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포로 석방 사건

 

1. 개요
2. 사건의 배경
3. 사건의 전개
4. 반응
4.1. 미국
4.2. 영국
4.3. 중국
4.4. 반공포로
5. 사건 이후
6. 관련 문서


1. 개요


6.25 전쟁의 휴전협정이 진행중이던 1953년 6월 18일,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북한 출신 반공포로를 석방한 사건이다.[1]
미국은 한국전쟁 휴전을 맺으려고 했으나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고 있었고 아무런 안전보장 장치 없이 휴전이 이루어지면 이후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이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다.
이 일 이후 이승만은 미국에게 휴전협정 전 안전보장 약속을 해 줄 것을 요구했고 실제로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보름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2. 사건의 배경


1951년 이후 6.25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UN군 측과 공산군 측 사이의 휴전 논의가 이어졌으나 좀처럼 결론이 나질 않은 채 교전과 휴전 협상이 오랫동안 병행하게 되었다. 이 때 협상 내용 중 큰 문제점으로 떠오른 사항이 있었는데 바로 전쟁 포로 송환 문제였다. 포로를 송환할 때 단순 국적에 따라 일괄적으로 본국에 보낼 것인지, 아니면 포로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선택권을 줄 것인지 두고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런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6.25 전쟁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이 충돌한 이념 전쟁이었고, 국가 사이의 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의 성격도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은 거제 포로수용소에 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등 17만에 달하는 적군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으나 실상 미군과 한국군은 외부에서 식량만 공급하고 있을뿐 포로수용소 내부는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천명 단위로 수용된 개별 수용소 안쪽은 사실상 무법천지로 포로조직을 중심으로 사상 교육과 인민군 군사 훈련까지 행해지고 있었고, 공산포로들은 다수의 반공 포로들에게 테러와 고문, 살해 등을 통한 회유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심지어 1952년 5월 7일 수용소장인 도드 미 육군 준장을 납치해 인질로 삼고 일괄 북송을 요구하는 폭동을 일으켰을 정도였으며 당시 공산포로에게 반공포로 105명이 살해되었다. 이후 조사를 거쳐 주로 반공포로들이 거제도 밖의 수용소에 배치되고 거제도에는 대부분 공산포로만 남게 되었다.[2]또한 UN군은 제3국을 경유해 자유 선택에 따른 북송을 추진했으나 북송을 원하지 않았던 반공포로들은 강제송환을 우려해서 몸에 태극기를 문신으로 새기고 혈서를 써서 몸에 지니는 등 북송 후 처형을 각오하는 결기를 보였다.
양측의 주장이 대립하긴 하였지만 한 가지 공통된 생각이 있었으니, 바로 공산군 포로 중 공산주의 국가에 송환되는 것을 반대하는 '반공 포로'의 수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였다는 점이다. 이게 문제가 된 건 남한에서 강제로 입대한 북한군이 상당히 많았고, 당장 공산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과 북한에서 내심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가 징집되어서 포로가 된 뒤 반공주의를 드러낸 사례도 적지 않았다.
당시 중국소련, 북한 등은 만약 포로 개개인에게 송환국의 선택권을 줄 경우 포로 중 공산주의를 버리고 남한 등 상대편으로 전향해 버릴 포로들이 대거 등장할 것을 우려했고 이를 막기 위해 일괄적으로 포로를 송환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반면 UN군 측에서는 개개인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자유 송환을 주장하였다. UN군 병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미국, 영국 등은 자국 포로 중 공산주의 측으로 전향할 포로들의 수가 극히 적을 것이라고 자신하였고, 공산포로에게 선택권을 줌으로써 자본주의 진영으로 전향하는 인원을 늘리고, 자신들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국가'임을 선전하고 공산주의 진영에게 정치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3]
1953년 6월, 지루한 협상 끝에 포로 송환 문제가 일단락되었는데, 송환 절차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1차로 자국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을 송환한 다음, 양측 대표단이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에게 방문해 자국 송환을 권유하게 하고, 그럼에도 송환을 거부할 경우 중립국에 이송한 다음 그곳에서 포로 개개인의 의사를 수용하도록 하였다. 자국 송환을 권유하는 과정은 최인훈의 소설인 '광장'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 유명한 '중립국' 대사가 이것이다.
이승만은 이에 반대하며 모든 반공포로들은 일괄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포로들이 공산 측의 위협에 노출되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북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이승만의 계산도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미국은 휴전 후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경제적 지원 여부에 대해 어느 정도 약속은 있었으나 확약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휴전 협정에 참여하지 못한 남한은 UN군의 휴전회담을 파기시킬 영향력이 없었다. 혹은 유엔 측의 일방적인 휴전 진행에 항의하여 일부러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한 것은 UN군 힘으로 전쟁을 유지하여 북한 정권을 소멸 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통일도 못한 채로 죽음과 파괴만 남길 것이라고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휴전 협정에 절대 반대하는 서한도 여러차례 보냈다. 이는 한국군만이라도 단독으로 북진하겠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따라서 당시 이승만은 UN군, 특히 그 대표국인 미국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선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었고 그 카드가 바로 반공 포로의 석방이었다. 반공포로 석방 후 일주일 후에는 가인 김병로 등을 포함한 입법부/사법부/행정부 각료와 함께 6.25 북진통일의 날 국민대회까지 열었다.
미국의 지원 자체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미 예정된 상태였다. 다만 6.25 전쟁 이후 북한 정권의 소멸과 멸공통일의 목적을 포함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발표 시기에 대한 문제가 있었는데, 미국은 휴전협정 이후 체결/발표할 예정이었고 이승만은 휴전협정 후 UN군이 철군하고서 미국이 약속을 어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휴전협정서 체결 이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청했다.

