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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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24대 국왕 헌종 이환의 계비.
성은 홍씨(洪氏)이며 본관은 남양. 1831년(순조 31년) 돈령부영사 익풍부원군 홍재룡과 연창부부인 죽산 안씨의 딸로 태어났다. 헌종의 첫 번째 왕비였던 효현왕후 김씨가 사망하자 1년만에 헌종의 왕비가 되어 가례를 올렸다. 헌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1849년(헌종 15년) 헌종이 승하하여 철종이 즉위하자 효정왕후는 대비가 되어 존호 '명헌'을 받았다. 헌종 때 '왕대비→대왕대비'에서 '대비→왕대비→대왕대비'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 당시 대비는 왕대비의 줄임말이 아니었다. 1857년(철종 8년) 시할머니 순원왕후가 사망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칭호가 왕태후로 올라갔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효정왕후를 황태후로 격상시켰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일단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효정왕후가 황태후 책봉을 받은 기록이 하나도 없다. 고종이 왕태자와 왕태자비, 군을 황제국 예법에 맞게 황태자, 황태자비, 친왕으로 승격시켰고 그 기록이 다 남아있다. 그런데 황태후 책봉 기록이 없다는 것은 격상을 안시켰다는 것이다. 〈독립신문〉에서 대한제국 선포를 보도한 기사에 효정왕후를 '황태후 폐하'라고 칭하긴 했으나, 공식적인 것이 아니다. 왜 황태후로 격상되지 못했냐면, 남편 헌종과의 형평성 문제 때문이었다. 헌종은 '대'''왕''''인데, 그 왕비인 효정왕후가 '황'자를 쓸 순 없었으므로.[2] 대신, 황제국에서 ''''왕'''태후'라고 하긴 뭐했던지, 대한제국기에 사람들은 효정왕후를 주로 존호를 붙인 '명헌태후'로 불렀다.
1904년(광무 8년) 1월 2일[3] 덕수궁 수인당에서 73세의 나이에 감기로 인한 폐렴으로 사망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승하 1개월전부터 감기를 앓았고 어의를 통해 치료한 기록이 있으나 워낙 노쇠한 탓에 버티지 못한 듯 하다.
능호는 경릉(景陵)이며, 남편 헌종과 그의 첫째 왕후인 효현왕후와 나란히 묻혀있다. 1908년(융희 2년)에 순종이 그의 남편 헌종을 헌종성황제로 추존하면서,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로 같이 추존했다.
한국사에서 '황태후'하는 호칭이 붙은 마지막 인물이다. 다음 대의 왕비인 철인왕후 김씨, 명성황후 민씨는 대한제국 선포 이전에 사망했으며 순정효황후는 본인이 마지막 황후이기 때문이다.
2. 여담
- 1844년(헌종 10년) 5월 효정왕후를 간택하던 날, 당시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순조의 적3녀 덕온공주[4] 가 경사를 치르기 위해 창경궁 통명전에 들어갔다가 점심으로 먹은 비빔밥이 급체하여 사망하는 참변이 발생했다.[5] 덕온공주는 죽기 직전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곧바로 사망했고, 공주 역시 아이를 매장한 지 약 2시간 정도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3. 매체에서
대비들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위주로 나왔다. 가끔 왕실 일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시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김용림 분)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 다른 대비들과 달리 20세기 초까지 장수했기 때문에[7] 후반부에서는 조선 말기의 온갖 막장 상황을 모두 겪는 비운의 태후로 나왔다. 드라마 최후반부인 을미사변 당시 건청궁에 칼을 휘두르며 들어와 명성황후(최명길)를 찾던 일본 낭인들이 왕태자 순종(백승우 분)의 머리채를 잡고 왕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이유리 분)와 같이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만행을 보고 실신한다.[8] 또한 아관파천 때도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을 한탄하며[9] 명성황후의 장례 때 슬프게 통곡한다.[10] 참고로 드라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오래 출연한 인물 중 하나이다.
왕실 어른 1로 [1] 現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2] 후술하겠지만, 헌종은 1908년(융희 2년)에야 황제로 추존받았다.[3] 음력으로 11월 15일이라 사망년도를 1903년으로 적은 경우도 있다.[4] 이복 언니 영온옹주를 포함하면 넷째 딸.[5] 현재는 급체가 심각한 질병이 아니나, 당시엔 급체로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6]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이영애(김현숙)의 어머니로 출연.[7] 대비인 철종비 철인왕후는 임오군란 전인 1878년에 승하했고 대왕대비인 익종비 신정왕후 조씨는 동학농민운동 이전인 1890년에 승하했다.[8] 이 때 의화군(강성민 분)이 효정왕후에게 할마마마라 하는데 고증오류다. 효정왕후의 남편 헌종과 의화군의 아버지 고종은 같은 항렬이며 족보 상 형제지간이기 때문. 그래서 의화군에게 효정왕후는 큰어머니가 되지만 큰어마마마(...)란 말은 없기에 그냥 (왕)태후마마라 부르면 됐다.[9] 실제 역사 상에서는 이 때 태자비(순명효황후)와 함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갔지만, 드라마에서는 고종(이진우 분), 순종(백승우 분)과 함께 러시아공사관에 간 것으로 나온다.[10] 효정왕후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