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낙선재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1763호

'''1764호'''

1765호
창덕궁 부용정
'''창덕궁 낙선재'''
서산 개심사 오방오제위도 및 사직사자도

[image] '''대한민국 보물 제1764호'''
'''창덕궁 낙선재'''
昌德宮 樂善齋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
1동
'''지정연도'''
2012년 3월 2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1847년 창건
1. 소개
2. 이름
3. 역사
4. 구조
5. 부속 건물
5.1. 석복헌
5.2. 수강재
5.3. 평원루
5.4. 취운정
5.5. 한정당
6. 여담
7.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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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 일곽 외경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1. 소개


昌德宮 樂善齋
창덕궁의 주거 건물이다. 전반적으로 양반가 형식을 따랐으나 궁궐 침전 양식을 가미한 이다.
창덕궁창경궁의 경계 부분에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원래는 창경궁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창덕궁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위치도 창덕궁 주요부와 꽤 떨어져있고 오히려 현재 창경궁과 훨씬 가깝다.
낙선재라 하면, 낙선재 건물 한 채만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보통은 낙선재와 다른 부속 건물들을 통틀어 부른다. 좁게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만을 말하며 넓게는 건물들 뒷편의 화계와, 그 위 너머로 있는 상량정 · 한정당 · 취운정까지 통틀어 낙선재 권역이라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대한제국황실 가족들이 1989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가장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즉 궁궐 전각들 중 그나마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2. 이름


‘낙선(樂善)’ 뜻은 ‘선을 즐긴다’이다. 《맹자》에 나온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을 즐겨(樂善) 게으르지 않는 것(不倦)을 천작(天爵)[1]이라고 한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3. 역사


1847년(헌종 13년)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이 지었다.
낙선재 영역 언저리엔 원래 동궁 중 하나인 낙선당이 있었는데, 1756년(영조 32년) 불탄 뒤 재건하지 않았다.
그 후 90여 년 뒤 비슷한 자리에[2] 이름이 같은 낙선재와 그 주변 건물을 지었는데 낙선당의 복구라기보다는, 그냥 이름만 딴 새 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엔 동궁에 살 세자도 없었고, 무엇보다 건립 이유가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조수빈 박씨의 처소가 서로 붙어있어 순조가 태어난 것처럼, 경빈 김씨도 헌종 곁에서 머물며 후계자를 낳기를 바란 의도였다.
헌종은 낙선재에, 경빈 김씨는 낙선재 바로 옆의 석복헌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수강재도 낙선재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 여 뒤인 1849년 헌종승하했고 경빈 김씨을 나와 안국동 일대에 머물면서 낙선재는 비었다. 그러다 갑신정변 직후에 고종이 잠시 이 곳에 머물면서 신하들과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하였다.# #
1907년(융희 1년) 황제 순종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3]한 후엔 황태자였던 영친왕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까지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순종이 이 곳에 가끔 머물면서 일본인들을 접견하였으며 1917년 창덕궁 내전의 대화재 이후 내전을 재건할 때까지 여기서 거주하였다.
순종 붕어[4] 직전에는 순종의 어진을 이 곳에 모시기도 했고# 순종 사후에는 대조전에 살던 순정효황후가 여기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1929년 3월에 서행각 등 건물 일부를 증축하였다.
그렇게 20여 년 넘게 잘 살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순정효황후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휴전 후 돌아왔으나 이승만창덕궁은 국유재산이라며 낙선재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면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인수재(仁壽齋)에서 임시로 머물렀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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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로 들어오는 순정효황후와 상궁들[5]
이후 1962년 덕혜옹주가, 1963년엔 의민태자(영친왕)이방자귀국하면서 낙선재 권역에서 순정효황후와 함께 살았다. 이 때 낙선재 본채는 의민태자 - 이방자 부부[6], 석복헌은 순정효황후가, 그리고 수강재는 덕혜옹주가 사용하였다. 순정효황후는 1966년, 의민태자는 1970년, 그리고 덕혜옹주와 이방자는 198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8] 낙선재는 다시 비었다.
근래까지 실제로 사람이 살았으니 당연히 조선시대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었다. 1990년대 들어서 낙선재의 증축한 부분들을 철거하고 조선시대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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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에 달라졌던 낙선재 풍경. 윗 사진 왼쪽은 낙선재 본채. 오른쪽은 낙선재 서행각 현관,
아랫 사진 왼쪽은 낙선재 본채에서 바라본 서행각, 오른쪽은 정문 장락문이다.
2005년 7월 의민태자의 아들 이구가 사망하자 빈소를 이 곳에 설치하여 조선 왕실 - 대한제국 황실 최후의 빈소로 기록에 남았다.
2012년 3월 보물 제1764호로 지정받았다.