3. 사건의 전개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기해 대한민국 육군 헌병사령부 주도로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군에 의한 반공 포로 석방이 강행되었다. 당시 작전 통제권이 미군으로 넘어간 다른 부대와는 달리, 육군 헌병사령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었다. '포로 석방'이란 이름 때문에 단순히 수용소 문을 열고 포로들을 풀어준 한낮의 평화적인 행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전국 각지의 수용소에서 일어난 '''한밤중의 대탈주극'''이었다.
당시 포로의 수용과 감시는 UN군 측에서 맡고 있었고 당연히 UN군은 포로들을 수용소에 얌전히 가둬 둘 의무가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은 UN군과 사전 동의가 없는 대한민국 정부 측의 일방적인 석방 행위였으므로, 그 과정은 사전에 몰래 언질을 받은 반공포로들이 일제히 포로 수용소를 탈출해 이를 대놓고 돕는 한국군과 한국 경찰, 그리고 이에 협조하는 민간인들의 보호를 받아 도망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포로들은 한국군과 한국 경찰이 미리 나가라고 뚫어준 전기 철조망을 통해 탈출한 뒤 민간인으로 위장해 전국에 골고루 분산되었다. 한국군이 미군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포로들을 탈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에도 미8군 사령부는 미군 방송으로 반공포로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였는데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전신)에선 외국 기관(미군) 말 듣지 말라고 방송에서 말하면서, 아군 방송끼리 싸우는 희귀한 장면이 연출됐다.
6월 18일부터 약 5일 동안 35,400명의 반공 포로 중 약 26,900여 명이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탈출 도중에 어찌됐건 포로수용 책임이 있는 UN군의 사격으로 인해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당했다. 나머지 8,200여 명은 미처 석방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UN군의 진압 등으로 인해 수용소에 잔류하였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이 소식을 면도 중에 듣고 얼굴이 베였다고 한다.

