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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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조의 간택 후궁. 홍낙춘과 우봉 이씨의 딸이자 홍국영의 여동생으로 유명하다. 궁호는 숙창궁(淑昌宮).
2. 생애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가 임신하지 못하자 이를 우려한 정순왕후가 후궁 간택을 지시한다.[4] 이에 금혼령과 함께 간택이 치러지고, 1778년(정조 2) 6월 13세의 어린 나이[5] 에 후궁으로 책봉된다. 14세인 1779년(정조 3년) 4월 16일에 관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어, 사실상 첫날밤은 이 뒤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홍씨가 대한 예우는 보통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까지 간택의 모든 절차를 거쳤으며, 가례의 의절과 의장은 대명집례[6] 와 당나라와 명나라의 예를 모두 찾아본 다음 시행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채제공이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다음[7] , 대전에서 중궁전까지 순서대로 인사를 끝냈다. 그런데 숙창궁의 승언색[8] 이 채제공에게 온 것이다. 이에 채제공이 놀라서 "세자를 탄생한 빈궁(嬪宮)이 아니면 문안할 수 없는 것이 예법인데, 누가 이를 예로 정하였는가? 유독 하늘에는 두 해가 없는 이치를 모르는가?" 라고 말했다.[9][10] 홍씨가 간택 후궁이긴 하지만, 아직 세자를 낳지도 않았고 엄연히 왕비가 살아있는데 선을 넘었다고 지적한 일이다.
1779년 5월, 홍씨는 창덕궁 양심합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도 정조는 희정당에서 거애하고, 당나라 황귀비의 예를 좇아서 시호를 인숙(仁淑), 궁호를 효휘(孝徽), 원호를 인명(仁明)이라고 추증했다.[11] 실록에서는 이때 홍국영의 방자함이 날로 극심해서 온 조정이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례 절차와 예우는 모두 정조의 허락없이 이뤄질 수 없다. 정조는 홍씨를 위해 직접 행장까지 지었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이 남아있다.
그녀는 이렇게 생전에도 사후에도 논란이 많았다. 너무 파격이었다고 생각했는지 정조는 화빈 윤씨 때는 "이번에는 그렇게 할 것 없으니, 품계가 있는 빈원에 예를 참고해서 하라."고 말할 정도.[12]
원빈 홍씨의 묘소인 인명원(仁明園)은 정조 10년, '원빈묘'로 강등되었다. 본래 원(園)은 왕의 친생부모로서 왕이나 왕후가 아닌 사람[13] 의 묘소를 일컫는 단어인데,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원빈의 무덤을 원이라고 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는 조정의 여론에 따른 조치였다. 1946년에 고려대학교에 매입되었고, 이후 고려대학교에서는 애기능 주변으로 이공계 학과들을 이전 및 신설하였다. 고려대학교에서는 이 무덤이 있던 곳을 애기능이라고 부르고, 자연계 캠퍼스를 애기능 캠퍼스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1950년 6월 13일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정조와 합궁을 한 후 출혈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사실이면 흠좀무(...).[14] 관련된 드라마에 이 이야기가 차용될 때가 있다.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에서는 정조와 원빈이 동침하던 밤에 큰 소동이 벌어진 것을 두고 상궁 두 사람이 대화하면서 "어른이 아이 버선에 억지로 발을 디밀어 넣으면 어떻게 되겠소?"라고 에둘러 표현한다.
3. 효의왕후와의 갈등
원빈 홍씨는 조선 역사상 삼간택과 가례의 절차를 거쳐 '''처음부터 빈'''으로 입궁한 최초의 후궁이다. 빈호에도 정실을 뜻하는 "으뜸 원" 자를 써서, 왕비인 효의왕후 김씨의 심기를 건드렸다. 원빈 홍씨(숙창궁)의 조현례 과정을 그린 《숙창궁입궐일기》가 전하는데, 이 작품에서 효의왕후는 더위를 핑계로 원빈 홍씨의 인사를 받는 걸 며칠이나 미루는 모습을 보인다. 또, 홍국영은 여동생 원빈 홍씨의 죽음이 효의왕후 때문이라고 판단, 효의왕후의 궁녀들을 문초하였고, 야사에 의하면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다 발각돼 몰락하였다고 한다.
