얻은 아들이 부친상 이후 아버지인 도르곤의 기반을 이어받아 황제가 되었다면 청나라 황실의 혈통에 조선인의 혈통이 섞인 혼혈 황제가 등극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도르곤이 부관참시된 것은 도르곤이 살아생전에 이것을 염두에 두고 비정상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을 가능성까지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결과적으로 병자호란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조선은 청나라의 입장에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므로, 순치제의 입장에서 도르곤이 의순공주와 결혼한 것은 조선의 힘을 빌려 황권을 위협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28]
도르곤이 아들을 얻기 위해 의순공주와 혼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을 뿐더러 결과적으로 의순공주의 삶을 망친 셈이 되어 도르곤과 의순공주의 혼인이 반면교사로 작용했는지, 청나라 황실 남성이 조선 여인과 혼인하는 일은 이후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29] 그로 인해 도르곤은 조선 왕실의 처음이자 마지막 이민족 부마가 되었다.

5. 창작물에서


  •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 김혁. 지구용사 벡터맨의 베어로 유명한 김혁이 연기했다. 변발을 하고 만주어로 연기했다. 소현세자와 교분이 깊고, 여러모로 소현세자를 아낀다. 소현세자 사후 소현세자의 아이들을 데려가 양자로 받아들여 직접 키우려고 까지 했다.

[A] A B 청 태조 누르하치의 열네 번째 아들로 청 세조 순치제가 추숭했으나 추후에 삭탈 당했다.[1] 만주어로는 ᡥᠣᡧᠣᡳ ᠮᡝᡵᡤᡝᠨ ᠴᡳᠨ ᠸᠠᠩ이라고 쓴다.[2] 소현세자와 동갑내기다.[3] 순치제 섭정[4]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명장 원숭환의 홍이포에 중상을 입고 얼마 뒤 세상을 떴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헛소문일 가능성도 있다. 상식적으로 왕이 부상당했는데 빠르게 본거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몽골을 침입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다만 누르하치에게 '''이 전투가 정신적, 심리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전투'''였던 것은 틀림없다.[5] 울라나라씨를 순장해서 아지거, 도르곤, 도도를 견제하려는 4 버일러(대패륵)들의 정치적인 수였다. 그러나 아무리 유목민의 풍습이라지만 아들을 셋이나 낳고 아직도 아이들 가랑이에 털도 안 난 어미를 순장시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일설에는 만주 최고의 플레이보이(...)로 악명이 자자했던 다이샨이 예전에 계모와 바람이 났듯이 이번에도 울라나라씨와 바람이 났기 때문에 울라나라씨가 억울하다는 항변조차 못하고 순장당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 [6] 누르하치가 후금 건국 직후 임명한 네 명의 팔기군 기주(旗主)를 일컫는 말로, 정홍기를 예하로 둔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 양람기를 관장한 누르하치의 조카로 슈르하치의 차남 아민, 정람기를 손에 쥔 누르하치의 5남 망굴타이, 그리고 정백기주 홍타이지이다. [7] 홍타이지는 한으로 즉위하고 황제를 꿈꾸며 자신의 백기와 도르곤 형제들이 물려받은 황기를 인원은 냅두고 색깔만 맞바꿔버린 일이 있었는데 이를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장은 다른 면으로도 근거가 희박한게, 생전에 누르하치는 도르곤보다 아지거와 도도를 더 아꼈다. 그냥 아지거와 도도가 삼형제 중 홍타이지의 신임이 가장 크고 실력도 입증된 도르곤을 팍팍 밀어주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8] 홍타이지가 아민을 숙청한 후 슈르하치의 아들들 중 자기한테 고분고분한 지르갈랑한테 맡겨버렸다.