4. 반응



4.1. 미국


이 석방 사건으로 인해 UN군 측, 특히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 정부 안에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한국 국민들과 한국 군부의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상당하여 섣불리 제거하기는 힘들었고, 이 행동이 단지 동맹국에 대한 이승만의 의지 표출이라는 것과 이승만이 반미주의자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서 제거 논의는 취소되었다. 이승만 암살 계획(에버 레디 플랜)이후 그를 대체할 자로 장면백선엽도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은 우방을 잃는 대신 적을 하나 얻었다"라고 말했다. 훗날 자신의 8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자다가 일어난 것은 그때가 유일하다고 회고했다. 아이젠하워는 일본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동맹국이 한국에서 퇴군했을 것이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미 국무장관 델레스는 "등에 칼 꽂는 짓"이라고 비난했고, UN군 사령관 클라크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지옥문이 열렸다"라고 말했으며,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대재앙'이라고 비판했다.
다만 공산권 측의 의도에 반대해 일으킨 사건임이 명백했으므로 나름의 반공 명분이 있었고, 미국의 높으신 분들이 전부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미8군사령관을 역임했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훗날 인터뷰에서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 대통령이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4.2. 영국


영국윈스턴 처칠은 이승만을 '배신자'라고 까지 말하며 극단적인 비판을 했다. 나아가 비밀리에 이승만을 즉각 구속하거나 대통령직에서 쫓아내야한다고 미국 정부에 요청까지 했다.[출처][4] 참고로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복구 사업이 한창 중이었고, 미국에게 진 부채를 감당하느라 바빴다. 없는 살림 쪼개서 6.25전쟁에 파병 규모 2위로 참전한 것도 미국의 마셜 플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참전한 것이었다.

4.3. 중국


중국은 신문을 통해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국제법 위반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고 석방된 포로만큼 한국군을 죽여야된다며 전방에서 많은 폭탄을 투하하는 등 분노를 표출했다.
그와 동시에 이승만의 독단적 결정임을 인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문구를 삽입하여 UN과 휴전협상을 계속한다.

4.4. 반공포로


이 사건이 당시에 국제사회에선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풀려난 반공포로 장본인들은 당연히 이승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반응이 많았다. 북한에 가기 싫은데 강제로 북한에 보내질 상황에 처해있던 것을 이승만이 밀어붙인 이 사건으로 구사일생한 셈이기 때문. 논산시 관촉사 입구에는 1965년에 세워진 이승만의 추모비가 있다. 당시 논산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이때 풀려난 이들 중 일부가 이승만이 사망하자 이곳에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정부에서도 이들에게 충성심을 보장받겠다며 한국군 입대를 요구하기도 했다.
다만 반공포로에 대한 전후 처우가 나중에 문제가 됐는데, 이들에게 충성심을 보장받겠다며 한국군 입대를 요구한 것은 그렇다 쳐도 이후에도 위험 인물로 간주하여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국내의 반발을 샀다. 이는 송환된 한국군 포로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용초도에서 사상 검증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자살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혐의를 벗은 귀환 포로들도 대부분 한직을 전전하는 등 불이익을 받아 2000년대 초에 사회 문제로 방송에서 다루기도 했다.

