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개양문
1. 개요
慶熙宮 開陽門
경희궁의 남쪽 궁문이다. 이 포스팅에 따르면, 현재 흥화문이 있는 자리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궁궐 정문은 남쪽에 두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경희궁의 지형 특성 상 정문은 동쪽 문 흥화문이 되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2. 이름
'개양(開陽)'은 북두칠성의 여섯 번째 별로[1] '양(陽)의 기운을 크게 연다(開)'는 뜻이다. 양은 전통적으로 남쪽을 상징했기 때문에 남문의 이름으로 쓴 듯 하다.
3. 역사
1617년(광해군 9년)에서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2] 지었다.
신하들이 궁에 드나들 때 주로 이용했다. 정전 숭정전과의 거리가 흥화문보다 더 가까웠으며 문 안쪽에는 궐내각사[3] 가 있었기 때문이다.
1860년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대부분 경희궁 건물들을 공사 자재로 쓰려고 없앴다. 그러나 영역만은 살아남았고, 개양문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890년대에 그린 서울 지도 《수선전도》[4] 를 보면 경희궁 궁장과 궁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일제가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5] 를 짓고, 그나마 남아있던 경희궁 건물과 영역을 일반에 매각하면서 개양문도 같이 헐렸다.
2016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었던 〈경희궁 특별전〉 전시 내용에 따르면, 처음에는 남산에 있는 일본 사찰 서본원사(西本願寺)에서 사들여 정문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이후 경성방송국을 거쳐 1964년에 성균관대학교에서 옮겨다가 정문 대성문으로 활용했다. 대성문은 1960 ~ 1970년대 성균관대학교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차량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1976년에 학교 측에서 교문을 석조로 교체했다. 이후 신라호텔로 옮겼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이 글에 따르면, 성균관대학교 대성문은 환구단의 석고단 광선문(光宣門)을 옮겨온 것이며 개양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윗 링크 본문에서는, 이철원이 지은 책 《왕궁사》에서 광선문을 경희궁 항목에 적었고, 이게 와전되다가 개양문으로 둔갑한 것이 아닌가하고 추정한다. 만양 대성문이 개양문과 전혀 상관없다면, 개양문 건물이 없어진 시기는 일제강점기에 경희궁 영역을 매각할 때인 듯 하다.
[1] 별자리로는 큰곰자리의 제타성에 해당한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등장인물들이 언급했던 '개양성의 주인'할 때의 그 개양 맞다.[2]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3]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4] 북장로교 의료선교사였던 헤론(J. W. Heron) 박사의 유품으로, 김정호의 《수선전도》를 펜으로 새로 필사한 후 한글과 영어로 지명을 수록한 것이다. 제작 연대의 경우 1890년(고종 27년)에 지은 러시아공사관인 아라사공사관이, 1896년(건양 원년)에 헐리는 서대문 밖의 모화관이 적혀 있어 그 사이에 필사한 듯 하다.[5]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했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