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왕후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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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추존 황후'''
'''神貞翼皇后 | 신정익황후'''

'''조선 추존 왕비'''
'''神貞王后 | 신정왕후'''

신정왕후 조씨의 추정 초상화[1]
존호 · 휘호 · 시호 [ 펼치기 · 접기 ]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신정익왕후
(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神貞翼皇后)
<colbgcolor=#bf1400> '''존호'''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
(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
'''휘호'''
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
(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
'''[[시호|{{{#ffd400 시호
]]'''
신정왕후(神貞王后)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출생'''
1808년 12월 6일 (음력 10월 19일)
조선 두포 쌍호정 사저
'''사망'''
1890년 4월 17일 (음력 2월 28일)
(향년 83세)
조선 한성부 경복궁 흥복전
'''능묘'''
수릉(綏陵)
'''재위'''
'''조선 왕세자빈'''
1819년 ~ 1830년
'''조선 왕대비'''
1834년 ~ 1857년
'''조선 대왕대비'''
1857년 ~ 1890년
1. 개요
2. 일생
3. 기타
4. 미디어에서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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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神貞王后 趙氏 / 神貞翼皇后 趙氏
(1808-1890)
조선의 추존왕 문조(효명세자)의 비이자 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 헌종의 어머니이자 순조순원왕후의 며느리. 조선 말 '다섯 전하' 중에 가장 서열이 높았던 인물이다.[* 익종비(효명세자빈) 신정왕후, 헌종비 효정왕후, 철종비 철인왕후, 고종, 고종비 명성황후.
한국근현대사에서 흔히 말하는 ''''조 대비''''가 이 사람이다. 대비로서의 공식 명칭은 효유대왕대비(孝裕大王大妃)지만, 후대에는 '조 대비'가 통칭으로 굳어졌다[2]. 세도정치 시기, 풍양 조씨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잘 알려져 있다.[3]

2. 일생


풍은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송씨의 딸로 태어나서 순조 19년(1819년)에 왕세자빈이 되었다. 하지만 순조 30년(1830년)에 남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중 승하하고, 4년 후 시아버지 순조도 승하함에 따라, 8세 밖에 안 된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른다. 남편이 왕이 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중전이 되지는 못했지만, 헌종이 아버지를 추숭함에 따라 어머니인 그녀도 대비가 되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시어머니인 순원왕후(명경대비)만큼은 아니지만, 대비이자 왕의 생모로서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겼기에, 그녀의 친정 가문인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만큼은 아니지만 세도 정치 기간 동안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 어떤 면에선 소혜왕후(인수대비)와 비슷한 케이스. 하지만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그동안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적대하거나 압도한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안동 김씨의 천하가 된 철종 연간에도 헌종이 총애한 조병헌을 제외한 풍양 조씨들이 안동 김씨 정권에 의해 해코지 당한 적이 없으며, 안동 김씨가 사실상 만든 헌종실록이나 철종실록에도 조인영, 조만영 등 풍양 조씨 인물들이 우호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두 가문이 적대적인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849년에 헌종이 후사없이 갑작스럽게 이른 나이에 승하하자, 시어머니인 순원왕후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나무를 케던 강화도령 철종, 즉 이원범을 왕위에 올린다. 드라마나 소설 등을 보면 이 사건을 신정왕후가 순원왕후와 어찌저찌 붙어보려다가 선수를 빼앗겨 후일을 도모해야 했던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 시대에 그것도 왕실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개기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가?[4] 이는 조선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황당한 추측이라 하겠다. 게다가 헌종 승하시 영조의 후손은 전계군 이광의 아들인 철종밖에 남지 않았다.[5] 영조의 후손 다음으로 계승권이 가까운 사람은 인조 대까지 올라가야 했다. 야사에서 철종 대신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경원군 이하전은 오히려 덕흥대원군 대에서 갈라져서 철종보다 더 계승권 순위가 낮았으며, 흥선군 이하응 본인 역시 오히려 철종보다 순위가 낮았다.
1857년에 시어머니인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로서 왕실의 최고 어른[6]이 된다. 1863년에 철종도 후사 없이 승하하자 신정왕후가 차기 국왕을 선정할 권한을 갖게 된다. 이 때 옥새를 확보한 안동 김씨[7][8]에 맞서 기민하게 대처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애초에 교지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신정왕후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다만 그녀가 지명한 차기 국왕이 하필이면 흥선군의 차남 재황인 걸 보면 정황상 흥선군과 그녀 사이에 차기 국왕 자리를 놓고 커넥션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록에는 이들의 커넥션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야사도 그렇고 몇몇 정황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13] 어쨌거나 흥선군의 아들인 이재황익종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즉위시켰다.
이후 고종의 법적인 어머니로서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3년 후에 고종이 15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났다.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주고 물러났다는 말도 있는데,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가 대원군에게 전권을 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명목상으로는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면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대원군의 막후 정치가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다만 아주 물러난 것은 아니고 여전히 흥선대원군이 신정왕후와 의논하여 새 개혁 정책을 짜면 고종의 입을 빌리거나 비망기를 내리는 형식으로 여전히 조정의 권력의 한 축이었고, 어찌보면 대원군의 개혁 파트너로 해석할 수도 있다[14]. 그러나 자신의 친정에게 주려는 특혜에 반대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신정왕후가 자신의 친정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조건적으로 키우려고 한 게 아닐 가능성이 크고,[15] 왕실의 법도를 보면 왕실의 최고 어른인 그녀의 뜻을 거스르고 대원군이 왕의 생부란 이유로 며느리를 멋대로 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에 가깝다.[16] 왕의 결혼은 대비를 포함한 내전의 뜻이 최우선이기 때문. 만약 진짜로 대원군이 신정왕후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외가 쪽 친척인 명성황후 민씨를 밀었다면 오히려 이게 기존의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다. 아무래도 야사인 듯.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아버지이자 시아버지를 내쳤다는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은 대원군이 아닌 신정왕후의 아들 및 며느리라는 걸 궁궐 내외에 보여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신정왕후를 매우 극진히 모셨다. 갑신정변이 터졌을 때는 궁녀들에게 업혀다니면서 여기저기로 피해다니기도 했다. 수렴청정을 거둔 후에는 정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당시로서는 무척 장수한 나이인 83세를 일기로 경복궁 흥복전에서 세상을 떴다.
생몰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1890년까지 살았기 때문에 개화가 진행되는 것도 지켜보았고[17] 그래서 신정왕후의 3년상을 전화기를 써서 치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혜경궁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이 사람도 오래 산만큼 많은 아픔을 겪었다. 남편 효명세자와 아들 헌종이 모두 20대 초반에 요절했던 만큼 외로움과 한이 컸을 것이다.