4. 사후
이렇게까지 승승장구했지만 14살의 어린나이로 오빠 홍국영의 기대와 다르게 자식하나 못남기고 사망하자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조카인 상계군 이담을 이미 사망한 원빈의 양자로 들이민다. 이는 아직 젊은 정조에게 '너 아이 낳지 말고 내가 지정한 이 아이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뜻으로 매우 불경한 짓이었다. 이 때문인지 홍국영은 몰락하고 괜히 조카가 되었던 상계군도 팔자가 꼬여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5. 가계
6. 의문
6.1. 왕실간의 관계
사실 원빈 홍씨와 홍국영은 왕실과 세간에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른 관계도를 가졌다는 추측이 있다.
김두광에게 김선경과 김운경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김선경의 아들이 김한구, 손주가 김귀주와 정순왕후 김씨이고, 김운경의 손자가 김면주이다. 이 김면주의 오촌 조카가 바로 홍국영이다.(김면주의 어머니가 홍국영의 고모할머니다)
홍국영이 과거에 응시하러 도성에 갈 때 머문 곳이 김면주의 집이었는데 김면주는 홍국영 쪽에서 보면 아버지의 고종사촌으로 오촌이고 김면주와 김귀주-정순왕후는 6촌이다. 이때 김면주의 사촌 김관주는 김귀주-정순왕후와 가까웠다고 한다. 물론 당시 양반들 결혼은 다 족벌이었고 저 정도면 멀지 뭐가 가깝냐고 생각되지만, 정순왕후와 홍국영의 사이가 의외로 가까웠던 게 아니냐는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원빈의 간택 시 하교를 내린 건 정순왕후 김씨였는데, 한중록에서 홍국영이 대비를 시켜서 하교를 내리게 했다. 정조어제원빈행장에서 혜경궁 홍씨는 풍산 홍씨인 원빈을 아꼈고 김조순이 쓴 <혜경궁행장>에서 원빈 간택시 효의왕후와 혜경궁 사이에서 긴장관계가 있었으며 <숙창궁입궐일기>에서도 효의왕후가 원빈의 입궐을 두고 혜경궁을 원망했다. 거기다 효의왕후는 혜경궁의 문안문제 때문에 정조시대 문안에서 배제된 경험이 있던지라, 둘의 사이는 의외로 좋지 않았다. 사실은 혜경궁이 원빈 입궐을 주도했고 정순왕후가 거들었는데, 홍국영이 망하니까 다 뒤집어씌웠다는 것이다.
또 명의록에서 홍국영의 상소 중 뜬금없이 대비 찬가가 등장한다. 일성록에 따르면
즉위년 9월 김귀주 유배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누나 정순왕후 김씨를 보호하겠다는 의사표현으로 보인다. 하지만 홍국영이 총대를 맸어도 울기까지 했다는 묘사는 좀 오버스럽다. 당시 궁중여인을 만난다는 건 매우 가까운 인척관계가 있어야 했고 친부모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있던 게 아니었다. 홍국영과 혜경궁은 9촌인데 한중록에서 왕세손과 혜경궁 의사소통에 홍국영을 사용한 걸 보면 드나들 수 있던 게 맞다. 이런 맥락에서 먼 친척인 정순왕후(항렬로 따지면 외당숙)와도 접점을 가져 친해졌을 수 있다."당시에 성궁(聖窮)을 보호해주시던 왕대비전의 성덕과 대은은 당연히 천하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어야 하는데도 아직 그 만의 하나도 칭송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억울합니다."
"이때 만일 전하를 보호하시던 왕대비전의 은덕이 없었더라면 나라가 편안할 날이 없었을 것이요, 군신 또한 오늘을 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진사의 상소를 보건데 우리 전하를 보호하시던 왕대비전의 은덕이 그토록 성대하시니 이는 단지 지신사의 말을 따를 뿐만 아니라 실로 신들이 마땅히 청해야 할 일입니다."
"자전(慈殿)의 성덕은 천지간에 내세워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며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정순왕후 김씨와 홍국영이 본래부터 한패였을 수도 있다. 정조 왕세손 시절 정조-김귀주/정순왕후-홍국영이 한패였는데 정조가 김귀주를 날려버렸지만, 벽파와 정순왕후는 그냥 놔뒀다. 이런 경우라면 홍국영의 부탁은 김귀주 제거와 별개로 누나 정순왕후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한 게 아닐까 추정된다. 만일 정순왕후가 억하심정 가질 일이 있었다면 원빈이 79년 5월 7일 죽었는데 6월 뜬금없이 흑산도의 김귀주가 위리안치가 된 일이다. 시점이 너무 절묘한데, 김귀주가 흑산도에서 뭘 했다고 갑자기 가중처벌을 하겠는가.