5. 사건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으려는 시도 자체는 이 사건 이전에도 계속 있었다. 물론 한국측의 요구였을 뿐 미국은 '휴전 이후 긍정적으로 논의해보자'는 정도였으며 명시적인 확답은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상호방위조약 대신 16개 유엔 참전국들 명의로 '확대제재선언'을 공포하고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켜 주는 것으로 무마하려 하였다. 미국 내부 정책은 한국에서 철수하는 쪽에 가까웠고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고 쳐도 한국 정부가 뭔가 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하다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것은 자명했기에 이승만 입장에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없이 휴전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휴전 이후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었다.
실제로도 국제 관계에서 구두약속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일례로 미국의 헨리 키신저는 남베트남에게 유사시 즉각적인 군사 지원을 구두로 약속하며 파리 평화 회의에 서명하게 했지만, 남베트남의 멸망할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다.[5]
당시 이승만은 휴전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만약 전쟁이 통일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이상태로 아무런 안전보장 장치도 없는 상황에서 휴전협정 후 미국이 빠지게되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자신이 맘먹으면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서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다. 미국이 결국 내부 정책을 바꿔 한국을 적극 지키는 쪽으로 선회했으니 도박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도 남한을 포기해 버린다면 UN군의 희생을 헛되게 만드는 격이기 때문에 남한을 애써 지켜놓고 다시 줘버리는 것은 미국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을 뿐더러 상호방위조약을 맺음으로서 남한을 포기할 의지가 없음을 남한 정부에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 외에도 '전작권을 환수하겠다', '휴전협정 이후 한국군을 군사분계선 2km 이남으로의 후퇴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등의 강수를 두며 미국 측의 안전보장을 압박했다. 결국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보름전인 1953년 7월 12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같은해 10월 1일에 실제 조약이 맺어졌다.
반공포로 석방 당시 탈주하지 못했거나, 남한 잔류(혹은 대만행)가 아닌 중립국행을 희망한 이들은 휴전과 포로 교환이 이루어진 후 비무장지대에 진주한 인도군에 인계되어 공산군의 설득 작업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설득이라는 게 말이 설득이지 온갖 강압과 협박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반공포로가 설득이라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늘어놓는 공산군 군관과 설전을 벌이는 장면을 촬영한 기록 사진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탈주를 시도하다 인도군에게 사살된 사람들도 있었다. 중립을 지켜야 할 인도군들은 반공포로들에게 북한행을 은연중에 강요했고 심지어 위원장조차 포로들에게 북한행을 권유했다. 또한 반공포로를 본인 의사에 상관없이 강제 북송한 일까지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참고로 이승만 정부는 인도가 친공적이라 하여 인도군의 영토 통과를 거부했고, 인도군은 별 수 없이 육로로 이동하지 못하고 미군이 제공한 헬기를 타고 여러 차례로 나눠서 비무장지대로 들어가야 했다. 당시 인도는 제3세계 일원이긴 했으나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에 우호적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포로에 관련된 협약을 깨버렸기 때문에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하여 북측에 사로잡힌 국군 포로들을 송환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사건 이전에도 북한은 상습적으로 국군 포로들을 강제 전향시켜 북한군에 편입시키거나(#) 고의적으로 통보 명단에서 누락시키거나 남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포로들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시범 케이스로 살해해 다른 포로들을 강제로 북한에 눌러 앉히는 등의 짓거리를 계속하고 있었으므로(#)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해 생긴 영향은 거의 없었다. 가장 나쁘게 말해도 그놈이 그놈이었던 셈이다.
북한의 위협과 인도의 강요에 반강제로 뜻을 굽히고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소수 있었지만, 공산군과 인도군의 회유에도 입장을 번복하지 않은 반공포로들은 다시 UN군에 인계되어 1954년 1월에 공식적으로 석방되었고, 북한 출신들은 남한 각지에 정착하였다. 중공군 출신들은 대부분 대만으로 갔으며, 일부는 대만에도 가지 않고 남한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지조를 지키며 본토로 돌아간 중공군들은 영웅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전쟁에서 지고 온 반동이라며 비판을 받았다.
또한 1953년 6월 당시 중공군은 중부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금성 돌출부의 장악을 목적으로 대규모 공세를 가하였는데 전선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했으나 일부 영토를 점령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만족한 중공군은 이 상태에서 전쟁을 끝내려고 했으나 며칠 후 이승만이 터트린 반공포로 석방 때문에 이 승리가 전부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중공군은 휴전에 반대하는 한국군에게 최종적인 패배를 안기고 휴전 이후 중부 전선에서 대치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금성 돌출부와 남쪽의 화천 저수지를 목표로 1953년 7월 13일, 5개 군, 2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춘계 공세 이후 최대 규모의 대공세를 감행한다.

6. 관련 문서



[1] 남한 출신 반공포로들은 늦어도 1952년까지 모두 석방되었다.[2] 이 과정에서 포로들을 1~2백명 단위의 소그룹으로 분산해서 수용하면서 수용소 내부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3] 물론 UN군 포로 중 공산주의 측으로 전향하는 포로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공산군 측에서 포로 감시를 맡은 중공군이 매우 교묘한 형태의 선전 활동을 벌였고, 여기에 설득되어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극소수의 UN군 포로들이 있었다.[출처] 김창훈, 한국외교 어제와 오늘(다락원 2002) 60[4] 정작 이승만은 처칠의 비난에 대해 "그 늙은이는 아편전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이라고 비웃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35~36쪽[5] 다만 당시 미국 내 반전 분위기 때문에 베트남판 상호방위조약 같은 걸 추진했어도 의회에서 통과될 리 없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