4.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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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 본채 사진
  • 기본 몸체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총 12칸이나 서쪽의 누마루가 남쪽으로 1칸, 동쪽의 방이 북쪽으로 2칸 더 나있어 실제로는 15칸이다. 겹처마 양식공포는 이익공, 지붕은 팔작지붕이며[9] 제일 아랫 부분에는 장대석으로 기단계단 3개를 조성하였다. 누마루의 하단은 화강석을 길게 깎아만든 주초석을 놓았고, 장귀틀 하부에 낙양 모양을 내었으며 누마루가 끝나는 부분의 하단은 얼음조각무늬로 장식하였다.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기와로 마감하으며 양반가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기에 용두, 잡상은 놓지 않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 서쪽 끝에 누마루가 정면 1칸, 측면 2칸의 2칸이 나있고 그 뒤로 온돌방이 있으며 마루와 온돌방 사이엔 둥근 모양으로 문을 내었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 차례로 대청 2칸, 온돌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창고가 있으며 대청과 온돌방 전면에는 툇마루가 놓여있다. 동쪽의 온돌방과 마루방 북쪽엔 위에 적었듯이 온돌방이 2칸 더 나있는데 《동궐도형》에 따르면 이 덧댄 온돌방을 통하여 석복헌과 실내로 연결되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특이하게 창호가 각 마다 다른데 만(卍)자 살, 아(亞)자 살, 정(丁)자 살을 비롯하여 당초무늬, 박쥐무니, 마름모고리무늬 등으로 상당히 개성있고 아름답게 꾸몄다.

  • 정면 동쪽 끝에는 작은 나무 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서편에 또 다른 문이 있는데 양쪽 기둥을 전벽돌로 쌓고 거기에 판장문을 달았다. 이런 양식은 다른 궁궐에서 찾아보기 힘든 양식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낙선재 뒤뜰의 화계를 볼 수 있다.
  • 낙선재 동남쪽에 작은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행랑이 보이며 이 행랑에 난 문을 지나 좌측으로 들어가면 석복헌이 나온다.

5. 부속 건물



5.1. 석복헌




5.2. 수강재




5.3. 평원루




5.4. 취운정




5.5. 한정당




6. 여담


  • 2015년 문화재청에서 낙선재 권역을 객실로 개방하는 이른바 '궁 스테이(宮 Stay)'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다. 정확히는 보물로 지정된 낙선재 본채는 놔두고, 부속 건물인 석복헌과 수강재를 수리하여 개방하려 했던 것. 그러나 하루에 300만 원 씩 받는 금액 논란에다 화재 위험 때문에 계획을 무산시켰다.#
  • 가끔 문화 행사들도 열리는데, 특이하게도 고려시대 문화 행사를 열기도 했었다.#
  • 영친왕일본에 있을 때 고국이 너무 그리워 한국으로 낙선재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고, 마침 황실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조약돌을 전해줬다고 한다. 그 뒤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조약돌을 계속 바라보고 만졌다고 한다.

7. 매체에서


  • 1990년 KBS1 광복절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서는 영친왕(서인석 분)의 추억이 서린 곳으로 나왔다. 임종 직전의 영친왕이 들 것에 실려 낙선재로 옮겨진 뒤, 마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1] 남에게서 존경을 받을 만한 타고난 덕행.[2] 연구자들은 낙선당과 낙선재의 자리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3] 移御. 쉽게 말해 임금이사하는 것.[4] 崩御. 황제, 황후의 죽음.[5] 맨 앞줄이 순정효황후, 그 뒤로 성옥염 상궁.[6] 의민태자는 혼수상태라 귀국 직후 병원에 입원하였고 이후 낙선재와 한남동 일반주택을 오가며 생활했다.[7] 薨逝. 임금이나 왕족,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의 죽음.[8] 둘 다 같은 해 4월에 사망. 덕혜옹주가 4월 21일에 서거하고, 이방자가 9일 뒤인 4월 30일에 훙서[7]했다.[9]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