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 수용소
价川 收容所 / 价川 第十四號 管理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1. 개요
정식 명칭은 개천 정치범 수용소. 북한 내에서 불리는 정식 명칭은 제14호 관리소이다. 참고로 요덕 정치범 수용소의 정식 명칭은 제15호 관리소. 참고로 개천 교화소랑은 다른 곳으로 그곳은 1호 '''교화소'''이다. 이둘은 20km정도 떨어져 있다.
2. 상세
혁명화 구역이 존재하는 요덕 수용소, 북창 수용소와는 달리 이곳은 철저한 '''완전통제구역'''. '''석방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다.[5]
대건선 외동역 인근에 있으며 대동강이 수용소 남쪽을 가로막고 산이 수용소 북쪽을 가로막고 있다. 개천시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넓이 155㎢, 수용인원 1만 5천 명.[6] 출처 이 155㎢라는 면적이 '''서울특별시의 1/4'''이며 개천시 전체의 면적의 1/5 수준이기 때문에 사실 신뢰하기에는 충분히 무리가 갈 만한 수치지만 독일의 슈피겔 지에서 위성 사진으로 표시한 화성 수용소의 충격적인 넓이를 보면(자세한 건 해당 항목 참고) 이 넓이가 신뢰할 만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동강이 있기 때문에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18호 수용소인 북창 수용소와는 직선거리상으로만 놓고 보면 불과 3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 이유는 수용소의 분리작업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수용소 인근에서 대동강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대건선의 철교를 건너는 것 뿐이다. '''그쪽에도 수용소가 하나 있다는 문제만 빼면'''.[7]
장진호 전투에서 포로가 된 미군이나 영국군도 이곳에 수용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하지만[8] 한국전쟁 당시 포로 관리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 51년부터 포로 관리는 100% 중국군에 이관되었다. 이미 20명 이상의 자발적 미송환자를 확보한 중국의 뜻을 어기고 북한이 임의로 수십년 동안 미국인 포로를 억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9]
오히려 월북 미군이나 석연찮은 이유로 외국에서 실종 납치된 외국인이 여기에 들어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80년대 월북한 미군의 경우 다른 월북미군과는 달리 대외 활동도 없었으며 미국의 가족들에게 '''대동강에서 수영하다 죽었다'''는 통보와 함께 유해나 묘지사진도 없이 처리된 경우도 있는걸 보면...
출처 김용이 탈북에 성공한 후 인터뷰한 기사. 탈북 가수 김용과는 동명이인이다. 단 그가 탈북에 성공한 것은 이곳과 대동강을 마주 보고 있는 18호 관리소로 이송된 덕분.
링크를 따라가면 여러 가지 충격적인 일화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고 처절한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체육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농구 선수가 있는데 아버지가 지주였던지라 이 수용소로 들어오게 되었다. 수용소의 참상은 정치범수용소/북한 항목에 나와 있으니 잘 알겠지만 먹을 것이 극도로 부족한데 이 농구 선수가 소 꼬리로 만든 채찍을 물에 삶아서 먹었다. 그러자 열 받은 감시관이 죽도록 매질하고 변소에서 회충을 억지로 먹인 것. 결국 그는 3일 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신동혁이 쓴 <북한 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 세상 밖으로 나오다>라는 책 역시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동혁 항목에 보충된 것처럼 신동혁은 실제로는 개천 수용소 인근이지만 덜 가혹한 북창 수용소(18호 관리소)에 수감되었었으며, 개천 수용소에 대한 그의 증언 일부가 심하게 과장되었음을 본인이 시인하였다. 이후로도 14호 수용소 출신이라고 했다가 다시 18호 수용소 출신이라고 하는 등 주장이 계속 바뀌고, 다른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인해 거짓말이 여럿 드러나면서 현재로서는 거의 신빙성을 잃고 있는 상황이다. 탈북자 출신인 주성하 기자는 칼럼에서 그가 일반적인 수감자가 아니라 해제민 출신으로 보았다[10] . 해제민이란 형기를 다 살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계층을 말하는 것으로 일단 죄수가 아니기에 수감자보다는 훨씬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016년에 사격장과 양식장을 설치하는 등 시설을 확장하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했다. #
영문 이름이 Internment Camp라고 되어 있는데 Intern에는 '인턴으로 일하다'라는 뜻과 '억류, 구금되다'라는 뜻이 있다.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
2.1. 참고 링크
[1] internment를 쓰는 이유는 개천교화소가 있기 때문이다.[2] 최근에는 수용소를 확장한다는 의혹이 있다.[3] 광복 당시엔 고사산이라 불리우기도 했다.[4] 중리, 오봉리[5] 완전통제구역은 처음부터 '''수용자를 가둬두고 착취하다가 죽일 목적'''으로 만들어진 나치나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와 동일한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 수감된 사람은 처음부터 짜낼 수 있을 때까지 짜낸 다음 죽도록 방치해두는 노예로 취급되며 이는 수감된 경우와 현지에서 태어난 경우 모두 동일하다[6] 5만 명이란 설도 있는데 산악지대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무리가 있다.[7] 북창 수용소의 경우 본래 완전통제구역으로 여겨졌으나 이곳에서 석방된 뒤 탈북, 한국에 온 김혜숙은 이곳이 혁명화구역이라고 주장한다. 완전통제구역일 경우 신동혁처럼 기적적인 탈출 또는 김씨일가의 아주 특별한 사면 조치 외에는 살 길이 전혀 없기 때문에 증언이 맞다면 석방되어 나온 만큼 혁명화구역이 아니라고 보기도 어렵다. 참고로 북창 수용소는 2013년 미국 북한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 해체되었다고 결론이 났지만, 2016년 다시 개장한 상태이다.[8] 증언 당사자도 직접 보거나 이야기 한게 아니라 그냥 풍문으로 들은것[9] 물론 한국전쟁 전후로 극동에서 격추된 후에 석연찮은 이유로 미귀환한 조종사들은 많다. 이들 대부분은 러시아에서 억류되었다는 의혹과 증거가 있다.[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