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포로수용소
1. 개요
영어 : '''Kŏje[2] P.O.W.[3] Camp'''
거제 포로수용소는 6.25 전쟁 중에 붙잡은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세워진 수용소다. 전쟁 기간 동안 전국에 세워졌던 수용소 중에 거제 포로수용소가 가장 규모가 컸으며 17만명이 넘게 수용되었다.
최근 전쟁과 인권을 주제로 한 역사적 기록으로서 보존가치가 있다는 점이 중시되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2. 상세
1951년 2월 독봉산을 사이에 둔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과 수양동 주변으로[4] 설치해, 1953년 7월까지 운영됐다. 북한군 15만, 중공군 2만, 여자포로 300명이 수용되었다. 당시 참전했던 미군들 중에서 종군기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중 카메라를 들고 와서 거제도 일대를 찍고 간 사람들이 있어 1950년대 거제 일대 사진들이 많이 남아 있다.# #
거제는 육지와 가까워 포로를 수송하기 수월하면서도, 거제대교가 지어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오로지 배 밖에 없어 포로를 격리 수용하기에 적합한데다 가장 후방에 있어 전쟁 와중에도 그나마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에[5] 이곳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포로들을 데려올 땐 배에 태워서 지금의 장평동 일대에 정박했었다.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반공 포로와[6] 친북 성향을 포기하지 않은 친공 포로 간 반목이 큰 문제였는데 이로 인해 결국엔 유혈사태가 터진다. 휴전협정 기간 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이 이루어졌지만 거제 포로수용소는 반공포로 석방이 없었다.
이는 포로들간의 대립이 폭발하여 1952년 5월 7일에 친공 포로들의 수장인 이학구가[7] 주도하는 폭동이 터져서[8] 수용소장인 미합중국 육군 준장 프랜시스 도드 장군을 납치하고[9] 등 대규모 유혈사태가 나면서 미군이 진압한다음[10] 35,000여 명의 반공포로들을 미리 다른 수용소로 이동시켰기 때문이다.[11] 또 반공포로를 분리시키면서 일부는 구역만 바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여전히 남아있었고 새로 생겨나기도 했지만 다른 지역의 수용소에 비해 유엔군의 경계가 삼엄했고 섬이라 탈출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후 휴전이 이루어지면서 이곳에 있던 친공 포로들은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남아있던 반공 포로들은 한국인으로 귀순했다. #
지금은 대부분 철거됐으나 곳곳에 몇몇 유적들이 남아있다. 거제시에서는 남은 유적 자리에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만들어 운영 중이며, 거제시의 관광지 중 하나다. 테마공원+6.25 전쟁 박물관+모노레일 관광을 결합한 공원으로 보인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공간적 배경이며,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도 나온다. 2018년 겨울 영화 스윙키즈에서도 배경으로 쓰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 존재가 알려졌다.
3. 관련 문서
[1] 파란색과 빨간색은 각각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성향의 포로들이 각각 장악한 캠프이다. 회색은 경비 임무를 맡은 부대의 시설들.[2]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 이렇게 표기된다.[3] Prisoner Of War 전쟁포로라는 뜻의 영어다.[4] 당시 (통영군)거제군 고현리, 수월리, 양정리[5] 한국군이 가장 밀렸던 낙동강 전선 때도 거제는 본격적인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이북, 중부지방, 호남 등 전국 피난민들도 부산, 김해와 함께 거제로 많이 피난을 왔다. 흥남철수로 탈출한 북한 피란민 10만명과 그 외 지역에서 탈출한 북한 피란민 5만명을 수용한 곳도 거제도였다.[6] 북한 정권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지만 그냥 북부지방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민군에 징집당한 사람들도 많았다.[7] 북한군 대좌(한국으로 치면 대령)로 춘천 전투의 패배로 인해 참모장으로 좌천되었는데 상관인 사단장 최용진 소장과의 불화가 커서 그의 팔을 권총으로 쏘고 도주하여 미군에 항복했다. 이학구는 한국으로 귀순하려 했으나 미군이 그에게서 정보만 받고는 포로수용소로 보내버려 사실상 버림받았고, 한국 정부도 그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에 대한 불만이 커져 친공 포로들의 수장이 되어 폭동을 주도했다. 특히 수용소의 친공 포로들중에서 이학구가 가장 계급이 높았고 고위 지휘관인터라 지도력과 인품이 있어(수용소의 포로들은 이학구가 공산주의자인것을 제외하면 인품이 훙륭하다고 평가했다.) 수장이 되기 쉬웠다. 이학구는 포로들의 폭동을 4번이나 주도하여 일으켰다가 미군에게 제압당하여 감시당하다가 휴전이 되고 나서 북한군에 포로가 된 미군의 장군 윌리엄 딘 소장과의 포로교환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상관을 쏘고 도주하여 항복한 것 때문에 북한에서 멸시와 푸대접만 받았고 결국 1963년에 권총으로 자살한다.[8] 특히 포로들은 미군 몰래 사제 무기까지 대량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치밀했다.[9] 도드 준장은 6월 10일에 콜슨 준장이 이학구와 친공 포로들의 요구를 듣어주는 조건으로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해 도드와 콜슨은 징계를 받아 대령으로 강등된다.[10] 1천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총으로 발포하며 최루탄과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해서 진압했다. 이때 친공 포로들을 증오하는 반공 포로들도 미군을 도와서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친공 포로들의 사상자가 더 커졌다.[11] 왜냐면 친공 포로들이 반공 포로들을 공격해서 106명이 살해도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