3. 기타


  • 1899년 대한제국 성립 이후 남편인 익종이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자 함께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추증되었다. 능은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수릉으로 남편 효명세자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
  • 특이한 기록을 여럿 갖고 있는데, 그녀의 정식 시호는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신정왕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神貞王后)로서 총 60자이며 세계 왕비들을 통틀어 가장 시호가 긴 왕비이다. 참고로 세계에서 시호가 가장 긴 사람은 남편인 문조. 또한 정식 왕비는 아니지만 조선 역대 왕후 중 가장 장수한 왕후(2번째가 정순왕후 송씨)로, 조선의 대비들 중 가장 오랜 기간 대비로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수렴청정을 한 대비들 중 유일하게 정식 왕비가 되지 못한 사람이다. 실로 격동의 조선 후기를 온몸으로 체험한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만했던 인물.
  •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 등장한다.

4. 미디어에서


남편아들은 사극 출연이 전혀 없다가 남편은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모티브만 따와서 이름까지 바뀐 인물[18][스포일러]로, 아들은 영화 《흥부[19]와 《명당[20]에 간신히 첫 출연한데 비해 본인은 구한말 배경의 사극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덕분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조선시대 인물임에도 인지도는 남편아들을 압도한다.
  • 1982년 MBC 한미수교 10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실록 한미 백년》 - 나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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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시점이 고종의 재위기이므로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 등장한다. 드라마 3대 세력[21] 중 하나로 등장하며 풍양 조씨 일문의 우두머리 역할을 한다. 흥선대원군(유동근 분)의 극딜로 인해 수렴청정과 중전 간택 권한[22]을 모두 잃고 낙선재[23]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이로 인해서 신정왕후는 대원군에게 깊은 원한을 가졌고, 이후 대원군이 하는 일마다 족족 트집을 잡으며 명성황후(이미연 분)가 대원군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힘을 보탰다. 이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자 청국에 연락을 넣어 청군이 대원군을 납치해가도록 한다. 갑신정변이 끝난 직후 고종(이진우 분)에 대해 무례한 태도를 일삼는 원세개(박진성 분)를 꾸짖다가 고혈압으로 승하한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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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것은 신정왕후(닥터 진)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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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유일하게 신정왕후의 젊은 시절이 나오는 작품. 여기서는 이름이 '조하연'으로 나온다. 단, 역사 속 신정왕후가 아닌 모티브만 따와 창작한 캐릭터다. 자세한 것은 조하연 항목 참조.
  • 2020년 tvN 드라마 《철인왕후》 - 조연희[25]