[9] 누르하치 생전에 쇼토가 명나라로 도망가려다 걸려서 다이샨이 저놈새끼를 죽여버리겠다 노발대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쇼토가 할아버지 누르하치 앞에서 아버지(다이샨)가 새엄마한테 정신 팔려서 형(요토)이랑 나는 조강지처 아들인데 신경도 안 쓴다고 서럽게 울자 누르하치가 반역 혐의는 집어치우고 다이샨을 불러다 집안 관리가 어찌 이리 개판이냐며 호통을 치고는 유폐형에서 금방 풀어줬다. 어쨌든 그 덕에 요토와 쇼토 형제, 그리고 다이샨의 다른 자식들까지도 모두 누르하치의 아바하이 소생 늦둥이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이 형제들은 자신의 동생, 조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어린 삼촌들을 귀여워하며 자랐고, 조선 침공 때에도 도도와 함께 움직였으며, 후일 실력을 기른 도르곤의 세력에 포섭되었다. [10] 도르곤은 자기보다 13세 많은 큰형, 아니 큰조카(...) 요토의 부고를 전하며 세상 서럽게 통곡하길래 홍타이지가 애써 달랬던 적도 있었다. 쇼토 역시 정확한 생년은 불명이나 도르곤보다 최소한 9~11살 연상인 큰형님 뻘이다. 비록 이 처분은 도르곤이 쇼토와 아달리를 독단으로 처단한 것은 아니고, 가족들에게 매정해서 아비한테도 한 소리 들을 정도였던 다이샨의 동의가 있었다고는 하나, 한마디로 말해 도르곤이 자신까지 곤란해질 위기에서 손절하는 꼬리자르기였다. [11] 물론 도르곤이 죽고나서 울라나라씨의 황후 추숭은 무효가 되었다.[12] 만력제의 3남이던 복왕 주상순의 아들로 아버지가 이자성의 난잡아먹히는 동안 도망쳐 복왕위를 이었고 숭정제 사후 황제를 자칭했다.[13] 일본으로 치면 본인은 조선에 비적대적이었지만 임진왜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선의 적이 된 고니시 유키나가소 요시토시와도 비슷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젊은 나이에 죽는 등 끝이 좋지 못했던 것도 도르곤과 비슷한데(도르곤은 요절한 걸로 모자라 아예 부관참시까지 당했음),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는 서군 소속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가 서군이 패하는 바람에 역사의 패자가 되었으며,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직후 참수형에 처해졌고 소 요시토시도 처형만 면했을 뿐이지 47세에 죽어서 당시 기준으로도 천수를 누렸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14] 사실 청나라는 황족 및 외척이라면 정치적 풍파에 휘말리거나 크고 작은 사고를 쳐도 후손까지 '멸족'당하는 예는 오삼계급의 대역죄인이 아니고서는 의외로 드물었다. 당장 누르하치 대에도 누르하치는 장남 추옌이나 동생 슈르하치를 숙청했지만 후예들은 보전하여 철모자왕 작위와 함께 오래오래 대가 이어졌고(추옌의 종갓집은 심지어 옹정 연간 황8자당+천주교입교 콤보의 사망 플래그가 떠서 순교자가 줄을 이었음에도 끝끝내 멸족만은 면했다!), 도르곤에게 숙청당한 호오거의 후손들도 역시 철모자왕 작위가 이어져 카와시마 요시코 등이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니오후루 허션 역시 건륭제가 세상을 떠난 후 추포되었으나 며느리의 읍소 덕에 자신만 자결하는 선에서 자손은 보전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가 죽게 생기자 앓아누운 연귀비에 대해 "연귀비 죽으면 황귀비급으로 장사지내라"고 연귀비가 죽기도 전에(...) 지시할 정도로 무자비했던 숙청의 황제 옹정제가 연갱요의 죄를 장자에게만 연좌시켜 아비 따라 저승에 보냈을 뿐 다른 아들들과 일가족에 대해서는 양황기한군 기적을 말소하고 변방 오지로 쫓아내는 선에서 숙청 작업을 마무리지었던 일이 그나마 청 황제들의 외척 숙청시 가장 '멸족'에 가까웠던 예이다. 그런걸 보면, 도르곤의 장성한 아들들은 모조리 숙청당하고 기록말살까지 당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없었을 가능성도 높다. [15] 청나라 멸망 이후가 아니라 청나라가 한창 전성기였을 때 만주족이 한족으로 신분 세탁을 했다면 주로 그 만주족이 속한 가문이 문자의 옥으로 몰락했던 경우다.[16] 정성공의 막료로 있었다.[17] 효장문황후와 같은 커얼친의 보르지기트 씨였다.[18] 보통 사랑하던 두 사람이 홍타이지에 의해 갈라지게 되었다가(원래 홍타이지가 그녀의 정혼자였다.) 나중에 도르곤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 다시 사랑이 불타오르게 된다는 식이다. 