정조 초기 혜경궁은 친정 전체를 위해서 오히려 홍인한 정도는 포기한 것 같다. 홍인한 처분 이후 한중록 서술할 때까지 정국이 몇 번이고 갈렸다. 홍인한을 버렸는데 나중에 태도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초기에는 홍국영에게 배팅했다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굴러가니까 홍인한 이야기를 다시 거론했다는 것이다.
6.2. 양자 문제
홍국영이 완풍군을 정조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은 홍국영이 탄핵당했을 때만 나온다. 이때 홍국영이 몰락하면서 원빈의 양자에서 파양된 완풍군은 군호도 상계군으로 고쳤으나[18] 의문스러운 자살로 사망했다. 하지만 완풍군이 사망한 이후 그의 외할아버지인 송낙휴가 상복을 입은 채로 궁궐의 대문을 밀치고 들어가 고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요약하자면 "상계군은 파양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 '김 정승(영의정 김상철)이 살면 나도 살고 김 정승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라는 말을 하고 며칠 후 급사했다"는 내용이다. 또한 송낙휴는 영조와 정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구선복이 상계군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고변도 했다. 구선복은 체포되어 심문을 버티다가 결국 반역을 꾀해 상계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실토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관련자들은 모두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았고 상계군의 혼례를 주관하던 김우진 역시 상계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파직되고 유배되었다.[19] 결국 이미 죽은 상계군의 작위는 즉시 폐작되어 '''"역적 담"'''으로만 불리게 되었고, 역적의 가족이 된 은언군 일가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보통 은언군 일가가 홍국영의 권력욕에 휘말려 몰락한 것으로 나오는데, 홍국영은 그냥 방축처분만 받았고 나중에는 죄안에서 이름도 삭제된다. 오히려 일개 신하에 불과한 홍국영의 처분이 왕족인 은언군의 처분보다 관대했다.[20] 만약 진짜 홍국영이 완풍군을 원빈의 양자이자 자신의 조카로 삼아 권력을 탐했더라면 이것보다 더 강대한 처벌을 받았을텐데 말이다. 이러한 의아한 처분 때문에 일각에서는 은언군 일가가 정말 아들 완풍군을 왕위에 올리려했다가 실패해서 더 엄한 처벌을 받았다는 추측도 있다. 제아무리 왕족들이 여러 특권을 가지고 있던 조선일지라도 반역에 준하는 사건에서 이름이 거론된 왕족은 국왕인 태종, 세종, 효종처럼 진짜 보살이 아닌 이상 살아남은 경우가 없다. 이를 볼 때 은언군 일가가 계승권을 잃고 유배되는 등, 홍국영보다도 강력한 처벌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계승에 관한 문제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다. 관점을 바꿔 말하면 원빈 사후에 정조 쪽에서 양자를 들일 생각을 했다가 그만뒀는데, 한때 이름이 거론된 시점에서 왕대비와 신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처벌할 만한 사유가 된다. 결국 자신들이 벌인 사고에 휘말린 은언군 일가는 어떻게든 목숨만을 보존하기 위해 몰락한 홍국영의 이름을 이용해먹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문제의 정조 3년 9월, 2일과 3일 양일에 "후사를 잇는 일"에 대한 기사가 있다. 얼핏이라는 건 명확히 양자를 들인다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2일 창덕궁 성정각에서 주강을 행했다. 이때 "특진관 이명식, 동지경연사 이보행, 경연관 송덕상, 승지 남학문, 옥당 유의, 심낙수 가주서 서정수, 사관 이신호 정동준, 서춘군西春君 이엽, 무신 조심태"가 입시했다. 이 때는 논어 강의와 안부 주고받기만 나온다. 그리고 경연관 송덕상이 양자 들이는 예법에 대한 자기의사를 피력한다. 이 기사는 후사 잇기에 대한 내용은 아니다. 일반 사대부가 등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양자입양에 대한 일반론이다. 양자를 들이고 보내는 결정권은 부모에게 있으니 조부나 아버지가 없는 자가 양자로 오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연장에서 이 기사는 조금 생뚱맞은 감이 있다. 앞, 뒤에 관련된 이야기나 맥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송덕상의 이 한 마디만 남아있는 것이다. 거기다 시기나 말한 당사자가 수상쩍기도 한데, 불과 20여일 전 홍국영이 은퇴하는데 이 은퇴 날 사관의 논찬 부분에 완풍군을 끼고 국본의 자리를 도모한 죄인이라고 길게 설명한다. 홍국영이 원빈의 아들로 해 왕세자로 삼으려 한 것은 한중록에도 나온다. 송덕상도 필자흉언이니 뭐니 해서 후사문제와 얽혀 망했다. 이런 시기에 양자에 대한 말이 나온 것이다. 거기다 일성록은 원본 그대로가 아닌데 순원왕후가 철종의 친 큰아버지인 완풍군 관련 기록을 대대적으로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 만일 기록이 잘려나간 게 사실이라면 그때 손을 탄 게 된다.