5. 관련 문서




[1] 추정일 뿐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참조[2] '조 대비'라 불린 다른 인물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가 있는데, 대한민국에선 장렬왕후보다 신정왕후가 조 대비라 불리는 경우가 많다.[3] 고구마를 조선에 들여온 조엄은 그녀의 증조부다.[4] 현재도 웬만한 경우엔 불가능한데, 예법이 중요시되는 조선 시대에 그랬다가는 폐비 윤씨 취급을 받고 쫓겨날 수 있다.[5] 조선왕조실록 헌종 16권, 15년(1849년 기유 / 청 도광(道光) 29년) 6월 6일(임신) 14번째 기사에 따르면, “종사(宗社)의 부탁이 시급한데 영묘조(英廟朝)의 핏줄은 금상(今上)과 강화(江華)에 사는 이원범(李元範)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광(㼅)의 셋째 아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6] 철종순조양자가 되는 형식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철종의 아내인 철인왕후는 신정왕후의 아랫 동서가 되고 헌종의 아내인 효정왕후에겐 숙모가 된다.[7] 옥새와 내탕고의 열쇠는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이 보관하는데 철인왕후의 친정이 안동 김씨였다.[8] 혹은 대원군의 충고대로 철종이 죽자마자 신정왕후가 안동 김씨들이 옥새를 찾으려 들기 전 미리 옥새를 찾아 보관해 두었다는 말이 있다.[9] 원래 흥선군의 둘째 형 흥완군 이정응의 친아들이나 아들이 없던 흥녕군의 양자가 된 것.[10] 고종 즉위 이후 이재면은 본가로 돌아가 흥선군의 대를 이었고, 흥완군의 대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10대손 이재완입양되어 잇는다.[11] 숙종의 3남 연령군의 봉사손이 은신군이고 은신군의 양자가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이다. 그러나 연령군의 양손자로 명확히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연군 가문에서는 은신군을 '연령군의 제사를 받드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인식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은신군 항목 참조. 그래서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흥선군의 정통성은 영조 대로 올라간다.[12] 사실 만약 저 때 은신군을 연령군의 후손으로 명확히 인정했었다면 흥선군은 왕족 자격으로 군호를 받을 수 없었다. 왕족은 왕의 4대손까지인데 흥선군은 숙종의 5대손이기 때문.[13] 정통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흥선군에게는 3명의 형이 있어서 그 형들의 아들들이 고종보다 서열이 높았다. 굳이 흥선군의 아들이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흥선군의 큰형 흥녕군 이창응의 아들 이재원[9]의 경우엔 33세로 나이가 좀 있고(33세면 적당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대비로서는 수렴청정을 할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반면 흥선군의 셋째 형 흥인군 이최응의 아들 이재긍은 당시 7세로 너무 어렸고 둘째 형 흥완군 이정응의 아들 이재면은 원래 흥선군의 장남이었다.))[10] 심지어 흥선군의 정통성은 숙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11][12], 그 아버지 남연군이 양자 입적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무려 인조까지 가야 한다. 그나마 남연군 집안이 효종 이후로 유일한 법적 후손이라 정말로 인조까지 가야하는 다른 방계 왕족들보다는 유리했다.[14] 개혁 파트너 설은 박시백 역시 주장하였지만, 수렴청정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주도적 위치에서는 완전히 빠진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 역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15] 바로 얼마전까지 안동 김씨의 전횡이 있었는데 눈치 없이 나섰다가는 괜히 미운털 박힐 수 있다. 흥선군과 손잡고 고종을 옹립할 정도인 그녀가 그 정도 머리도 돌아가지 않을 리 없다.[16] 법적으로는 흥선군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아버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종은 익종(=효명세자)의 아들이므로 법적으로는 신정왕후가 어머니로 더 가까웠다.[17] 연도만 보면 잘 감이 안올 수 있는데, 이화학당제중원 설립, 영어 등 서양 외국어 교육 실시, 경복궁에 전기가 들어올 때도 생존해 있었다.[18] 그나마 다행히 한자만 바뀌고 발음은 그대로다.[스포일러] 그런데 실제 역사와 달리 조대비와 혼인을 하지 않는다(...)[19] 배우는 정해인.[20] 배우는 이원근.[21] 나머지 두 세력은 각각 며느리인 중전대원군.[22] 신정왕후는 대원군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기 위해 풍양 조씨인 조면호의 여식을 중전으로 택하려 하였으나 대원군이 이를 가로막았다...고 하는데, 조면호는 임천 조씨로 핏줄만 따지면 신정왕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23] 창덕궁에 인접한 별궁이다. 신정왕후가 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원군이 내쫓아버렸다.[24] 원세개가 신정왕후의 면전에서 '노마님께서 망령이 드셨다. 고종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강제로 퇴위시켜버리겠다.'라는 망언을 내뱉었다.[25] 본명은 조선주로, 2020년에 조연희로 활동명을 변경했다.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