다만 어떤 역사 소설에서는 홍타이지 사후 효장문황후의 아들 푸린이 황제 자리에 원만하게 오르기 위해 도르곤을 이용했다는 식으로 쓰이기도 했다.[19] 본인도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했으니 당연하다. 게다가 병자호란 이후의 환향녀 문제를 생각하면 조선 왕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인들 모두 자신들의 여성 친족이 청나라 만주족 남성과 혼인한다는 것 자체를 싫어했을 것이다.[20] 성종의 8남인 익양군(益陽君) 이회의 후손이라고 한다.[21] 義順公主. "의롭게 순응했다" 하여 효종이 내린 이름이다. 이름은 이애숙.[22] 실제로는 '리기야'라고 불린다. 이렇게 만주 씨족으로 등록된 사례도 실제로 있었다.[23] 보통 버이서, 버이러, 군왕, 친왕 등의 작위는 그냥 만주족 아무개도 아니고 황족 중에서만 임명되었지만, 홍타이지가 차하르부 복속 후 에제이 칸을 비롯한 몽골의 고위 왕공들을 친왕에 봉하여 황족 대접을 했듯 청이 직접 복속한 적국의 군주에 대해서는 예외가 충분히 있을 수 있었으며, 더욱이 정축하성 당시 홍타이지는 실제로 삼궤구고두례를 마친 인조를 자기가 데려온 친왕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히는등 높은 격식의 의전을 제공했다. 물론 이것도 도르곤이 황제 대 제후왕의 예로서 존중을 해줬을거란 말이지 조선 입장에서는 경술국치가 260년 빨리 다가오는 셈이니 국치 중의 국치였겠지만. [24] 조광윤은 추존황제인 아버지의 부인이자 자신의 생모인 소헌태후 두씨를 태후로서 모셨지만 이는 두씨가 자신의 생모이자 적모였기 때문이지 추존황제의 부인이라 황후로 받든 것은 아니었다.[25] 조선의 성종제안대군이나 월산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의 쿠데타를 겪지 않고 38세까지 무사히 왕으로 살아간 것도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살아서 수렴청정을 했기 때문이다.[26] 2차로 보낼 예정이던 시녀들은 도르곤의 사망으로 인해 다시 귀국했다.[27] 이 재가 상대가 누구였느냐에 있어 각국 기록들이 제각기 다르다. 심지어 효종실록에서도 말이 왔다갔다 한다. 일단 청사고의 생몰년도 기록을 보면 누르하치의 7남 요여민군왕 아바타이의 3남이자 도르곤의 부하로서 전공을 세워 친왕에 책봉된 단중친왕(端重亲王) 보로가 유력하다. [28]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은 군사력이 약했다기보다 결정적인 순간에 일어난 불행으로 인해 패배한 것에 가깝다. 광교산 전투 등 조선군이 승리한 전투가 의외로 존재했다는 게 그 증거이며,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가 조선군을 자신들의 중원 정복과 나선정벌에 강제로 끌어들인 것도 이들이 조선군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군이 청나라 방계 황족의 쿠데타에 이용된다는 것 자체가 청나라 황실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었을 텐데, 도르곤이 의순공주와 결혼하여 조선 왕실의 부마가 된 것은 변수에 따라 도르곤이 조선 왕실의 지원을 받아 자기 의지대로 조선군을 이용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그 점에서 더더욱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정말로 도르곤이 조선의 힘을 빌려 황위 찬탈에 성공했다면 홍타이지는 조선의 입장에서 사후에나마 병자호란의 업보를 치른 셈이 되었을 것이다. 해당 대체역사에서는 홍타이지가 패배시킨 조선군이 아이러니하게도 홍타이지의 직계 황통을 단절시키는 데 기여하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동치제가 자녀 없이 요절하여 청 황실 직계가 단절되고, 만주족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한 걸로 모자라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사라질 뻔한 처지가 된 근현대사를 감안하면 실제로도 충분히 업보를 치렀다고 볼 수 있지만...[29] 건륭제의 후궁 숙가황귀비 긴기야씨는 혈통상 조선계였지만 호적은 정황기의 만주인 포의 신분이라서 법적으로는 만주족으로 대우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