이후 기사에서 갑자기 언관들이 체차를 청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렸다. 이날 주강자리에서 유현이 삼사의 신하들에 대해 '잠자코 있으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배척했다고 해 자신들이 상소를 올린다는 것이다. 이날 주강에서 송덕상이 부모 없는 아이 입양 외에도 다른 소리를 했다는 뜻이다. 삼사의 관료들이 들고 일어난 걸 보면 꽤 민감한 내용 같은데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매우 민감한 부분이 있었고 그 말은 기록에서 소실되었다는 건 확인된다.
다음날 3일 이날도 주강이 있었고 송덕상은 이 자리에 없다. 이날 그 자리에 입시한 서명선과 잠깐 다른 대화를 하다가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유현이 이미 진달한 것이 있지만 그 일의 실정이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없기에 하나로 결론을 내려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즉 송덕상이 뭐라고 한 게 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는 고민하고 있다. 이게 유일하게 기록으로 남은 '조부모와 부모 없는 아이를 임의로 양자로 보내고 받는 행위를 중단시켜야 한다.'는 것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이날 마지막 기사가 이렇다.
김양행이 병으로 전날 경연에 참여 못해서 예조가 정식 문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예조에서 문의한 게 후사를 잇는 일이었다. 이게 송덕상이 말한 양자입양의 일반론은 아닌 것 같다. 이 일에 대해 김양행은 몸을 빼버린 것이다.예조가 후사를 잇는 일로 전 참의 김양행에게 문의하였으나 병이 들어 우러러 대답할 수가 없다 하였다고 아뢰었다.
정리하자면 이틀 간에 경연 논의가 중간에 삭제된 흔적이 있다. 이 때문에 언론이 예민하게 반응할 정도의 폭탄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양자나 후사를 얻는 일이 거론된다. 공식 사석에서 정조의 양자논의가 나왔다면 절대로 홍국영 단독으로 진행할 수 없다. 즉 이때 양자에 대한 소리를 한 건 오히려 정조가 된다.
“세손이 빈궁과 금슬이 심히 좋지 아니한데 궁인 중에 나아가는 자도 없고 일왕손 은언군은 송낙휴의 사위인데 그 아들을 세손이 매우 사랑하였다.” - 이재난고
이걸 보면 당시 정조와 효의왕후의 사이가 젊은 시절부터 개판이였던게 유명했던 모양(...) 정조 본인은 다 유언비어라고 부정했지만 당시 정황을 보면 부부간의 사이가 나쁜 게 확실하다.[21]“그러나 내가 동궁에 있을 때부터 말이 많은 것을 미워했었는데 중전께서 예절이 예전과 다름이 없었으나 외부의 말이 시끄러웠다. 이는 대체로 내가 병신년의 역적 무리들에게서 미움을 많이 샀기 때문이다. 그들의 간사한 내막을 빠짐없이 꿰뚫어보자 돌아서서 물려는 흉악한 꾀를 품고 널리 거짓말을 퍼뜨려서 흔들어보려는 계교를 꾸미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궁중의 일은 은밀하여 바깥사람들이 알기가 어려우므로 모함하기 쉽고 흑백을 혼동할 수 있다고 여겨 터무니없는 비방과 망령되이 예측한 말을 수없이 지껄임이 이루 말할 수 없으므로 항상 춘방春坊에서 사람과의 접촉을 드물게 하였다.”
1782년 12월 27일
가동궁 사건이 벌어졌을 때 정조는 이복 남동생을 감싸려고 했지만 명분에서 신하들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 정순왕후 김씨가 말한 가동궁이라는 표현도 갑자기 등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타 ‘은언군이 위인이 어리석어 그게 자기에게 해가 될 거라 생각 못하고 좋은 일인 줄 알고 으스댔다.’는 기록도 단순히 지어낼 만 한 건 아니다. 하지만 홍국영 몰락은 가동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에는 미묘하다. 하지만 실제로 양자사건이 있었다면 이 사건의 주도자는 정조가 되는데, 실패하니까 다 뒤집어씌웠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직 20대인 임금이 자식 가지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양자를 들이는 건 당대에도 현대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발상이며 혜경궁 말이 딱 그거다.
가동궁 사건이 실제 일어났다면 언제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원빈 사후에 일어낫다고 하지만 홍국영을 빼고 생각해도 원빈 사후 임금이 새 후궁을 들이기 귀찮다고 하는 대목이 있기에(일성록 11월 3일 김종수와의 대화, 이듬해 2월 화빈 윤씨 간택령 내리는 시점 등이고 기타 정변록에는 6월 시점에서 임금이 새 후궁 맞기 싫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실제 이해 기해년 원빈 사후에 있던 것일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하지만 정변록 상권 중에 1777년(원빈 입궐 전해)에 관련 논의가 있었다고 하니 이전부터 나왔을 수도 있다.
원빈 사후 다음 달 송덕상이 상소를 올려 새 후궁을 맞이할 것을 권유하고 나서 “모양의 도리에 관하여서는 아래 있는 사람으로서 감히 지적할 수 없습니다.” 하는 대목을 적어두었는데 홍국영이 방출된 뒤 김종수(홍국영이 따른 도당의 대장)가 ‘그건 중궁의 복병을 낫게 조섭하려고 권고한 것’이라 말했다고 하며 이후 정조 6년 윤음에서 정조가 직접 ‘그건 담의 일이다’라고 말하게 되어 가동궁 사건이 대략 모양 지어진다. 그런데도 남는 의문점은 은언군을 왜 하필이면 송낙휴의 사위라고 한 점인가다.
정조는 15살에 1살 연하의 혜경궁의 수양딸 성씨에게 청혼했는데 효의왕후가 후사가 없는데 무슨 소리냐면서 죽어도 못 한다고 울면서 거절했다. 이에 정조는 물러났고 19살에 매제 정재화와 기생 외입질을 해서 문제가 되었다. 이때 혜경궁은 정조가 외가와의 갈등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만이라 보기는 어렵다. 설마 바깥에 쏘다니면서 기생과 놀기만 했겠는가. 혜경궁이 친정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외입질 못하게 단속하다가 세손이 외가를 언짢게 여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제쳐놓고 왜 굳이 궁밖에 다닌 걸까. 아내와는 사이가 예나 지금이나 최악이고 좋아하던 여자애에게는 차여서 한동안 접근도 안 했고 왕세손 시절에 귀여워하던 조카 문제로 가동궁 사건이 터졌다. 언제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지는 넘어가고 양자 의도가 있기는 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혜경궁은 “왜 젊은 내 아들이 스스로 제 자식 보는 걸 포기하고 양자를 들여야 한단 말이냐!”고 했던 것이 포인트인데 당시 이재난고를 보면 ‘빈궁과는 사이가 좋지 않고 궁인 중에 가까이하는 이도 없다.’고 한다.
홍대용의 계방일기에서 왕세손 시절의 정조가 여자를 두고 포사나 달기를 거론하면서 여자는 본래부터 악한 자도 있다고 말했는데, 효의왕후가 궁녀에게 화풀이를 하고 여자에게 차이기까지 하자 궁녀를 피해 궁 밖 기생 오입질도 했지만 당연히 실패하고, 결국 여색 자체를 멀리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신하들 앞에서 자기는 여색을 안 즐긴다고 한 것도 그게 원인일지도.
7. 원빈 홍씨가 등장하는 작품
드라마가 조기종영하며 정작 원빈이 된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홍국영의 여동생으로만 나오다가 종영했다.
실제 원빈 홍씨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간택되었으나, 현대적 정서를 고려해서인지 이 작품에서는 성인으로 등장한다. 배우 황금희는 방영 당시 32세. 당초 황금희는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 역에 캐스팅되었는데, 정순왕후와 화완옹주와의 악역 캐릭터 유사성 문제로 이 배역이 삭제되면서 대신 원빈 홍씨 역으로 등장한 것.
히로인인 의빈 성씨와 효의왕후가 선역으로 설정된 상황에서 원빈 홍씨까지 선역으로 설정하면 극 진행이 루즈해질 것이라 판단한 것인지, 악역으로 등장한다. 의빈 성씨에게 질투심을 품고 괴롭히거나 뺨을 때리는 등 매우 악랄한 성품으로 묘사했다.
극중에서 상상임신을 했고 그걸 숨기고 실제 임신인 척 하려다가 들켜 효의왕후에게 털린다. 죄를 용서받고자 효의왕후에게 석고대죄를 하다 그만 병을 얻어 죽으면서 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